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흔히 2차 고려거란전쟁의 첫 번째 야전(野戰)을 행영도통사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과 성종 야율융서가 친정하고 도통 소배압이 총괄하며 선봉 야율분노, 그 이하의 부선봉 야율분노와 야율홍고등이 맞붙은 통주 전투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 시기를 다루는 많은 창작물에서는 흥화진 전투 이후 곧바로 통주 전투로 이야기가 넘어가는 경우가 많으며, 최근의 <고려거란전쟁> 역시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 고려는 압록강을 도하한 거란군에 대해 선제 요격을 가해 야전 피해를 유도하려 한 바가 존재했다. 1010년 음력 10월 17일의 귀주(龜州) 인근 육돈(恧頓), 탕정(湯井)·서성(曙星) 에서 벌어진 전투들이 바로 그에 해당한다.
이미 거란의 침공이 가시화된 시점에서, 고려는 3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통주에 주둔시킴으로서 대응 태세를 갖추긴 했으나1, 고려에 직접 황제의 친정을 선언한 거란군의 직공은 아무리 방어 대비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대단히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2 고려의 최전방 방어선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흥화진(興化鎭)에서 1차적인 교전이 있을 것이 분명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의 고려 지휘부는 거란군이 별 피해 없이 흥화진을 함락하고 남하할 가능성, 그로서 통주에서 온전하고 사기도 충천한 거란군을 맞이해 싸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군을 동원한 거란군에게 어떻게든 야전으로 타격을 입히고 그들의 사기를 꺾을 필요성이 있었기에, 고려군 지휘부는 이제 막 압록강을 도하한 거란군에 대해 먼저 공격을 가하고자 했다. 고려가 먼저 거란을 상대로 야전 습격을 시도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고려군 지휘부는 '가능하다면' 최일선의 흥화진에 대한 지원 역시 목적으로 두고 있었을 공산이 있다. 여기서는 간접적인 지원 측면과 직접적인 지원 측면이 모두 고려되는데, 간접적인 지원 측면이란 흥화진 지역은 아니나 타 지역에서 움직이는 거란군에 야전 피해를 입힘으로서 거란군 전체의 수효를 줄여 흥화진에 대해 추후 가해질 거란의 압박 수위를 낮추는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며, 직접적인 지원 측면은 귀주 북쪽에서의 승전을 통해 여세를 몰아 흥화진의 거란 본군에도 공격을 가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물론 거란 본군 전체에 비해 최사위 지휘하의 고려군의 숫적 열세는 확실했으나, 흥화진이 최일선에서 거란군에 대한 수성 대처를 하는 상황에서 포위 거란군에 피해를 준다면 거란의 흥화진에 대한 압박이 약화되어 분명 흥화진 부근의 전황이 상대적으로 호전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조는 해당 공격의 지휘관으로 통군사 최사위(崔士威)를 선임했다. 그의 지휘하에 배치된 고려군은 귀주 등지의 고려군도 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임무의 성격, 추후의 퇴각 방향을 보자면 통주의 고려군 지휘부가 직접 배치한 기동성 높은 정예부대였을 것이다.
이러한 최사위 지휘하의 고려군의 공격 시도에 앞서 성종 친정하 거란 본군은 1010년 10월 16일(음력) 이미 서북면도순검사 양규(楊規)와 흥화진사 정성(鄭成), 부사 이수화(李守和)가 지키고 있던 흥화진을 포위하였고, 그에 대해 공성을 시도하고 있었다.3 그리고 본대로부터 떨어진 또 하나의 군은 흥화진에서 좀 더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귀주 북쪽 방면에서 기동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안주섭은 해당 부대의 기동을 북계 동로에 대한 진출 시도를 위한 기동으로 판단하였다.4
하지만 해당 기동은 처음부터 귀주 북쪽 방면을 통해 도하한 거란군이 흥화진 쪽을 통해 도하한 본군에 합류하기 위한 움직임이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스스로 40만을 호칭하는 대군이 한 방면으로만 움직이는 것은 부대의 기동을 둔중하게 할 수 있기에 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두 개 방면서 도하를 했을 가능성 역시 충분하다. 대표적인 예시로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 역시도 도르곤(dorgon)과 호오거(hooge)의 동로군이 홍타이지의 본군과 따로 움직여 국경을 돌파, 기동하여 남하했던 전례가 있으므로 무리한 생각은 아니리라고 생각된다.
이런 상황에서 최사위 역시 귀주 방면으로 이동한 참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귀주 북쪽 육돈, 탕정, 서성로를 통하여 귀주 북쪽에서 이동하고 있던 거란군에 대해 공격을 가했다. 앞서 말했듯, 1010년 10월 17일의 일이다.
이 때, 최사위는 '군을 나누어(分軍)'거란군을 공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를 통해 보자면 당시 최사위가 지휘했던 고려군은 비록 확실히 명시되진 않으나 상당한 규모를 가지고 있었음으로 생각된다. 군대의 수가 적었다면 통합된 부대를 통해 기습을 가하지, 군을 나누어 공격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휘관의 직급, 거란측에서는 최사위의 공격을 강조 본인이 이끄는 고려 주력군의 공격으로 판단하였던 점5, 최사위가 여러 장수를 거느렸던 점6.후술하겠지만 이 공격에 대해 거란 성종이 직접 반응하였다는 점에서 이 당시 최사위의 공격은 단순한 유격적 소규모 기습으로 볼 수 없으며 대규모 공격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강조가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통주에 주둔한 덕에, 당시까지 북부에서 운용할 수 있던 고려측 가용병력이 충분했기에 가능했던 일로 생각된다.
하지만 고려군의 공격은 제대로 통용되지 않았다. 고려군의 공격을 맞이한 거란군은 그에 반격하여 되려 공격해 온 고려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군은 거듭 공격했으나 거란군 측에서는 이를 강조의 주력군의 대항이라 여기면서 이들을 재차 역공했다. 이 때문에 고려군은 도리어 거듭 패했다. 최사위와 출정 고려군은 거란군에 대한 기선제압을 하긴 커녕 결국 패전의 상처만 입고서 그대로 통주로 퇴각하고 말았다.7
이에 대해 거란군은 고려군을 추격하여 고려군의 본진이 있는 통주 인근에까지 다달았는데, 최소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등 고려측의 사료에는 여기에 성종 본인이 직접 나선 것으로 확인된다. 성종 본인이 고려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최사위를 격퇴하는데에 직접 나선 것인지, 아니면 공격해 온 고려군을 격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흥화진의 본진에서 잠시 이탈하여 추격에 합류한 것인지, 아니면 고려측의 오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요사 본기에는 강조를 패배시킨 주체 지휘관이 따로 명시되지 않으므로 거란 본군과 성종이 직접 고려군 격퇴에 개입, 총괄한 것으로 볼 공산이 있다.8
해당 거란군이 통주 인근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까지 강조가 통주에 주둔하기만 할 뿐 확실한 야전방어 준비에 나서진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로 생각된다.9 통주 인근까지 접근한 거란군은 그 근방에서 일하고 있던 고려 농민 남녀 두 명을 생포했다. 성종은 해당 포로들에게 비단옷을 하사함과 동시에 양규와 정성, 이수화를 향한 격문을 쥐어주고 3백명의 병사로 호송하여 먼저 흥화진으로 보내어 흥화진에 항복을 종용케 했다.10
성종은 해당 포로들이 흥화진 인근에서 잡은 포로들이 아닌 통주에서 잡은 포로인 데다가, 해당 포로들이 최사위가 패한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흥화진의 사기를 꺾는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격문에는 전대 왕인 목종을 시해하고 멋대로 현종을 옹립한 역신 강조를 주벌키 위해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일으켰으며, 흥화진의 병사들이 강조를 잡아 바친다면(즉 거란의 편에 선다면) 친히 돌아갈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개경까지 진격하겠다는 논조의 회유와 압박이 쓰여 있었다.11 하지만 양규는 최사위의 고려군이 패전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항복치 않았다.
많은 논문이나 서적에서 본 전투에 대해서 그저 짧게 다루거나 아예 생략하지만, 사실 이 전투는 그리 중요성이 떨어지는 전투는 아니었다. 짧고 단편적인 언급 탓에 그 중요성이 가려지지만, 이 전투는 강조를 위시로 한 고려군 지휘부가 어째서 통주 전투 전까지 흥화진에서 거란 주력의 발을 묶고 있던 양규군과 협응하여 거란군을 견제하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최사위의 패전은 강조가 더 이상 북쪽의 거란군에 대해 먼저 공격을 시도하거나 또는 흥화진을 구원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황제가 친정한 거란군의 초기 사기와 전투력이 상상 이상으로서, 거란 대한 선제공격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파악한 탓으로 생각된다. 대신에 강조는 통주에 주력군 대부분을 주둔시켜 두면서 추후 흥화진을 함락하고 남하할 거란군에 대해 대비태세를 굳혔다.
또한 거란군은 이 전투를 통해 고려군 주력이 통주에 몰려 있는 사실을 파악했으며, 이들을 궤멸시키지 않고는 남하할 수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 때부터 거란군의 전략은 흥화진을 함락한 뒤 통주의 고려군을 궤멸시킬 것으로 가닥이 잡힌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흥화진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이후 거란의 원정군 중 남하군으로 추려진 '20만'이 남하하여 강조의 30만 대군과 조우하긴 했으나, 그들은 배후에 흥화진이라는 위험요소를 남겨둔 채였다. 그리고 그것은 2차 고려거란전쟁의 가장 큰 변수 중 하나가 되었다.
남하한 거란군의 후방에 서북면도순검사 양규가 남아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중. 귀주 북면 전투들은 생략되었으나 귀주 인근까지 진출한 거란군의 존재 자체는 다루었다. 아마도 드라마 분량 제한상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지만, 해당 전투가 생략됨으로서 강조가 흥화진을 그저 '거란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는 희생양'으로 놔두고 통주에서 거란군을 섬멸할 생각을 하는 묘사 탓에 개인적으로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중. 통군사 최사위. 자신의 패배가 생략됨으로서 명예가 좀 더 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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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사절요』 권3 현종 원년 10월 1일.
2.『고려사』 권4 현종 원년 11월 1일.
3.『고려사』 권4 현종 원년 11월 16일.
4.안주섭, 『고려거란전쟁』, 경인문화사, 2003, 124~125쪽.
5.『요사』 권15 본기 권제15 성종본기 6권 11월 10일,大軍渡鴨淥江,康肇拒戰.
6.『고려사』 권94 열전 7 최사위 열전, 士威率諸將, 分軍出龜州北恧頓·湯井·曙星三道, 與契丹戰敗績.
7.『고려사절요』 권3 현종 원년 11월 17일 .『요사』 권15 본기 권제15 성종본기 6권 11월 10일. 敗之,退保銅州.
8.『요사』 권15 본기 권제15 성종본기 6권 11월 10일, 앞의 두 기사와 같음.
9.『고려사절요』 권3 현종 원년 11월 24일.
10.『고려사절요』 권3 현종 원년 11월 무일. 契丹主獲通州城外收禾男女, 各賜錦衣, 授紙封一箭, 以兵三百餘人送興化鎭, 諭降. 그러나 18일인 계사일 이전의 기사이므로 아마도 17일 임진일에서 계사일 새벽 시기로 생각된다.
11.『고려사절요』 권3 현종 원년 11월 무일, 앞과 같음. 其箭封有書曰, “朕以前王誦服事朝廷, 其來久矣, 今, 逆臣康兆弑君立幼, 故親率精兵, 已臨國境. 汝等擒康兆送駕前, 便卽回兵. 不然, 直入開京, 殺汝妻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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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역사글은 환영이양
역사 학술글이니까 읽어주겠지??
건전한 역사글은 환영이양
역사 학술글이니까 읽어주겠지??
부규게가 새미래로 포대갈이 된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