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유우는 검소한 것을 지조(志操)로 삼았는데 관(冠)이 해어져도 바꾸지 아니하고 그 구멍을 기워 썼다. 해를 입게 되어 공손찬의 군사들이 그 집안을 수색하니 처첩(妻妾)들은 곱고 얇은 비단을 입고 화려한 장신구로[綺飾] 성대하게 꾸미고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 때문에 (유우의 검소함을) 의심하였다. -유우열전
형의 아들 두소(竇紹)는 호분중랑장으로 성격이 간소하였으나 사치가 심했다. [후한서집해 - 원굉의 《후한기》에서는 두소가 두무의 장남이라고 기록했다.] 두무는 여러 번 매섭게 훈계했으나 그가 깨닫지 못하자 상소를 올려 두소의 지위를 박탈하라고 말하고, 스스로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으니 마땅히 먼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상주했다. 이에 두소는 개과천선하여 절제하게 되었다. 상하를 막론하고 감히 예법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중략)
아들 두기(竇機)를 위양후(渭陽侯)에 책봉하고 시중에 배수했다. 형의 아들 두소는 호후(鄠侯)로 보병교위(步兵校尉)가 되었고, 두소의 동생 두정(竇靖)은 서향후(西鄉侯)로 시중 겸 우림좌기(羽林左騎)를 감독하는 일을 맡겼다.
-두무열전
이때부터 곧고 올바른 기풍이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정도(正道)를 굽혀 사사로이 결탁하는 풍습이 퍼졌다. 해내에서 명망을 우러러보는 문화가 성행해 서로 칭송하면서(摽搒) [一] 천하의 명사들에게 칭호를 붙여주었다. 차례대로 「삼군三君」,「팔준八俊」, 「팔고八顧」, 「팔급八及」, 「팔주八廚」라 했다. 옛날의 「팔원八元」, 「팔개八凱」와 같았다. 두무(竇武), 유숙(劉淑), 진번(陳蕃)을 「삼군」이라고 했다.(후략)
-당고열전
“선제께서 막 세상을 떠나신 뒤로 황릉도 완성되지 못했는데, 두무가 무슨 공이 있다고 형제와 부자까지 한 가문에서 세 명의 열후를 세웠지? 또 궁중의 궁인을 많이 데려다 음악을 연주하고 술자리를 열었고, 열흘에서 달포 사이에 쌓인 재산이 억만을 헤아리는데, 대신이 이처럼 구는 것도 도에 부합한단 말인가? 공께선 국가의 동량이 되어 당인에게 몸을 굽히고 영합하고 계시거늘, 그러고도 다시 적신(賊臣)을 잡으시겠다고!”
-진번열전
앞에서 깨끗한 척하면서 정황을 보면 축재한 정황이 있고 그걸 칭송하는 사람들을 보면
후한 시대 문제점을 영제,환관의 문제점으로만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지 않을까 싶음
망국이 다 그렇듯이 이미 다 썩어문드러져서 위에도 썩은 애가 올라간 거지
망국이 다 그렇듯이 이미 다 썩어문드러져서 위에도 썩은 애가 올라간 거지
군君’은 당대에 조종(祖宗)이 될 만하다는 의미다. 두무 같은 애를 삼군이라고 칭송한거면 전체적으로 썩은 걸로 보임
사실 위에서 쌓인 모순점이 영제 때 터진거지
영제가 후한 망국으로 가는길을 마무리 한 것은 맞음. 영제때 극한대립으로 사인들의 한나라 지지도가 나락갔음
유우보단 차라리 황보숭, 노숙이 더 깔끔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두무,원소 보면 실리 챙기고 끝낼 기회가 있었는데 탐욕부리다 반격에 망했는데 이런 무리들을 칭찬하는 후한사회의 과격성이 제일 큰 문제같음
후한 자체가 제대로 된 개혁 하나도 없이 썩은 사회구조 그대로 이어받아서 시작한 나라라
영제는 몰라도 환제는 까는것은 선비들이 선넘은거 같음 환제는 나름대로 선을 안넘을려고 노력했는데 그거 선을 깬것이 두무인데 두무빨고 환제까는게 너무 옹졸하다 싶음
사실상 정권 잡으려는 반란군이었는데 괜히 곽광 빨아주는 세계관의 인간들이 아니긴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