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를 벗은 남자는 앞머리가 벗겨진 길쭉한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했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뾰쪽한 턱에는 색 바랜 염소 수염이 붙어 있었다. 가슴에는 금속으로 만든 오각형 고리를 걸고 있었는데 각 꼭짓점에 연결된 가는 사슬이 어깨와 허리에 걸쳐있었다. 게르두는 남자를 쓰윽 보고 고개를 돌리며 무심한 듯이 말했다.
“경매가 시작되면 그보다 더 나갈 거요.”
“2만 펜트. 제아무리 입찰이 치열해도 이 가격은 절대로 안 나올 겁니다.”
염소수염이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테루와 보글러는 안그래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맏형을 돌아봤다. 게르두는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노인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뗐다.
“실례지만 존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알리스터 크리올리. 애드리건 가문의 대고문입니다.”
테루와 보글러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마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드리건…. 대모님에게 들은 적이 있어. 테세이아 남쪽 사막지대를 영지로 둔 가문. 지금은 작은 공국에 불과하지만 오슬론 제국 시기에는 건국에 기여한 공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지. 그런 곳에서 고작 가발이나 만들자고 이렇게 큰돈을 쓸리가 없는데….’ 게르두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경매를 등록할 차례가 되었다.
“형님, 어쩔 거요.”
‘가발 말고도 이 계집이 다른 쓸모가 있다면? 그렇다면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 아닌가!’ 게르두는 아자니를 데리고 줄 옆으로 나왔다.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하시지요.”
“나도 이 거래를 같이 하고 싶소만.”
“당신은?”
놀란 알리스터 앞에 긴 머리를 뒤로 올려 묶은 남자와 함께 나타난 카스노아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유, 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보아하니 아직 시작하지 않았나 보우.”
뒤렉이 까치발을 하고 광장 끝에 경매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애런은 두리번거리며 녹색 머리가 눈에 들어오길 바랐다. 눈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어둡고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손에 사슬을 걸고 맥없이 걸어가는 여자의 얼굴에 아자니가 겹쳐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노예로 만들지 않을 거야.’
“일단 흩어져서 찾아보죠. 저는 경매대 쪽을 볼 테니 뒤렉씨는 광장 왼쪽을, 나즈는 오른쪽을 봐주세요. 아자니와 와스프의 인상착의는 말씀드렸고 어쩌면 아자니는 얼굴이나 머리칼을 가렸을 수도 있어요.”
나자리아가 가죽 주머니에서 늑대 머리 모양의 나무 호각과 구멍을 낸 작은 도토리를 꺼내 애런과 뒤렉에게 나눠주었다.
“이건 우리 마을에서만 쓰는 호각이에요. 그냥 불면 바람만 나오지만 이걸 귀에 끼운 사람은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멀리서도 들을 수 있으니까 와스프를 찾으면 길게 한 번, 아자.., 그 여자를 찾으면 짧게 두 번 신호하세요.”
애런과 뒤렉이 고개를 끄덕이고 도토리를 한 쪽 귀에 끼었다.
“넬! 덕분에 늦지 않게 올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마라님의 가호가 함께 하길.”
애런은 넬의 어깨를 다독이고 경매대 쪽으로 갔다. 다른 두 사람도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각자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넬은 그 자리에서 애런 일행이 간 방향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느닷없이 앞에서 가면을 쓴 여자가 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며 들이닥쳤다. 피할 겨를도 없이 여자는 한 걸음에 넬의 어깨를 밟고 뛰어넘었다.
“거기 서라!”
곧바로 남루한 옷을 입은 남자가 몸을 날려 넬의 키를 넘으며 검을 휘둘렀다. 가면을 쓴 여자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채찍을 뿌려 검을 쳐냈다. 광장으로 뛰어든 두 사람은 곧바로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놀란 양떼처럼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우르르 흩어졌다가 두 사람 주위를 에워싸고 싸움을 지켜봤다.
“싸움이 일어났군요.”
라스테온이 흥미로운 듯 광장을 내려다봤다.
“종종 있는 일입니다. 노예 경매장에서 싸움은 금지하고 있으니 경비대가 곧 해결할 겁니다. 음? 저건…?”
훈련 일정을 설명하던 크레이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하다 광장에 가면을 쓴 여자를 보고 놀란 얼굴로 라스테온을 보았다. 대공은 가는 눈으로 두 사람의 싸움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번쩍이는 검광들이 여자를 향해 빠르게 파고들었지만 채찍이 그리는 매끄러운 곡선에 닿을 때마다 사라졌다. 마치 검은 뱀이 허공을 날며 빛을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뜻밖에 좋은 구경거리가 벌어졌어. 칼날이 보이지도 않는 공격을 거미는 막기에 급급한걸? 소문에는 한 번 손을 떨치는 것만으로도 사람 머리가 밤송이처럼 떨어진다던데 다 거짓이었나? 자네가 볼 때는 어떤가?”
회랑에서 싸움을 지켜보는 카스노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머리를 묶은 남자는 거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고 있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전부 매서운 공격이야. 그것도 예측하기 힘든 곳만 노리고 있어. 하지만 상대의 공격이 더 빨라서 방어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야.’
“저렇게 채찍을 살아있는 것처럼 쓰는 것은 처음 봅니다. 결코 제가 쉽게 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폭풍 군주를 죽인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거미가 대단한 건 맞나 보군. 가만, 그럼 저 거지같은 남자가 자네 정도 실력이란 말인가?”
남자는 대답 없이 두 사람의 싸움을 주시했다. ‘이자가 폭풍 군주를 죽였다고?’ 카스노아의 말에 깜짝 놀란 게르두는 감히 남자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곁눈으로 살펴봤다.
서른 중반의 얼굴에는 콧등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고 허리에 찬 대도는 칼등이 미려하게 굽었는데 길이가 2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스승님이 남다른 무기를 쓰는 자는 실력을 미리 가늠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하신 말씀인가.’
“거미가 쉽지 않은 상대를 만났구나.”
카스노아는 미소를 머금고 계속 거미를 바라봤다. 테루와 보글러까지 넋을 잃고 싸움을 구경하고 있자 아자니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들 정신이 팔려 있는 지금이 기회야.’ 뛸 수 있는 방향은 걸어온 광장 끝 쪽과 광장을 나가는 입구 쪽뿐이었다. 어느 쪽이든 광장으로 사람들이 몰려서 뛰기에 좋아 보였다. ‘있는 힘을 다해도 발 빠른 테루에게 금방 붙잡힐 거야. 어쩐다….’
“와아-.”
광장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내는 소리에 아자니도 광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미를 향해 공격을 퍼붓는 남자는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며 사자처럼 맹렬하게 몰아쳤다. 그가 검을 쓸 때마다 밝은 빛이 무리 지어 흩날렸다.
“저 남자는 누구일까요? 차림새는 거지 같은데 쓰는 검은 이곳 경비대의 것 같군요. 혹시 단장님이 아는 자인가요?”
라스테온의 말에 크레이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검은 아무래도 경비대의 것을 탈취했나 봅니다. 그것보다 검의 궤적을 쫓기도 어려운데 그런 것까지 알아보시는 대공의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저 두 사람 모두 자기 실력을 다하는 것 같지는 않군요.”
경매대 가까이에 있던 애런은 뒤에서 어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에게 등을 떠밀렸다. 중심을 잡고 몸을 돌려 보니 빽빽하게 선 사람들 너머로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화려하게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일 때마다 검은 머리칼이 물결치듯 흩날렸다.
‘리케?’ 애런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싸움이 벌어지는 곳을 향해 갔다.
‘다들 싸움 구경에 정신이 팔렸군, 중요한 거래를 하다 말고 한심한 것들.’ 알리스터가 헛기침을 했다.
“재미난 구경거리긴 합니다만 당신이 여기 온 목적은 그게 아닐 텐데요. 하던 거래를 마저 끝냈으면 좋겠군요.”
“죄송합니다.”
게르두가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떼었다.
“아-, 십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싸움인데 정말 아깝다. 아까워.”
테루가 잔뜩 아쉬운 얼굴로 발을 떼며 앞에 선 여자의 등을 밀었다.
“가자.”
[연재] 엘더사가 - 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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