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모든 일은 갑작스러웠다. 거짓말처럼. 12년 만에 이 땅에 붕괴액이 기폭하고, 그 폭발과 함께 그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폰 & 크루거의 쓰잘데기 없는 인형들이 철수하고, 넝마가 되어 온 UMP45나 HK416 따위가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서로에게 재잘대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마스터를 처음 만난 날에 이 말을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다른 그 어떤 말보다도 기억에 남는 그것은 내게 있어 절대적인 버팀목이 되어줬다. 그렇지만 지금은 괜찮지 않은걸. 마스터,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만큼은 도저히 괜찮아질 수가 없는데.
세상은 째각이며 돌아가고 있었다. 나만이 그 돌아가는 시곗바늘을 쫒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방 안은 어두웠다.
오전 6시.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그러나 설령 동이 텄다 한들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굳게 친 블라인드에 막혀 빛은 조금도 새어들어오지 못했을 테니까. 사면이 어두운, 감옥 같은 답답함이 서린 방에서 데레는 마지막 통화 녹음 기록이 끝나는 것을 들었다.
“…할 게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 거지, 도대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며 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몹시 피로한 행색이었다. 옅게 핏발 돋은 눈이 그가 밤을 샜다는 것을 을러주었다. 뒤집어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어 목에 걸자, 짓눌려 있던 귓바퀴가 겨우 풀려났다. 겨우 피가 도는 느낌에 잠시 머릴 흔들고선, 그는 양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생각했다.
안젤리아가 실종된 날로부터 너무나 많은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쳤고, 그 일들은 그의 삶에 있어서 적지 않은 부분을 변화시켰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그리고 전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의자에 파묻히듯 기대 앉았다. 눈이 이글거렸다. 하지만 정신은 무섭도록 맑았다. 그날 이후로 줄곧 이런 상태였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에너지 드링크를 혈관에 직접 흘려 넣어도 이 정도로 비정상적인 각성상태를 유지할 순 없으리라.
넝마가 되어 돌아온 UMP45나 그녀에 대한 태도가 갑자기 변한 HK416, 각각 개수와 정비를 명목으로 빼낸 기억 데이터 속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정보. 이것이 시작점이다. 상황은 알 수 있었다. 정규군의 배신, 괴멸 직전까지 몰렸던 그리폰, 그리고 안젤리아의 선택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 왜 그런 거야, 마스터.”
국가를 위해서? 그가 아는 안젤리아는 분명 신소련을 위해 일했지만, 그렇게 애국심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임무를 수행해야 할 책임 때문에?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기갑부대를 고작 인형 몇 기로 막으라는 말 자체가 미친 소리였고, 아무도 그 명령을 우직하게 따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기록 속 안젤리아 또한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리폰인가?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납득할 수 없는 가설이었다. 그들에게 도대체 어떤 가치가 있길래.
풀리지 않은 의문에 혼란스러워 할 무렵, 문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가 일어난 듯했다. 마땅한 수확을 거두지 못한 상황에 혀를 차면서, 데레는 컴퓨터를 종료하고 방금 일어난 것처럼 가장하며 나가기로 했다. 그때, 그는 방금까지 들은 자료에서 무언가를 포착했다.
두 기의 인형. 마스터가 탈취한 것으로 된 무기 두 정. 데레는 오늘도 바쁜 하루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갈 곳이 있었고, 갈 길은 멀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방법은 알지만, 정작 실행에 옮기기에 난처한 일이 있는 법이다. 예를 들어, 바로 어제 보안 경고에 걸린 회사에 다시 한 번 침투하는 일 말이다.
심호흡 한 번.
발상은 이러했다. 코어마다 발당되는 일련번호, 통신 주파수, 모델마다 부여되는 시리얼 넘버.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인형은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는 듯 하지만, 엔지니어로서 감히 정의내리자면 결국 컴퓨터에 불과했다. 그저 인간 모양 케이스에 담긴 컴퓨터. 어떤 식으로 커스텀하든 간에, 기업은 자신이 출하한 제품을 마음과 시간과 자본을 들이면 얼마든지 추적할 수 있다. 그가 하려는 것도 같은 원리였다.
심호흡 두 번.
만약 마스터가 그 두 기를 버렸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이 발견될 수밖에 없겠지. ‘정부’는 ‘무능하다’의 명사형이는 선입견이 있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다만 그들이 원치 않는 일을 처리하는데 한해 게을러질 뿐이지. 파기했다면 그 흔적이 어떤 식으로든 남았을 것이다. 아니, 이런 말까지 갈 것도 없다. 마스터는 절대 그 두 기를 허투루 버릴 리 없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생존주의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전력을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심호흡 세 번.
“…그만, 그만! 그만 긴장해! 그만!”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펼쳐지는 상념에서 벗어나려는 듯, 데레는 또렷하게 소리치며 발을 굴렀다. 다행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리를 오가는 사람 중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목요일 정오 언저리. IOP 제조회사 S11 지부 사옥 앞은 놀라울 정도로 평화로웠다. 저 부지 안에 테러리스트가 있다는 게 알려진다면, 과연 이렇게 태평할 수 있을까? 방금 옆을 지나간 버스 대신 장갑차가 있었으리라.
데레는 자기 무릎을 짚은 채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방법과 별개로,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건 멍청한 짓임에 분명했다. 어제는 데이터 베이스에 접근하고, 오늘은 부지 내부의 그리폰 임시 본부로 쳐들어간다니. 보안 인력 측에게 이미 얼굴이 알려진 상황에서 정문으로 들어갔다간 30초 안에 도로 거리로 내던져질 것이 분명했다. 문득 그들이 떠올랐다. 특히 UMP45. 현장에서 직접 잠입 액션을 벌이는 그들이라면 직원보다도 쉬이 진입했겠지.
힘을 빌릴 순 없었다. 이건 그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오늘 안에 집에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제레에게 또 잔소리 듣지 않도록.’ 그리 뇌까리는 게 신호였다. 행동 개시.
그리고 약 30분 후. 네 잔째의 커피를 마시던 페르시카는 환풍구에서 자그마한, 하지만 분명히 들리는 이상한 소리를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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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일.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해져야겠습니다. 졸려서 분량이 짧네요.
[이 소설은 포스타입에서 모아보실 수 있습니다.]
좋은작품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