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왕이 하는 일!> 5권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신동'이라는 단어가 있다.
신에게 사랑받은 아이들.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재능을 받고 내려온 아이들.
철이 들기 전부터 어른들보다도 강하고, 현명하고, 뛰어난 존재. 이대로 성장한다면 그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거라는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는 존재.
하지만 대부분의 신동들은 성장해감에 따라 평범한 '인간'이 되고 만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다.
성장 속도가 남들보다 빨랐을 뿐이었다. 재능에 취해서 노력을 게을리했다. 대기만성형의 천재에게 따라잡혔다. 가정을 꾸리면서 평범한 '어른'이 되었다.
또 어떤 천재든지 육체를 지닌 인간인 이상 나이가 들면서 그 능력 역시 저하되고.......결국은 새로운 재능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
......
그렇다면.
인간으로 되돌아가지 않은 신의 아이가 있다면......어떻게 될까?
신동은, '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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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용왕이 하는 일!> 작중 등장인물들의 현실 모티브에 대해서 글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저 글에는 일부러 중요한 인물을 한 명 빠뜨렸는데, 자칫하면 아직 정발되지 않은 5권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급적이면 5권 정발된 다음 올리려 했지만...결국 오늘 올릴 수밖에 없게 되었네요.
이 인물의 이름은 작중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시리즈가 얼마나 계속된들 앞으로도 결코 나오지 않겠죠.
왜냐하면 이 사람은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왕이 하는 일!>은 비록 많은 부분을 현실 장기계의 인물들과 사건들에서 모티브를 따왔지만
결국 어디까지나 픽션이고, 등장인물들 역시 작가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죠.
그렇지만 이 인물만큼은 엄연히 우리들과 같은 현실에 살고 있는 실존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이 나오지 않고, 일러스트에도 얼굴이 나오지 않고, 그저 시종일관 '명인'이라고만 언급됩니다.
(5권에 나온 명인의 기사카드. 글씨가 작아서 안 보이지만 저 목록 전부 타이틀 획득과 우승 기록들입니다)
통산 타이틀 등장횟수 131회, 획득합계 99기, 기타 기전 우승 44회
역대 세 번째 중학생 프로기사, 제19대 영세명인 자격과 현재까지 유일무이한 전 타이틀 동시 석권 기록 보유자,
일명 사상 최강의 장기기사.
하부 요시하루입니다.
뭐랄까, 새삼 소개하는 게 오히려 민망하네요.
-1985년 15세에 4단 승급. 사상 세 번째 중학생 프로기사.
-1988년 대국수, 승리수, 승률, 연승 4부문 1위 달성. 사상 최연소 최우수기사상 수상.-1989년 첫 타이틀(제2기 용왕) 획득. 이후 현재까지 27년간 매 기 타이틀 최소 1개 이상 보유중.
-1990년 첫 기왕 획득. (통산 17기 등장, 13기 보유)
-1992년 첫 왕좌 획득. (통산 26기 등장, 24기 보유)
-1993년 첫 기성 획득. (통산 19기 등장, 16기 보유) 동년 첫 왕위 획득. (통산 23기 등장, 18기 보유)
-1994년 첫 명인 획득. (통산 16기 등장, 9기 보유). 동년 영세기왕 자격 획득 (연속 5기 이상 보유)
-1995년 첫 왕장 획득. (통산 18기 등장, 12기 보유). 사상 첫 7타이틀 동시석권 달성. 영세기성 자격 획득 (통산 5기 이상 보유)
-1996년 명예왕좌 자격 획득 (연속 5기 이상 보유)
-1997년 영세왕위 자격 획득 (연속 5기 이상 보유)
-2006년 영세왕장 자격 획득 (통산 10기 이상 보유)
-2008년 제19대 영세명인 자격 획득 (통산 5기 이상 보유)
중요 기록만 정리해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입니다. 보통 이런 걸 간단하게 레전드라고 부르죠ㅡㅡ;;
하부 명인에 대해 한때 2ch에는 이런 농담이 떠돌아다녔을 정도입니다.
<하부 컨디션 측정법>
7관 : 귀축안경
6관 : 절호조
5관 : 호조
4관 : 보통
3관 : 부진
2관 : 초부진
1관 : 은퇴 임박
보통 장기 기사는 타이틀 도전자가 되면 일류, 타이틀 하나를 보유하면 초일류, 둘 이상 보유하면 전설이 되지만
하부 명인은 동시에 4관 보유하고 있는 게 보통이고 그 이하는 슬럼프라는 농담이죠.
그야말로 현실 인물을 가감없이 그대로 소설 속에 등장시켜도 당연하다는 듯 끝판왕 중의 끝판왕이 되어버리는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하부 명인이 장기계에서 남긴 일화와 전설들을 모아보면 과장없이 책 서너 권은 가볍게 나올 정도, 아니 이미 나와 있을 정도지만
그 중에는 장기를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 한 번쯤은 들어봤을 명승부가 있습니다.
바로 2008년, 제21기 용왕결정전의 7번승부입니다.
당시 와타나베 아키라 용왕은 4기 연속으로 용왕 타이틀을 보유중이었고, 도전자인 하부 명인은 연속은 아니지만 과거 총 6번 용왕 타이틀을 획득했던 상태였죠.
(용왕 타이틀을 5기 연속 보유하거나, 혹은 통산 7기 이상 보유하거나 둘 중 하나를 만족하면 영세용왕 자격을 얻습니다)
게다가 하부 명인은 이미 용왕을 제외한 나머지 6개 타이틀에서 모두 영세위 자격을 얻어서 전례가 없던 영세6관 자격을 획득한 상태였습니다.
7번의 대국 모두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극적인 승부였고, 그 중에서도 최종 제7국은 그 해 최고의 대국으로 뽑혀 장기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제21기 용왕결정전이야말로 <용왕이 하는 일!> 5권 줄거리의 핵심 모티브입니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 이 글에는 굳이 적지 않겠습니다. 그저 소설 속의 전개는 현실에서도 거의 똑같이 일어났다고만 해두죠.
잠깐만 인터넷을 찾아봐도 간단히 알 수 있지만, 아마 모르는 상태에서 읽는 편이 더 흥미진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하부 명인을 과연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시켰는지, 작중 야이치의 입을 빌려서 털어놓는 듯한 대목이 있습니다.
대국에서 멀어진 내 의식은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앉은 명인에게로 향했다.
------이 사람, 이런 얼굴이었던가......?
지금까지 어딘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명인의 얼굴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봤다.
한밤중까지 계속된 대국 때문에 지저분하게 자란 턱수염에 머리는 희끗희끗한, 중년 남자의 지친 얼굴이 거기 있었다.
눈은 움푹 들어가고, 그 주위에는 검은 그림자가 떠 있었다. 안구는 충혈되고, 반쯤 벌린 입에서는 낮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츠키미츠 회장처럼 젋고 늠름한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오이시 씨처럼 와일드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신 같은 것도 아니다. 평범한 모습일 뿐이다.
그런 명인의 모습을 보고서......
------멋있다.
순수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어린애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속 주인공을 동경하는 것처럼, 나도 이 사람을 동경해왔다.
이렇게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있는 지금조차도,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그 마음은 더 강해진다.
특별한 혈통을 타고난 것도 아니다.
기구한 운명을 짊어진 것도 아니다.
하치오지에 있는 신흥주택가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공립학교에 다녔던 정말로 평범한 소년. 그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한결같이 장기를 좋아했을 뿐인 지극히 평범한 소년.
지금도 전철을 타고 덜컹거리며 장기회관을 오가고 있다. 딸이 두 명 있고, 최근 사모님이 시작한 트위터에 의하면 집에서는 반바지 차림으로 포○몬go를 하는 모양이다.
그야말로 평범한 아저씨다. 상냥한 아빠다.
하지만------그 모습은 그야말로 '용자'였다.
질리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고, 느슨해지지도 않고 온 힘을 다해 싸워온 한 명의 남자.
어떤 커다란 승부에서도 두려움 없이 상대의 특기 전법에 뛰어들고, 그 용기로 승리라는 운명을 이끌어내 왔던 사상 최강의 장기꾼.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고, 처음으로 이 사람과 정면으로 마주보고서......역시 나는 이 사람을 동경해버리고 만다.
라노벨 세계의 등장인물들과는 달리 정말로 평범한 우리들의 현실에 살고 있는, 그렇지만 틀림없는 최강의 장기기사.
5권은 그런 명인에 대한 최대의 존경을 담은 한 권의 헌정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낮, 마침내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건이 현실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글도 그래서 쓰게 되었고요.
하부 명인의 대기록 달성을 축하합니다.
농림 작가는 산속에 들어가서 수련하다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데.
농림 작가는 산속에 들어가서 수련하다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데.
앞으로는 농림 작가가 용왕을 쓴 게 아니라 용왕 작가가 농림도 썼다고 할 것 같습니다.
방금 뉴스를 보고 왔는데, 소설보다 더 소설같네요. 귀축안경이 이제 패시브가 된 셈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