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날, 팔과 다리가 잘려나갔을 때도 느꼈던 것인데.
벌써 2년 전의 일이었다 – 안젤리아는 떠올렸다. 2061년, 그녀가 맞은 첫 번째 죽음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그녀가 ‘안젤리아’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건 그날 이후였다. 완벽한 함정, 철혈공조는 그녀와 제대원들 간의 통신을 끊었고, 그녀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잘라냈다. 죽이기엔 충분하다 여겼는지 그 이상 건드리진 않았지만, 그게 다행인지 아닌지 그녀 자신도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하여간, 그녀는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안전국의 그 남자, 그 질긴 인연 탓에 또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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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차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듯 스쳐 지나간 바람에, 안젤리아는 어깨에 걸친 웃옷을 한 차례 고쳐 여몄다. 절뚝 절뚝, 매일 같이 재활훈련 삼아 도심지를 거닐고 있었지만, 아직 의족은 통 익숙하지 않았다. 답답함을 느끼며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편한 의족만이 문제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을 새로 쓸 칼날을 우리가 쥐기 위해서’. 그날, 다 죽어가는 안젤리아를 회수한 젤린스키가 한 말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라 생각했다. #3 세이프하우스에서 발견한 그 기록은, 그런 허무맹랑한 말로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진실이었다. 나비 사건의 전말, 그날 있었던 일의 근원이 당신들이었냐 추궁하는 말은 그렇게 넘어가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실을 안 이상, ‘자신은 죽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라는 것을.
갑갑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자유롭지 못한 건 몸을 가누는 것만이 아니게 되었다. 그날, 졸업 때 있던 테러에서 살아남았을 때 했던 결심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파사삭.
상념에 빠져있던 안젤리아의 정신을 잡아끄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했다. 무언가의 결합이 깨지는 소리.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녁 7시. 해가 빨라진 탓에 거리는 벌써 어둑했다. 살짝 나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희미하게, 다른 소리가 있다면 가려질 듯한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S01지역은 최소한 ‘도시’라고 불릴 만한 곳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이 치안까지 보장해주는 건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걷는 거리에 이따금 자동차만 지나갈 뿐, 다른 사람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녀는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문득 요 근래 사지나 내부 부품이 전부 망실된 채 발견되는 인형이 늘고 있단 소식이 떠올랐다. 경비, 종업원, 광부 등, 가릴 것 없었다. 반 인형 단체의 소행일까? 뇌까린 안젤리아는 생각했다. 참 속 편하게 산다고. 누굴 적대해야 할지도 모를 자신에게 자조했다.
잘깍, 잘깍, 골목길에 들어간 그녀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금속이 맞닿는 소리가 들렸다. 의족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 사실은 그녀 쪽에서 다가가는 것이지만, 안젤리아는 꼭 그쪽에서 다가오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한 모퉁이만 남겨놓았을 때 잠시 소리가 멎었고, 다시 들릴 때까지 그녀는 숨을 죽였다. 그리곤 살짝 고개만 내밀어 모퉁이를 확인했다.
“저건….”
입안에서 맴도는 목소리. 다행히 들리진 않은 듯 반응은 없었다. 실외기와 쓰레기통이 놓인 모퉁이에는 두 명이 있었다. 아니, 움직이는 건 한 명만이었다. 누워있는 쪽은 분주히 움직이는 다른 쪽의 손에 조금 흔들릴 뿐이었다.
움직이는 쪽은 소년이었다. 나이는 열다섯 정도 먹은 듯했다. 회갈색 넝마 차림, 그마저도 다 찢어져 가는 걸 테이프 따위로 겨우 기운 모습이었다. 푸석한 머리카락은 눈가를 덮을 만큼 덥수룩이 자라있었고, 분주히 움직이는 손가락도, 손목도 가느다랬다. 오랫동안 못 먹고 지낸 걸까. 쥐고 있는 공구의 무게로 부러질 것 같았다.
그래, 공구를 쥐고 있었다. 드라이버. 누워있는 쪽을 헤집고 있었다. 피나 살이 아니라 톱니바퀴나 전선 따위가 튀어나온 게 그나마 나은 걸까.
그리고 그 순간, 소년은 눈알만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잠-”
안젤리아는 뭐라고 말하려 했다. 순간 용수철마냥 자리에서 튀어 오른 소년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번뜩이는 금속, 그녀가 왼팔을 든 것은 의식적으로 의수로 막으려 한 건지, 아니면 남은 오른손을 지키려 그랬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여간, 나쁜 선택이었다. -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손목 부분이 깔끔하게 분해되어 바닥으로 떨어졌고,
소년도 바닥에 쓰러졌다.
“…….”
어안이 벙벙했다. 안젤리아는 한 차례, 손목 부분이 깔끔하게 분해된 의수를 보았다가, 바닥에 쓰러진 소년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넘어진 건 아닌 듯했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숨을 쉬고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쪼그려 앉아 떨어져 나간 의수를 줍는 한편, 소년을 살펴보았다.
숨은 붙어 있었다. 미미하게. 며칠은 못 먹은 것처럼 몰골이 초췌했다. 바람을 너무 많이 맞은 듯 피부가 창백하다 못해 푸르죽죽할 지경이었다. 옅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하지. 안젤리아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소년이 정황상, 요 근래 있던 인형 해체범일 것이다. 몰골을 보아하니 생계를 위해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그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경찰 따위에 넘기면 간단하겠지만, 탈진해버린 상태에서 그리 방치했다간 꼭 죽어버릴 것 같았다. 더군다나 방금, 분해할 때의 모습….
그녀는 잠시 고민했고, 그리고 행동했다.
자정이 가까워진 다음에야 소년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제대로 휴식을 취한 건 아니었다. 정신을 잃고 있던 와중에도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고통이 확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내고 싶었는데, 내지 못하는 게 갑갑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 꼭 감옥 같았다.
시설에서 도망치고서, 아픈 누나를 겨우 돌보면서 산지 도대체 얼마나 지난 걸까.
“윽…!”
순간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몸을 일으켰다. 번뜩 뜨여진 시야가 한없이 새하얗다가, 이내 차츰 선명해져 갔다. 어스름한 방, 탁상 위에 켜진 전등이 겨우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래, 이제야 깨어났니.”
그리고 기상을 확인한 안젤리아는 침대맡에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눈알만 돌려 그녀를 쳐다본 소년은, 이내 천천히 고개까지 돌리며 마주 입을 열었다.
“당…신, 사람이었…?”
“비록 이곳저곳 갈아치웠지만 분명히 사람이거든? 안젤리아, 라고 불러.”
말하는데 이질감이 있는지 소년은 살짝 더듬으며 말했고, 안젤리아는 살짝 아연실색했다. 그렇다면 이 꼬마는 자신을 인형으로 본 걸까? 맥 빠지는지 한 차례 내쉬는 한숨.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이어서 물었다.
“그럼, 여기….”
“내 거처. 이곳에서 눌러사는 건 아니지만 당분간 그럴 테니까. 넌 탈진해서 정신을 잃고 있었어, 인형 해체업자. 곧바로 경찰서로 데리고 갈까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쳐 기절한 애한테 그렇게 가혹하게 굴 순 없겠더라고. 그래서 데리고 온 거지.”
소년의 눈에 그제야 이해의 빛이 돌았다. 정말이지 맥 빠지는 일이다. 꼭 죽일 듯이 달려들던 저녁때와 동일인물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그래서… 몸은 좀 어떠니?”
이번엔 대답이 없었다. 몇 차례 몰아쉬는 숨소리가 그를 대신했다.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힘든 모양이다. 안젤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쉬고 있어. 적어도 배는 채울 걸 가져올 테니까.”
그리고 방문을 열고 나갔다. 닫히기 전, 소년은 멍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충동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현 상황을 그나마 타파할 수단이기도 했다. 터벅터벅, 간소하게나마 먹을거리를 챙기러 부엌으로 향하는 발걸음. 그때 - 어둠 속에서, 안젤리아에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 하나가 있었다.
“그래서… 무슨 생각으로 저 꼬마를 데려온 거야?”
“…기척은 좀 내지 그래?”
- UMP45. 안젤리아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그렇게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신출귀몰함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에 아랑곳않고 45는 말했다.
“우리 둘이 서로를 알고, 서로를 만나고 있단 걸 알면 놀랄 이들이 많다는 것, 당신도 알잖아? 하여튼. 설마 저 꼬마도 이 일에 끌어들이려고?”
포커페이스임에도 목소리에서 못 미더움이 묻어나왔다. 안젤리아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소대’를 만들기 위해선 인형만 필요한 게 아냐. 너희들의 지휘와 관리는 내가 직접 해도, 유지보수까지 해줄 순 없어. 그렇다고 인력을 고용할 순 없지. 돈으로 맺은 관계는 더 많은 돈으로 언제든 깨질 수 있으니까.”
“그렇다 해도 왜 하필 저 꼬마야? 인형 해체에서 입에 풀칠하던 애한테 정비를 맡기겠다? 이게 더 말도 안 되는 짓 같은데.”
목소리는 슬쩍 움직였다.
“역시 당신의 생각은 통 알 수가 없다니까. - 그래도, 잘 되길 기대할게.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새로운 ‘동료’가 생길 것 같거든. 서로 힘내보자?♬”
그리곤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남겨진 안젤리아는 생각했다.
자신만의 수단.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무력 수단. 그녀 자신은 결코 자유롭지 못한 존재다. 그날, 자신이 비밀을 알아버린 뒤부터, 그리고 자신이 비밀을 알고 있단 사실을 다른 이들이 – 특히 국가안전국 – 존재하는 한, 그녀를 옭아맬 제약은 반드시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이 알고 아무도 모르는, ‘존재하지 않은’ 세력을 만들어낸다면?
물론 아직은 공상에 불과했다. 구체적으로 그로서 ‘무엇을’ 할지조차 아직 명확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저, 비밀스러운 동맹을 맺은 인형 한 기가 있고, 기계를 조금 만질 줄 아는 꼬마 하나를 주웠을 뿐이다. 구상을 현실로 만드는 건 안젤리아 그 자신의 몫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상황을 타파할 수 있단 방법을 알았단 것만으로도 그녀가 움직일 이유는 충분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간소한 먹거리를 챙겨 방문을 연 안젤리아는, 순간 자신에게 들이닥치는 가위를 황급히 막아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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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웠다.
소년이 언제나 느낀 것은 추위였다. 자신에게 기억이란 게 생겼을 때부터, ‘데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부터. 그리고 누나와 함께 있을 때부터 계속. 단 하루도 빠짐없이.
태어날 때부터 시작했던 전쟁이 끝났을 때도. ‘전쟁으로 묻히는 인재의 양성을 위해’라는 명목을 내세운 시설에서 생활했을 때도, 그곳이 얼마나 끔찍한 지옥인지 깨달아 누나를 데리고 도망쳐 나왔을 때도 언제나 추웠다. 유일하게 느꼈던 온기는 다리에 파편이 박혀 흘러나온 누나의 피가 손에 맞닿았을 때뿐이었다.
그 온기가 그를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그다음부터 소년의 삶은 자기 누나를 살리고, 먹이고, 재우는 데 사용되었다. 열넷 남짓한 아이가 도시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선택할 수단의 폭은 너무나 적었다.
그래봐야 인간이 아니잖아, ‘일’을 할 때마다 소년은 생각했다. 이것 외엔 돈이란 걸 벌 수가 없었던 탓도 있었다. 그가 잘하는 유일한 일이라는 탓도 있었다.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어딜 찌르고 어딜 돌리면 분해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소년이 인형이란 걸 보는 인식은 그러했다. 사지를 해체하고, 내부 부품을 다 드러내곤, ‘아, 오늘은 굶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살아가는지 2년이 다 되어갈 무렵. 어느 날, 소년은 한 사람을 만났다.
인간인데도, 인형 같은 소리를 내던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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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싶었다, 라고 생각했다.
믿지 않는다, 의 다른 말이었다.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안젤리아를 보는 시선 또한 다른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약간의 친절, 그럴 듯한 호의. 그런 걸 받을 때마다 그는 언제나 그런 생각을 했다.
처음으로 느낀 춥지 않은 잠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사람은 괜찮을 것이다’라고 믿어버리면 편해질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여긴 위치가 어디지? 나는 여기 얼마나 있었지? 이 사람은 다음엔 내게 뭘 할까?
- 누나는 어떻게 된 걸까?
자그맣게 들린 문 너머의 소리, 이곳엔 자신과 그녀 이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은 귀를 기울였다. 언제나 듣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기릭기릭,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었다. 어디서 누가 오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부터, 어디를 건드리면 분해할 수 있는지까지.
그리고 알았다. 자신을 단지 사소한 호의로 데려온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소년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방 안을 살폈다. 순간 힘이 풀린 다리로 인해 주저앉아버릴 뻔했지만, 겨우 일어선 그는 서둘러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당분간 쓰는 거처라는 말처럼, 이곳은 아무래도 필요에 따라 잠시 빌린 집인 것 같았다. 안 쓰는 것이 분명한 먼지 쌓인 탁상과 책장, 천장의 조명은 깨져서 탁상 위의 작은 전등만이 방을 밝히고 있었다. 그나마 나무 판자가 아닌 제대로 된 바닥인 점이 다행일까. 소리 날 걱정 없이 이를 뒤진 끝에 가위를 하나 발견했다.
괜찮은 걸까?
반사적으로 가위를 집어 든 소년은 뒤늦게 생각했다. 저 사람은 인간인걸. 죽이면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죽이면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서둘러 여길 나가 누나에게 돌아가야 했다. 아무것도 못 먹었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 있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때였다. 발소리, 이곳으로 다가와 문고리를 잡은 소리. 소년은 문이 열리는 순간,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가위를 쥔 채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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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게 일어난 금속음. 날붙이에 맞부딪친 의수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문에 날이 박혔다. 반대쪽 손으로 막았다간 오른팔도 의수를 해다 박아야 했을 것이다. 그나마 분해되지 않아 다행인 걸까.
“도대체 뭘-”
“날 어찌해도 좋고… 다른 건 다 상관없는데, 몇 가지만 묻자. 나 여기 얼마나 있었고, 누나는 어쨌어…?”
갑작스런 공격에 놀라 묻자 돌아오는 반문. 여전히 말하기 힘든 듯 연신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순간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확 내려앉은 목소리에 눈알만 돌아가 쳐다보는 모습까지. 진정시켜야 한다. 안젤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네 시간 정도. 그리고, 누나라니?”
“내 누나, 제레. …당신들이 안 건드렸다면, 날 어찌하든 좋으니 이쪽에서도 조건 하나만 걸자.” 여기서 소년은 잠시 말을 끊고 몇 번 차례 깊게 숨을 쉬었다. “누나의 안위. 일단 먹고 살아도 지장 없도록 해줘.”
“처음 만날 때도 모자라서, 방금도 칼 들고 죽이려 든 애 말을 들어줘야 해?”
“멋대로 납치한 건 당신 쪽이잖아. …이걸로 피차일반이야.”
막무가내로 말하는 소년. 안젤리아는 상황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이 꼬마에겐 누나가 있고, 인형 해체범 활동은 남매가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방에서 자신의 말을 조금 엿들었고, 그 때문에 자기가 납치된 줄 안 모양이다. 인신매매든 뭐든, ‘일에 끌어들인다’ 운운하는 말에 자길 쉬이 놓아주진 않으리라 생각한 거지.
대강 사태를 파악한 안젤리아의 머릿속에 한 기억이 살짝 떠올랐다. 13살, 오르조니키제에 있던 시절. 더 이상 부모를 만날 수 없단 사실에 말하기를 포기했던 시절. 안젤리아라는 이름이 아닌, 안나라고 불렸던 시절. 짧은 회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정했다.
“좋아, 당돌한 꼬맹아. 그 말 들어줄게.”
가윗날 사이에 끼워진 의수의 손목을 빼내며,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의외라는 듯 소년의 눈빛이 변했다. 자기도 진짜 들어줄 줄은 몰랐단 것 마냥. 바닥에 떨어진 건빵 봉지를 주워다 안겨주면서, 안젤리아는 못 말린다는 양 피식 웃었다.
“하여간, 다른 것보다 우선 그 무모할 만큼 앞뒤 안 가리는 성격부터 고쳐야겠어. 안내해. 같이 가서 바로 데려올 거니까.”
“어…, 어.”
이번엔 이쪽이 당황한 듯 멍청하게 대답하는 소년. 흘러내릴 것처럼 엉성히 건빵 봉지를 안고 있다가, 잠시 뒤에야 겨우 총총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누나 이름이 제레라고? 넌 뭐라고 부르면 되니?”
“데레….”
“데레? 이름 한 번 건성이네.”
누가 지었는지…. 다소 어이없어하면서도 안젤리아는 별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얼마나 멀리 갈지 몰라 차에 태워주면서.
그리고 데레는 혼란스러웠다. 죽은 듯이 자는 제레를 판자 따위를 기워 만든 거처에서 데려오고, 오늘은 늦었으니 자고 내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다 말하는 안젤리아에게 무어라 대답못하고 끄덕이기만 하면서, 도로 방에 돌아와 누웠을 때까지.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도대체 왜?
두 번이나 죽일 뻔 했는데도, 왜 저 사람은 여전히 친절한 거지?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와, 그 이상 깊게 생각할 순 없었다. 하지만 도통 해소되지 않는 의문스러움은 가시지 않는 안개처럼 그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그 자신이 자각했는진 모르겠지만, 잠들기 직전 데레는 자신의 생각을 복기했다.
믿지 않는다, 의 다른 말이었다.
그래도, ‘믿고 싶다’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