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광의 춤이 하늘을 엮을 때,
업화는 대해를 사리며
흩어진 섬은 흑연에 삼켜지고,
대지는 깊이 신음하네.
검은 해안은 황혼의 이정표.
맞이하라, 대지의 황혼을.
ㅡ최초의 인간, 아니 몬스터조차 나타나기 이전의, 머나먼 과거.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푸르른 이끼들과 양치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나던, 풍족한 해안. 그 해안은 이제 회색과 붉은색이 뒤죽박죽 섞인,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것 같은 파도가 밀려드는 타오르는 바다에 집어삼켜졌다.
‘쿠르르릉....’
한 때 쉬지 않고 다리를 움직이는 거대한 벌레들과, 바닷바람에 짠 소금기가 밀려오는 그 해안가에서 바다 속의 무수한 생물들을 잡아먹으며 살아가던 비늘에 덮여있던 거대한 동물들이 어울리며 살던 곳들은 이제 그 모습을 잃은 채로 대지가 진동하는 굉음과 하늘을 울리는 천둥소리들을 공허하게 퍼트리고 있었다.
ㅡ그오오오오....!
그 대지의 진동과 함께 들려오는 너무나 이질적인 낮은 포효소리는 모든 대지의 위를 울릴 정도로 강렬하게 퍼져나갔다. 깊은 내륙까지 불타는 해일이 밀려들고,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용암이 대지를 뒤덮으며 모든 것을 뒤엎어들려고 드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세계.
그런 파괴만이 가득한 세계의 가운데에서 그 포효의 주인은 그런 것이 당연한 것인 것 마냥 화산재와 뜨겁게 달궈진 암석증기로 뒤덮여 황혼의 색을 띤 채로 녹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빛의 장막이 쏟아져 내리듯 아른 거리는 하늘을 향해 그 머리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켁,켁.. 끼익, 끼이이익...’
타오르는 바다에 뒤덮인 해안가와 머지않은 절벽에서, 한 뼘 크기도 안 되는 털이 송송 난 작달막한 동물들은 한 때 포식자와 먹이의 관계였던 이들마저 모여들어서 오들오들 떨면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쉬기도 힘든지 몸통이 오르락내리락 할 때마다 기침을 하는 그 짐승들은, 회색빛으로 물든 세상에서 온 몸을 떨면서 대지를 뒤엎고, 모든 것을 불과 물로 갈아엎은 대지의 거인을 먼발치서 올려다보았다. 본능마저 싹 잊게 할 광경이었다.
ㅡ크오오오....!
‘쿠구구구...!’
‘찌익! 찌이익!’
다시금 천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포효에 공황에 빠진 짐승들은 그 좁은 틈 안에서도 펄쩍펄쩍 뛰며 찍찍거렸다. 비단 이 절벽 안에서 죽음의 공포에 날뛰고 있는 짐승들만이 아닌, 행성 곳곳에 퍼진 채로 그 몸을 숨겨 떨고 있는 이들도 포효에 맞춰 대지가 찢어질 것만 같이 격렬하게 뒤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그 작은 머리들로 단 하나 밖에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ㅡ모든 것의 끝.
바다를 떠돌던 단세포 생물이 수억 년에 걸쳐 이제야 육상에 완전히 적응한 참이었기에, 그 생물들은 단지 본능에 가까운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허나 하늘과 대치가 무너져 내리고, 그들의 생명이 시작된 바다가 파도로 모든 것을 뒤덮는,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공포와 공허함이 혼재한 그 며칠은 그들에게 감상과 생각을 심어놓기 충분했다.
‘쿠구구구구....’
ㅡ쉬이이익!
다시금 온 대지를 뒤흔들며 하늘을 가르고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붉은 궤적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녹색으로 덮여있던 해안과 대지는 붉은 궤적들이 쏟아져 땅에 내리 꽂히자, 불과 먼지가 일어나며 그 범위가 줄어들어갔다. 느닷없이 일어난 저항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것만 같은 모든 것을 잿더미와 불의 바다로 뒤덮은 재난은 끝날 기미조차 안 보이기에 더욱 그 압도적인 공허함을 느끼는 짐승들은 구멍 안에서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찍, 찍!’
하지만, 여전히 그 단춧구멍과도 같은 까만 눈으로 밖을 바라보고 있던 짐승들은 무언가 이변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쿠르르릉....’
하늘을 가르고 지나가는 보랏빛 번개가 일으키는 소리에 다시 짐승들은 온 신경을 곤두세웠어야 정상이었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큰 변화에 전부 그 굉음이 울리든 말든 상관을 안 하고 있었다. 며칠 사이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깜깜하던 하늘에, 정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주홍빛 태양. 그 재난 속에서 모든 것을 잠시라도 현실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도피처나 다름없던 생명의 원천이 차츰 무언가에 가려지듯 서서히 푸르스름한 그림자에 덮여가고 있었다.
-킁, 킁, 킁!
그 느닷없는 태양을 집어삼키는 것만 같은 달의 그림자와 함께, 불과 몇 분전만 해도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로 탁하던 공기가 일순간에 맑아지기 시작했다. 첫 분화가 시작된 이래 점차 공기가 독성을 띄게 되어 숨을 쉬기도 버거울 정도로 유독가스를 들이켜 움츠려 들어있던 짐승들은, 갑작스럽게 맑아지는 공기에 하나 둘 코를 킁킁거리며 밖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름 동안의 미쳐버릴 것만 같은 공포에 시달리던 짐승들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히지 못할 광경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ㅡ쏴아아아아...!
불과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맹렬하게 모든 것을 태울 것만 같이 넘실거리던 화마에 덮인 채로 깊은 내륙까지 밀려들어왔던 생명의 요람, 바다. 그렇게 불이 붙은 채로 며칠 간 죽음과 고통만을 몰고 오던 바다는 어느새 점차 불이 사그라지며 서서히 본래 있을 곳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아닌, 이제는 잊혀질듯 말 듯 할 정도로 오랜만에 나는 반갑기 그지없는 파도가 밀려나가는 소리가 널리 하늘에 퍼져 나갔다.
‘그오오오....’
그리고 그렇게 빠져나가는 파도와 함께 며칠에 걸쳐서 쉬지 않고 온 대지를 불과 물로 뒤덮었던 거대한 대지의 거인은 처음 해안가에 그 모습을 징조 없이 갑작스럽게 드러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역시 징조를 보이지 않으며 그 머리부터 수면 아래로 낮춰 들어가며 엄청난 물기둥을 일으키며 몸을 숨겼다.
ㅡ쏴아아아아!
며칠 간 모든 것을 불태우려는 듯 맹렬하게 달궈져 있던 불타는 검은 거체는 어느 새 서서히 식어가는 듯 바위처럼 변해갔다. 하지만 그 엄청난 덩치와 무게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듯, 꼬리 끝까지 바다 속에 빨려 들어가자 엄청난 파도를 일으켰다.
ㅡ후두둑...
‘찌익... 찌이익...!’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영원토록 기억에 담으려는 듯, 채 몇 분전까지만 해도 벌벌 떨며 서로 뭉쳐있던 짐승들은 구멍에서 하나 둘 몸을 빼내어 기어 나오며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모든 것의 끝을 고하는 것만 같은 14일의 불로 씻는 재앙은 그렇게 급작스레 시작되어, 급작스레 끝을 고했다.
‘찌익... 찌이익...’
‘끼이이익!’
새로운 섬이 생겨나고 산이 무너져 내리며 바다는 끓어오르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만 같은 그 급작스럽던 재앙은 지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운명을 뒤바꾸고 끝났다. 그로 인해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잿더미가 되어 바스러져 나갔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그 잿더미가 된 폐허의 위에서 다시금 살아남기 위하여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먼 미래, 첫 번째 대멸종이라 불릴 보름 동안 대지를 뒤덮었던 업화와 파괴. 그 마지막은 그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시작되었듯, 예상치 못한 형태로 끝나며 막을 내리고 있었다.
-
ㅡ현재.
하늘을 돌고 돌아온 사악한 바람이 산을 다시금 뒤덮기 약 6년 전.
“벌써 몇 주째 쏟아내는구먼, 정말 여기에 원래 화산섬이 없던 것이 맞나?”
“영감님도 보셨잖습니까, 여기는 반년 전만해도 섬 자체가 없던 바다 한 가운데라고요.”
“아무 것도 없는 망망대해에 하늘의 색까지 주홍빛으로 물들일 정도의 분화를 하는 화산섬이라.. 거 참...”
“며칠 사이 갑자기 분출물의 양이 급감했어요, 이런 일은 관측 이래 처음인데..”
“그래서 탄지아에서 가스 농도와 온도를 평소의 배는 자주 측정하라 하잖아.”
탄지아 항구에서 약 900해리 밖 대양.
오로라가 쉬지 않고 일렁이고 있는 대양의 상공에 떠 있는 탄지아의 휘장에 헌터 길드의 깃발, 그리고 왕립 고생물학 서사대의 심벌을 두른 대형 비행선 안에서 서사대원들은 몇 주에 걸쳐 관측하고 있는 거대한 화산재의 기둥을 보면서 논쟁 아닌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고문서에 적혀있던 거대한 오로라 때문에 조사를 나왔다가 이런 현상을 보다니 허, 참.”
“그런 자료에 단순히 새로운 열점이 생성된 곳이 나올 리도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죠...”
고문서.
폰란에서 발견된 마치 마천루를 연상케 하는 고대의 유적들 몇 곳에서 발견된 방대한 쇠락해서 사라져버린 고대 문명의 자료. 그것을 토대로 헌터 길드와 학술원, 그리고 서사대는 항상 오리무중이었던 고룡들의 생태와 그들의 서식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정도로 귀중한 자료들. 그러한 중요하고 귀중한 지식을 제공해준 고대의 자료였기에 그 곳에 명시되어있던 무언의 전조인 오로라가 펼쳐지자 곧장 그 알 수 없는 징조 하나에 의존하여 대양 한 가운데에 무슨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하여 관측선을 보낸 결과가 작금의 상황이었다.
“항해와 비행을 계속 허가하기엔 무리겠구먼, 차라리 늘어나면 모르는데 분출량이 줄어드니 불안해.”
“네, 그럼 비둘기를 날릴까요?”
“그러도록 하게, 늦어서 민간인 사고라도 일어나면 면목 없어져.”
“2호선에도 신호할까요?”
“그러도록 하게.”
제일 늦깎이로 들어온 막내 하나가 전보를 날리기 위해 비행선들이 반드시 몇 마리씩 데리고 다니는 전서구들을 보관하는 곳으로 가는 것을 본 후, 다른 한 명이 뒤따라서 거대하게 치솟고 있는 연기 기둥의 반대편을 역시 탐색하고 있는 다른 비행선에 저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빛으로 신호할 수 있는 신호용 거울들이 장비된 곳으로 향했다.
4달 여 전, 서서히 모든 하늘을 뒤덮기 시작하는 오로라의 장막이 관측되기 시작함과 동시에 대양의 중앙에서 시작된 분화. 분명 중앙 해령이 가로지르는 대양의 중심부였기에 그러한 대형의 분화가 일어날 일은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전조라고는 약한 지진만 몇 번 보인 채로 분화가 시작되자 학술원과 서사대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누가 느닷없이 대양 한 가운데 그것도 해령이 가로지르는 위치에 대분화를 일으키는 화산섬이 나타났다고 믿겠는가.
ㅡ정말로 단순한 새로운 열점이 활동을 시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인 건가?
다시 망원경에 눈을 딱 붙이고 바다 한 가운데서 끊임없이 열기와 분출물을 하늘로 흩날리는 화산재 기둥을 보면서 노령의 용인족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이 부자연스러움은 그에게 확고한 답을 금세 던져주고 있었다.
“자연스럽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부자연스럽구먼.”
아마 다른 서사대 비행선의 인원들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것을 용인족 노인은 말로 내뱉으면서 열기로 인하여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렸다.
“해령이 사실 초 화산이었다, 라는 건 전혀 말도 안 되겠죠.”
“완전히 뜬 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구먼. 뭐 그렇게라도 답을 도출해내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말일세.”
하얗게 센 수염의 노인은 단칼에 그 말을 일축했지만, 이내 그런 상상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면서 역시 반대편의 망원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니, 정확히는 느닷없는 그 현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돌리려고 했다, 가 맞을 것이다.
‘쿠구구구구....’
“엇차,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응? 뭘 말하는 건가? 그보다 비둘기는 보냈나?”
“네, 당연히 보냈죠. 제가 말한 건 화산재 기둥에서 나는 소리가 줄어드는 것 같...”
“그러고 보니... 맙소사, 전원 귀마개 착용!”
비둘기를 탄지아로 날린 후 막내가 하는 말을 처음은 다들 무슨 의미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분출량이 줄어들었다 한들, 여전히 공중으로 쏟아지는 분출물들이 내는 그 엄청난 소음과 화산재에서 번쩍이는 천둥으로 인해 귀가 얼얼한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 폭음이 느닷없이 사라지며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 세상에 침묵이 내리깔린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느닷없이 고요해지는 바다 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노인은 소리를 질렀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서 침묵을 깬 것은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폭발음과 빛이었다.
‘쿠와아아!’
마치 수 천, 수 만개의 폭탄을 동시에 격발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폭발음. 그 폭음과 동시에 연기기둥이 순식간에 태양이 수백 개가 나타난 것 마냥 밝게 빛을 내며 몇 주간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열과 붉게 달궈진 화산재를 쏟아냈다. 오로라를 일시적으로 걷어내버릴 정도 상식을 훌쩍 넘은 폭발의 충격파만으로 비행선은 뒤틀리며 날벌레처럼 짓이겨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폭발.
“끄아아..! 눈이, 눈이!”
“으아아아아... 귀, 귀가!”
“하얀 용이시여, 맙소사...”
다른 대원들과 다르게 정말 간발의 차이로 귀마개를 꽂는데 성공한 노인이었지만, 추락하기 시작하는 비행선을 가득 채운 비명소리와 그 충격으로 인한 쇼크로 인해 넋이 잠시 나가있었다. 귀마개로 간신히 귀를 막았음에도 양 귀에서 한두 줄기씩 피가 흘러내릴 정도의 엄청난 충격. 그러나 그 정도로 크게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멀고 청각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다른 대원들보다는 그나마 추락하기 시작한 비행선 안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끼이이이익...’
그는 비명이 넘쳐나는 아비규환을 넋이 나간 채 멍히 보다가 금속이 뒤틀리는 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바다로 떨어지는 비행선에서 어떻게는 버티기 위해 간신히 창틀을 잡고 비틀거리는 몸을 지지한 채, 넋이 반쯤 나간 상태로 신을 찾으며 밖을 내려다봤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인간이 어떻게 이런 갑작스러운 분화를 예측한단 말인가...”
날개에 불이 붙어 떨어지는 불나방처럼, 터지면서 불이 붙은 비행선 안에서 그는 자신의 지식과 지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 엄청난 재난을 내려다봤다. 순식간에 모든 구름이 사라지며 날아다니는 비룡들이 전부 모습을 감출 정도의 그 엄청난 분화는 절로 다른 지방에 있다고 알려진 초 화산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그 엄청난 폭발의 여파로 불과 1분 전까지만 해도 같이 조사를 진행하던 서사대원들은 그 엄청난 폭발 때문에 눈이 멀고 귀가 먹어서 이성을 완전히 잃고 추락하는 비행선의 바닥을 뒹굴었다. 바다 위에 떨어져도 생존을 전혀 보장할 수 없는 그 참상 속에서, 노인은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의문에 빠졌다.
ㅡ대체 뭐가 일어난 것인가.
고령의 용인족 조사원은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가운데에서도 무엇이 일어났기에 전조도 없이 자신들을 죽음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는지 여전히 충격으로 뇌진탕에 걸린 터라 제대로 사고가 되지 않았지만, 그 답을 얻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 몸을 한껏 창가로 밀어 당겼다.
-그오오오...
“저건...”
비행선이 바다에 내리 꽂히기 직전, 기이하고 낮은 포효가 들려왔다. 죽음을 앞둔 용인족 노인이 그 쪽으로 눈을 돌리자, 맹렬하게 불타오르는 망망대해가 눈에 들어왔다. 타오르는 바다라니, 도저히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가 포효가 들려온 쪽, 끊임없이 용암과 화산재를 뿜어내는 화산섬으로 시야를 돌리자, 그 섬의 중앙에서 용의 머리와도 같은 게 서서히 드러났다. 노인은 말문이 막혔다.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것만 같은 그 몸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하는 불덩어리들, 그것들과 망연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노인은 고철이 된 비행선과 함께 오로라가 다시금 쏟아지고 있는 타오르는 바다 위로 내리 꽂혔다.
‘쿠르르릉...’
조각나서 떨어진 비행선을 뒤로하고 황혼과도 같은 주황색 어둠이 깔린 하늘에서 그 수를 늘리며 쏟아지기 시작하는 붉은 궤적들은 마치 세상의 끝이 다가왔음을 예고하는 듯, 불타오르고 있는 바다 위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그런 종막의 시작을 뒤로하고 거대한 대지의 거인은 하늘을 향하여 포효하며 치켜들었던 머리를 천천히 숙이며 불이 붙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수표면의 아래로 고개를 내리며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불타오르는 대양 아래의 해저는 대지를 부수는 거인의 움직임에 맞춰서 서서히, 하지만 격렬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
“끄으으응... 오늘도 늦게 일어났구먼.”
“카를, 나발데우스를 격퇴하고 나서 너무 빠진 거 아니냐, 차!”
모가 마을.
어업으로 풍족하게는 아니지만, 평범한 수준까지는 먹고사는 고도 유일의 작은 마을의 어느 집.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엉망이 된 머리로 부스스 일어난 남성의 앞에서 기묘한 가면의 챠챠브가 허리에 손을 짚고 당당히 선채로 나무라고 있었다.
“후, 일어날 때마다 짜증나게 만드네.”
“이 차차의 말에 그렇게 말하면 실망이다 차! 풋내기 헌터였을 때의 마음가짐은 어디 갔냐 차!”
그 광경이 너무 익숙한 듯 관자놀이를 짚으며 카를이라 불렸던 헌터는 대놓고 짜증과 날이 서린 말로 대번에 차차의 말을 일축해버렸다.
“아 거 참 더럽게 시끄럽네. 어떻게 해야 입을 좀 닥치고 있을 거냐, 차차”
“아, 아 하도 안 일어나 길래 좀 허세를 부려 본거다 차, 화내지 마라 차!”
그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지 그는 풀쩍 침대에서 뛰어내리듯 일어선 후,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 모습에 차차는 좀 당황한 듯 폴짝였지만 그걸 모르는 듯 욕실 안에서 그는 질문을 던졌다.
“아이샤는 일찍 나갔지?”
“길드 아가씨니까 할 일이 많으니 당연히 평소처럼 나갔다 차!”
“후, 주말이라서 촌장 아들이 좀 느긋하게 나와도 된다고 해도 꼭...”
“카를, 얼른 안 나가면 오늘 돌아올 여동생 씨하고 카얀바가 엄청 조잘거릴 거다 차!”
모가 마을의 길드 지부에서 일하는 아가씨에 대해서 너무나 익숙하게 질문하고 답마저 예상한 듯한 카를의 반응이었지만, 뒤이어 차차가 말한 거에 그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말투에서 마저 인상을 찌푸린 게 느껴질 정도로 반응했다.
“아, 그건 좀 귀찮겠는데.”
“얼른 씻고 나가라 차!”
차차의 말에 처음으로 제대로 반응한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디보자 그럼 준비를 해볼까, 오늘은 그거도 줘야하고...”
“카를 설마 그거, 아직도 아이샤한테 안 줬던 거냐, 차?”
“좀처럼 시간이 없었으니 당연하지, 너도 카얀바한테 한 소리 안 듣도록 마저 준비해라.”
“알았다, 차!”
일어난 후 처음으로 그와 차차 사이에 대화다운 대화가 이루어지는 사이, 카를은 일부러 옷가지 사이에 아이샤에게 들키지 않도록 파묻듯 숨겨놨던 전혀 그에게 어울리지 않은 포장지로 쌓여있는 작달막한 상자를 꺼내어 확인했다. 그에게 있어서 모가 마을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늦게 시작되고 있었다.
-
“안녕하십니까, 시장.”
“안녕하십니까, 길드마스터. 아, 장군님도 오셨군요.”
“안녕들 하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이번 긴급 소집의 의제가 뭔지는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탄지아 헌터 길드.
록락 대륙 최대 규모의 그 길드의 한편에 자리한 회의실에서 하나 둘 백발이 무성한 용인족 노인들과 해민족의 노인들이 모이고 있었다. 인간인 탄지아 길드마스터를 제외하면 다들 전통적인 의복을 입고 왔지만 그들의 얼굴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비행선이 행방불명된 일이 이렇게 길드 권한으로 긴급 소집까지 할 일입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해민족 청년의 말에 다들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가 술렁였다.
ㅡ서사대 비행선 행방불명.
거울을 통한 신호로 항상 비행선의 위치를 확인하던 탄지아 서사대에 그 소식이 들어오기 까지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원칙대로면 3시간에 한 번씩 반사광을 통해 무사 비행 중이라는 것을 기록해야 했지만 대양에는 기껏해야 부악룡만 바다를 건너기 위해 모습을 보이며 강룡과 폭풍룡처럼 비행선을 추락시키는 고룡은 물론이오, 심지어 화룡조차 슈레이드 지역 종과 달리 고고도 폭격을 하듯 사냥을 하지 않는 종들이 서식하는 곳이었기에 너무나 안일해져서 원칙을 사실상 무시하며 하루에 한 번씩 반사광을 확인 한 것이 너무 늦게 추락 사실을 알게 된 것의 큰 원인이었다.
“추락의 원인이 단순한 화산 분화로 보이지 않기에 긴급 소집을 시장님께 부탁드린 겁니다.”
“화산 분화가 문제가 아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요?”
“서사대장, 나와서 설명해주시오.”
그런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예상치 못한 말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드마스터는 탄지아 서사대의 서사대장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일단 아시다시피, 모든 하늘에서 오로라가 관측되기 시작한 몇 개월 전부터 관측된 해양 분화는 정상적인 분화가 아닙니다.”
“그건 다들 알잖습니까, 요점만 말해주시오.”
“비행선의 추락원인은 자체는 대 분화의 충격입니다만, 원거리 관측선이 보내온 관측 자료는 그 분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가지고 온 돌돌 말려있는 커다란 양피지를 펼치자 순간 실내에는 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깨트린 것은 마치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본 것만 같은 해민족 청년이었다.
“이건... 신화 속에나 나오는 모습 아닙니까? 신화에 나오던 그림 속 존재라니, 말이 됩니까?”
“분명 슈레이드 지방의 전설과 유사합니다만, 다릅니다. 완전히 달라요. 이건 고문서를 통해서 알려진 거니 이미 다들 아시는 사실이겠죠.”
용인족 학술원장이 수염을 만지며 심각하게 하는 그 말에 해민족 청년은 머리로는 납득이 되었지만 좀처럼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항변하는 것 마냥 말했다.
“그래도 이건...”
“존 아서 대부터 지금까지, 서사대는 직접 관측하며 그린 그림에 과장을 더하지 않습니다.”
펼쳐진 넓은 양피지에 그려져 있는 마치 바위로 만들어 진 것만 같은 거대한 뱀의 머리와 같은 형상. 언뜻 보면 염과룡이 떠오를 수도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것과 크게 이질감이 드는 머리의 형상과 목의 돌기들로 인해 옛 신화에나 나오는 존재가 절로 연상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실내는 더욱 술렁였다.
“지금껏 전설의 존재인 흑룡이라는 이름을 받은 용은 황흑룡 뿐입니다만, 이 정체불명의 용이 나타나면서 일으킨 재난을 보면 흑룡의 이름을 부여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심각한 상황인 것은 알지만 저는 그 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 하겠습니다.”
“예?”
순간 튀어나온 말을 끊어버리는 것만 같은 학술원장의 확고한 거절의 의사에 길드마스터는 절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뒤이어 나오는 말에 그에 대한 반박의 의사마저 순식간에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 황흑룡도 결국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전설 속의 용에 발끝도 미치지 못한다는 자료가 계속 나오고 있잖습니까.”
“저 역시 동의하기 힘듭니다, 게다가 단지 파괴력과 외형만으로 내려앉은 전설의 이름을 부여할 거면 천검을 두른 뱀은 진작 그 용의 이름을 받았어야 하지만 현실을 어떻습니까!”
“끄응...”
전설의 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가차 없이 날아드는 반론들. 하지만 그 반론에 길드마스터는 좀처럼 그 말에 반박을 하지 못 하고 신음했다.
황흑룡(煌黑龍) 알바트리온.
몇 십 년 전 추락했던 서사대의 비행선에서 발견된 조사일지를 토대로 그 존재가 확인된 고룡. 그 파괴력과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변화무쌍함을 토대로 빛나는 검은 용이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던 신종. 하지만 그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힘은 발현되지 않은 위험성일 뿐이었고 잠재되어 있는 위험일 뿐 피해 사례라고는 영역을 지나가던 비행선을 요격한 것이 다인 녀석이었기에 서사대와 학술원에서는 처음부터 그 지나치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명에 크게 반대표를 던졌었다.
하지만 끝끝내 사냥꾼 길드는 그 이명을 밀어붙인 후 극비 의뢰서를 작성하여 각지에 길드나이트들을 통해 보내어 그를 통해 소집한 최고의 사냥꾼들에 의해 토벌령을 내렸고, 엄청난 사투 끝에 간신히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얻게 된 사체가 왕립 고생물학 서사대에 전달 된 후, 연구되기 시작하면서 도저히 흑룡이라는 전설속의 용의 이름을 받을 만한 종이 아니었다는 자료가 연구가 시작된 지 열흘도 안 되어 하나 둘 확인되기 시작하면서 사냥꾼 길드의 위상을 순식간에 바닥으로 치게 만든 원흉이기도 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괜한 고집을 부렸던 탄지아 사냥꾼 길드의 길드마스터였기에 완전히 반박의 말문이 막혀버린 채로 입을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쿠구구구구....’
“실례합니다! 급보를 전하러 왔습니다!”
그렇게 침묵이 감돌려는 순간 흔들리는 건물. 전조 없이 갑자기 흔들리자 처음에는 다들 단순한 지진으로 여겼지만 그 생각을 분쇄하듯 탄지아 길드의 길드 아가씨가 급히 문을 열고 숨을 고르기도 전에 급보를 전해왔다.
“쓰나미 경보를 당장 발령해야 합니다! 약 900해리 밖 해저에서 진도 8.5의 지진이 관측되었다는 급보입니다!”
“진도 8.5? 맙소사...”
상상을 초월하는 진도의 지진. 드물게나마 대양에서 지진이 발생해도 결코 진도6을 넘는 일이 없었기에 그 어마어마한 강도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충격에 빠트린 또 다른 이유는 900해리라는 그 명확한 거리였다.
비행선 두 척이 흔적을 찾기도 힘들 정도로 손상되어 추락했다고 알려진 그 장소와 인접한 곳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는 그 소식에 사색이 되어 버린 이들은 잠시 무어라 말을 못 잇다가 이내 길드마스터의 말에 다시 정신을 다 잡았다.
“일단, 갑자기 나타난 미기록 용에 대해서는 상세한 추가 자료가 모이기 전까지 명명은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고룡인지 아닌지도 확정하시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이 지진을 일으킬 정도로...”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지진이 정말로 그 용에 의한 것인지도 알 수 없고 말입니다.”
‘쿠구구구...’
다시금 대지를 울리는 진동에 잠시 감도는 침묵. 그 흔들림의 원흉이 결코 용이 저지른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침묵이 감도는 사이, 길드마스터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름 깊게 생각한 것을 그 여느 때보다 진중한 분위기로 입을 열어 말했다.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용의 분류가 아닌, 시민들의 안전입니다. 그러니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말을 하다가 잠시 다시 고민 하는 듯 말을 멈추는 길드마스터, 하지만 그 고민을 빠르게 꺼내고 한 말은 지금 실내의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간절히 생각하고 있는 말이었다.
“...특급 재난 경보를 탄지아 시를 포함한 모든 해안 도시와 마을들에 발령할 것을 시장님께 강력 건의합니다.”
“동의합니다.”
“동의.”
“저도 동의합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길드마스터의 말에 날이 서린 말로 대립하며 날카롭게 비판하던 서사대장와 학술원장도 지체할 틈이 없이 바로 동의를 하자 재난에 대한 대비는 더욱 박차를 가해지기 시작했다.
“고도 전역에 제1급 쓰나미 경보를 발령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도시들에도 최대한 빠르게 경보를 전달, 사냥터에 나간 사냥꾼들도 전원 귀환토록 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나이 지긋한 시장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짧게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자 길드 아가씨는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빠르게 그 특보를 알리기 위하여 아래로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무언가를 잠깐 생각하던 서사대장과 학술원장은 다른 미사어구를 붙이지 않고 최대한 짧게 입을 열었다.
“서사대는 추가관측을 통해 대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최대한 빨리 계산하도록 하겠습니다.”
“학술원에서는 최대한 빨리 슈레이드 대륙에도 쓰나미 경보를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속해서 요동치는 건물 안에서 인간의 인식을 벗어난 재난을 동반하고 있는 전설 속의 고룡과 한없이 비슷한 대지를 넓히는 거인. 그 모습이 그려진 양피지를 두고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탄지아 방위군은 시민들의 대피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빠른 결정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이런 재난에는 빠르게 대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빠르게 대피를 준비하며 최대한 피해를 줄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시피 한 무력감과 탈력감이 가득한 실내. 몇 초전까지만 해도 진동하듯 울리던 대지의 울림은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언제 다시 지진이 뒤흔들지 모르는 실내에서 나이가 지긋한 용인족 노인은 그 방 안의 모든 이들이 바라는 희망이 담긴 말을 천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내뱉었다.
“하얀 용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기를.”
기록이 남기 시작한 역사 시대 이래,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재난이 탄지아를 제대로 덮치기 까지 앞으로 약 닷새하고도 반나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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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 그러니까 대해룡이 단순히 뿔의 문제로 마을의 지반을 들이 받은 것이 아닌 것 같단 말인가요?”
“응, 바로 그거야!”
모가 마을의 집회소.
집회소라고 해봤자 고도의 길드 업무를 다 떠맡아 하는 작은 오두막을 연상케 하는 건물에 상주하는 직원조차 2명뿐인 그 작달막한 건물. 그 실내에서 탁자 위에 푸른색과 형광 녹색이 섞인 방어구를 입은 여성이 같은 색의 투구를 벗어 올려두고 턱을 괴듯 몸을 탁자 위에 숙인 채 말을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자료를 취합해서 낸 추론인데 근육 바보 오빠는 항상 헛소리하지 말라 하더라고.”
“흐음, 뭐 카를 씨는 그런 쪽으로 생각을 깊게 하는 유형은 아니니까요.”
“칫, 난 당최 아이샤가 왜 그런 힘만 센 멍청이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니깐.”
오빠인 카를을 감싸주려는 것만 같은 말에 삐쳤는지 여성은 고개를 돌려서 입을 삐죽이며 험담을 뒤이어 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말에 옆에서 가면을 삐죽거리며 반들거리게 광을 내고 있던 한 차차브가 그 말에 반박하듯 입을 열었다.
“벨라! 아무리 욕해도 그 멍청한 근육 뇌 사냥꾼은 차차의 친구이자 네 친오빠다, 얀바!”
“으음, 너도 그런 쪽으론 별반 다를 바 없이 욕하는 거 같은데, 카얀바.”
‘쪼르르륵’
카얀바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답하며 유리병에 조금 남아있던 음료를 빨대를 통해 쪽 빨아들이자 순식간에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음료는 순식간에 사라지며 한 두 방울만 바닥에 남아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보다 아이샤, 유쿠모 드링크 더 남은 거 없어?”
“그게 마지막 병이에요, 벨라. 다음 건 나흘 후에나 와요.”
“으음, 달달한 게 필요한데..”
‘따악’
“아얏!”
“인마, 그렇게 막 마시다간 내가 몸 상한다 했지.”
그 순간 머리 위로 날아드는 손. 그와 함께 어이없다는 투로 들려오는 말에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벨라는 순간 욱했는지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분 되게 나쁘네! 3주 동안 다른 사냥터에 가 있다 돌아온 여동생 머리부터 치다니!”
“3주는 무슨, 오늘로 딱 보름 만이잖나.”
“그게 그거지.”
“카얀바! 용케도 사지가 멀쩡히 돌아 온 거냐, 차!”
“누구처럼 놀고먹지 않아서 그래도 괜찮았다, 얀바!”
대수롭지 않게 그 화내는 말을 인사처럼 넘기는 푸른색과 주황색의 무늬가 질서정연하게 섞여있는 방어구를 입은 카를에 서로 보자마자 습관처럼 서로 말싸움을 시작하는 챠챠브 둘. 그걸 보고 모가 마을의 길드 아가씨 아이샤는 역시 이런 소란이 익숙한 듯 그를 반겼다.
“어, 이제 일어났어요?”“딱히 뭐 할 일도 없으니까 계속 게을러지네. 아이샤는 너무 일찍 일어나는 거 아냐?”
“거의 공무원이나 다름없으니 피곤해도 어쩔 수 없는 거죠, 뭐.”
여동생의 날카로운 반응을 일상처럼 깔끔히 무시한 그는 이내 더 이상의 다툼을 피하려는 건지 아이샤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무언가 달라진 것을 눈치 챘다.
“너 방어구를 바꿨네?”
“참 늦게도 눈치 챈다 어휴..”
“어떤 종의 소재냐, 본 적도 없는 녀석의 것 같은데.”
“훗, 놀라지 마.”
고도에서 생소하기 짝이 없는 녹색과 파란색이라는 색 조합에 상당히 희한하다는 듯 말하는 카를. 그 말에 으쓱해졌는지 양손으로 허리를 짚은 후 가슴을 쫙 펴며 그녀는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그 유명한 쇄룡(碎竜) 브라키디오스의 소재지!”
“어? 쇄룡? 설마... 그 의뢰 때문에 탄지아 길드에 갔던 거예요?”
어찌 보면 생소할지도 모르는 이름. 하지만 그 것을 듣자마자 깜짝 놀란 아이샤가 하는 말에 그녀는 더욱 기고만장 해보일 정도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서사대와 학술원에서 받았던 미기록종 탐색 의뢰에서 마주친 녀석이었지.”
“세상에... 쇄룡의 소재라니..”
“브라키디오스라니... 카얀바가 나보다도 그 굳센 녀석을 먼저 사냥할 줄은 상상 못했다, 차...”
쇄룡 브라키디오스.
일찍이 부터 용맹함을 넘어서 투사처럼 여겨질 정도의 그 투쟁심과 사납게 터지는 그 철권으로 인하여 학술원과 길드에서 주목하고 있던 공폭룡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수룡종들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독특한 수룡.
바르바레 구역과 걸쳐진 늘 만년설로 덮여있는 북쪽의 화산지대에서 처음 수렵되어 그 표본이 확보된 이래, 공생하고 있는 점균을 통하여 상상이상으로 광범위한 환경에 적응하여 살고 있다는 것이 여기저기서 암시되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쇄룡 그 자체가 관측된 후 수렵되어 표본이 확보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것을 알고 있는 카를이었기에 여동생이 하는 말에 놀라움과 함께 감탄도 하던 중 이내 문득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맞다, 탄지아에서 내가 부탁한 거 제대로 보냈지?”
“응? 어, 그 알 두 개?”
“어, 그거”
“당연히 보냈지, 내가 오빠도 아니고 그런 걸 잊을까봐.”
급히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그의 모습과 여유롭게 답하는 그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샤는 살짝 어리둥절해져서 질문했다.
“카를 씨, 알이라니... 대체 뭘 부탁해서 누구에게 보낸 거죠?”
“응? 아아, 그 작년에 왔던 그 꼬마 애에게 깜짝 선물로 엽룡의 알을 보냈어.”
“꼬마 애면... 아, 그 바튜바톰에서 왔던 꼬마 엽사요?”
“엉.”
꼬마 아가씨라는 말에 바로 누군지 떠오른 그녀가 물은 말에 정말 핵심만 간추려서 말해주는 카를. 그 걸 듣자 바로 짧은 시간 동안의 의문이 해소되었는지 아이샤는 빠르게 납득했다.
“아무래도 대검에는 엽룡이 좀처럼 쓰이기 힘들기도 하죠.”
“거기에 바튜바톰 수해에는 바다도 없으니 훨씬 편할 거야. 그 애가 잘 키워서 쓰겠지.”
“그러게요, 그 애도 나름 G급이니까요.”
“으음, G급이 어째 오빠나 아이샤와 이야기하면 생각보다 엄청 많은 것 같단 말이지..”
‘또르르.’
G급이란 말에 인상을 쓰면서 빈 음료수병을 데구루루 굴리는 벨라였지만, 그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은 딱히 무어라 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 지 그녀는 투덜거리는 투로 중얼거리듯 말을 이어나갔다.
“대해룡을 격퇴한 걸로 바보 오빠도 G급 수렵자격증을 얻었지, 작년에 왔던 나보다도 어린 꼬마 여자애도 G급 시험 때문에 마을에 온 거였지... 왠지 나만 뒤처지는 느낌이야.”
“뒤쳐지기는 무슨, 원래는 네 나이에 상위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게 더 특이한 거야.”
“그건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꼬마애에 비하면 내가 재능이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자괴감마저 느껴지는 그 말에 카를은 어떻게 답을 해줘야할지 곤혹스러워서 주춤했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려는 것인지 아이샤가 헛기침을 살짝 한 후 입을 열었다.
“흠흠, 그보다 서사대에서 벨라의 대해룡의 행동에 대한 추론을 관심 깊게 봤다고요?”
“응? 아, 맞아. 바보 오빠, 서사대의 몬스터 연구소에서 내가 제시한 근거와 추론을 꽤 관심 있게 듣더라고.”
서사대에서 눈여겨보았다. 그 말이 가지는 의미는 어찌 주눅 든 여동생을 위로해야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던 카를을 뜬금없을 정도로 황당케 했다. 약 4개월 전, 갑자기 모가 마을에 일어나기 시작한 지진의 원인인 고룡.
처음에는 라기아크루스가 원인으로 지목되어 죄 없는 그 해룡을 토벌해야 했었지만, 차차와 카얀바가 친분이 있던 아이루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탐색을 한 끝에 뿔을 기반암에 들이받고 있던 그 모습이 확인되었었다. 덕분에 내려진 격퇴 명령으로 인하여 그 원인으로 추측되는 유달리 큰 한 쪽 뿔을 카를이 두 차차브와 함께 절단함에 따라 뿔로 지반을 들이받는 것을 멈추고 돌아간 그 사건은 모가의 모든 이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이샤가 한 말은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하며 그가 뿔을 잘라낸 고룡이 그 외의 다른 이유 때문에 마을을 공격하려는 것만 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기에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엉? 그 얼토당토 없는 엉터리 이론을 서사대에서 눈여겨봤다고?”
“얼토당토 없는 엉터리라니 너무 말이 심하잖아...”
순식간에 기세가 더 꺾여서 더욱 주눅 드는 벨라였지만 이내 금세 털어낸 후 입을 열기 시작했다.
“황해룡이 어쩌면 대해룡이 성장한 개체일지도 모른다는 설에 입각한 이론이긴 하지만.”
“그거 꽤 옛날부터 도는 가설 아니냐?”
고룡종의 특성상 다른 몬스터들에 비해 그 근연관계와 성장 시의 변화에 대한 자료가 극히 드물다는 것은 사냥꾼 길드와 왕립 고생물학 서사대 양 측 다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서로간의 몬스터 분류 방식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하여 마찰도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그리 추측하기 어렵지 않은 사실이었다.
“뭐 여태까지 네 이론은 제대로 들을 기회가 없었으니 이번 기회에 들어보도록 할까.”
“아마 좀 그럴 듯하게 들릴 걸? 탄지아 서사대의 몬스터 연구소의 소장님도 꽤 흥미롭다 하셨으니까.”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목을 가다듬는 것 마냥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입을 열었다.
“오빠도, 아이샤도 대해룡을 격퇴 한 후에 자료를 찾아봐서 알겠지만, 나발데우스는 인간에 위해를 가하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보기 드문 고룡 중에 하나인 건 알지?”
“그거야 뭐 유명한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그게 왜요?”
“바로 그게 문제인 거야.”
“응?”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고룡이란 것이 어째서 문제인 것인가, 라는 의문이 피어오르려는 찰나 벨라는 그것에 또 다른 의문을 더하는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황해룡이 정말로 아종이 아닌 단지 성장 관계에 따른 분류 변화일 뿐이라면 대해룡은 굳이 뿔에 문제가 있다고 지반을 들이 받을 이유가 없는 거기도 한 거고.”
“황해룡이 여기에서 또 왜 튀어 나와?”
“오빠가 격퇴한 대해룡은 뿔이 한쪽만 비대하지만, 황해룡은 양 쪽 뿔 전부 비대하거든.”
“으음...”
뒤이어 떠오른 의문을 한 번에 종식시키는 말에 카를과 아이샤는 바로 뒤이어 할 말을 까먹고 사이좋게 골치 아픈 신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이쯤에서 정리를 해보면 요컨대 이렇게 되는 거야.”
좀처럼 감을 못 잡고 있는 모가 마을의 길드 아가씨와 오빠에게 마치 선생님이 학생을 지도하는 것 마냥 쉽고,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녀는 빈 병을 빙글빙글 돌리며 풀어 말했다.
“한 쪽 뿔이 비대해진 인한 고통 때문에 대해룡이 지반을 뒤흔든 것으로는 보기 힘들지 않을까, 라는 것.”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 그러니까 넌 나발데우스가 뿔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지반을 흔들었을 지도 모른다는 거지?”
“응, 바로 그거야.”
그 말에 손가락을 튕기며 바로 답하는 벨라였지만, 뒤이어 카를이 하는 질문에는 이번에는 그녀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면 그 다른 이유란 건 뭔지 알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지.”
“확실한 근거라곤 없는 거냐...”
“으음, 그렇다기보다는 너무 막연하다고 해야 하나...”
고민을 하는 듯 잠시 말을 멈춘 후 그녀가 하는 말에 카를과 아이샤는 역시 같은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아마 대해룡 정도의 지능을 지닌 고룡이면 단순한 이유로 들이 받진 않았을 지도 모르니까. 솔직히 원인은 내가 속단하기에는 너무 위험하지.”
“그래도 짐작 가는 게 뭐라도 있을 거 아냐? 그거라도 말해봐.”
“으음... 내 의견에 두 사람 다 뭐라고 안 할 거지? 좀 뜬금없는 이야기긴 해서.”
“일단 들어나 보죠, 궁금해요.”
아이샤의 단도직입적으로 하는 말에 머리를 긁은 후 그녀는 그 여느 때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언가의 재난에 대한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야.”
“재난? 그 이후로 그 어떤 전조도 안 보였잖아?”
“응, 그렇긴 한데 그 날 전후로 어획량이 확 줄기 시작했다는 주민 분들의 성토도 있고 하니까... 그 왜 천재지변이 일어나려하면 동물들이 도망가는 경우가 많잖아?”
“그렇긴 한데, 음. 확실히 좀 뜬구름 잡는 이야기긴 하네.”
“거봐, 역시 뭐라 할 줄 알았다니까.”
‘똑똑.’
“어라, 누군가 왔나본데.”
“그러게요, 누구지... 밖에 계신 분, 사람 있으니 들어오세요.”
카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반응하며 말하자 다시 벨라의 풀이 확 꺾이며 테이블 위에 엎드려 버리는 순간, 집회소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아이샤는 곧장 느긋하게 담소를 나누던 모습을 어느 새 싹 지운 후 업무용 표정과 말투로 바꾸며 외쳤다.
ㅡ정말 공과 사가 뚜렷하단 말이지...
‘딸랑!’
그 모습을 보며 내심 감탄하는 카를이었지만, 그런 느긋한 생각도 잠시 방울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을 통해 들어온 사람을 보고 그는 순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라, 촌장님?”
“아, 마침 있었구먼. 벨라 아가씨도 돌아온 건가?”
“아, 안녕하세요. 새벽에 막 돌아온 참이에요.”
“그런가,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
호탕한 구릿빛 피부의, 한 때는 사냥꾼으로써 탄지아에서 꽤나 이름을 떨쳤던, 하지만 이제는 고도의 유일한 마을의 촌장이 들어오자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작달막한 모가 마을의 길드 사무소 내의 모두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자네들 혹시 비행선의 신호를 읽을 줄 아나?”
“신호요? 어느 쪽 비행선에서 오는 건가요?”
“탄지아의 연락용 비행선 같네만. 아무래도 긴급 신호 같아서 말일세.”
“아, 저하고 벨라 씨가 좀 해석이 가능할 거 같은데 확인을 해볼...”
‘쿠구구구구...’
그 순간, 모가 마을의 대지를 울리는 거대한 진동. 그 진동에 모두가 깜짝 놀랄 것은 더할 나위 없었으며, 촌장의 머릿속에는 바로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또 고룡.. 아니 어신님이 일으키는 건가?”
“아뇨, 이 진동은 생물이 일으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마 자연적인 진짜 지진일 겁니다.”
순간적으로 휩쓴 진동 탓에 잠시 휘청 이던 것도 잠시 어느 새 균형을 다잡고 조금 비틀거리며 자세를 잡는 마을의 촌장과 카를은 한동안 마을을 뒤흔든 지진 때문에 그리 놀랍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꽤 규모가 컸는데... 진도 4쯤 되었을지도... 아?”
“내가 치울 테니까 얼른 나가서 촌장님이 말한 연락선에서 무어라 신호를 보내는 지 확인하고 와.”
“아주 동생 걱정은 하나도 안 하고... 어휴...”
아주 잠시 동안 마구 흔들려서 여기저기 흩어진 물건들을 치우려는 아이샤의 어깨에 손을 얹어서 밖에 나갔다 오라고 하는 그 모습에, 벨라는 등허리에 닭살이 돋는 듯 몸을 부르르 떤 후 이내 먼저 자리를 떠서 밖으로 나섰다. 평상 시였다면 은근 슬쩍 놀려먹었을 촌장이었겠지만 느닷없는 지진에 순식간에 근심이 가득해진 얼굴로 아이샤와 함께 문을 나서는 것을 보면서 카를은 여기저기에 떨어져서 흐트러진 물건을 주워 다 정리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은퇴를 좀 빠르게 하는 걸로 생각해볼까...”
평생을 사냥꾼으로써 밖에 살아오지 않았으며,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미래에도 그렇게 살아가리라 생각해온 그가 처음으로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한 전혀 다른 미래의 모습. 스스로가 아닌 가까운 이를 위하여 처음으로 미래의 모습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그 시각,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몇 개월 째 아름다운 녹색과 보랏빛의 장막이 일렁이고 있는 모가 마을의 하늘에서 천천히 회색의 눈과도 같은 가루가 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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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 댕, 댕, 댕’
“4회? 4회면 해일 경보 아닌가?”
“놔둬, 어차피 지진 때문에 안 울린 거 이제야 뒤늦게 울린 거겠지. 얼른 작업이나 끝내세.”
탄지아와 그리 머지않은 해안가에 울리는 4회의 종소리.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처음에는 해안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어부들은 좀처럼 납득하려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항구라는 특성상 언제 태풍과 그로 인한 해일로 피해를 입을지 모르는 탓에 주기적으로 대피를 위한 민방위 훈련을 주민들이 귀찮게 여길 정도로 자주 한데다가, 정작 재난 상황에선 그 상황이 지나간 후에야 울린 탓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이거, 눈인가? 뭔가 하늘에서 떨어지는데.”
“헛소리 말게, 한 여름에 무슨 눈이란 말인가. 기껏해야 작은 우박 종류겠지.”
“아니 봐봐, 아무리 봐도 이거..”
어둑어둑해진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과 같은 가루들. 그것이 얼굴에 묻자 장갑을 벗으며 손으로 문질러 닦아서 냄새를 맡아보던 어부는 이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이거 무슨 냄새지?”
“또 뭔가.”
“아니 이거 냄새가 좀 이상해서, 한번 맡아보게.”
“당최 뭐 때문인지 모르겠구먼, 어디 보자... 응?”
평소와 같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노령의 어부였지만, 반신반의하며 옷에 묻은 재를 손가락으로 닦아낸 후 그 냄새를 맡아보자 이내 인상이 확 찡그러졌다.
“이거 유황 냄새 아닌가, 설마...”
코를 톡 쏘는 것만 같은 썩은 달걀 냄새와도 같은 냄새를 맡자 대번에 그것이 무엇이 내는 냄새인지 알아챈 백발의 어부는 이내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기 시작하며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저 경고음이 뒤늦은 재난 경보가 아닐 지도 모르겠군. 얼른 넣어두고 돌아가세.”
“대체 뭐 길래 그러나, 유황이라니? 어떻게 그걸 아나.”
“옛날에 어떤 섬을 지나면서 질리도록 맡은 적이 있어... 이 냄새를 내는 건 우박이나 눈이 아냐.”
“아니면?”
노령의 어부는 그물을 정리하는 작업을 그만 두고 급히 해안가로 끌어올리면서 짧지만 너무나 명확하게 동료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단어를 내뱉었다.
“화산재야. 그것도 쏟아진지 얼마 안 된.”
“화산재라고? 고도의 화산이 또 쏟아내기라고 한...”
“바람을 보게, 이건 고도에서 온 것이 절대로 아냐! 얼른 끌어올리고 대피하세!”
‘댕, 댕, 댕, 댕’
-쏴아아아...
ㅡ쿠르르릉...
다시금 울리는 재난 경보용 종소리. 그와 함께 머나먼 해상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거대한 짐승이 포효를 하는 것만 같은 으르렁거리는 소리. 그 소리는 아직까지는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일 정도로 평온하게 해안가에 밀려 올라오는 것이 아닌, 바다로 엄청난 속도로 빠져나가는 하얀 파도소리에 뒤섞여 들려왔다.
‘까악, 까악!’
ㅡ푸드득! 푸드득!
구름떼처럼 많은 새들이 바다를 뒤로하며 도망치고 있는, 점점 더 많은 재를 흩날리며 회색빛으로 가득한 보라색 번개가 번쩍이기 시작하는 어두운 하늘. 그 회색으로 가득한 구름의 색을 바꿔가며 서서히 주홍색으로 변해가는 하늘은 해안의 바닷물을 다 빨아들인 것만 같은 밀려오고 있는 먼 바다의 거대한 파도마저 황혼의 색으로 물들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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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단단히 묶어! 아니면 전부 떠내려간다!”
“선장님, 이대로는 배가 못 버팁니다!”
“어떻게든 버텨! 그래야 해안으로 사지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다!”
‘쏴아아아!’
탄지아 항구에서 약 50해리 밖 해상.
너울치기 시작한 회색의 바다 위에서 짐을 가득 실고 바다를 건너 탄지아 항구로 입항을 시작하던 상선 올리비아는 쏟아지는 바닷물에도 불구하고 선체를 유지하려는 선원들과 선장의 노력으로 아직까진 가라앉지 않았다. 강한 너울로 이미 대부분의 화물은 소실되었고, 배를 유지하려던 선원들은 이제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기둥과 난간을 잡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쿠르르릉...!’
“대체 무슨 놈의 해일이...! 폭풍 경보도 없었건만!”
“서, 선장님! 저거...”
귀를 찢어버릴 정도의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 번쩍이는 보라색 번개로 인해 아비규환이 된 갑판 위가 비쳐 보인 것도 잠시, 바닷물을 제대로 뒤집어써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있던 선원 한명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대체 뭘... 허...”
“배를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대로 가다간...”
그리고 그 손이 가리킨 것을 보고 선장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선원들 역시 패닉에 휩싸여서 물었지만, 선장이 한 말은 그 패닉마저 지울 정도로 너무나 현실을 잘 짚어버렸다.
“아니야, 지금 배를 버리면 아마 익사할 것이 분명하네.”
“그러면...”
“어느 쪽이든 고통스럽겠지만, 조금이라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쪽을 택하게.”
‘끼이이익...’
“배가 뒤집어 진다! 전원 준비를...”
엄청난 파도에 의해 종이배처럼 마구 흔들리다가 뒤집어진 채 어디론가 떠밀려가던 올리비아의 선원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상상보다 훨씬 거대하며 가까이에 위치해 있던 탄지아 항구에 새로이 건축되고 있던 거대한 하얀 방파제였다.
ㅡ쿠콰콰콰...
‘쏴아아아아!’
엄청난 파도가 상선을 떠밀자, 상선은 가차 없이 방파제에 처박혀 천지가 울릴 정도의 폭음을 냈다. 선원들의 비명은 그 폭음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허나 그 폭음도 가루가 되다시피 한 방파제를 넘어, 가차 없이 쏟아지는 거대한 파도 소리에 묻혀버렸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거대한 파도는 어마어마한 무게와 속도로 94만 인구의 항구도시로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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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웹 몬헌게시판에는 처음 올리는 것 같네요
옛날에 썼던 글을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