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글은 모든 종교의 감소세를 비판하는 글이 아님을 서두에 앞서 밝힌다.
우선 길희성 작가가 쓴 책의 일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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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문적 사회윤리의 확립
불교가 아무리 왕성한 포교 활동과 자유롭고 평등주의적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대중적 종교로서 바라문 교를 위협하는 세력을 형성했다 해도, 불교는 어디까지나 출가자들을 위한 출세간적 종교였고 승가 역시 수도승들을 중심으로 한 수도 공동체였기 때문에 출세간적 해탈 외에는 관심이 적었다. 결과적으로 가정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 재가자들의 삶에 침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비해 바라문교는 출가 수도자들이 아니라 베다 이래로 제의/제사 행위를 주관하고 재가자들의 삶의 주기 -출생 ,혼례, 장례 등-에 맞는 각종 의례Ritual서비스를 해주는 바라문 사제들이 주관하는 종교로서 재가자들에게는 더 가까운 종교였다. 따라서 불교가 재가 불자들에게 하는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불교에 재가 신도들의 종교 생활은 삼보의 귀의하고 5계를 지키며 승가에 필요한 물질적 보시를 하는 정도였고, 도덕적 삶을 통해 선업을 쌓아 내세의 행복을 기약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하지만 사회 전체의 질서에 대한 관심은 바라문들의 몫이었다. 특히 출세간적 가치를 중시하는 불교나 자이나교 같은 출가 수행자들의 종교가 유행함에 따라 보수적인 바라문들의 사회 질서에 대한 관심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바라문들의 관심을 주로 사회적 규범. 법도. 의무Dharma를 다루는 바라문들의 문헌에 잘 반영되어 있다. 베다의 의식들에 규범을 다루는 천계경 天啓經 Srauta-sutra, 재가자들의 사회생활을 의무를 더 폭넓게 규정한 가정경 家庭經Grhya-sutra과 법도경Dharma-sutra 등이 편찬되어 있다.
법도경은 바라문교의 윤리 전통상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사회적 규범들과 예의범절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법도경은 더욱 발전하여 기원전 200년 경부터 기원 후 300년경 사이에는 고대 인도인의 생활 규범을 더욱 완전하게 체계적으로 제정해 놓은 법전Dharma-sastra들이 편찬되었다. 이 법전들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것은 '마누 법전 manava-dharma-sastr기원전 200년~기원후 100년'과 '야즈나발키아 법전 yajnavalkya-smrti100~300년'이다. 이들은 마우리아 왕조 이후 인종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점점 더 복잡해져 가는 사회 상황과 불교 같은 비바라문계의 종교적. 사상적 위협에 대처하는 바라문들의 대응의 일환으로 편찬되었다. 이 법전들도 우파니샤드처럼 지식과 해탈을 인생의 최고의 목표로서 인정하고 있지만, 실제 관심은 어디까지나 현세의 삶 속에서 지켜야 할 올바른 행위의 의무를 체계적으로 규정하는데 있다.
바라문적 사회윤리의 확립 / 바라문교의 재정비 / 인도철학사 - 길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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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성해영 교수의 코로나를 지난 현 종교인들과 종교가 가야할 길에 대한 짧은 영상을 보고 ( 그 영상 또한 형식적 종교집단의 감소를 말했다.) 난뒤 인도 철학사를 읽던중 바라문교가 비바라문계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유지했는지 보고 두가지 단상이 한군데 섞이게 되었다.
인간은 삶에 의미를 절대적 존재자 혹은 구원자로부터 찾고자 하였고, 그러한 의미의 공空에 대한 불안을 견디지 못하게 되어 수많은 교리와 대상 행사를 만들었다고 필자는 추정한다.
특히나 현대 특히나 코로나 기간 이후 GDP가 괜찮은 먹고살만한 나라들에서 종교집단의 감소세가 두드러지는 것은 극단적인 변화를 맞이한 세상속에서 기존의 세속적 종교관이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필자또한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라마불교적인 세계관이 섞인 사람으로서 인간의 존재와 현세 그리고 내세에 대한 개념을 다각적인 관점으로 주입 받아왔다. 그것은 가정, 학교, 사회 등 그외에 수많은 집단에서 '이것은 이러하다'라는 논지로 사용되고 축적되어 다시 대물림된다.
그러한 대물림이 비교적 잘사는 이들에게서 끊겨져 버린 것들은
기존의 종교집단에서 해결해 주었던 문제들- why-을 어느정도 한 개인이 찾아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 또한 유튜브와 책이라는 두 가지 갈래로 인식하고 인지하며 추론하는 과정을 겪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종교적 집단에서는 그것들을 how의 개념으로 접근하여 형식에 몸을 맡긴다. 아니 생각을 맡긴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슬람이든 힌디든 기독교든 불교든 각자 어떠한 행위를 하게끔 되어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형 행사가 될 수도 있으며, 각자 자기 스스로를 점검하는 파편화된 행위가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모든 종교가 다 옅어지고 많은 이들이 과연 그것으로부터 달라질 수 있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확답을 하지 못하겠다. 종교라는 영역은 기존의 사회가 해주지 못했던 복지의 개념에 상당히 붙어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정情이라는 온기로 남아 쉬이 끊어낼 수 없는 관계로 남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온기는 은은하게 한 사람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된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같은 관용문들은 결국 그 땅과 그 문화에 속한 이들이 '시작'을 알리는 증표로서 사용된다. 종교는 종교집단으로서의 힘은 약해져있지만, 그 문화속에 녹아든 종교는 옅어질 수가 없다.
특히나 더욱이 파편화된 현대시대에서는 개인이라는 자아를 유지하지 못해 어떠한 유니폼을 더욱 착용하려 한다. 그것은 성적 지향성이나, 정치의 신념이거나, 음악의 호불호로도 나뉜다. 그러한 유니폼을 겹겹이 쌓아 놓아야지 스스로 인식하는 얇은 자아를 위한 온기가 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열熱을 낼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의 빛을 꺼트리고 다른이들에게서 불을 빌리려는 고대그리스 신화의 인간들처럼 되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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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하지만 뭔가 내가 느낀 거랑 비슷하게 말씀하시는거 같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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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가만....길희성이면 근래 돌아가신 한국 종교학 연구 네임드잖아 ㄷㄷㄷㄷㄷㄷ 하버드 박사학위에 서강대 명예교수까지 간 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