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뒤,
쿠도 신이치는
오키나와를 가기 위해
하네다 국제공항을 찾았다.
2시간이 좀 넘는
비행시간은
서울에서
도쿄를 가는 것과 비슷했다.
지금이야
일본에 속했지만
오키나와는
약 130년 전까지만 해도
류큐라는 독립국이었다.
오사카나 도쿄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국의 낭만이랄까?
‘ 그게 다 개소리지.’
누가 오키나와행 아니랄까봐
비행기엔
오키나와를 소개하는 안내책자가 비치됐다.
심심해서 안내책자를 들춰보던
신이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내용만 보면
무슨 환상의 섬 같이 묘사했는데
그의 기억에 남은 오키나와는
딱 세 가지뿐이다.
‘ 양키, 양키, 양키.’
양키로 시작해서 양키로 끝났다.
뭐 볼게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부푼 기대로 찾았다간
실망하기 딱 좋다.
관광명소로 소문난 곳이
다 그렇지만
상당히
과장되고 와전된 풍문이 많았다.
특히
전문사진작가를 고용해 촬영한 풍광은
실제로 보면
사기! 란 말이 목구멍으로 치솟기도 했다.
제주도나 오키나와나
그다지 다를 게 없다.
“ 오키나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공항에서
쿠도 신이치를 마중한 사람은
하루 먼저 출발한
이오리 무가와
오오카 모미지, 스즈키 소노코 였다.
그동안
그들 모두가
사무적인 딱딱함으로 중무장한 커리어라면
지금은
딱 10대와 청년층의 발랄함과 신중함이 엿보였다.
“ 어제 하루 잘 놀았나보네요?”
“ 네.
효율적인 업무를 위해서라도
휴가는
꼭 필요하단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오리 무가가
다른 두 사람을 대표해서 대답했다.
확실히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일본인의 업무강도는 지나친 편이다.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하는 건
익히 알려진 통념이니
휴가를 즐기는 것도 훌륭한 업무능력인 셈이었다.
“ 호텔로 모실까요?”
“ 아니요.
어제 하루 자아알 노신 여러분들의 가이드를 기대합니다.”
“ 그럼 식사부터 하시죠.”
다른 두 사람과는 틀리게
이오리 무가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안내한 곳은
오키나와 소바를 파는 가게였다.
오카나와 현지인들의 소바사랑은 각별했는데
특이하게
메밀이 아닌 100% 밀가루를 사용했다.
일본 하면
스시나 우동, 라멘을 떠올리겠지만
오키나와 요리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리 잡은 미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 분위기는 어떤가요?”
“ 스즈키 그룹 쪽은
총회장님 직속의 태스크포스를 꾸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모미지 콘체른 쪽도
스즈키 그룹 쪽에서
도움을 주시기로 하셨고 말입니다."
쿠도 신이치의 질문은
두루뭉술했지만
이오리 무가와
다른 두 사람은 대번에 알아들었다.
“ 세무조사가 임박한 걸로 아는데...
문제는 없겠습니까?”
“ 삼십대 재벌 모두를
동시에 조사하는 건
우리나라 국세청의 역량으론 어렵습니다.
아마도.......
형식적인 절차가 아닐까싶습니다.”
“ 그렇다고
방심하면 곤란합니다.”
“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즈키 지로 회장님께서
직접 챙기고 계시니까요.”
촛불시국을 진정시키기 위해선
결국
누군가는 처벌받아야 했고
30대 재벌은
눈치껏
저마다의 희생양을 각출할 것이다.
당하는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받아먹은 게 있으니
무죄를 주장하기도 어려웠다.
‘ 스즈키 그룹이나
모미지 콘체른이라고 다를 건 없어.’
집단을 위한다는 핑계로
개인을 희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잘못은
부정을 저지른 자에게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게 진실일까?
영악한 자는
부정을 적발했다고
무조건 신고하지 않는다.
이걸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써먹을까 저울질했다.
일단 빠져나갈 수 없는 약점을 잡았으니
필요한 순간
희생양 삼아
사건의 본질을 교묘하게 비트는 것이다.
“ 이오리 무가 씨는
재벌개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 제가 함부로 입을 놀릴 사안은 아니네요.”
스즈키 그룹과 모미지 콘체른은
그래도
재떨이를 던지거나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사장은 없는 걸로 알려졌다.
그러나
어느 조직이든
규모가 크면 클수록
정신병자도 많다.
사실
재벌이 저질렀다고 소문난 막장과 기행 중
절반은
오너일가와는 상관없는 임원이나
그들의 가족이 벌인 짓이었다.
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린 것이다.
‘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한 것도
죄라면 죄겠지.’
상식을 따른다면
잘못을 저지른 부하를 당장 내쫓거나
고발해야겠지만
재벌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룹의 역량을 동원해
감출 수 있다면 감추고
묻을 수 있으면 묻어버렸다.
왜?
부정한 자일수록
자신의 운명과
집단의 운명을 더욱 합치시키기 때문이다.
그건
이를테면
어긋난 충성심이었다.
‘ 그룹은 왕국이고 오너는 왕이다.’
내 잘못을 감싸 안은
왕의 자비로움을 찬양하오니
왕국을 위해 못 할 일이 없었다.
설사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불의한 일일지라도,
우리 몸은
분명 21세기를 살지만
정신은
아직
중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왕과 노예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충신을 내칠 군주는 드물어.’
그들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가업을 일으켜 일가를 이룬 기업가는
스스로
대단한 선구자란 자부심이 강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만 해도
자신이
일본 경제를 지탱했던 대들보란 신념을 가졌으니까.
‘ 그 신념 자체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선민의식과 똑같지.’
신이치의 말을 듣는다면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부정하리라.
간단한 식사를 끝낸 넷은
가게를 나왔다.
관광으로 먹고 사는
명소답게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넘쳐났다.
“ 여기는... 국제거리입니다.”
이오리 무가가
완벽한 집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본인답지 않게
말을 더듬는 걸 보니
잠깐
생각이 안 났나보다.
제국패망 이후
일본은 미국이 관리했는데
특히
오키나와는
주일미군전력의 대부분이 몰린 요충지다.
당연히
국제거리는
어느 지역보다 빨리 재건됐다.
오키나와의 명동?
아니면
압구정동이나 청담동?
뭐라고 부르던
오모로마치 쇼핑타운과 함께
나하에서 가장 발달한 곳임에는 틀림없다.
쿠도 신이치가 선택한 곳은
노천카페다.
오키나와가
확실히 일본과 다른 점이 이것이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일본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대로변에
테이블을 내놓는 짓은 못했다.
유럽과 달리
일본의 노천카페는
대부분
부지까지 사들인 경우가 많다.
당국에서
노천카페거리를 따로 만들어주지 한
편법점거 같은
혼자 튀는 짓은
일본인의 정서상 용납이 안 된다.
“ 저는 아이스커피,
소노코와 모미지 둘도 커피일 것 같고
이오리 무가 씨는요?”
“ 저는 맥주로 하겠습니다.”
일단은
출장 중이고
아직 해가 떠있으니
업무시간이 끝나지 않았다.
신이치와
다른 두 사람은 그렇다 치고
이오리 무가가
당당히 맥주를 선택하자
쿠도 신이치는
작게 웃었다.
“ 오키나와가 마음에 들었나보군요?”
“ 외국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대마도와 달리
눈치 볼 사람도 없고 좋죠.
이 맛에
출장 다니는 거 아닌가요?”
“ 하하.”
요령껏 뺀질거리겠단
당찬 포부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주문한 음료와 술이 벌써 나왔나?
갑자기 드리워진 그림자에
이오리 무가는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상냥한 미소를 짓던 종업원이 아닌
털북숭이 한 마리가 서 있었다.
“ 왔나?”
움찔하는 이오리 무가와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신이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다.
털북숭이는
상대방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 맥주 한 잔
추가주문하세요.
맥시멈사이즈로.”
“ 네, 네.”
신이치의 말에
놀란 토끼눈이 된 이오리 무가와
바캉스 차림의
오오카 모미지와 스즈키 소노코를 곁눈질하던 털북숭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 잤냐?”
“ 개소리.”
“ 안 잤으면 소개 좀.”
거듭되는 멍멍이소리에
신이치는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오키나와라..비극의 역사가 보입니다.
일본인들은 잘 모르는 진짜 비극의 역사의 현장이지요. 2차 세계대전 전사에서는 이오지마는 잘 알아도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비극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오키나와는 말 그대로 미국령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입니다. 섬의 반이 미군기지이니.......
독립도 자주도 너무 어렵다고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일본도 독립이나 자주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미국도 동아시아 핵심 기지인 오키나와를 포기하지 못할테니......
대만을 보니 더 세게 갈 기분입니다.
고르고 13의 에피소드 중 하나로 오키나와 독립계획이 나오는데 진짜로 아시아에서 오키나와를 공격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미국의 아시아 전력 자체가 오키나와에 모여있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미국의 전군이 30일 정도 쓸 수 있는 전쟁물자와 탄약, 무기 수리부품같은 군수물자와 핵잠수함 기지에 전투기, 조기경보기까지...... 진짜 일본의 전 자위대를 상대할 정도급의 전력이 오키나와에 존재한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오키나와는 더욱 더 중요한 곳이 될 겁니다. 중국이 탐을 내면 미국도 태평양함대 전체를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오키나와를 지키려고 할 테니까 말입니다.
말뚝을 박았군요.
필리핀을 포기한 이상 오키나와 말고는 미국의 아시아 군사전력을 보존할 수 있는 기지는 한국 말고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한국은 육군 전력이고 오키나와는 해군과 해병대 전력이라고나 할까요?
반도와 섬의 차이군요.
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