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이란 사랑의 결실이다. 단지 아이를 낳아 인간을 존속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아닌 사랑을 하고, 사랑이 흩어져도 서로 사랑했다는 기억으로 살아가겠다는 약속이다. 약속의 또다른 형태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으므로, 지금도 그녀를 잊지 못하므로 그녀를 보냈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게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이 곳은 백합꽃이 피는 세계이다.
한달 전 즈음,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쉬는 도중에 문득 졸업사진을 꺼내들었다. 여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끼리 뭉쳐 있고, 남자애들은 그런 여자애들에게 밀려 구석에 박혀 있거나, 혹은 친구로써 그녀들 옆자리에 조촐히 자리잡고 있었다. 여름사진. 졸업사진을 찍을 때 즈음 나는 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곳은 백합꽃이 피는 세계이다. 나는 이 세계에서 엑스트라에 불과한 남자다. 그리고 아주 처절한 사실 하나를 더 알았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그녀는 다른 여자애를, 그만큼이나 다른 여자애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사진 너머로도 느껴지는 풋풋함, 그리고 애틋함. 그때의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싫어서, 그녀의 졸업 사진을 같이 찍지 않았다. 지금은 후회한다. 그러나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찍을 수 있다면, 나는 찍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동안, 친구로써 지냈던 기억을 되살려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랬던, 세상에 반항하던 내 의도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있어 친구조차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가 되기엔, 나는 그녀를 너무 좋아한 것 같다. 미소가 좋았다. 벛꽃 아래가 가장 잘 어울렸던 그녀의 미소짓는 얼굴이 아른거릴 땐 정말 고통스러웠다. 기억속의 그 미소는 항상 그녀의 연인과 함께 있었을 때 있었으니까. 내가 만일 거기에 고백했다면, 그랬다면...
나는 그녀를 마음에서 지워야 했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나고,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지금의 차가운 겨울에 오기까지 몇 번의 봄이 올 때마다 나는 항상 아련히 아려오는 가슴을 품고 살았다. 밖에는 여자 커플이 즐비하다. 정말 이상한 세계지만, 나 이외엔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 '일반적인' 연인이 남녀커플인 것이라는 상식도 법도 모든 것이 존재함에도... 부부관계가 결국 파행되고 파행되는 것이 두려운 이들은 아내의 로맨스와 같은 불륜을 묵인한다. 그래도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야 할 것이다. 이 세계는 백합꽃이 피는 세계니까. 파행 끝에 남겨진 아이들은 여자들이 데려가고, 이야기의 끝에 홀로 선 남성들은 그렇게 이야기에서 버려진 채, 외로히 죽어간다.
나와 같다.
나는 그래서, 한달 전 졸업사진을 꺼내어 그녀의 행복한 얼굴을 보았을 때, 다시 그 해의 봄에 느꼈던 아려오는 행복함을 다시 이 겨울에 느꼈을 때 숨죽여 울었다. 그렇게 숨죽여 울었다. 나는 나의 끝을 너무나 빨리 맞이한 것이다. 이상함을 느낀 자의 댓가라면 댓가일 것이다.
그 댓가조차 너무나도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나는 2주 전에 깨달았다.
나는 아직 젊다. 나에게 남겨진 시간은 그녀에게 남겨진 시간만큼이나 길고, 그녀가 행복했던 것 만큼이나 나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했다. 수소문한 끝에 알아낸 그녀는 이미 그녀가 사랑한 그 여자와 결혼했다. 아이를 입양해 잘 살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미소지으며. 그녀를 먼저 떠나보낸 건 나였다.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이라며 버린 건 나였다. 그 친구로써의 위치를 깰 것이 무서워 떠난 사람이 바로 나란 사람이였다. 결국 나에겐 청첩장 하나 오지 않았고, 친구의 자리는 사라졌다. 나는 외로히 늙어갈 운명이였다.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로.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이를 두 명 입양했다. 한명은 남자아이고, 한명은 여자아이다. 태어난 날짜는 여자아이 쪽이 빠르지만, 나이는 둘이 같다. 이상한 일이지만, 남녀간의 사랑이 파행으로 치닫기 일쑤인 이 세상에서도 버려지는 아이들은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거두었다. 내가 해주지 못한 사랑 만큼이나, 나는 아이들을 사랑할 것이다. 내가 주지 못한 애정을 부정으로 쏟을 것이다. 인정받지 못하고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은 낮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사과했고, 건강하고 사랑스럽게 자라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리고는 10일정도의 시간동안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바쁘게 여행을 다녔다. 상식이 있는 세상이라 이상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여성커플과 여성부부가 많은 세상에 우리는 좀 튀는 가족이였다.
그리고 내일, 나는 아버지에게 아이들을 데려갈 것이다.
입양할 것이란 언질은 했다. 아버지는 처음엔 화를 냈지만, 아이들의 어색하게 웃는 사진을 보고는 웃으셨다. 아내의 로맨스를 한발짝 물러서서 지켜보다가, 내가 세상을 알아챈 뒤로 이혼하신 아버지. 내가 독립한 뒤로는 쭉 혼자 사셨다. 종종 찾아뵈었지만, 외로움을 참기 힘들어 하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손자손녀를 보여드릴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 나를 아버지라 부르기 힘들어 하지만, 그래도 노력하려고 한다. 나의 아버지에게도 그럴 것이다.
"저기... 아저, 아버....지."
스키장에서 집으로 오는 자동차 안에서, 약간 피곤해 했던 아들이 골아떨어지자 딸이 멈칫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운전하며 말했다.
"당장 아버지라고 부를 필요는 없어요. 편한 대로 불러요."
"아, 저... 네.... 그래도 이제 아버지..인데."
"그래, 무슨 일이에요? 우리 딸."
나는 고마움을 느꼈다.
"고마워요. 저희...를, 거둬 줘서."
"고맙기는."
나는 운전을 계속했다. 두 명 다 뒷좌석에 타 있어서, 운전대를 잡은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더 고맙지요."
"....."
딸은 말이 없었다. 곧 두 명의 차분한 숨소리가 차 안을 조용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졸업사진을 보고 울었던 그날 밤처럼, 오늘 밤도 눈이 온다. 아마 내일 밤에도 눈이 올 것이다. 아버지도 눈 오는 날 이혼을 하셨고, 혼자 술을 드시며 눈물을 훔치셨다.
이 아이들은 이 세상에 넘기지 않을 것이다.
이 아이들이 사랑을 한다면, 그것은 백합꽃 위에 던져지는 것이 아닌, 스스로 어떤 꽃을 피워낸 결과일 것이다.
나는 아버지로써 이 아이들을 사랑했던 만큼이나, 아이들이 피워낸 꽃도 사랑할 것이다.
나는 그 꽃을 정말로 아름답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 아이들이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