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루리웹 애니메이션 유저 칼럼 시리즈입니다. 일정기간 동안 루리웹 애니갤러리 상단 공지로 노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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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노 요시유키가 일본 아니메사(史), 특히 거대로봇물의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만들었음을 부정하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리도 대다수는 1980년작인 <기동전사 건담>이 거대로봇물이라는 장르를 분화시킨 젓 족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기동전사 건담>은 직접적인 장르 분화의 가장 가시적인 작품이지만, 분화의 시발점은 그보다 3년 앞선 <무적초인 잠보트 3>(이하 <잠보트 3>)에서 시작되었다 보는 편이 타당하다.
<잠보트 3>에 대한 인상은 대체로 작품의 후반부에 몰려있다. 대개는 작품 중반부터 시작되는 '인간 폭탄'과 관련된 에피소드, 그리고 우주에 올라간 카이조그를 쫓아 올라간 후 발생하는 처절한 전투를 <잠보트 3>의 특징으로 꼽는다. 하지만 <잠보트 3>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것과 더불어 거대로봇 아니메사에 커다란 반향을 남긴 에피소드는 한참 이른 제 5화 [바다가 분노로 물들 때]으로 봐야한다.
[바다가 분노로 물들 때]의 큰 이야기는 간단하다. 피난민들에게 구호물자를 전하기 위해 잠보 에이스로 출동한 진 캇페이는 그 장소에서 과거의 친구였던 코즈키와 마찰을 빚는다. 그 와중에 카이조그의 메카 부스트가 일본을 습격하자 잠 불과 잠 베이스가 출격, 잠보트 3로 합체하여 메카부스트를 무찌른다. 여기까지는 거대로봇 아니메의 흔한 에피소드 중 하나 일 뿐이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잠보트 3와 메카부스트와의 결전 중 수많은 피난민이 목숨을 잃는다는 점이다.
메카부스트와 잠보트 3의 결전은 총 25분(노래와 크레딧 포함)의 플레이 타임 중 절반인 13분 정도부터 시작되어 20분 정도에서 끝을 맺는다. 그 7분 중 절반을 넘는 약 4분이 현재 짚고 넘어갈 항만에서의 전투이다. 항만에서의 전투가 시작되는 14분부터 잠보트 3가 물속에서 부상해 메카 부스트와 대치하는 19분까지는 기존의 영웅 서사로 일관되던 거대로봇 아니메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도록 연출되어 있다.
이 5분은 약 60개의 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중 잠보트 혹은 메카 부스트의 전투를 묘사한 컷은 불과 20컷 정도이다. 그 20컷 중에서도 잠보트 3(와 파일럿들)와 메카부스트를 '기존의 거대로봇 아니메 방식(컨벤션)'으로 조망하지 않은 컷이 두 컷으로 실제로 로봇 아니메의 보편적 형태로 담져겨 있는 컷은 7할도 채 안 되는 8컷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남은 컷들은 모두 둘의 싸움에 휘말려 든 피난민과 코즈키 일가의 이야기들로 담겨 있다.
잠보트 3와 메카 부스트가 담겨져 있으나 거대로봇 컨벤션으로 직조되지 않은 2개의 컷은 이 일련의 시퀀스의 핵심이다. 이 두 개의 컷에서 거대로봇들은 근경의 피난민들을 걸친 채로 원경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액션이 묘사되기 보다는 '거대한 두개의 거체가 대치하고 있는' 형상만을 담는다. 이 컷들에서 주체는 당연히 두대의 거대로봇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피난민들이다. 피난민들이 주체화되면서 배경에 존재하는 거대로봇들은 객체화되며, 그들은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써의 피난민에게 고난을 던지는 공포의 중심이 된다. 이 두 개의 컷은 각각 그 컷이 등장한 이후 실질적인 재난 -화재와 해일-을 발생시켜서 그것이 단순한 불안이 아니라 실질적인 재난 그 자체로 대상화된다.
남은 40개의 컷들에서 가장 많은 클로즈업을 가져가는 인물은 코즈키로써 그는 두 번의 재난이 일어나는 동안 동생과 어머니를 잃게 된다. 이 5분간의 전투 시퀀스는 명백히 피난민들에게, 그리고 피난민의 중심인물인 코즈키에게 이입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 60개의 컷은 철저하게 관객의 심리로부터 잠보트 3라는 '영웅'을 분리시키고, 그의 행위로부터 피해를 입는 인물에게 동일시하도록 유도되어 있으며 이 안에서만은 잠보트 3는 재난을 일으키는 괴물 그 자체로밖에 볼 수 없다.
이것은 거대로봇물에 있어서는 일대의 사건이다. 거대로봇물은 일본 아니메사의 시작부터 함께한 일본과 아니메의 독보적인 장르이지만, 그 근저의 본질은 영웅 서사였다. 대개의 주인공은 상실을 겪고 상실의 대가로 '거대로봇'이라는 커다란 힘을 얻게 되며, 작품의 안타고니스트(반동 인물)는 마치 처음부터 주인공에게 대치하기 위해 존재했다는 듯 지나치게 가시화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거대로봇이 적의 거대로봇과 육체적으로 부딪히는 모든 시퀀스는 영웅이 자신에게 닥쳐오는 시련에 대항하는 장면을 의도해 왔으며, 설령 주변의 사건들을 묘사하더라도 언제나 카메라는 거대로봇(과 파일럿)을 주체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거대로봇 아니메에 드라마를 가져왔다고 여겨지는 나가하마 타다오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단 한 번도 벗어난 일이 없었다. 그러한 경향이 최초로 깨어진 것이 바로 이 <잠보트 3>의 5화인 [바다가 분노로 물들 때]였던 것이다.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은 무크지 [토미노 요시유키 전작업](키네마준보 편집부, 1999)의 인터뷰에서 창작자가 전쟁을 다룰 때의 자세에 대해 논하며 '<잠보트 3>에서는 이전의 거대로봇 아니메가 다루지 못한 것을 다루고 싶었다.'라고 발언했다. 이 시퀀스가 전쟁을 벌이는 당사자들에게 포커스를 두지 않고 전쟁에 휘말린 사람들에게 포커스를 둔 이유는 아마도 이런 의식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1943년생인 토미노 감독은 태평양 전쟁의 말미에 태어났기에 실질적으로 전쟁을 겪지 않았던 '전후 세대'였다. 다만 그의 역사는 아마도 전쟁을 직접 겪었던 사람들, 그리고 전후의 복구와 이민이라는 혼란의 시기와 함께 했을 것이다. 토미노는 자신이 직접 본 것과 더불어 그 사건을 겪어온 사람들로부터 '전쟁'이라는 커다란 이벤트를 체험해왔고, 자신이 TV에서 보아온 것들이 겪어온 전쟁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느껴왔을 것이다. <잠보트 3>, 특히 제 5화는 타자에 의해 직조된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당사자가 쌓아 올린 철저한 체현으로 봐야 옳다.
장르론에서는 장르가 맹아기(혹은 발아기)에서 태동하여 동일 장르의 작품이 난립하는 고전기 그리고 기존의 장르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수정기를 거쳐 기존의 법칙들을 풍자의 용도로 쓰는 패러디기로 이동한다고 한다. 특히 수정기에서 수정된 요소들이 또 다른 분파를 만들면 그것이 새로운 맹아기가 되기도 해, 이렇게 장르가 분화되어간다. 수정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 장르의 컨벤션과 아이콘들에 대한 정치적 재해석이다. 수정주의 웨스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랠프 낼슨 감독의 <솔져 블루>(1970)는 기존의 웨스턴 영화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불공정성 - 원주민을 야만스러운 적으로 묘사하고 그들을 죽이는 기병대를 정의롭게 묘사하는 것 - 에 반발해 기병대가 원주민을 학살하는 끔찍한 장면을 삽입했다. 이러한 재해석 덕분에 웨스턴이라는 장르는 재해석되며, 영웅신화를 이탈한 다양한 웨스턴 장르가 분화되는 계기를 낳았다.
<잠보트 3> 역시 기존 거대로봇 아니메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성, 즉 전쟁담론에 대한 재해석을 보인 작품으로 해석해야 한다. 거대한 세력과의 마찰을 단순히 이원화하여 그 중 '우리 편'만을 영웅화하는 담론 그 자체를 정면에서 부정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캇페이가 전쟁이라는 것에 뛰어드는 태도의 변화나 전쟁을 하나의 유희로밖에 여기지 않는 킬러 더 붓쳐의 태도, 궁극적으로 '지구인은 기본적으로 사악하기 때문에 이타적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철저히 타자화된 마더 돌 8호의 태도 등 이 작품이 전쟁이라는 일대 사건을 다루는 방식은 기존 로봇 아니메의 모든 컨벤션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장르적 분화와 재해석의 가장 중요한 기점은 설정과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태도에 있다. 제 5화 [바다가 분노로 물들 때]가 기존의 거대로봇 아니메가 가지고 있던 연출적 한계를 완벽하게 깨트렸기에 <잠보트 3>가 로봇 아니메라는 장르 전체를 뒤흔든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본작의 제작 당시, 토미노 감독은 자신과 함께하는 스태프들 그리고 스폰서인 완구업체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험 없이 전쟁을 무대로 하는 이야기를 만든다면, '꼭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야만 한다.'라는 아픔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無経験に戦争を舞台にするのなら「本当はこういう話作らなくちゃいけないんだよ.」という痛みをわからなければいけない.)" 그리고 그 후 <잠보트 3>를 만들면서 얻은 교훈들을 통해 완벽한 수정장르 작품인 <기동전사 건담>을 완성해낸다. <잠보트 3>는 단순히 '동심파괴'나 '인간폭탄이 나오고 모두 다 죽는 미친 만화'로만 해석되기에는 아쉬운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철저하고 집요한 작가적 성찰과 함께 하나의 장르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한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기동전사 건담>이 거대로봇 아니메를 뒤바꾼 작품으로 거론된다면, 그것의 앞 길을 닦아낸 <무적초인 잠보트 3> 역시 그와 같은 반열에 꼭 올라가 있어야 한다.
빵끗
사실 철혈같은 작품이 어느날 갑자기 뿅 하고 튀어나온 것은 아닐겁니다. 그 사이 아니메가 전쟁을 다루는 방식이 점층적으로 쌓이다가 시기를 빌어서 뻥 터진거겠죠. 단순히 특정 제작진만이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업계 전체가 사유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의 묘사는 미묘하지만 거대 로봇의 전투가 주변에 피해를 준다는 묘사는 의외로 일찍이부터 있었습니다. TV판 <마징가 Z>의 7화 아수라 남작의 대모략편에서도 광자력 연구소를 침공하는 기계수때문에 도시가 파괴된다는 이유로 반 광자력 연구소 시위에 참여하는 대중이 나오거든요. 사람이 죽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말씀하신대로 대상 연령 덕분에 기피하는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거대로봇 아니메에서 피해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어디가 터지고 누가 죽었냐... 가 아니라 그것이 영웅 서사의 일면으로 묘사되느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봅니다. 요컨데 영웅 서사 안에서 영웅의 행위는 어느정도 면죄부를 가지고 있게 됩니다. 위에서 설명한 마징가 Z의 해당 에피소드도 결국 대중이 아수라의 책략에 걸려든 것으로 묘사되지, 실제로 광자력 연구소가 피해의 책임을 깊이 반성하는 내용은 없죠. 이런 상황이라면 설령 진짜로 누군가 죽음을 맞이했더라도 관객의 이입 주체인 주인공을 두둔하게 하기 위한 장치들이 고려될 것이 분명한 겁니다. 잠보트 3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이런 이원적 개념을 이탈해 있기에 선구적인 면이 보이는 것이죠.
칩펀스 제작진 같은 전쟁을 가볍게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글이군요
아직 현역으로 뛰시는 분이다보니 43년생이라는 사실이 좀 생경하긴 하죠.
토미노 옹은 전쟁 장르 창작물을 이념 프로파간다의 장에서 끌어내서 실제 전쟁터에 데려다 놓았죠. 선악 구별 없이 모두 목숨을 지키기 위해 서로의 것을 앗아가는 장으로 말이죠.
이념적인 부분이 대두되는 기존 체제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60년대 신좌파 운동과 맥이 비슷하긴 하겠습니다. 키네마 준보에서 굳이 토미노 감독의 무크지를 내주는 것도 정신적인 면에서 쇼치쿠 누벨바그와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일지도요.
컷을 이렇게 빠짐없이 전부 펼쳐놓으니 구조가 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잠보트 3의 23화 완결편 방영일이 78년 3월 25일이고, 퍼스트건담 1편 시작일이 79년 4월 7일이니 어떤 면으로 보든 본작을 제작했던 경험이 건담 제작의 직접적인 토대가 되었다고 봐야겠네요. 좋은 분석 글 감사합니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잠보트 3를 제작하기 위해 습득한 지식이 기동전사 건담에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는 토미노 본인이 직접 하기도 했죠. 텍스트 내에 언급된 토미노 요시유키 전작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실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컷바이컷으로 읽어야 하는 물건이지 않나 싶습니다. 60년대에도 촘촘히 그림 콘티로 구조를 쌓아올려서 만들던 매체여서...
일단 토미노는 추천
빵끗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ㅎㅎ
어쿠 저도 지면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칩펀스 제작진 같은 전쟁을 가볍게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글이군요
보여줘도 못 알아먹을 거고 알아먹으려 하지도 않을 겁니다.
사실 철혈같은 작품이 어느날 갑자기 뿅 하고 튀어나온 것은 아닐겁니다. 그 사이 아니메가 전쟁을 다루는 방식이 점층적으로 쌓이다가 시기를 빌어서 뻥 터진거겠죠. 단순히 특정 제작진만이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업계 전체가 사유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높이 수십미터짜리 무게가 수백에서 수천톤이 넘어가는 금속 덩이리들기리 싸우는데 그 근처 여파로 건물만 부서지고 사람 하나 안죽는다는게 정말 말이 안되는거지요.... 주 고객연령층인 어린이인 용자물이나 그 연령대를 노린 거대로봇물에서는 사람 죽는 모습을 보여주는건 거의 없으니까요. 개인적으로 가오가이가의 디바이딩 드라이버의 공간만곡으로 필드를 만들어서 민간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 시킨건 진짜 회기적인거 같았네요.(뭐 그 실상은 배경에 대한 경비를 줄이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사람이 죽는 것의 묘사는 미묘하지만 거대 로봇의 전투가 주변에 피해를 준다는 묘사는 의외로 일찍이부터 있었습니다. TV판 <마징가 Z>의 7화 아수라 남작의 대모략편에서도 광자력 연구소를 침공하는 기계수때문에 도시가 파괴된다는 이유로 반 광자력 연구소 시위에 참여하는 대중이 나오거든요. 사람이 죽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말씀하신대로 대상 연령 덕분에 기피하는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거대로봇 아니메에서 피해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어디가 터지고 누가 죽었냐... 가 아니라 그것이 영웅 서사의 일면으로 묘사되느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봅니다. 요컨데 영웅 서사 안에서 영웅의 행위는 어느정도 면죄부를 가지고 있게 됩니다. 위에서 설명한 마징가 Z의 해당 에피소드도 결국 대중이 아수라의 책략에 걸려든 것으로 묘사되지, 실제로 광자력 연구소가 피해의 책임을 깊이 반성하는 내용은 없죠. 이런 상황이라면 설령 진짜로 누군가 죽음을 맞이했더라도 관객의 이입 주체인 주인공을 두둔하게 하기 위한 장치들이 고려될 것이 분명한 겁니다. 잠보트 3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이런 이원적 개념을 이탈해 있기에 선구적인 면이 보이는 것이죠.
점보트3가 진짜 명작요. 재밌기도 재밌는데 당시의 장르 틀을 아주 개박살내면서 재밌어요. 게다가 그저 눈길을 끌기위한 자극적인 내용이 아니고 가시처럼 박혀서 생각을 복잡하게 만드는 강렬한 내용... 다이탄3는 한가한 사람에게만 추천하는데 점보트3는 로봇물이란 장르에 관심있는 사람에게는 이데온과 같이 무조건 추천해줍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의 필살기가 달과 태양인 것 처럼 당대 토미노의 정신세계를 양분해서 볼 수 있는 귀중한 샘플들이죠. 토미노라는 작가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연달아 제작된 두 작품을 이어서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봅니다.
학살의 토미노 요시유키..
전 해당 별명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확실히 잠보트3를 보면은 우리 인류라는 무리들이 상당히 객관화 되어서 나타났었죠. 그렇기 때문에, 공포감도 배증되는게 아닐까 합니다. 예를들어 우리는 인류이기 때문에 인류의 입장에서 보는 위치에서는 기존의 로봇물과 크게 다를바가 없었죠. 악당은 죽어 마땅하고, 우리는 주인공 메카로부터 구원을 받기 때문에 위기라는건 어디까지나 극복하기 위한 존재로 묘사되지만, 잠보트3에서의 인류는 가이조쿠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존재라는걸 제대로 부각하고 있다는 점. 인류가 공포에 떨고, 부챠는 인류를 벌레잡듯이 잡거나, 식용으로 관리하거나 본문처럼 메카부스터는 물론이고 잠보트역시 우리의 친구가 아닌 일방적인 힘의 차이를 가진 대상이라는 점. 이러한 시각의 차이에서 토미노는 지금까지의 울분같은게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게 묘세하게 되죠.
대중에의 객관화는 사실 토미노 이전에도 아예 없었지 않고, 도리어 토미노는 그러한 대중도 때로는 이입의 주체로 발산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봅니다. 기존과 달리 객관화된건 대중보다는 영웅처럼 묘사되던 주역로봇의 자태에 가깝죠. 다만 기존 로봇 아니메의 대중과 상당히 격이 있게 느껴지는 것은 토미노는 이 판 자체를 '전시상황'이라고 확신하고 있기때문으로 보입니다.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나중에 또 다른 주제의 칼럼도 부탁드립니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가뭄에 콩나듯 브런치에도 글을 올리니 가끔 봐주세요. 주소는 https://brunch.co.kr/@nowyan
「피카소」찬양은 위법 [중앙일보] 입력 1969.06.09 00:00 [출처: 중앙일보] 「피카소」찬양은 위법 http://news.joins.com/article/1199866 기사의 마지막에 재미있는 문단이 있어서 퍼와 봅니다. "그러나 검찰은「피카소」의 작품을 단순히 미술품으로 소장, 감상하거나 그의 예술에 대한 연구를 하는 행위는 반공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렸던 것처럼 애니메이션은 영화보다 더 극적인 상황을 더 여과없이 보여줄 수 있는 '사회의 창'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데요. 이를테면 '전쟁'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극'들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전쟁놀이'에서 현실적인 지옥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달까요. 그로 인해 전쟁의 의미에 대해 되짚어 볼 수 있게 해준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바람의 검심' 같은 작품에서도 PTSD같은 것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거든요. 소년병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는 소지로라던가 말이죠. 보다 적나라한 현실을 묘사하는 가장 현대적인 장치로서 저는 참여예술 형식의 애니메이션을 참 좋아하는데 기회되면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전 어떠한 매체가 어떠한 사실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는 관점에는 사실 좀 부정적입니다. 그것은 매체 특성이라기보다는 매체의 언어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매체적 관점보다는 작가적 관점에서 해소되어야 되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죠. 말씀해주신 바람의 검심 사례도 매우 설정적인 특질이기 때문에 '만화이기 때문에' 성립하는 형태는 아니라는 것이 저의 소견이옵니다... 그런것들은 설정보다는 해당 매체의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아웃풋이 있을때 비로소 '만화이기 때문에'라는 단초를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한 샘플로는 데이비드 마추켈리의 <아스테리오스 폴립> 중 티눈으로부터 아내를 떠올리는 일련의 시퀀스를 자주 제시합니다. 만화가 아니면 표현이 불가능한 회고의 감성이죠.) 하지만 만화 혹은 애니메이션 읽기는 권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해당 매체들이 상대적으로 특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비평이 지난하기 때문입니다. 제작되는 작품의 수가 폭발적인 데에 비해서 대중과 접점을 가진 비평지면이 미비한 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니까요. 물론 평단의 문제보다는 비평 소비가 미비한 탓이지 않나 싶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