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593년 음력 9월에 있었던 여진/몽골계의 9개 연합 세력과 건주간의 전쟁에서, 승리자가 된 것은 건주와 그 지도자 누르하치였다. 그 결과로 연합군의 수장중 한 명이던 여허의 부자이가 전사했고 울라의 소(小) 버일러 부잔타이는 건주에게 포로로 잡혔다.
이 이후 부잔타이는 1596년 누르하치의 도움을 얻어 울라의 군주가 되었다. 형인 만타이가 간음을 일삼다가 부족민들의 불만을 사 암살당한 뒤 울라의 최고 군주 자리가 공석이 된 틈을 노린 누르하치와 부잔타이의 공투의 결과였다. 누르하치는 부잔타이를 울라의 군주로 옹립함으로서 울라에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그들 세력을 자신의 우군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1598년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의 조카딸인 어시타이와 혼인했다. 그 이후 1603년에는 누르하치의 또 다른 조카딸 온저와 추가로 혼인했다. 둘 모두 정략혼이었다. 혼인 당시의 상황은 어느정도 차이가 있었으나 부잔타이가 누르하치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 이 정략혼을 맺었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물론 이 정략혼의 이득자는 부잔타이 뿐만이 아니었다. 누르하치 역시도 이를 통해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이 두 차례의 정략혼은 쌍방이익의 결과라 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1605년 음력 3월, 부잔타이는 대군을 몰고 조선의 육진 지역에 위치한 종성의 속진 거점, 동관진을 공격했다. 해당 공격은 조선에 대한 압박을 통하여 자신이 얻고자 하는 바(직첩, 무역관계)를 얻고 번호들에 대한 울라의 영향력을 진흥시키고자 하는 의도와 연계되어 있었다. 이 때 동관을 지키던 조선군과 친조선계 번호들은 부잔타이의 강력한 공격을 맞이하여 분전했으나 결과적으로 중과부적으로 전멸당했다. 성은 함락되었으며 동관첨사 전백옥은 전사했고 군병들 역시도 대부분 전사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가까스로 도망치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 때 동관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부잔타이의 군세에 함께 했던 이들로 추정되는 이들 중에는 부잔타이의 두 처인 누르하치의 조카딸, 어시타이와 온저 역시도 존재한다. 이는 당시 조선에 협조하고 있던 번호 탁두와 석을장개의 보고를 북병사 김종득이 인용하여 보고한 바에서 드러난다.
김종득이 온성에 있을 당시 탁두와 석을장개는 김종득에게 지난 동관 전투에 대하여 조선이 모르는 정보들을 일부 전달했다. 이 때 두 사람의 보고에는 본래 부잔타이가 건퇴3에 오래토록 주둔할 생각을 하며 자신이 특히 사랑하는 아내(愛妻) 두 명을 군에 대동시키기 까지 했다는 내용, 그러나 동관 전투에서 제법 손실이 발생한 탓에 건퇴에는 5백여명의 군대만 주둔시키고 본인은 다시 원정군을 이끌고 울라 본토로 돌아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선조수정실록』당해 음력 5월의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 두 애처란 누르하치의 조카딸인 어시타이와 온저로 추정된다. 당시 부잔타이에게는 어시타이와 온저 말고도 처가 한 명 더 있었기에 이 두 명을 어시타이와 온저로 추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될 수 있지만, 이는 1603년 울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이후 송환된 이난에 대한 공초를 통해서 어느정도나마 교차검증이 된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추정이다.
조선군 출신 포로였던 이난은 부잔타이의 울라 도성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을 공술했다. 이 때 이난은 부잔타이의 본처보다는 누르하치의 두 조카딸이 부잔타이에게 특히 총애받고 있다고 하였다. 이 두 명은 어시타이와 온저로 거의 확실하게 파악된다. 이난의 진술과 동관 전투 및 그에 대한 탁두, 석을장개의 보고간의 차이는 단 1년여의 시간차이밖에 안나는데다가, 거론된 '애처'의 인원수도 일치한다.
따라서 탁두, 석을장개가 언급한 '부잔타이가 총애하는 처들 2명'은 이난이 언급한 '부잔타이로부터 총애받는 2명의 여인'과 동일하며, 그 두 사람은 바로 어시타이와 온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잔타이의 군대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부잔타이의 회군 의지에 따라 그와 함께 울라 본토로 돌아갔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어시타이와 온저, 이 두 명이 부잔타이의 군대에 함께 했던 것은 대체적으로 사실로 보이지만 그들이 실제로 원정군을 따라 조선령에 진입했을지는 미지수이다. 여인 역시도 무장을 하고 싸움을 했던 것이 여진 계열 세력의 특징중 하나라지만 이 두 명의 경우 명백히 전투인원이 아니었던 데다가 군주의 푸진(fujin, 부인)이었으며, 뭣보다 부잔타이보다도 강력한 힘을 지닌 군주 누르하치의 조카딸들이었으니만큼 최우선 보호대상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과연 위험천만한 전투현장에까지 대동시켰을지는 미지수이다.
자신의 용맹을 부인들에게 과시하고 그를 통해 그들의 백부인 누르하치에게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두 사람이 다칠 위험도 있었으니만큼 건퇴까지만 동행시키고 건퇴에 머물게 하거나, 또는 건퇴를 나선 이후로도 원정군에 대동시키되 후진으로서 국경 밖에 머물게 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어시타이와 온저, 누르하치의 두 조카딸이 조선 땅을 밟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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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사료
『만주실록』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논문
한성주, 「조선 선조대 후반 忽剌溫 부잔타이[布占泰]의 침입 양상」, 『역사와 경계』 100, 부산경남사학회, 2016.
장정수, 「선조대 말 건퇴 전투의 발발 배경・경과와 대(對)여진 관계상의 변화」, 『한국사연구』191, 한국사연구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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