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푸진, 울라나라 아바하이
삽화 출처 : 칼부림
1601년 누르하치는 하다를 완전히 병합한 후 불어난 인구를 확실하게 통제하고 국가의 운영을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 '니루'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이로 인해 니루는 완벽한 상설 조직이 되었으며 표준, 이론적으로 3백명의 장정으로 구성되는 행정-군사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건주는 이를 기반으로 국가와 군사 체제를 기존보다 더욱 발전시키게 되었다.1
한편 하다를 병합한 후유증과 당해에 극심해진 기근으로 인해 건주의 식량 사정은 다소 어려워졌다. 이 때 누르하치는 물자난을 해결하기 위해 물자의 충당을 목적으로 조선에 직첩을 요구했는데, 조선의 번호들로부터 해당 방식에 대한 정보를 습득한 바로 인한 것이었다.2
조선은 누르하치의 요청에 대해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이후 누르하치가 요청한 식량 요구에 대해서는 절충안을 통한 해답을 내놓았다. 이 때 조선에서는 변경에 접근하는 건주 관하의 여진인들에게 구호 차원으로 식량을 지급하여 누르하치의 요구를 봉합, 누르하치와의 관계에서 있을 지 모를 돌발사태를 예방하려했다.3
동시에 누르하치는 명나라로부터도 구호 조치를 받았는데, 이는 조선이 요동에 보낸 자문을 통해 명나라 관리들이 조선의 건주에 대한 식량 지급 부담을 인지하고 건주인들에게 요동 쪽에 와서 식량을 배급받도록 한 것이었다.4 하지만 누르하치는 그렇다고 하여 조선으로부터의 구휼을 포기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만포를 통한 조선의 건주인들에 대한 식량 지급 조치는 최소한 광해군 시기 중엽까지 단절 없이 이어진 것으로 보이며, 더 오래 이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한편 1601년 음력 11월 누르하치는 울라의 부잔타이와 새로운 정략혼 관계를 맺었다. 부잔타이는 본인의 조카딸, 즉슨 울라의 이전 버일러인 만타이의 딸인 '아바하이'를 누르하치에게 시집보내고자 했고 누르하치가 이를 승낙함으로서 정략혼 관계가 구축된 것이다.5
이는 누르하치 본인이 최초로 울라의 왕가 여식을 맞이한 사례였다. 이전에도 건주와 울라간 정략혼은 몇 번이고 존재했으나 그것은 누르하치의 동생이자 건주의 2인자였던 슈르가치, 그리고 울라의 버일러인 부잔타이만이 대상이었다. 건주의 최고 버일러였던 누르하치 본인은 스스로 울라와의 정략혼을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1601년에 와서 부잔타이가 자신에게 조카딸을 시집보낼 것을 제안하자 누르하치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로서 마침내 누르하치-울라 왕가간 직접적인 정략혼 관계가 맺어졌다.
아바하이는 누르하치에게 시집올 당시에 고작해야 12살 이었고, 그것은 당시를 기준으로 해도 미성년이었다. 덕택에 이 시기에는 누르하치 본인 역시도 정략혼의 대상으로만 보았을 뿐 딱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아바하이가 성장하여 성인이 되고 그 미모가 출중해진 뒤부터는 누르하치 본인이 그녀를 총애한 티가 사료상에서 확실하게 묻어난다. 당장 그녀가 누르하치의 마지막 대푸진이었던 것을 고려해 보고, 그녀의 소생인 아지거와 도르곤, 도도가 모두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을 고려해 보자면 누르하치는 아바하이에게 애정이 있었던 듯 하다.
어쨌건 아바하이와의 결혼으로 건주와 울라간 결맹은 강화되었다. 하지만 울라는 건주와만 사이 좋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부잔타이가 1년여 뒤 건주와 특별한 마찰이 없었음에도 여허와 재연대를 하려 했던 것을 고려해 보자면, 부잔타이가 누르하치에게 아바하이를 시집 보낸 까닭은 건주의 울라에 대한 경계심을 다소 완화하기 위한 조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편 1602년 무렵 누르하치는 1600년에 자신에게 완전 귀부한 로툰을 다시 조선의 변경으로 돌려보냈다. 누르하치가 로툰을 돌려 보낸 이유는 자신이 직접 나설 필요 없이 로툰을 매개로 하여 조선의 국경 인근에 위치한 번호들을 병합, 자신이 세력에 귀속시키는 한 편으로 당시 건주가 처한 식량난 상황을 다소 경감시키기 위함으로 보인다.
로툰의 통솔 가호수는 당시를 기준으로 약 8백여호로 추정되는데6, 이는 인구로 계산하자면 못해도 3~4천여명은 되는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원수는 당시 여전히 식량적 사정이 좋지 않던 누르하치로서는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숫자였고 따라서 그들을 조선의 변경으로 돌려보내어 식량을 자급하게 하는 대신 본인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번호들을 복속시키는 임무를 맡긴 것이라 판단된다.
로툰은 1602년 음력 6월 무렵 무산을 통해서 조선에 항복의사를 밝혔다.7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다시 조선의 번호가 되려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조선 변경에 세거할 명분을 만들고 조선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의논이 오갔으나, 결과적으로 로툰을 '용서'하는 대신 회령을 통해 재차 항복 의사를 전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로툰은 회령을 통해 왕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 명분은 회령 인근의 번호들과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조선 조정에서는 1603년 무렵 로툰의 명분을 인정하고 무산에 개시를 열어 그를 회유할 것을 결정했다.8또한 무산의 격을 높여 첨절제사가 주둔하게 하고 번리를 안정화하게 했다.
로툰은 조선의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포섭되지 않고 1602년부터 지속적으로 번호 철거 행동을 벌였다.9 로툰의 이러한 행동은 누르하치의 의지에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누르하치는 로툰을 매개로 하여, 자신이 직접 번호 철거에 나서서 조선의 이목을 끄는 위험부담을 지지 않고 번호 세력들을 차례대로 흡수해 나갔다.
1.만주실록 권2 신축년(1601년)조
2.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음력 10월 23일
3.조선왕조실록 광해군 5년 음력 2월 19일
4.장정수, 17세기 초 朝鮮의 이원적 對女眞교섭과 ‘藩胡規例, 명청사학회, 명청사연구 54, 2020, p.198
5.만주실록 권2 신축년(1601년) 음력 11월
6.팔기만주씨족통보 권11, 안출라쿠 지방 타타라(安禇拉庫地方他塔喇), 罗屯 : 正红旗人世居安褚拉库地方国初率八百戸来(이하 생략)
7.조선왕조실록 선조 35년 음력 6월 16일
8.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6월 4일, 음력 6월 10일
9.조선왕조실록 선조 35년 음력 7월 10일, 선조 36년 음력 7월 1일, 37년 음력 3월 15일
버일러가 머임
대충 군주라고 생각하면 됨.
거대한 세력의 통치군주, 혹은 거대 세력 내부의 조직을 소유한 소유군주 같은.
지방호족 같은?
그것과는 다름. 호족들은 국가의 통치자와 혈연적으로 이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버일러들은 혈연관계로서 주로 동생, 조카, 아들 이었음.
정략혼인데도 부부간에 금슬이 좋았다니 의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