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꽤 늦은 밤이었다. 뉴스에서는 연신 슈퍼문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으나 구름이 짖게 끼어 달은 커녕 구름사이로 스며드는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차 키를 꺼내 손목 스냅으로 반 바퀴 휘릭 돌린 후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5월도 서서히 끝나갈 무렵이었지만 아직 밤은 쌀쌀해서 얇게 입고 나온 것이 후회되었다.
정장 자켓의 안 주머니에서 파란색 담배갑을 꺼냈다. 메비우스 스카이 블루. 촌스러운 디자인에 그에 걸맞은 거친 향을 자랑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다른 담배를 피면 영 맛이 없다고 느꼈다.
군대에서 배운 담배는 그의 좋은 친구가 되어줬다. 정확히는 근묵자흑에 가까운 불량한 양아치일지도 모른다. 담배를 가장 먼저 권유한 선임은 몸은 비쩍마르고 키가 작고 곱상하게 생겨서 처음 마주했을 때는 유약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부대의 악습 쇄신 과정 속에서도 꿋꿋이 자기 일을 후임에게 미뤄버리는 못돼먹은 인간이었다. 그런 주제에 담배는 이름도 모를 과일향 캡슐이 들어있는 얇은 담배를 피웠다. 그걸 처음으로 시작했기 때문일까, 맛이 의외로 달아서 자기도 모르게 중독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담배를 볼때면 그 사람으로 부터 겪었던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전혀 마음이 동하질 않게 되었다.
자켓 안 주머니 어디에도 라이터가 보이지 않아 온 몸의 주머니와 백팩을 쥐잡듯이 뒤졌다. 그러나 라이터가 보이지 않았고 이내 아침에 자기 상사가 라이터가 없다고 해서 하나 건내준게 생각났다. 여유분이 책상에 있어서 그걸 가져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바빠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쉬며 한껏 제쳤던 의자를 바로하고 시동을 걸려는 찰나 조수석 유리창 쪽에서 똑똑하고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껏 많은 사람들을 태워줬고 창문 두드리는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저 소리는, 희고 얇은 손가락의 중지 두번째 마디에서 나는 특유의 소리는 왜인지는 몰라도 구분이 가능했다.
"가는 길 태워 주실 수 있어요, 선배?"
그렇게 말하며 안지는 무작정 조수석 문을 열고 몸을 들이 밀었다. 추워하는 선배와는 달리 블라우스 차림에 자켓은 반으로 접어 왼팔에 걸치고 있었다. 어지간히 열받는 일이 있었나 보지. 선배는 그렇게 생각했다.
"라이터 있어?"
안지는 따로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백에서 라이터를 꺼내 선배가 꼬나문 담배 끝에 불을 붙여 가져다 댔다. 일과의 끝이 담배향일 필요는 없지만 막상 없으면 많이 허전하다. 니코틴 부족으로 인해 은근히 올라있던 심박수가 천천히 내려가는게 느껴졌다. 선배는 눈을 감고 차분히 연기를 폐까지 빨아들이고 다시 뱉었다. 쿵쿵, 하는 소리가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선배는 그 독한걸 용케 뻑뻑 차 안에서 피워대네요."
"그러는 너는 계집애 같이 캡슐담배가 뭐냐?"
"요새 그런 발언하면 여러군데서 항의 들어와요."
그러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안지는 비교적 가는 담배를 물고 한숨 크게 들이켰다. 은은한 단 냄새가 차 안에 퍼졌다. 처음 차를 살 때는 절대 차 안에서 피우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인가 술에 잔뜩 취해 대리기사를 불러 집에 가던 중 차에서 위액까지 게워낸 이후로는 신경쓰지 않게 됬다. 그 일이 있던 다음날 비싼 돈을 주고 실내세차를 맡겼고 분명 머리로는 냄새가 다 빠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계속 불편해서 차라리 담배 냄새로 지워버리자고 생각했다. 지금 되짚어보면 터무니 없는 아이디어였다.
"오늘 열받는 일이라도 있었냐."
안지는 네, 라고 대답하고는 답답함을 못이겨 다시 한번 연기를 마셨다.
"그 늙은이는 언제쯤 되야 성격 고칠까요."
"김 부장?"
"이 차장이요. 오전에는 보고서 늦게 제출했다고 까이고 오후에는 내용이 왜 그러냐고 까였어요."
"니가 말하는 늙은이는 너무 많아서 항상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적당히 알아들어요."
그럼 일을 눈치껏 잘 했어야지. 하지만 선배는 이 말을 그냥 속으로 삼켰다. 앞뒤 사정이 어떻건 선배가 알고 있는 이 차장은 보통 괴팍한 사람이 아니긴 하다. 반면 안지는 일을 제법 잘 하는 편이었다.
"저 이번 달에만 선배 차 얻어탄거 벌써 열 번 가까이 되지 않아요?"
"그럴걸. 알면 뭐라도 좀 사줘라."
"조수석 쪽 타이어는 제가 바꿔드릴게요. 제 깃털 같은 몸무게 때문에 아주 조금 더 수명이 일찍 닳을 테니깐."
"너 몸무게 정도면 뒤쪽 타이어도 바꿔야 할걸."
"진짜 죽고 싶어요?"
"미안, 잘못 했어."
다 피운 꽁초를 재떨이에 넣고 바닥에 비볐다. 안지는 잠시 기다렸다가 선배가 손을 빼자 자기도 꽁초를 처리했다. 그러고는 다시 한 개비를 더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안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자니 까득, 하고 이빨로 살짝 캡슐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줄담배피면 일찍 죽는댄다."
"일론 머스크가 되살려 줄거에요."
"너 아직도 테슬라 주식 들고 있냐?"
"매일매일의 등락을 보는게 마치 인생의 회전목마."
제정신이 아니다.
"일과 중에도 피면 이렇게 연달아 피우고 싶지 않을텐데. 부서 사람들한테 왜 숨기는 거냐?"
"그냥요. 담배는 나쁜거잖아요."
"그건 그래."
"소소한 반항 같은거에요. 저 졸업한 고등학교가 깡통 같은 곳이라서 주변 친구들이 선생님들 몰래 피우곤 했거든요. 저는 그때는 학업 때문에 입에 안 댔는데 일 시작하고 나니깐 동네 아저씨들이 왜 피우는지 알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아무도 몰래, 부모님도 모르게 피우기 시작했어요. 매일 집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게 옷 벗어서 탈취제부터 뿌려대는 것이다 보니까 선배말고는 아무도 모를걸요."
"그럼 나하고 있을 때만 피는거야?"
"자취방 근처 골목에서요. 깜깜한데 담배불만 반짝이다보니 가끔 경찰 분들이 오셔서 학생인지 아닌지 따진다니까요."
"네가 좀 어린애 같아보이긴 하지. 네 또래에 비해 스무 살은 젊어 보인다."
"응애 나 아가."
"아가는 담배 안 펴요."
안지는 마지막 한 모금까지 빨아들인 후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껐다. 선배는 시동을 켜고 네비게이션에 등록되어있는 "개집" 주소를 클릭했다. 금요일 밤, 걸리는 시간은 약 한 시간. 차가 어지간히 많은 모양이었다.
"제 주소 이름이 개집으로 되어있네요."
"새끼개 집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됬네요 됬어."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선배 차 블루투스 연결의 우선순위는 안지가 선배보다 더 높았다. 운전해야하는 선배를 대신해 안지 스스로 선배가 좋아하는 노래를 켜준다는 기특한 마음은 아니었다. 그래도 선곡 센스가 대체로 괜찮아서 군말은 한 적 없다. 지금은 '뜨거운 여름 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 없지만'
"아직 이거 틀기엔 이른 것 같다?"
"뭐 어때요 뜨거운 여름밤이건 선선한 봄날씨의 밤이건."
"그건 그래."
구름이 서서히 걷혔다. 선선한 봄날씨의 밤. 마침 늘어선 빌딩 사이로 달도 보이며 제법 운치있는 광경이라고 느껴졌다. 서서히 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그 둘을 싣고.
저 담배 안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