https://sillok.history.go.kr/id/kva_10003020_001
1. 정조 즉위 후 사도세자 시호 교정작업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존호(尊號)를 추후하여 올려 ‘장헌(莊獻)’이라 하고, ...
봉원 도감(封園都監)을 추숭 도감(追崇都監)에 합쳐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시호를 의논한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시호를 ‘사도’라고 하신 것은 성스러운 뜻이 있으신 것인데,
지금 내가 오직 종천(終天)의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일 뿐이다.
옛적부터 제왕들이 시법(諡法)을 간여하려 하였음을 내가 일찍이 그르게 여겨 왔다.
만일 혹시라도 지나치게 아름다움이 넘치도록 한다면 어찌 나의 본뜻이겠느냐?
여러 신하들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 하였다.
->> 번역 : 우리 할배가 우리 아빠한테 고인드립 쳤는데
그거 자체는 못 바꾸니까 '장헌'이라는 글자를 추가하자
내 아빤데 이대로 두면 너무한 거잖아? 반대하면 알지?
정조 이후에도 계속 시호를 덧붙여서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 가 됨
아무리 교정작업을 해도 앞머리에 붙은 '사도' 두 글자 못 지워서 아직도 사도세자라고 불림
2. 민간 무속신앙에서 신격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086
"그는 왕세자로서 당연히 왕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이었으나
뒤주 안에서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민간에서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신으로 모시고 받들게 된 듯하다.
...
특히,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은 일반 서민들이 받게 되는
억울한 감정과 일치하기 때문에 몇몇 왕신들과 함께
민중의 한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신으로서 뒤주대왕신으로 신앙화되었으며,
평안과 재수의 신으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효자 아들 정조가 아버지가 벌인 폐악 관련 기록 실록, 승정원 일기에서 다 지워버림 한중록이 자기가문 쉴드치는 책이라고 욕 먹어도 계속 사료로 쓰이는 이유가 그때 기록이 다 사라져서
+효자 아들 정조가 아버지가 벌인 폐악 관련 기록 실록, 승정원 일기에서 다 지워버림 한중록이 자기가문 쉴드치는 책이라고 욕 먹어도 계속 사료로 쓰이는 이유가 그때 기록이 다 사라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