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에구치 히사시 트레이싱 논란 입장 발표
에구치 히사시입니다. 올해 10월 3일 저의 게시물에서 비롯된 SNS상의 일련의 혼란과 소동에 대해, 각처와의 조정이 길어지는 바람에 제 목소리로 직접 전달해 드리기까지 이렇게 시간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걱정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사건의 발단이 된 이번 가을 '루미네 오기쿠보 중앙선 문화제'의 포스터 제작 당시, 카나이 큐(金井球) 님이 인스타그램에 게시하신 본인의 옆모습 사진을 본인에 대한 배려 없이 무단으로 참고한 점에 대해서는, 포스터 발표 직후 본인의 지적이 루미네 측에 전달되어 즉시 DM으로 연락을 드려 사과하였고, 이후 변호사를 통해 쌍방 합의 하에 화해하였습니다.
이 일로 고초를 겪으신 카나이 큐 님, 루미네 및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이벤트를 기대해 주셨던 모든 분께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립니다. 또한, 이 일을 계기로 과거 작품들까지 논란이 번지며 피해를 드린 각 기업 담당자 및 관계자 여러분께도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번 일을 발단으로 일어난 소동은 트레이스, '트레파쿠' 문제로 확산되어 더욱 커졌습니다. 잡지 사진이나 인터넷 이미지를 참고하는 것, 혹은 트레이스라고 불리는 표현 기법 자체를 '악(惡)'으로 규정하는 목소리와 의견도 많았습니다.
여기서 트레이스에 대한 저의 생각을 조금 적어보고자 합니다. 트레이스는 그림을 그리는 정당한 단계 중 하나이며, '트레이스=도용 행위, 즉 악', '트레이스=전부 트레파쿠'라는 단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저의 경우, 트레이스는 밑그림의 가장 초기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잡지 사진이든 직접 찍은 사진이든 그림으로 옮길 때 우선 트레이스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타리(가이드라인)' 정도의 수준입니다. '아타리'란 종이 위 어느 위치에 그림이 올지 레이아웃이나 트리밍을 결정하는 작업이며, 트레이스라는 첫 번째 단계는 거기까지입니다.
그 아타리 위에 다시 밑그림을 몇 겹이고 겹쳐 나갑니다. 그것은 참고한 사진 속 인물의 구도, 윤곽 등을 수정하여 '자신의 그림'으로 변환해 가는 작업입니다. 사진 위에 얇은 종이를 올려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베껴 그리는 것을 트레이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그림을 그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그렇게 해서는 결코 자신의 그림이 되지 않습니다.
에구치 히사시의 일러스트는 'PC의 트레이스 기능을 쓰면 누구나 그릴 수 있다', 'AI로 사진에서 선화를 추출해 색만 입힌 것뿐이다'라는 극단적인 의견도 있었습니다만, 저는 그런 툴을 일절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날로그 수작업이면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나, 저의 경우 밑그림부터 펜 터치까지 모두 아날로그 수작업입니다. 채색 작업에만 Photoshop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의 일러스트는 그리는 것이라기보다 만드는 것'이라고 평소 공언해 왔습니다만, 이 밑그림 단계는 바로 일러스트의 설계도를 만드는 작업과 같습니다. 밑그림이 완벽하게 완성되면, 펜 터치는 모든 작화 공정 중에서 제게 가장 즐거운 '그리는' 시간입니다. 선의 흐름이나 떨림, 예상치 못한 우연의 선은 그때그때의 저만이 낼 수 있는 것이며, 그 선이 있어야만 비로소 '에구치 히사시의 일러스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참고하여 그리는 것은 일러스트보다 만화를 많이 그리던 시절부터 해온 일로, 업계에서도 과거부터 현재까지 평범하게 행해져 왔다는 인식입니다. 물론 작품집이나 사진집으로 출판된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것은 당시에도 '아웃(금기)'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잡지의 사진은 정보이며 제가 직접 찍은 사진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자료'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인식은 갖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규범이나 가치관, 도덕관 등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법입니다. 이번 일의 최대 문제는 제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배려하지 못한 점입니다. 40년도 더 된 너그러웠던 시절, 20대 무렵의 미숙했던 인식을 그대로 간직한 채 무의식적으로 변함없는 방식으로 제작을 계속해 왔습니다.
비전문가인 제가 법적인 이야기를 여기서 길게 하는 것은 피하고 싶습니다만, 이번에 전문 변호사와 상담한 결과, 예를 들어 포징이나 패션의 룩·스타일링을 참고하는 것만으로는 사진의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으며, 일러스트로 변환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해당 일러스트를 본 사람이 본인임을 특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초상권이나 퍼블리시티권 같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판단되는 것이기에, 권리 침해가 되는 트레이스도 있고 그렇지 않은 트레이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설령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참고한 사진에는 피사체인 분이 계시고,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의 모습이나 윤곽과 닮은 그림이 그려진다면 불안을 느끼거나 기분이 상하는 분도 계십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당연한 부분에도 충분한 배려를 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20년 남짓, 저는 일러스트 일을 너무 많이 해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긴 익숙함이나 태만함, 무엇을 바탕으로 그리든 '에구치 히사시의 그림'이 되면 그만이라는 오만함도 생겨났던 것일지 모릅니다. 그 부분은 크게 자계(自戒)하며 인식을 고쳐나가야만 합니다.
이번 일을 통해 다시금 스스로의 표현 수법을 되돌아보고 생각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주신 엄격한 의견도 진지하게 받아들여 교훈으로 삼고, 앞으로의 활동에 살려 나가고자 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림을 그려 나갈 것입니다. 아직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그림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해갈 것입니다.
여러분, 부디 좋은 새해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2025년 12월 30일 에구치 히사시
https://x.com/i/status/2005934416745341320
요약
1. 사건의 발단 및 사과
사건 경위: '루미네 오기쿠보' 포스터 제작 시 카나이 큐(金井球)의 인스타그램 사진을 무단 참고하여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조치 사항: 포스터 발표 직후 당사자에게 사과했으며, 현재는 변호사를 통해 원만히 합의를 마친 상태입니다.
사과 대상: 당사자인 카나이 큐, 루미네 관계자, 그리고 과거 작품 논란으로 피해를 본 기업 관계자와 팬들에게 사죄의 뜻을 전했습니다.
2. '트레이스' 기법에 대한 소신
표현 기법으로서의 트레이스: 트레이스를 '도용(악)'으로만 보는 시선에 반대하며, 이는 구도와 레이아웃을 잡는 '아타리(가이드라인)' 단계일 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작업 방식: 사진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밑그림 수정을 거쳐 자신의 화풍으로 변환하는 과정이며, 모든 작업은 AI나 자동 툴 없이 아날로그 수작업으로 진행됨을 강조했습니다.
3. 시대적 변화에 대한 자각과 반성
과거의 인식: 과거에는 잡지 사진 등을 '정보'나 '자료'로 인식하여 참고하는 것이 업계의 관행이었으나, 현재의 변화된 윤리 기준을 민감하게 파악하지 못했음을 인정했습니다.
법적/윤리적 책임: 법적으로 저작권 침해가 아닐지라도, 피사체가 느낄 불안과 불쾌감을 배려하지 못한 점을 반성했습니다.
태도 성찰: 오랜 활동 기간 동안 쌓인 익숙함과 오만함(나의 그림이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깊이 자계하고 인식을 고치겠다고 밝혔습니다.
4. 향후 다짐
이번 사건을 표현 수법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고, 엄격한 비판을 교훈 삼아 앞으로도 변화하며 그림을 계속 그려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