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본적으로, 거의 모든 동화는 PC적 시각에서 보면 별로 좋은 물건이 아님. 인어공주의 원작만 봐도, 주인공은 사랑을 위해 모든걸 내다버리고 왕자를 찾아가지만 왕자는 한눈팔아서 에리얼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임. 여성의 주도성 같은건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없지. 왕자가 에리얼을 존중하는 장면도 전혀 없음. 동화는 원래 대부분 그런 물건임. 동화의 탄생 자체가 옛 시절의 성역할과 도덕을 가르치는 용도임.
2. 하지만 PC주의 한다고 이런걸 일일히 따지는건 피곤할 뿐더러 별로 잘 통하는 일도 아님. 알만한 나이가 되면 그때 뭐가 문제인지 이야기해주는게 훨씬 나음. 그도 그럴게 세상은 동화랑 돌아가는게 아주 다르고 여자는 공주가 아니며 남자도 왕자가 아니거든. 나이먹으면서 아 내가 공주가 아니고 왕자를 찾으려 들면 평생 개고생만 하겠구나. 하고 깨달을 시기가 되면 어린 시절 배웠던 동화가 뭐가 문제인지 알게 됨. 물론 그 나이먹고도 세상물정 모르고 왕자 찾으려고 사는 애는 뭐가 문제인지 말해준다고 해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도 아님.
3. 디즈니는 구시대의 도덕과 성역할을 가르치는 동화를 현대의 자본주의를 통해 되살리는 일을 하고 있는데, 따라서 정상적으로 존나 오래된 PC 주의자라면 디즈니 물건에 PC주의를 들이미는 자체가 아무 의미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거나 진배없는 일이다.
4. 나는 인어공주와 관련해서, PC가 한국보다 훨씬 더 깊게 뿌리내린 유럽에서도 한국과 비슷한 반발이 나오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함. 인어공주의 문제는 PC주의에 있는게 아니기 때문임.
5. 간단히 말하자면, 할리 베일리 인어공주의 문제는 에리얼을 "흑인"으로 바꾼게 아니라, 에리얼을 "못생기고 연기 못하는" 배우에게 맡긴거임.
6. 차라리 디즈니가 노골적으로 뻔뻔하게 "못생겨도 인어공주를 할 수 있다"고 나왔더라면 유럽에서의 반응은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라고 봄. 하지만 디즈니는 못생기고 연기 못하는 애한테 인어공주를 맡긴 다음 극중에서 걔가 "예쁜 것처럼" 연기하게 했는데, 이건 PC주의자 입장으로 봐서도 빡치는 일임. 외모의 역할을 부정했더라면 차라리 PC주의자의 눈에는 용감하게라도 보일 수 있음.
7. 디즈니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때, 디즈니가 무슨 대단한 PC적 사상이 있어서 "흑인 지위 향상을 위해" 할리 베일리를 주연으로 삼았다고 생각한다면 인생을 참 순진하게 사는 거라고밖에 할 말이 없음.
8. 디즈니는 아마도 지금까지 자신들이 고객으로 유치하지 못한 계층 - 즉 어린 흑인 여자애들과 그 여자애들의 부모들 -을 새로운 고객으로 끌어들이고자 할리 베일리를 기용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음. 할리 베일리가 흑인 계층에서도 특별히 미인은 아니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평균적 외모 특징(레게 머리라거나)을 많이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음. 고객으로서 동질집단을 포섭하려는 마케팅적 시도라고 할 수 있음.
9. 물론 인어공주가 글로벌 마케팅에 대성공할거라는 생각은 디즈니 경영진이 아무리 희망적으로 관측했어도 하지 않았을거라고 봄.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디즈니 입장에서 나쁜 카드는 아님. 어쨌거나 지금까지 디즈니를 안봤던 계층을 디즈니 관객으로 끌어올 수 있으면, 이후의 미디어 상품들을 통해 장기적으로 벌어먹을 가능성을 남겨둘 수 있음.
10. 오래된 PC주의자 입장에서는 인어공주에 대해 인종적 비난보다는 외모적 비난이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기존의 미적 관념을 억지로 타파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반발이라고 생각함. 나는 못생긴 사람이 못생겼다는 이유 때문에 비난받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외모의 역할을 긍정하는 작품이 안예쁜 사람을 데려다가 "예쁘다"라고 말하는 건 그와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함. 그건 못생긴 사람에게 이중삼중의 조롱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임.
11. 정말로 PC주의를 따르려면 인어공주는 "못생긴게 아니다"가 아니라 "못생겨도 괜찮다"의 길을 갔어야 했음.
12. 하지만 그랬다면 존존존존나게 안팔렸겠지. 디즈니의 목적은 할리 베일리가 대변하는, 지금껏 디즈니의 고객이 아니었던 애들에게 "너처럼 생겼어도 예쁘다고 해줄테니까 우리 물건 사라"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임.
13. 나는 인어공주를 보겠지만, 디즈니 플러스로 나오면 볼 것임. 보고 나서 생각이 달라질 수는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디즈니가 만드는 동화에 PC주의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변할거라 생각하지는 않음.
하지만 당신이 할리 베일리를 못생겼다고 생각하는건 백인남성들이 만들어둔 미의 개념에 구조적으로 가스라이팅되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구요
누가 만들었든 이미 만들어진 미적 관념이 변하는게 아니거든. 어쨌든 "비슷하게 생긴 애들"에게 팔기 위해 만들어진 상품이라는 점을 부정하긴 어렵지.
하지만 당신이 할리 베일리를 못생겼다고 생각하는건 백인남성들이 만들어둔 미의 개념에 구조적으로 가스라이팅되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구요
누가 만들었든 이미 만들어진 미적 관념이 변하는게 아니거든. 어쨌든 "비슷하게 생긴 애들"에게 팔기 위해 만들어진 상품이라는 점을 부정하긴 어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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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g05042
저는 성인을 타겟으로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성인"을요. 하나 더 포함시키자면 사춘기 여자애들 정도가 되겠네요. 아이의 미적 관념을 바꾸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위에서도 썼듯 디즈니의 메시지가 "너같이(혹은 네 자식같이) 생겼어도 예쁘다고 해줄테니 우리 물건을 사라"에 가깝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자존감 팔이라고나 할까요.
ing05042
첨언하자면, 20세기 들어서 디즈니가 정말로 "아이들"을 메인 타겟으로 잡은 영화를 만들긴 했는가가 저는 의문스럽습니다. 오히려 그런건 픽사 등의 서브 브랜드를 통해 이루어지죠. 디즈니의 메인 셀링 타겟은 항상 아이를 위해 돈을 쓰는 성인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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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두밥
판단이 옳았는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이만한 자본이 들어가는 영화를 사업적인 목적 외의 사상적 목적으로 만들 수 있는 회사가 있다면 그 회사 주가는 애저녁에 바닥을 쳤어야 해
그치 여성주도 인종 이런건 모아나 뮬란 등에서 잘 보여줬고 외모지상주의는 슈렉에서 다루지. 인어공주에서 젤 빡치는건 과거의 영광에 그저 묻어가려했다는거임. 내용도 그대로고 인종만 바꾸면 개돼지들이 사갈거라 생각한게 뻔히 보임. pc가 문제가 아니라 설득력이 없는게 문제. 설득의 기술중에 빌드업이 있는데 인어공주를 본작대로 살리고 왕자를 흑인으로 바꾼뒤 2세를 흑인인어공주로 하는게 좋다고 생각함. 이렇게 하면 원작빠들도 좋아할거고 pc빠들도 납득할수 있으며 개연성도 살릴수 있다. 디즈니가 이렇게 하지 않는건 당장 흑인공주를 팔아먹어야 하니까 그러는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