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 말고 서평만 볼 분은 마지막 두 문단만 보시면 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 출간된 이후, 마이클 샌델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등 현대 철학자 중 국내에 도서가 빠짐없이 출간된 보기 힘든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죠.
「공정하다는 착각」으로 한 번 더 한국에서 작은 돌풍을 일으켰던 그가 올해 초 새로운 서적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를 출간했습니다. 클린턴 시기에 출간한 「민주주의의 불만」에서 그 동안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편집해서 새로 냈다는데, 나름 샌델 철학을 파 보기로 하였으니 기왕이면 끝까지 가자는 생각에 이 책도 사서 읽어보았습니다.
도서명: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Democracy's discontent)
저자/출판사: 마이클 샌델/와이즈베리
정가: 20,000원
<미국사의 핵심 키워드: 자유>
미국의 정체성을 하나 고르라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걸 고를까요? 아마 다들 논란의 여지없이 자유를 꼽으리라 생각합니다. 태생이 영국에서 자유로워진 나라이고, 자유에 대해 보여주는 미국인의 자부심과 행동들이 이를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2003년 프랑스와 잠시 사이가 나빠졌을 때 연방의회 하원 식당에서 감자튀김(french fries)을 자유의 튀김(freedom fries)라고 바꿔 부른 해프닝도 그렇고, 총기사고 논란이 아무리 일어도 총기를 소유할 자유(freedom)를 포기하지 못 하는 것처럼 말이죠. 미국의 원조를 많이 받은 우리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 봐도 미국에서 자유는 절대 떼놓을 수 없는 키워드라 할 것입니다.
미국 철학자 샌델은 미국인답게 자유를 중심으로 미국의 정치윤리적 관점 변화를 고찰합니다. '자유'의 뜻이 경제적 변화에 따라 어떤 의미로 이해됐는지 건국기부터 현재(바이든 집권기)까지 시간순으로 살피면서 현대적 자유가 왜 나치 독일의 재림(도널드 트럼프)과 같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다시 불러왔나를 살펴봅니다.
<그대의 자유는 어떤 것인가?>
위에서 쓴 것처럼 '자유'는 미국의 정체성 그 자체기에 미국에서 자유가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를 파악한다는 건 미국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과 같을 겁니다. 샌델은 우선 자유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공화주의적 관점과 자유주의적 관점의 두 가지로 나눕니다.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자유는 바람직한 공동선을 따랐을 때 오는 결과로 '지치의 역량'을 의미합니다. 공동체에 바람직한 공동선을 구성원들에게 함양시켜 시민으로서 자신을 지배하는 공동체를 운영하는 역량을 갖추게 하는 것이 공화주의적 자유로, 우리나라에서는 대한제국 시기의 애국계몽 운동이나 일제시기의 야학 운동을 떠올리면서 '주권'과 '독립'에 가까운 자유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자유주의적 관점은 공동선 같은 특정한 관점 설정 없이 개인의 권리와 사상적 관용에 근거한 '제한 없는 행동'을 지칭합니다. 칸트가 이론적 기반을 만들어 롤스가 완성한 자유주의적 자유는 공화주의적 자유와 달리 내 안의 도덕 법칙에 따라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고, 간섭 없는 자유라는 면에서 '해방'이 이 개념에 가깝다 보시면 됩니다. 본문 중간에 나오는 자발주의적 자유도 불완전하지만 이 의미에 포함된다 보시면 되겠습니다.
샌델은 이러한 두 가지 자유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들고 미국사의 주요 정치적 논쟁으로 뛰어듭니다.
<공화적 전통의 농업국가에서>
비록 미국의 주요 키워드로 금권을 꼽긴 했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갓 독립한 미국은 농업국가로, 생산과 소유가 일치하고 영국의 압제에서 독립한 사람들에게 자유란 내가 먹고 살만한 것을 스스로 생산할 능력을 보유한 상황에서 강자에 대항해 자신을 지킬 능력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을 위시한 독립의 아버지들에게 자유란 당연히 공화주의적 자유를 의미했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업을 자유의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농업에 기반한 자유의 개념에 제조업에 추가된 건 알렉산더 해밀턴을 비롯한 연방주의자의 주장과 외국산 수입품에 대항하여 스스로 상업과 제조업을 일으키자는 움직임에서 비롯됐습니다. 처음에 독립의 아버지들은 제조업이 사치를 불러일으켜 공화주의 정신을 흔들 것이라 생각하여 상업과 제조업을 적대하고 자유무역을 통해 물품 수요를 충족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제조업을 하지 않아도 외국의 제조업 제품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결국 공화주의적 자유가 위협받게 되는 상황에서 결국 미국이라는 신생국가의 자유를 지키려면 제조업과 상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빗대어 봐도 조선 역시 사농공상의 농업중심 체제를 유지하다가 대동법을 통해 교환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상업과 제조업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걸 생각하면, 이러한 미국의 흐름 또한 무역을 하는 한 피할 수 없었는 필연적인 결과였을 겁니다.
제조업을 받아들인 이후 앤드루 잭슨 시기에 일어난 경제적 상황은 지금과 비슷한 면모가 있지만 이해관계자의 상황은 반대였습니다. 상인, 자본가, 은행은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한 진흥을 주장했고 농민, 노동자, 직공은 정부 개입을 반대했죠. 보통 유리한 쪽이 움직이는 걸 반대한다는 걸 생각하면 여전히 공화주의적 가치관과 경제가 미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노예제와 임금노동>
이러한 공화주의적 자유관이 크게 흔들린 첫 번째 계기는 바로 노예제 논쟁과 남북전쟁으로, 미국이 산업국가로 발전하면서 치른 큰 이 사건은 자유의 가치관 변화에도 상당히 중요한 지분을 차지합니다.
임금을 받고 일하는 북부 노동자가 과연 노예랑 무엇이 다른가는 노예제 논쟁에서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노예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급자족하지 못하여 독립의 기반이 없는 것은 북부 노동자 또한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의식주 및 소유로 인해 일어나는 말썽을 회피하게 해주는 더 교활한 장치라고 주장했습니다.그러나 노예제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이는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의사에 반대하는 일을 비자발적으로 하는 사람과 자발적으로 계약하는 사람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던 겁니다. 가치관 자체가 달랐던 것이죠.
노예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보통 농업을 하는 농장주로, 공화주의적 자유관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분명 자급자족할 기반이 없다는 면에서 노동자와 노예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였을 겁니다. 반면 노예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발주의적 자유관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썼던 자유주의적 관점과 비슷한데 그들에게는 자신의 의사로 행동하는 것이 진정 자유였고, 그런 의미에서 노예와 노동자는 천지차이였던 겁니다. 논쟁 초기에는 이처럼 노예제를 둘러싼 양측의 주장은 전제부터 달랐기 때문에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평행선은 시간이 지나면서 링컨을 포함한 공화당 정치인들이 노동자에 대한 관점에 공화주의적 자유를 혼합하면서 북부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들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자발적 의사로 계약했을 뿐만 아니라 저축을 통해 향후 자유노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면에서 평생 비자발적으로 일해야 하는 노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분명 자발적 자유관을 버린 건 아니지만 공화주의적 기치를 근본으로 한다는 면에서 이전보다 더 세련된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기반으로 북부는 남부에 대비하여 이론적 우위를 점하였고 이는 남북전쟁이 끝난 뒤 임금노동을 정당화하고 산업 사회로 나아갈 사상적 기반이 되었지만, 순수한 공화주의적 관점의 자유는 이미 한 번 크게 상처입은 뒤였습니다.
<임금노동은 자유노동인가?>
자유노동의 가능성을 약속한 북부가 승리했지만, 산업혁명으로 인한 산업의 고도화는 노동자들이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환경으로 점차 내몰고 있었습니다. 신음하던 노동자들은 저항할 방법을 찾았고, 단합하여 두 번의 큰 흐름을 보였습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는 노동기사단으로, 이들은 8시간 노동, 노동자의 시민의식 함양, 생산수단의 공동소유 및 성과에 따른 분배 등을 통해 임금체계를 대체하고 공화주의적 자유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이미 거대해진 트러스트 앞에서는 너무나 미약했던지라 협동조합은 자본부족으로 사라지고 노동기사단 자체도 헤이마켓 사건의 타격으로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두 번째 흐름은 헤이마켓 사건 이후 등장한 미국노동총연맹입니다. 이들은 현대 임금체계를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면서 그 틀 안에서 노동자의 조건 개선을 도모하였습니다. 계약에 의한 자유노동을 인정하고 자발주의적 자유관에 입각하여 행동할 뿐, 공화적 가치의 회복은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담배노동조합장 아돌프 스트래서의 말이 이러한 그들의 시각을 단적으로 대변합니다.
우리에게는 궁극적인 목표란 것이 없다. 우리는 하루하루 먹고 살 뿐이다. 우리는 단지 눈 앞의 목표들, 몇 년 안에 실현할 목표들만을 바라보며 싸울 뿐이다.(...) 우리는 모두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이렇게 노동운동의 흐름이 자발주의적 자유노동관으로 바뀌면서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버림받은 공화주의적 자유관은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진보주의 개혁운동과 공화주의의 쇠퇴>
하지만 공화주의적 전통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금권 정치의 폐해와 거대 트러스트로 인한 사회적 위기에서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진보주의 개혁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흐름 속에는 공화적 자유를 복원하려는 움직임 또한 있었습니다.
우드로 윌슨과 루이스 브랜다이스 대법관으로 대표되는 탈중앙화의 흐름은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자유로의 복원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경제 권력을 쪼개고(트러스트 분할 등 반독점 운동) 이를 통해 노동자의 경영 참여(노동조합)가 가능한 상태를 실현함으로써 공화주의적 자유가 가능한 상태로 복원하려 하였습니다.
반면, 허버트 크롤리와 시어도어 루스벨트로 대표되는 신국가주의적 흐름은 경제 권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걸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공화주의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규모도 커져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시민권력을 되찾기 위해 힘을 국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류입니다. 다만 이들 역시 집중되는 국가의 역량만큼 시민적 역량 또한 배양하여 국가 단위로 공화주의적 자유를 실천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들은 방법은 달랐을지언정 생산자로서의 시민의 역량을 향상시켜 공화주의적 이상을 실현한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하지만 월터 웨일로 대표되는 또다른 흐름, 시민들의 정체성의 공통분모를 소비자에서 찾은 소비자주의 노선의 개혁가들은 생산자와 관련된 기존 공화주의적 미덕은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소비의 측면에서 소비자의 경제적 만족을 폭넓게 달성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다양한 흐름이 존재하는 가운데 진보주의 개혁가들은 거대 자본을 제어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는데, 샌델은 독점금지와 체인점 금지운동을 대표적으로 꼽으며 설명합니다. 독립소매점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던 체인점 금지운동은 시민의식 복원과 공화적 자유를 위한 마지막 투쟁으로서 결국 소비자 논리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반면 독점금지운동은 시민의식 복원을 기치로 하였을 때는 힘을 못 쓰다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기의 반독점국 수장 서먼 아널드가 거대 자본 규제에서 소비자 보호로 방향을 틀면서 성공하여 지금까지 존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운동의 성패가 보여주는 것은 대단히 명확했습니다. 공화주의적 자유가 설 곳을 점점 잃어간다는 것이었죠.
<대공황과 공화주의적 자유의 몰락>
진보주의 운동에서도 공화주의적 자유는 설 곳을 잃어갔지만, 대공황과 뉴딜은 거치면서 공화주의적 자유는 완전히 몰락하게 됩니다.
대공황 시기,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흐름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위의 진보운동처럼 탈중앙화와 신국가주의를 통한 공화적 조치였고, 세 번째는 케인스 이론에 따른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조치였습니다. 좋은 사회의 지향점을 제시한 기존 해결책과 달리 케인스는 특정 가치를 제시하지 않고 현상의 해결에만 집중하였죠.
처음에 루스벨트는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대공황 해결을 접근하였습니다. 생산량을 조절하고 잉여농산물을 폐기하고 정부보조를 하면서, 산업부흥법을 통해 기업-노동자-정부 사이의 관계 정립을 통해 미국 산업을 재구성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대기업이 비협조와 소비자의 불만족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국가부흥청 소멸 후 뉴딜은 분권적 노선에 따라 진행됩니다. 테네시계곡개발청과 같은 자치기능이 있는 기관이 만들어지고 사적 권력의 집중을 견제하기 위해 공공사업지주회사법을 제정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이 역시 1937년 생산량 감소와 주식시장 급락과 함께 실패하게 됩니다.
결국 루스벨트는 1938년부터 정부지출을 통한 유효수요 창출을 주장한 케인스의 안을 받아들였고, 2차대전의 시작과 함께 천문학적 유효수요와 함께 미국이 불황에서 탈출하면서 최후의 승자는 케인스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건국과 함께 줄곧 미국인의 마음 속에 함께하던 공화주의가 완전히 몰락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샌델은 이를 두고 케인스혁명이라고 칭할 정도로 의미가 큰 사건이라 평합니다.
<절차적 공화정 속 자유의 빈 틈>
케인스주의의 승리 이후 가치를 적극적으로 판단하는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은 몰락하고 절차적 공화주의가 대두됩니다. 가치를 설정하고 추구하는 공화정에서 가치 대신 절차가 최종 목표가 되었다는 의미에서의 이 절차적 공화정은 존 롤스에 의해 확립된 이후 현재까지의 미국의 지배적 가치관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자세한 설명은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 3부 해설(1) 참조). 그러면서 자유의 개념도 자유주의적 자유로 정착했죠.
미국이 전후부터 베트남전 이전까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 때 절차적 공화정과 자유주의적 자유는 풍요, 인권 향상 등 다양한 사회발전을 이루고 미국인을 해방시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 패배하면서 가치의 공백은 그 구멍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가치를 잃어버린 미국인들은 스스로 수습할 역량을 잃은 채 패배감, 상실감과 혼란에 빠져버렸다고 샌델은 지적합니다.
가치가 비어버린 혼란에서 신자유주의를 위시한 자본주의 세력은 '세계화', '금융화', '능력주의'의 세 가지 교리를 제시합니다. 공화주의적이지도 않고 소비자 지향적이지도 않은, 월스트리트를 위시한 금융세력이 주도하는 이 특성은 세계화를 통해 어디에서든 돈을 빼기 쉽게 만들고 금융화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며, 능력주의로 자기들의 위상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들의 횡포로 미국의 근간 제조산업은 황폐화되고 서브프라임 위기에서도 아무런 책임없이 살아남았으며 능력이라는 허황된 사다리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횡포와 혼란은 기성 정치에 대한 분노와 증오, 원한으로 이어져 2016년 트럼프 선출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그가 취한 조치들은 기만의 연속이었죠.
<불변하는 것은 없고, 논의 못 할 것도 없다>
샌델이 이제 제시하는 것은 금융세력이 주장하는 세 가지를 타파하고 공공철학을 새로 구축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 현재의 절차적 공화정은 시장의 왜곡 등 도덕적 문제조차 공적 토론의 영역에서 빼 버리고 좋은 삶에 대한 고민을 하지 못 하게 마비시킵니다. 하지만, 케인스혁명으로 인해 기존 공화주의적 자유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워진 것 또한 사실이죠. 그렇다면 절차적 공화정에 공화주의적 자유를 가미하여 적극적으로 가치판단을 하여 바람직한 가치를 찾는 것이 최선의 길이 아닌가 하는 것이 샌델의 의견입니다.
과거 세계화에 대한 논쟁이 뜨거울 때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름이 지난 뒤에 과연 가을이 올까 하는 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가을은 사실상 멸종하고 기후변화의 영향을 우리는 온 몸으로 체감하고 있습니다. 불변의 진리로 보았던 것조차 논의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서 삶을 지배하는 힘을 불가피한 걸로 보지 않고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며 샌델의 책은 끝을 맺습니다.
<현실과 해결책을 잘 녹였지만, 우리에겐 그 이상이 필요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회의적으로 바라봤던 부분은 '미국적 가치가 주제인 책이 과연 우리나라에도 통용될 수 있을까?'였습니다. 위에서 썼다시피 책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자유인데 다른 나라 사정과는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 읽고 난 저의 답은 '일단 yes'입니다. 케인즈까지 다루는 5장까지의 내용은 그냥 미국 정치윤리사의 샌델 해석본으로 생각하면 되고 6~7장의 내용은 월스트리트의 세계화를 통해 우리에게도 영향을 끼친 내용이기 때문에(특히 능력주의) 적용이 가능하겠다는 생각 들더군요.
단적으로 우리나라는 비록 입시를 위한 입시라는 비판은 있어도 학업 수준이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편인지라 미국하고 대조해서 보면 됩니다다. 샌델식으로 해석하면 적극적 가치판단을 할 역량이 있는 상태인 사람이 그래도 많은 거죠. 이에 반해 미국은 레이건 때 공교육을 박살낸 이후로 정말 능지처참이 어울리는 수준이 되어 버렸고요. 트럼프 같은 폭력적 극우사상이 미국에서는 주류까지 올라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딱 한 번 수면 위로 오른 뒤로는 사람취급 못 받는 것처럼 미국도 시민역량이 한국 수준으로까지 상승한다면 그런 극우사상이 발호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은 들고, 그런 면에서 샌델의 처방이 현실에서도 유효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샌델의 해결책 이후가 문제입니다. 시민적 역량이 일정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정치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하여 있고, 정치는 극단적 포퓰리즘에 치달으면서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이죠. 이러한 민의의 왜곡이 샌델이 제시한 보완된 절차적 공화정만으로 해결 가능할까요? 혹여나 해결 가능하더라도 그 수준까지 사람들이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소양을 쌓아야 할까요? 이 부분은 '이 책을 읽은 한국인들'에게 과제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샌델을 한 권만으로 이해한다면 가장 좋은 책>
개인적으로 샌델의 책은 이번이 다섯 권째인데, 이 책을 줄기로 다른 책들이 뻗어나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읽었던 다른 책 내용의 부분부분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면서 한 쪽으로는 반가웠고 한 쪽으로는 이런 책이 이제 출판되었나 하는 아쉬움이 들더군요. 나머지 책들은 샌델 사상의 파편을 줍는 느낌이었다면 이 책은 샌델 사상의 몸통을 직접 만지는 느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역사적 사실을 주로 열거하다보니 겹쳐서 떠오르는 것도 있는 흥미로운 책이기도 했습니다. 제 경우는 산업혁명으로 생산수단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면서 일어난 가치관의 변화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일부가 떠오르고, 체인점 금지 운동에서 등장했던 판매가격 제한제도는 우리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도서정가제가 생각나고 그렇더군요.
다만 와이즈베리가 한역하면서 출판하면 제목에 의역을 많이 하는데, 이번 제목인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는 그리 맘에 들진 않았습니다. 아마 민주주의의 위기 이면에 있는 경제현상과 윤리적 변화가 보통은 인지하기 힘드니까 이런 제목을 지은 것 같은데, 이전의 「공정하다는 착각」과 달리 직접적으로 와닿지는 않네요. 그래도 부제에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을 달아둔 거 보면 적절한 제목을 찾기 어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은 듭니다(사실 민주주의의 불편이라고 또 쓰면 옛날 거 재판인 줄 알고 안 사는 사람도 있고, 제목이 재미없으니 안 사는 사람도 있고 그러겠죠).
만약 샌델을 단 한 권으로 가장 많이 이해하고 싶다면 전 이 책을 추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읽는 데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전의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책도 아니고 역사적 사실과 인용문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고 특별히 생경한 용어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책 자체가 어렵지 않거든요. 사전지식 없이 샌델을 이해하는 데 가장 많은 도움을 주는 서적이라 하겠습니다. 그 외에도 미국 정치윤리사에 관심있는 분에게도 흥미로운 서적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긴 감상문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쓴 감상문 가장 오래 걸렸네요.
요즘은 유튜브 제목도 책 제목도 죄다 당신이 모르는이네요.
제목낚시긴 합니다. 원제는 민주주의의 불만인데 편집본이라 새로 내면서 제목을 이렇게 했네요.
능력주의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미신이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