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손이 떨리고 어머니가 밤 중에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귀는 거실 방향으로 항상 열려있다. 휴대폰으로 밤새 박 과장에게 전화를 연결했지만 한 통도 연결되지 않았다. 30통 정도 걸었을 때 전원이 꺼져있다는 말과 함께 그런 노력도 물거품이 되었다.
“경찰서에…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고 다음 날 회사에서 박 과장을 만나는 거야. 그렇게, 그렇게 하면 상황은 조금씩 나아질 거야.”
불안감에 빠져 잠들지 못하다, 제풀에 지쳐 잠이 들었을 때 비가 그쳤다. 앞 건물과 3뼘 정도의 벌려진 거리를 보여주는 작은 창문에서 벽에 부딪힌 빛들이 방의 내부로 쏟아져 나왔다. 말라비틀어진 도시에 3일 내내 쏟아 내리던 비는 먼지와 불순물들을 안고 증발해버리고 하늘색 하늘을 비췄다. 하얀 햇살이 떨어지니 도시의 지저분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침대 위에서 뒤척이던 그는 내리쬐는 빛에 눈이 부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아.”
자봐야 2시간은 지났을까,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울렁거리는 속에 또다시 두통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런 것에 흔들릴 시간이 없었다. 구역감을 애써 무시하고 아주 빠르게 샤워를 끝낸다. 주방으로 가 모아둔 물을 단번에 삼켜 메슥거리던 속을 억지로 잠재웠다.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살면서 이렇게나 통화를 자주 하게 될 날이 올 줄 몰랐다. 박 과장이 내게 휴대폰을 사라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박 과장은 무사하겠지? 무사할 거야, 그는 강한 남자니까. 경찰서에 들렀다가 회사로 돌아가면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를 보고 시원찮은 회사 얘기를 해주겠지. 나는 식탁에 앉아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충 둘러대고 급한 일이 생겼다 말하니 알아서 하란다. 눈치가 없는 부장이 도움될 때도 있고 별일이다. 나는 최대한 얕보이지 않게 정갈히 옷을 골라 입고 집에서 나왔다. 내리쬐는 볕이 따뜻하니 기분이 좋다. 맑은 공기가 심란한 정신상태와 맞물려 기분이 오묘하다.
거리가 묘하게 어수선하다. 버스도 다니지 않고 차들도 눈에 띄게 적어 보인다. 비가 오다 갑자기 그쳐서 흥이 식어버린 건가? 그 묘한 기류를 알아채지 못했다. 경찰서까지 20분 정도는 걸어야 한다. 그 안에 심란한 마음이 정리되길 바라며 간만에 마스크 없이 심호흡해본다.
전날 밤
엘리베이터에 정장을 입은 두 명과 흰 외투에 파란 셔츠를 입은 한 키 작은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탄다. 그의 목소리는 무언가로 변조된 듯 어색하다.
“전화는 잠시 끊지.”
박 과장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의 말에 따라 전화를 끊었다. 그는 1층의 버튼을 아주 길게 눌렀다. 곧 엘리베이터는 1층을 지나 표시도 되지 않는 지하로 향했다.
“누… 누구십니까?”
정장과 비싼 시계 선글라스 등으로 몸을 꾸몄지만 앳된 모습이 가려지지 않는 상대에게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존댓말 박 과장은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일단 같이 가시죠.”
지하 몇 층인지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백색 정장의 사내는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가고 두 정장의 사내는 박 과장에게 손짓했다. 거친듯하면서도 격식 있는 두 명이었다.
박 과장과 두 사내가 마저 나가고 엘리베이터는 곧바로 1층으로 올라갔다. 깜깜한 복도에 한 치 앞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주 천천히 앞으로 걷자 저 멀리서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불 좀 켜두라니까!!”
아까 하얀 정장의 사내가 스위치에 시계를 갖다 대자 곧 복도의 불이 팍하고 켜지니 먼지나 긁힘 하나 없는 새하얀 복도가 있었다. 복도는 위에 사원들이 사용하는 복도보다 폭이 3배는 넓어 보였고 천장의 높이도 널널해 공간이 탁 트인 느낌이었다.
“회사에 이런 곳이 있었나?”
저 앞에서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백발의 사내는 목에 변조기를 껐는지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나고 있다. 그는 멀리서 멀뚱히 서 있는 박 과장에게 소리쳤다.
“어이, 안 올 거야?!”
박 과장은 머쓱히 고개를 숙이고 그를 따라 넓은 방으로 들어갔다.
‘뭐 죽기야 하겠나. 죽일 거였으면, 진작에 죽였겠지.’
방에 문이 스르륵 하고 조용히 닫히고 복도의 불이 꺼졌다. 건물에 아무도 없다는 게 확인되자 건물 전체의 전기가 자동으로 차단되고 곧 어두워진다. 밤이 깊어지자 빗소리도 조금씩 약해진다.
방에 들어서자 하얗고 파란 전등이 넓은 방 전체를 메운다. 건물의 너비보다 훨씬 넓게 파여있는 지하는 사용처보다 과하게 넓어 보인다. 곳곳에 노트북들이 널브러져 있고, 벽에는 조금은 낡아 보이는 컴퓨터들이 설치되어있다. 가운데에 큰 흰색 테이블에 정장의 사내가 거만하게 앉아있다.
“박 과장님, 자리에 앉으시죠.’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상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외투에서 팔을 빼니 옆의 사람들이 옷을 받아내어 곱게 펴 접는다. 뒤에서 두 덩치 큰 남자들이 호위하는 형태나 말투를 보니 예사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어떻게 제 직급을…?”
박 과장은 긴 시간 동안 그와 앉아 얘기를 나눴다. 강압적인 분위기는 곧 사라졌지만, 대화의 내용은 심각한 것들뿐이었다.
경찰서로 향하는 길에 점점 사람들이 늘어난다. 자세히는 들리지 않지만, 사람들이 어떤 사건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 같다. 나는 묘한 감정에 걸음을 빠르게 했다. 경찰서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 같다. 그곳엔 사건 현장으로 다른 지역에서 온 경찰들이 사람들을 막아서고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옮겨지는 경찰들의 시체 2구와 피범벅이 된 건물의 내부가 쇠사슬과 테이프들 사이로 훤히 보인다.
우연인가? 정말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우연이라 생각해야 되나? 어제 나랑 전화한 경찰관은 여기서 죽었으려나? 전화로 나를 무시한게 여기까지 나를 끌어내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나는 바로 앞에 사람의 등을 툭툭 찔러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적당한 키에 수염을 기른 남자는 내 짧은 질문에 아주 장황하게 대답을 해주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경찰서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이 문이 깨진 경찰서를 발견했다나 봐요, 안에는 보시는 대로 피가 범벅이 돼 있었고요, 다른 곳에서 순찰 중이거나 근방의 경찰서에서도 연락을 받지 못했나 봐요. 갑작스러운 지역 이동이 있었다나? 혹시 그쪽 기자는 아니죠?”
“그건 왜요?”
그 남자는 목소리를 죽이고 소곤거리며 말했다.
“여기 아까 다른 기자들 전부 쫓겨났거든요. 저는 몰래 내용을 작성해 회사로 가져가려고요, 사진도 찍어놨어요.”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사건 현장에서 튀지 못해 안달이 났구나. 뭐 그런 사람도 있는 거지. 나는 현장에서 조금 떨어져 박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연결되지 않는다. 박 과장의 상태와 어머니의 실종, 경찰서의 난리가 모두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점차 불안감이 확신이 되어 몸을 떠밀었다. 나는 집으로 향해 달렸다. 박 과장이 걱정되었지만, 전화를 못 받을 상황에 처한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로 가야 해.”
일단 사무실에 박 과장이 있는지부터 차근차근 짚어가야 한다. 나는 지금 옷차림 그대로 외투만 입고 다시 집에서 나왔다. 일하러 가는 게 아니니 가방은 메고 갈 필요가 없었다.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거리의 반인들과 기계들을 헤치며 회사로 향했다.
나는 부장과 사무실의 동료들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옆의 사무실로 향했다.
“아 박 과장님. 오늘 급하게 현장으로 자리를 옮기셨어요. 짐도 누군가 우르르 와서 빼서 가져갔고요.”
“뭐라고요?”
아까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이라 생각했다고는 했지만, 막상 현실과 맞닥뜨리니 심하게 흔들리는 기분이다. 불안함을 넘어 무섭기까지 했다.
“그래서 어디로… 어느 부서로 갔죠?”
“글쎄요… 현장이라고만 했는데… 생산부서에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거 같네요.”
나는 온갖 계열사 건물들을 돌아다니고 나서 모르겠다, 관련 사원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다. 라는 답변만 듣고 대로로 나와야 했다. C 외곽을 모조리 돌고 나서 결국 돌아온 곳은 회사 앞이다. 나는 택시 정류장 앞의 벤치에 털썩 앉아 굳은 종아리를 주물렀다. 앞에 멈춘 무인 택시의 창문이 열리고 어색한 기계음이 들린다.
“탑승하시겠습니까?”
어딘가에는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소프트웨어가 있다고 들었는데 외진 곳이라 아직 구형 음성이 쓰이고 있다. 역겨운 고철 덩어리들
“저리 꺼져.”
나는 퉁명스럽게 택시를 쏘아댔다. 그러자 천천히 창문이 올라간다.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건든다.
“뭐야, 씨발…”
외부에서 자극이 느껴지자 신경질이 확 올라왔다. 온종일 쏘다니고 박 과장의 신변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찾지 못했으니 짜증이야 날 법하다. 뒤를 돌아보니 얼굴이 철에 집어삼켜 진 듯한 로봇들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아이고, 왜 이리 성이 나셨을까. 낄낄낄”
딱 봐도 불량스러워 보이는 그의 뒤에는 동료인지 비슷하게 생긴 고물이 대동하고 있다. 뭐지? 경찰서가 습격당했다고 이렇게 빠르게 꼴통들이 튀어나오는 건가?
“뭐 알려드릴 게 있어서 그런데. 일단 앉아보지?”
“너희한테 들을 말 없어 저리 꺼져!!”
나는 어깨에 올려진 손을 뿌리치고 거리를 벌렸다.
“이런 염병할, 어린 노무 새끼가…”
내게 뿌리쳐진 불량배는 기분이 상했는지 자신의 손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나는 그런 모습에 머리가 부글거리며 끓었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뒤의 동료는 화가 난 그의 팔을 잡아 말렸다.
“형님 그냥 다른 곳으로 갑시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에 회사 건물의 불이 탁! 하고 꺼지며 가로등이 켜졌다. 회사의 건물이 꺼지자 저 멀리 유흥거리의 네온사인 불빛이 더 눈에 띄게 빛난다. 그나저나 이 시간까지 회사에 사람이 남아있었나? 불량배들은 밤길 조심하라며 이런저런 이상한 얘기를 하더니 어두운 길목으로 사라졌다.
-지잉
회사의 1층 문이 아주 느리게 열리며 부장이 걸어 나왔다. 오늘따라 이상한 일이 많이 생기는군.
“자네 아직도 노이드들에게 쌀쌀맞구먼.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하하.”
하… 현기증이 난다.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손가락으로 두피를 강하게 눌러 지압했다.
“2층에서 단박에 이 대리인 걸 알아봤지. 후딱 나와서 도와주려 했더니 늦어버렸네?”
저놈도 같은 부류다. 회로에 따라 나를 이해하는 척 하는 거겠지. 나노봇을 이식받은 ‘인간’은 없다. 인간이길 포기하고 되는 대로 살려고 나노봇을 받아낸 반인들만 있는 거지.
“부장님 오늘은…”
대충 떼어내고 집으로 돌아가야지.
“저번에도 그렇게 도망치지 않았나? 오늘은 밥 한 끼 하지. 몰골을 보아하니 또 끼니란 끼니는 죄다 거르고 쫄쫄 굶은 거 같구만.”
돌아서고 가려니 아비의 말이 떠오른다. 나 오늘 뭘 먹었던가? 물도 한 잔도 못마신거 같네. 그렇지만 부장이랑 사적으로 엮이기는 정말 싫은데…
“그러지 않아도 몇 명 월차로 빠져서, 이 시간 까지 남아서 일하는데, 이 정도도 못 해주나 이 대리?”
부장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살의 질감이 거친 것이 매우 불쾌하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끌고 걸었다. 어두운 상업지구를 벗어나니 밝은 싸구려 홀로그렘들 흉측이 일그러진 모습의 괴물들도 보인다.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지만 근처로 지나갈 때마다 이상한 냄새와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려 구별할 수 있다. 50년 전쯤 지구로 불시착해 눌러앉은 시민 취급을 받지 못하는 외계인들… 그들은 곧 지구의 환경에 적응해 저렇게 숨어다니고 있다. 이런 풍경만으로도 이 외곽지역이 얼마나 안쓰러운 곳인지 알 수 있다.
길을 걸으니 화려한 옷들을 입은 반인들, 로봇들이 허리를 숙여 가슴을 내보이며 내게 전단지를 건넨다. 그들이 움직이자 건물 밖의 홀로그렘 이미지도 똑같이 움직인다. 부장은 자주 가던 술집과 식당들을 건너뛰고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나를 끌고 갔다.
“저는 오늘 술은…”
“아 알고 있어. 요즘 몸 상태가 안좋았잖아?”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고급 음식점. 거무틔틔한 잿빛이 아닌 푸른 빛을 띠는 검은색 벽지에 대리석 재질의 기둥이 건물을 받치고 있다.
“그래도 억지로 끌고 왔으니 이 정도는 돼야겠지?”
소문은 들어본 적이 있다. 억세게 예쁜 도우미나 갓 시술받은 인간에 가까운 도우미도 없고 그저 정갈히 음식만 제공하는 억세게 비싼 음식점이 유흥가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얘기. 잘빠진 정장에 비싼 자차를 끌고 다니는 재벌들이나 드나드는 곳이라던데… 더 디테일한 소문에 따르면 이런 식당의 음식은 예전 미각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들의 맛을 그대로 구현해 낸다고 한다. 어차피 맛도 구별 못 할 부장이 뭣 하러 이런 곳에?
“이런 곳은 너무 부담… 스러운데.”
건물에 들어서니 적당히 밝은 주황빛 전등과 오리엔탈 장식들이 내 눈에 가득 찬다. 건물 내부에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지나다니고 있다. 취한 여성들도,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중년 남성들도 테이블에 앉아있다. 화려한 색감에 눈이 데일 것 같군.
“식사하시겠습니까?”
“2명 부탁하죠.”
부장은 긴 복도를 지나 내부로 들어서 주방에 바로 붙어있는 일자형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도 설명도 없이 조금 앉아서 기다리자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주방의 내부는 구석구석 깔끔하고 흠잡을 곳이 없어 보인다.
“이 대리. 요즘 힘들어 보이는군.”
그는 유리잔에 따라진 물을 홀짝 마시며 가방에서 파일을 하나 꺼냈다.
“박 과장이 부서를 옮겼다고 얘기를 들었어. 열심히 과장을 찾으러 다녔다면서?”
“…….”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전화와 경찰서의 풍경을 곱씹었다. 이 부장은 왜 갑자기 내게 질척 거리는 거지? 하는 부정적인 감정만 있을 뿐 그의 얘기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회사에 있을 때는 반인일지라도 상관이니 그러려니 참을 만 했는데… 사적인 장소로 나오니 그 존재가 불쾌하긴 마찬가지군.
“박 과장, 자네와 같이 다녔던 공장으로 갔다던데 말이야. 이 대리 거기 안 가봤지?”
“뭐라고요?”
아무도 알려주지 못했던 정보가 그의 입에서 나오자 그제야 정신이 그에게 집중됐다.
“그래도 중간중간 나와 같이 있어 주던 친구인데… 갑자기 사라져서 말이야. 짐을 옮기던 직원들에게 꼬치꼬치 캐물으니 알려주더군. 자세한 건 못 들었지만 말이야.”
부장은 파일을 손으로 슥 밀어 내게 건넨다. 나는 파일을 열어 내부의 문서를 펄럭이며 무작위로 정보를 훑었다. 내가 왜 그 공장에는 안 간 거지?
“회사에 이 대리 자네가 입사할 때 사장님께 얘기를 들었어. 면접에서 특이한 녀석이 있었다고 말이야.”
부장이 과거를 회상하는 말투로 친근하게 운을 띄웠다. 옆에선 준비된 음식이 하나 둘 씩 테이블에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벨트형으로 움직이는 테이블은 알맞은 위치에 멈춰 길쭉이 가슴 쪽으로 튀어나왔다.
“컴퓨터와 노이드 기술에 극도의 혐오감을 가진 엔지니어가 왔다는 재미난 소문을 들었지. 내가 옛날에 그 공장에 납품하고 문서를 정리하는 사원이었거든. 내가… 그 당시 과장이었나? 기억이 잘 안 나는군.”
“반인들은 기억력이 좋지 않습니까?”
내게 잘 보이려는 의도가 다분한 그의 거짓 회상에 반발심이 자연스레 입으로 튀어나왔다. 말하면서도 짜증이 난다. 의자에 앉으니 허기가 온몸에 휘몰아친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나. 이런 잡종 늙은이에게 얻어먹고 싶지 않은걸…
“하하하, 그래 맞아. 나는 당시 대리였어. 역시 자네는 감이 좋구만.”
음식이 입에 들어가고 부장은 도수가 강한 술을 시켜 잔에 따랐다. 직원은 술잔을 권유했지만, 부장은 굳이 물을 마시던 컵을 비우고 그곳에 술을 따랐다.
“회사에서 자네를 주시하라는 얘기를 했어. 난 대리가 사원으로 들어올 때 몸에 무엇 하나 섞이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도 들었지. 사장실에서 부하 직원의 설명을 듣는 기분은 참 오묘하더군.”
“사장이 저에 관해서 얘기를 했다고요?”
처음 듣는 얘기다. 공장에서 새로이 회사를 옮길 때 면접을 보긴 했지만, 그때의 나는 많이 날카로웠지. 당연히 이직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한 부서에 임명되더니 컴퓨터를 배워야 했지. 그런데 이런 일에 회사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니?
“그래 나는 무슨 특별한 존재인 줄 알았어. 뭔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과거 보험에 나노봇 시술이 적용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두려워했지. 나노봇들에 자아를 빼앗기는 게 아닐까? 인간의 창의력이나 상상력 같은 고유의 능력들을 잃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
그는 술이 쓴지 달달한 반찬을 집었다.
“그리고 시술이 보편화하고, 나도 시술을 받게 되고… 이제는 적응도 끝나서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몸이 됐지. 그리고 자네가 온 거야 이 대리. 모두 내색하진 않지만, 자네를 주시하고 있었어. 사장이 주시하라는 인간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하고 말일세.”
비행기를 태우며 나를 놀리는 건가?
“하지만 자네는 열등했지. 남들이 하는 업무를 따라가지 못하고, 컴퓨터도 잘 다루지 못했고 말이야.”
“흠.”
속으로 음식이 들어오니 기력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부장의 대화가 조금씩 들리는거 같다. 더 화낼 정신력이 남아있지 않은지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렸다.
“말이 길었구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었을 뿐이야.”
“뭡니까?”
“자네에게 나는 어떻게 보이는지…”
부장은 포크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은 채로 발을 굴려 몸을 빙 돌렸다. 그의 위측 귀 아래가 보인다. 검은 색 혈관과 귀 뒤쪽 아래에 파고들어 있는 기계장치, 무언가를 끼워 넣는 홈이 보인다.
“여기 보이는가? 여러 가지 능력을 개방할 수 있는 확장장치의 홈이야.”
나는 시선을 음식으로 고정한 채 말했다.
“보고 싶지 않군요. 애써 먹은 비싼 음식을 게워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부장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 젓가락을 집었다.
“내가 박 과장에 관한 얘기를 한 거. 사장이나 윗선이 알면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나는 이렇게 이 대리를 도왔지. 이게 무슨 소린지 아나?”
“지금 제게 생색이라도 내려는 겁니까?”
“아니, 나는 내 의지로 이 일을 한 거야. 금방 회사 앞에서 자네에게 시비를 건 녀석들. 자네를 쫓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리려고 했어. 자네가 의자에 앉을 때 누군가가 몸을 골목에 숨기는 걸 그들이 봤거든. 뭐 아닐 수도 있지만.”
“의지…?”
나는 직원을 손짓으로 불러 오렌지 주스를 한 잔 부탁했다. 메뉴판은 없지만 이런 곳이라면 그런 주스까지 구비되어 있을 거라 예상하고.
“나도 가끔 시술을 받기 전 어머니의 음식이 그리워. 자네 같은 인간들이 반인이라 부르는 우리도 여전히 인간이란 말이지.”
“살아있는 세포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고, 죽을 날을 자기 손으로 정하는 무언가가 여전히 인간이라는 말입니까?”
부장은 조용히 직원이 따르는 술을 마셨다. 기분 탓인지 직원이 째려보는 느낌이 드는 데 착각이겠지?
“저는 회사에 있는 직원들과 통역기 없어 대화하려고 중국어를 배웠어요. 능숙하게 구사하는데 3년 가까이 걸렸죠. 텍스트를 정리하는 데 필요한 프로그램을 배우는 데는 6달을 꼬박 잠도 자지 못했고요.”
“그게 대리는 억울한가?”
“아뇨, 안심됩니다. 그래서 아직 살아있다는 게 실감이 되거든요.”
“하하. 나는 멀쩡히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데 자네에게는 사체일 뿐이구먼.”
오렌지 주스가 나오고 내 옆으로 옮겨와 멈췄다. 부장은 자신이 마시던 황금색 술이 담긴 물잔을 내 앞에 툭 내려놓더니 말했다.
“이건 물잔이지. 들은 건 술이고. 물잔에 들었다고 술이 물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이런 궤변으로 날 가르치려 들다니 조금이지만 술에 취해 풀린 그의 얼굴이 가증스럽다. 나는 손에 쥔 유리잔을 들어 그의 물잔에 주스를 부어 채웠다.
“음.”
부장은 얼굴을 조금 찡그리더니 이내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제 이건 술이 아닙니다. 비싼 술의 풍미도 달콤한 주스의 상쾌함도 잃어버린… 정체성을 잃은 괴짜 액체일 뿐이죠. 아까 제가 부장님을 죽은 사람 취급한다고 했죠? 아니죠. 저는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상실과 죽음은 다른 개념이니까.”
나와 부장을 담당하던 직원이 내 행동을 지긋이 보더니 옅게 웃으며 내 비어버린 잔에 음료를 다시 따라주었다. 직원은 고개를 살짝 숙여 나와 부장이 들리도록 덧붙였다.
“과거에는 음료수에 술을 섞어 마시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술이 비싸지 않을 때는 말이죠. 술에 과일을 풀어서 진한 과일주를 마시기도 했고요. 그 술들은 일반적인 술보다 더 즐겁고 밝은 이미지의 술로 취급됐었습니다. 괴짜 액체가 아니라 칵테일이라고 불리는 종류였는데…”
나는 포크를 세로로 고기에 꽂고 주스를 반쯤 마셨다. 부장은 조금 즐거워 보인다. 고급식당의 점원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게 내심 기분이 좋은가보다. 나는 그대로 반쯤 남은 음료를 직원의 얼굴에 부어버렸다. 부장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술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껍데기만 인간인 주제에. 손님들 얘기에 마음대로 끼어들지 마.”
“흐하하!!, 회사에서 알고 지낸 시간 동안 변한 게 하나 없구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스요리는 중간 부분쯤 이었던 것 같지만. 더 그 역겨운 공간에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목이 근질근질해 기침이 나온다.
-쿨럭 쿨럭 콜록!
손에 피가 묻어나오지만 나는 주먹을 쥐어 그것을 숨기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어머니 얘기는 박 과장에게 들었네. 예삿일이 아닌 거 같은데.”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