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탄지아 사냥꾼 길드 임시 숙소.
피난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사냥꾼들이 모여있어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그 와중에 길드가 어떻게든 자리를 내준 숙소에서 카를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를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 걸터 앉아있었다.
‘쿠구구구....’
건물을 뒤틀어버릴 것만 같은 지진 소리를 듣자, 그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평상시엔 마실 생각도 않는 독한 술이 담신 주석 병의 뚜껑을 열어 독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평상시엔 좀처럼 마실 생각도 안하는 독한 술이 담긴 주석 병의 뚜껑을 열어서 한 모금 들이켰다.
‘똑, 똑.’
“안자고 있어, 들어와.”
“역시 안자고 있을 줄 알았어... 설마 술 마시고 있어?”
노크를 하고 들어오는 벨라는 역시 안색이 눈에 띠게 안 좋았지만, 오빠가 지난 반나절 간 여태껏 손도 안 대던 독주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을 보자 그 표정에 걱정을 띄울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취하지라도 않으면 도저히 뭘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서 말이다.”
“오빠가 그렇게 무너져 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무너지기는 무슨, 후...”
‘벌컥, 벌컥.’
인상을 찌푸리며 여동생을 들어오게 한 후 다시금 술을 들이키는 그였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도 벨라는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고 그저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후우... 빌어먹을, 사냥꾼들을 죄다 대피 인력으로 써도 모자를 판에...”
“길드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잖아, 이 재난이 고룡 때문에 일어난 일이면 당연히...”
평소의 드세게 나무라던 말과 달리, 마치 달래는 것처럼 조심스레 말하는 벨라지만 그것이 도리어 카를의 신경을 긁고 말았다.
ㅡ콰앙!
“어쩔 수 없는 선택? 그걸 말이라고 해!”
“오, 오빠?”
길드마스터에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방위 작전'에 대한 설명을 반박조차 못하고 들은 게 마음에 못이 되어 박힌 모양인지, 그간 단단히 쌓인 분노가 결국 터져 나왔다. 평소의 유들유들하고 무뚝뚝하지만, 다정하던 모습하고는 거리가 너무나 먼 그 분노 어린 모습에 벨라는 순식간에 안색이 새파래질 수밖에 없었다.
“소집령이 내려진 건 그렇다고 쳐, 그렇다고 그 인원을 전부 방위 작전에 밀어 넣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냐!”
“그건 길드가...”
“빌어먹을 놈의 사냥꾼 길드!”
‘쾅!’
길드라는 말에 결국 그는 벽에 구멍이 날 정도로 강하게 들고 있던 술병을 집어던졌다. 그의 윤리와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작전을 강요받은 탓인지 도저히 분노를 숨기지 못하는 그 모습에 벨라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좀 진정해,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 어?”
그렇게 움츠러들었던 것도 잠시, 벨라는 무언가 바닥과 침대에 너부러져 있는 것을 보고 조심스레 집어 들어서 훑어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아예 작전을 새로 짜고 있던 거야?”
“길드의 작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니 길드마스터에게 제출하고 그대로 밀어 붙일 거다.”
탄지아 사냥꾼 길드에서 배포한 길드 가이드북에 동봉되어있던 탄지아 시의 지도를 토대로 여러 가지로 머리를 쓴 것이 확연히 보이는 작전 개요를 보며 벨라는 항상 장난삼아 바보, 근육덩어리라고 오빠를 불러왔던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급박한 상황이라서 더욱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일순 들었지만 그 쓸데없기 그지없는 생각을 머리를 흔들어 털어낸 후 벨라는 조심스레 그 작전도와 카를을 번갈아보며 입을 열었다.
“길드마스터도 나름 고민이 엄청 많아 보였으니까, 중앙의 명령을 우회해서라도 오빠의 작전을 승인 해주지 않을까... 싶은데.”
“길드마스터가 읽어 주기라도 할지 의문이다, 녀석들은 나발데우스가 모가 마을을 들이 받는 데도 지원 없이 나 혼자 격퇴시키도록 보낸 놈들이야!”
카를의 목소리에는 그 때의 기억을 상기하며 치가 떨리는 듯, 날이 서슬 퍼렇게 서려있었다.
대해룡 나발데우스가 섬의 기반을 지탱하고 있는 주 기둥을 들이 받아서 자칫하면 마을 전체가 침몰해버릴 수도 있던 상황. 그런 상황에서 탄지아 길드에서 내린 얼토당토 안 되는 명령서를 받았던 장본인이기에 그에게는 탄지아 사냥꾼 길드의 당시 대처와, 용에 대한 정보조차 최대한 제한한 채 억지로 방위 작전을 떠넘기는 이번 사태가 완벽하게 겹쳐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발데우스 때문에 오빠가 길드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알겠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돈도르마에서 고집하는 고룡에 관련된 수렵법 때문이지 탄지아 길드의 탓이 아니라고?”
그걸 잘 아는 벨라의 말은 그의 길드에 대한 깊은 불신에 대한 핵심을 부정과 동시에 긍정했다. 그렇게 카를을 진정시키는 말을 하면서 쭉 계획서를 넘겨보던 벨라는 계속 읽어 나갈수록 놀람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감탄하고 있었다.
“저기 오빠, 이거 복사해서 사람들에게 좀 보여줘도 될까?”
“어찌해도 상관은 없긴 한데, 아직 미완성된 부분이 엄청 많은데 가져가서 어디에 쓰려는 거냐.”
여전히 인상에 분노가 서려 있는 채로 말하는 카를.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벨라는 다시 꼼꼼히 오빠가 써내려갔던 작전 개요를 훑어본 후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이 작전에 도움을 줄 만한 두 명한테 보여주고 완성시켜 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
“두 명? 너 설마 리엘 형님하고 저맘 이야기 하는 건 아니지?”
두 명이란 말에 카를은 인상을 더욱 찡그리며 이름을 말했지만,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작전도를 정리하여 든 후 입을 열었다.
“그 둘 중 하나는 오빠한테 대해룡을 어떻게 격퇴를 시켜야 할지 급보를 날려준 친구기도 하다고?”
“내가 생각한 작전이 결국 무슨 결과를 불러올지 몰라서 그 둘을 엮으려 드는 거냐?”
희생을 전제로 한 작전.
남들이 본다면 필히 거부할 그 방어전에, 가까운 사람들을 엮는 건 카를의 속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벨라가 한 말은 그의 마음속에 다시 불을 지펴버리기에 충분했다.
“응, 알아. 나도 갈 거니까.”
“절대 안 돼!”
호통 치듯, 호되게 외치는 그 말에 순간 벨라는 움찔했지만 그것에지지 않으려는 듯 악을 쓰면서 반박했다.
“뭐가 안 돼! 어차피 오빠의 바보 같고 무모한 작전에 자원할 사람이 나하고 리엘 씨, 그리고 저맘 빼면 있지도 않을 텐데!”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야! 넌 하나 뿐인 목숨을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이런 일에 내버리려는 거냐!”
“윽...”
노기가 서려있지만 핵심을 찌르는 카를의 말. 그 말에 정곡을 찔려버린 듯 벨라는 반박을 못하고 순간 움츠려 들었다.
“이렇게 대지를 뒤집는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존재는 용이 아니야! 대해룡 때처럼 어디어디를 자르고 뜯어내고 격퇴시켰다, 이런 선으로 끝날 존재가 절대 아니라고! 이런 존재를 상대하러 간다는 데에 동행하다니 제정신이냐!”
“그건 알지만... 으윽, 애당초 이 작전을 짠 건 오빠잖아!”
“큭...”
길드마스터의 브리핑을 들은 후 줄곧 벨라가 생각하고 있던 사실을 정확하게 짚으며 호통 치는 그 말에 벨라는 더더욱 움츠려들었다가 이내 욱한 마음에 따져 말하기 시작했다. 그 말에 이번에는 카를이 살짝 물러서듯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고룡이 아닌 다른 존재라며? 거기다 살아남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며? 이런 것을 혼자 상대하러 간다고? 제정신이야?”
“그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던 카를의 말 하나하나를 정확히 짚어서 마치 송곳으로 후벼 파는 것 같은 말. 그런 여동생의 말에 도리어 카를이 이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예리한 말로 후벼 판 곳에 소금을 쳐버리며 더욱 깊게 신음하게 만든 것은 뒤이어 그녀가 이어나간 말이었다.
“거기에 오빠는 아이샤하고 약속까지 하고 탄지아로 온 거잖아? 그걸 다 잊어먹고 살아남을 방법을 걷어차 버리겠다고?”
‘쿠구구구구....’
검지로 목에 걸려있는 하얀 용이 조각된 목걸이를 찌르면서 하는 말은 그의 속을 다시금 후벼 팠다. 무어라 답을 하기 힘들 정도로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드는 가운데, 침묵이 감돌기 직전 다시금 건물을 뒤흔드는 진동음. 그걸 신호로 벨라는 한숨을 쉬며 방을 나섰다.
“하아, 여튼 그 둘에게 보여줄 테니 복사본 만들고 올게. 혹시 몰라, 생환이 가능한 작전으로 바꾸는 게 가능할지.”
신경질적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은 후, 작전 계획서를 움켜쥐고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여동생을 보며 카를은 여전히 말없이 무뚝뚝하게 보고 서 있었다. 벨라의 말에 핵심을 찔려 버린 탓에 사고가 꽤나 마비되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는지, 목에 걸어둔 조각 목걸이를 그 투박한 손으로 잡아 보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커튼에 반쯤 가려져 있는 창문 너머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차마 어떻게 여동생의 말에 답을 해야 할지 감이 안도는 와중에 눈에 들어온 하늘은 밤이 다가오면서 점점 더 어둑어둑해져갔고, 보라색과 녹색의 빛이 춤추는 장막이 수놓고 있었다.
언뜻 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천연색 빛의 파도였다. 하지만 그걸 올라다보고 있는 카를의 무의식 속, 깊게 각인된 본능은 그 빛의 장막이 단순한 오로라가 아님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주었다.
“...다 잘 될 거야.”
ㅡ그래, 다 잘 될 거야...
현란하게 펼쳐지고 있는 황혼의 장막과 손 위의 조각을 번갈아 본 후 이내 마음을 굳혔는지, 그 굳게 다진 마음을 되새기듯 카를은 불과 몇 분전까지의 격양된 모습은 어디로 가고 그 어느 때보다 굳은 눈빛으로 다시 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시선이 향해있는 곳은 탄지아 제 1항만의 명물인 높은 등대들 너머, 시간이 갈수록 더 밝게 불타오르고 있는 수평선이었다.
-
“시장님, 가면 갈수록 지반 침하가 빨라집니다. 대피령을 빨리 내리셔야 해요.”
“으음... 더는 못 버티는 건가?”
“예, 이대로 가다간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 록락 전체가 다 무너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쿠구구구구...’
모래의 바다와 너무나 가까운 도시, 록락.
대륙의 이름에 그 도시의 이름이 붙을 정도로, 탄지아 시와 대륙 최대의 도시 순위에서 1,2위를 다투고 있는 봉산룡의 포경을 위해 모인 이들에 의해 세워진 대도시. 그 오랜 전통의 도시는 약 나흘 전부터 온 세계를 삼킬 기세로 흔들리고 있는 지진에 의해 전례 없는 격변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반 액화가 예측된 것 이상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위험해요”
“어쩔 수 없군, 신호를 올려서 그럼 피난민들을 바르바레로 이동토록 알리게.”
“예, 알겠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나절에 한 번씩 탄지아에서 연락용 비행선이 오고갔었지만, 엄청난 규모의 지진과 폭음이 뒤흔든 후로 정기연락은 고사하고 빛 신호를 보내기에도 힘들 정도로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탄지아의 난민들을 받아주겠다고 빛 신호를 통해 답했었지만, 지진이 점점 잦아지고 지반이 빠르게 불안정해지면서 난민들을 받아주기는커녕 바르바레로 곧장 넘겨 보내야 할 정도로 록락의 상황도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쾅, 쾅!’
“들어오게.”
“시, 실례합니다, 시장님! 길드마스터!”
그렇게 시시각각 상황이 나빠지는 가운데 지진으로 언제 붕괴할지도 모르는 시청이 아닌 그나마 저지대의 암반에 건축된 반 지하 상인 길드 건물 안에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직업 길드의 길드마스터들과 록락 시장이 의논하면서 대피 계획을 세우기 위해 머리를 맞대던 와중에 급히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 후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로 그리 급하게 왔나?”
“헉, 헉 재..재난 특보를 발령해야합니다, 긴급 상황이에요!”
“좀 진정하고 말하게, 대체 무슨 일인가.”
탄지아와 록락의 심벌과 서사대의 심벌을 나란히 달고 있는, 여전히 숨을 잘 고르지 못할 정도로 급하게 달려온 청년은 나이 지긋한 대장장이 길드의 길드마스터가 묻자 파리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규모 모래 폭풍이 관측 되었습니다, 당장 준비하셔야 해요!”
“모래 폭풍이야 매년 관측되지 않는가, 대체 카테고리 몇이기에 그러나.”
바르바레와 록락은 대 사막과 인접해있는 그 지리적 특징 덕분에, 매년 모래 폭풍이 서너 번씩 휘몰아쳐왔다. 매년 꾸준히 그로 인해 피해가 일어나자 근 반세기 전부터 다른 지방에서 태풍의 규모에 따라 부여하는 카테고리 번호를 부여하여 최대한 유연하고 안전하게 대응해나가고 있었다.
‘휘우우우...’
서사대원은 하얗게 질린 채 덜덜 떨며 입을 좀처럼 열지 못했다. 그래서 반 지하 건물 안에서도 바람의 비명만이 들릴 정도로 모든 게 정적에 잠겼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낀 시장은, 그걸 애써 부정하기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것을 부정하려는 듯 시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리 강해봐야 이 시기에는 카테고리 3 아닌가? 왜 그렇게 뜸을 들이나?”
“아, 아닙니다... 전례 없는 카테고리 7...입니다!”
스스로가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지 순식간에 팍 줄어든 목소리로 내뱉은 카테고리 7이라는 말. 그 말을 분명 들었음에도 순간 자신들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록락 사냥꾼 길드의 길드 마스터가 되물었다.
“카테고리 몇이라 했나? 방금 숫자를 잘못들은 거 같은데.”
“카테고리 7...입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 숫자는 현실감을 순식간에 앗아가며 그걸 듣고 있는 이들에게 마치 지독하게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선사했다. 어떻게든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그 기분을 억누르고 록락 시장은 다시 차분히,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확인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7? 정말 7이 맞나?”
“예, 확실합니다!”
“맙소사...”
그 충격적인 숫자가 사실임을 확인하자 시장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단 시장 뿐 아니라, 직업 길드의 길드마스터 들도 그 충격을 금치 못할 정도로 높은 분류에 넋이 나가버린 듯 안색이 파리해진 채로 들어왔던 서사대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슈퍼 셀의 형성도 확인되어서 토네이도 경보도 내려야 합니다! 빨리 안 하면 위험해요!”
“하얀 용이시여...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대지가 내려앉는 것만 같은 진동과 함께 서사대원의 입에서는 더욱 충격적인 소식이 더해졌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규모의 모래 폭풍에 토네이도 경보까지 내려야 한다는 말에 시장은 눈가를 손으로 짚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반세기 전, 카테고리라는 규격으로 모래폭풍의 규모를 분류하기 시작한 가운데 여태껏 관측된 폭풍 중 가장 강한 것은 카테고리 5에 그쳤었다. 물론 그 정도 사이즈의 모래폭풍만 되어도 충분히 록락을 위협할 정도로 강대했기에 그에 따른 대비를 철저히 하며 건물들에 대한 안정성도 높여왔지만 카테고리 5은 7에 비하면 하룻강아지에 불과한 규모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들이기에 그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숫자에 멍해지듯 넋이 나가버릴 수밖에 없었다.
‘쿠구구구구....’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대응책을 세우기 전에 들이 닥치는 폭풍들이라니...”
“토네이도가 몰아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대피하셔야 합니다! 이 방공호로는 못 버텨요!”
대지 아래로 쑥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의 격렬한 진동. 그 진동에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겨우 벽을 짚어서 자세를 유지하면서 외치는 서사대원. 그의 말에 사람들은 무어라 말해야 할지 감도 못 잡은 채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침묵이 계속되려던 찰나, 이마를 짚고 있던 시장이 입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피난 명령을 내리고, 바르바레에 긴급 구호 신호를 보내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시장님, 설마 록락을 포기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경례를 한 후 뛰쳐나가는 서사대원을 보고 있는 시장을 향해 걱정스레 묻는 대장장이 길드의 길드 마스터. 그 불안이 섞여 있는 질문에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투가 강하게 베여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시장의 답은 그 헛된 부정도 다시 깨부숴줬다.
“후.. 카테고리 7이면 록락은 완전히 폐허가 될 겁니다. 다른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면 대피를 어디로 해야... 바르바레도 안전한 곳은 아니잖습니까.”
“일단은... 바르바레로 갔다가 뒤는 나중에 생각해야겠죠.”
그 모든 것을 포기한 것만 같은 말에 모여 있던 길드마스터들과 시 의원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불과 몇 분전만 해도 재난에 휘말려 철저히 파괴당하고 있는 탄지아 시의 난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 줘야할지 의논하고 있던 것이 이제는 살아남기 위한 긴급 대응을 논하고 있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기도 했다.
“정말 세계가 멸망하려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이렇게 온 세계가 신음하다니...”
“어쩌면, 인간에게는 이런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쿠구구구...’
언제라도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근 며칠간의 재난의 향연. 그것에 대해 사냥꾼 길드의 길드마스터가 탄식을 하는 사이 대지는 다시금 크게 울리며 뒤흔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강해지며 더욱 빠르게 대지가 내려앉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될 정도의 진동. 그 진동에 건물은 격렬하게 위 아래로 요동쳤지만, 이제는 그 대지 아래에서 오는 재난이 아닌 하늘에서 밀려올 재난에 대한 공포가 시시각각 사람들의 마음에서 커져가고 있었다.
‘휘우우우우...’
“하얀 용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기를...”
점점 커져가는 바람 소리 아래, 그 짙은 두려움이 얼굴에 내깔리기 시작한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 그 말과 함께 건물을 울리는, 지진과는 다른 진동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대지의 황혼은 서서히 대지 위의 모든 것을 덮어가면서 그 색을 짙게 퍼트려나가고 있었다.
-
“정말, 벨라는 얼토당토않은 작전을 들고 왔네.”
“내가 구상한 게 아니라니까, 그 바보 오빠가 생각한 거지.”
“흐음...”
탄지아 고생물학 서사대.
탄지아 전체에 내려진 대피령으로 인하여 사실상 남은 사람이 없다시피 하여 한산하다 못해 텅 비어버린 서사대 건물. 그런 바람소리만 들려오는 서사대의 자료실 중에서 평상시나 재난 상황이나 동일하게 사람들이 좀처럼 찾지 않는 고룡생태학 칸에서 탄지아는 고사하고 돈도르마에서도 보기 힘든 특이한 제식 장비를 낀, 단발을 한 벨라와는 대조되는 장발의 여성이 벨라가 건네줬던 종이를 훑어보고 있었다.
“주인님, 록락 사막에서 초대형 모래폭풍이 관측되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냥.”
“으음, 이 재난이 좀 진정돼도 당분간 메제포르타로 돌아가긴 힘들어지겠네...”
“주인님 어떻게 할 생각이냥?”
역시 탄지아 사냥꾼 길드의 동반자 아이루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아이루가 열려있는 자료실 문을 넘어 달려오며 하는 말에 그녀는 골치가 좀 아픈지 머리를 긁적이다가 답했다.
“일단 당분간 귀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자. 하토, 전보를 날려준 후에 계속 소식을 좀 가져와줘.”
“알겠다냥, 비둘기를 날릴 테니 주인님도 얼른 정리마저 끝내라냥.”
“메제포르타로 당분간 돌아가기 힘들다니, 거기에서 뭐라 걱정 안 하겠어?”
“으음, 딱히 걱정해줄 사람이라고 해봤자 부모님뿐인걸 뭐. 그마저 너보단 덜 걱정하실 걸?”
동반자 아이루 하토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달려가는 걸 보면서 곰곰이 지켜보던 벨라가 하는 말에 저맘은 고개를 살짝 돌려서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모습에 벨라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황급히 휙휙 저은 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으윽, 뭐 하여튼! 저맘도 알겠지만, 길드마스터는 탄지아와 그 반경 몇 백리의 사냥꾼들을 전부 호출, 동원해서 이 ‘용’을 격퇴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거든.”
“응, 알지. 그런 녀석을 네 오빠는 4인서 먼저 어떻게든 발을 묶어보자고 계획을 짠 거고.”
‘쿠구구구....’
다시금 대지를 낮게 울리는 진동음. 그 진동에 예의치 않고 광충 램프의 깜빡이는 빛 아래에서 저맘은 다시 계획서를 차례대로 읽어나가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벨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리엘 씨한테도 줬지?”
“응, 좀 심각하게 보시던데. 아마 오빠한테 가서 지금쯤 의논하고 있지 않을까...”
“으음, 확실히 그 분 성격이면 그럴 만하겠네.”
책 더미 사이의 의자에 앉은 채로 물끄러미, 그리고 찬찬히 작전을 다시 훑어보는 저맘을 보던 중 벨라는 무언가 문득 떠오른 듯 입을 조심스레 열었다.
“오빠는 이 ‘용’을 고룡이 아닌 다른 무언가 일거라 말하더라고.”
“헤... 그 카를 씨가 그렇게 말했다고?”
“응, 그래서 길드마스터의 방위 작전에 더욱 화내던 거 같은데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벨라는 스스로의 감이 부족한 것을 탓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배워온 지식이 부족한 것을 자책하는 것인지 움츠러든 투로 말했다. 그것을 알아챈 것일까, 저맘은 다독이듯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여린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아니야, 벨라는 잘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 많을 뿐이야.”
“혹시 너도 이게 진짜 용이 아닌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으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마치 남들이 다 아는 것을 자신만 모르는 것 같다는 원망이 비치는 벨라의 말과 눈빛에 저맘은 난감한 듯 볼을 긁적였다. 그렇게 뜸을 들이는 동안 자신을 올려보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그 눈빛에 더더욱 부담을 느끼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알겠지만, 내 전공이 고룡학인 거 알지?”
“응, 알지. 덕분에 나도 많은 걸 배울 수 있었고.”
“그러면 설명하기 편하겠다, 일단 이 ‘대규모 방위 작전’의 초안은 메제포르타 서사대와 사냥꾼 길드에서 만들어졌던 거야.”
“어?”
저맘이 밝힌 첫 번째 사실에 순간 벨라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도 멍청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그것을 아는지 마치 되새길 시간을 주는 것처럼 뜸을 잠시 들인 후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일반적인 고룡에 대한 작전은 아니야. 절도(絶島)에서 잠들어 있는 뱀에 대비한 거였으니까 말이지.”
“절도의 뱀? 그 대암룡(大巖竜)? 그 녀석 고룡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응, 그래도 성채게처럼 고룡에 맞먹는 존재임이 확인되어서 나름 대비를 한 거지. 문제는 여기서부터야.”
쌓여있던 책들 몇 권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저맘은 마치 재밌는 농담을 던지듯 슬쩍 웃음을 띤 채로 말을 이어 나갔다.
“과연 이 작전이 처음 제안되었을 때부터 대암룡만을 위한 거였을까?”
“대암룡 외에는 그런 작전이 필요한 건 노산룡이나 성채게 정도 밖에 없지 않아?”
“아냐, 그 둘은 돈도르마의 요새거리가 요격을 하고 있으니까 논외로 봐야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벨라는 짐작 되는 것이 있을까?”
“으음...”
벨라는 좀처럼 감이 안 오는지 깊이 신음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녀는 쓴 웃음을 지은 후 마치 답안을 알려주는 선생님 같은 투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일단 첫 번째 이유는 몬스터와는 거리가 좀 먼 거라서 생각하기 힘들었을 거야.”
“어? 그럼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야?”
“응, 길드 내의 정치적인 이유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말끝을 살짝 흐린 후, 어떻게 마저 말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을 잠시 지었던 저맘은 이내 머릿속에서 얼추 정리된 듯 말을 이어나갔다.
“과거부터 그랬지만, 길드는 애초에 사냥꾼을 소모품으로 여기고 있어. 그래서 굳이 군대가 맡아주겠다고 하는 고룡의 요격을 자신들이 담당해오고 있는 거였거든. 그러니까, 이런 대규모 동원은 헌터들을 물갈이 하려고 한다는 의도도 있다는 거지.”
“길드가 헌터를 소모품으로 본다고?”
“응, 너나 나나 결국 길드 입장에선 쓰다가 스러지면 대체해버리면 그만인 입장인 거야.”
“으음... 확실히 길드가 사냥꾼을 막 다루긴 하는데 그래도...”
분명히 규정에 쓰여 있는 대로라면 사냥꾼들은 수렵 후 최소한의 휴식 기간을 가져야 했지만, 가끔씩 사냥꾼 길드는 그 휴식 기간이 반도 지나기 전에 위험한 의뢰를 반 강제로 떠넘기곤 했다. 벨라에게도 그런 기억이 생생히 각인되어 있었기에 길드가 자신들을 그저 쓰다가 버릴 폰으로써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온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런 의구심을 노골적으로 사실이라 인정하는 저맘의 말이었기에 당장 그것을 현실로써 완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마음 한편에서 불편함이 감돌고 있었다.
“뭐, 메제포르타가 시국으로 승격된 후 사냥꾼 길드마저 독립해 나간 후에 뒤따라서 다른 지방 지부의 길드들도 자치권을 크게 얻어 나가기 시작하면서 차차 나아지긴 했지만 말이지.”
“나아진 게 3000명을 사지로 몰아넣는 거라고...?”
“응, 10년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벌써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릴 밀어 넣었을 걸?”
무덤덤하게 말하는 저맘이었지만, 그 말에 소름이 돋는 듯 벨라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역시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탄지아 사냥꾼 길드도 돈도르마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긴 하지만, 음. 뭐 하여튼 첫 번째 이유는 저런 거야. 좀 끔찍한 이유지.”
“확실히... 좀 듣기 거북한 이유네.”
“응, 이제 두 번째 이유를 알려주도록 할게. 아마 이건 알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벨라의 살짝 찡그러진 표정을 뒤로하고 저맘은 곧장 말을 이어나갔다.
“천검산에서 똬리를 튼 채로 바위처럼 굳어있는 존재에 대해선 알고 있지?”
“아아, 그 천의 검을 두른 뱀? 그 녀석 유명하잖아.”
“으음, 사실 그 이름도 해석을 잘못한 이름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면 누구나 아는, 사키 국의 천검산 전체를 휘감아 똬리를 튼 채로 바위처럼 굳어있는 거대한 뱀.
그 덩치 때문에 결코 살아있는 존재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아득히 인식을 벗어난 그 사황(蛇皇)에 대해 언급하자 벨라는 이제야 자신이 아는 것을 들었다는 듯 곧장 답을 했지만, 그 말에 뺨을 긁적이며 애매한 표정으로 말하는 저맘을 보자 벨라는 아리송해질 수밖에 없었다.
“해석을 잘못 한 이름이라니? 다른 고룡들처럼 고대 미나가르데 어가 아니었어?”
“응, 본디 고대 사키 어인데 발음이 비슷하다고 완전히 오역해버린 거지.”
“본디 무슨 뜻이기에 그래?”
“고대 사키 어의 발음을 그대로 말해주긴 그렇지만, 그 뜻 자체는 ‘달을 빚은 자’야.”
“달을 빚은 자...”
자신이 알고 있던 뜻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 그것을 알게 되어 버려서 잠시 멍하게 있는 벨라였지만, 그걸 봤으면서도 저맘은 헛기침을 살짝 한 후 말을 이어나갔다.
“흠흠, 뭐 오역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본래 대규모 방위 작전은 혹시나 ‘달을 빚은 자’... 그러니까 천고불후를 읊는 왕이 천검산에서 내려오기라도 할 경우에 대비한, 바르바레 길드가 창설될 당시부터 세워졌던 기초적인 대규모 방위 계획이었지.”
“어... 하지만 천검의 황제는 고대부터 지금껏 쭉 안 움직이고 있잖아?”
인류가 그 존재를 확인한 이래, 드물게 움직이는 곳이라고는 가끔씩 돌아가는 가는 눈동자 외에는 없는 천의 검을 두른 뱀의 황제. 그 사실을 벨라는 당연히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곧장 떠오른 의문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을 안 듯 저맘은 어깨를 으쓱했다.
“응, 그래서 페이퍼플랜으로만 남겨졌다가... 시국과 그리 머지않은 섬에서 동면중이던 거대한 용을 발견한 메제포르타 길드에서 그 개요를 다시 가져갔고, 그것을 토대로 수정한 긴급 계획이 지금 탄지아에서 실행되려는 거지.”
“복잡해...”
“으음, 요약해보자면 노산룡을 뛰어넘은 위험에 대비한 작전을 처음으로 실행하는 실험 쥐 신세가 된 거라는 게 두 번째 이유라는 거지.”
“어느 쪽이든 길드의 생각이 마음에 안 들어...”
요약해준 결론을 듣고 벨라가 툴툴거리자 저맘은 다시 쓴 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거야. 그걸 감안하고 보면 카를 씨의 이 초안을 보면 상당히 희생을 줄이려고 한다는 게 바로 눈에 들어오지.”
“그래도 결국 3000명의 목숨이 달려 있는 건데...”
“그 인원을 어떤 식으로 쓰냐에 따라 인명을 경시하는지 아닌지 판가름이 나기 마련이니까.”
‘쿠구구구구....’
ㅡ쩌저적...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건물이 다시 격렬하게 진동했다. 점점 지진이 대지를 울리는 간격이 짧아진 것 같았다. 책장 중 몇 개는 쓰러지고 벽에 금이 가는 소리가 사람이 거의 없는 한 건물 안에 울려 퍼졌다. 점차 강해지는 듯 책장 중 몇 개는 쓰러지며 벽에 금이 가는 소리가 이제 사람이 없다 시피 한 건물 안에 울려 퍼졌다.
“으음, 이제 슬슬 무기 정비하러 가야 하나... 필요한건 하토한테 다 보관토록 했으니.”
“정비? 설마 진짜로 이 작전에 참여하려고?”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저맘을 보며 한껏 당황한 표정을 띄우는 벨라였지만, 그것을 보고 그녀는 미소를 띠면서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그 누구보다 생각하는 네가 참여한다는 데, 안 할 리가 없잖아?”
“그래도 참가하면 죽을 지도 모르는데?”
마치 만류를 하려는 것만 같은 말. 하지만 그 말에 저맘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조금의 여유를 주지 않고 답했다.
“앉아서 지켜보다가 얼어 죽는 것보다 난 연인하고 같이 맞서다 죽는 걸 택하고 싶어서.”
“하아... 알았어, 그러면 길드마스터한테 같이 가야 할 거 같은데 괜찮지.”
“응, 뭐 시간도 없다시피 하니까 금방 허가를 내려주겠지만.”
“목숨이 달린 주제인데도 저맘은 너무 태평해...”
“으음, 그런 가?”
“그런 거지.”
연이은 지진으로 놀라서 날뛰고 있는 광충들이 담긴 랜턴이 깜빡이며 그 빛을 서서히 잃어가는 가운데, 그것을 집어들 생각도 않고 두 사람은 그렇게 심각하기 짝이 없는 주제로 만담 아닌 만담을 나누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금이 점점 뒤덮으며 파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자료실을 나서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으음, 뭐 다 잘 되겠지.”
“오빠처럼 말하네, 저맘도.”
“그렇다고 백룡이라는 미신에 기대기엔 자존심이 용납을 못해서.”
“어휴...”
‘쿠구구구...’
몇 번의 수렵을 같이 다녔던 탓인지, 카를의 입버릇을 그대로 하는 것을 보면서 머리를 절래절래 흔드는 벨라였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료실의 문을 닫기 직전 울리는 진동과 함께 저맘은 다시금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ㅡ다 잘 될 거야.
마치 절망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만 같은 생각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녀가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여성을 동요 시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듯 다시금 되뇌었다.
“전부 잘 될 거야.”
그런 거짓에 가까운 말로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저맘의 위로, 오로라가 그 현란한 빛을 자랑하듯 쉬지 않고 격렬히 춤추며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
“록락과는 연락이 끊어졌나?”
“예, 마지막으로 받은 전보의 내용은 바르바레로 피난민들을 보내라는 거였습니다.”
“맙소사...”
탄지아 대장장이 길드와 그리 머지않은 곳에 위치한 임시 시청. 시 의원들과 무너져가는 건물에서 중요 자료만 빼내서 온 서사대장과 역시 무너져가는 건물에서 몸과 장비만 간신히 빼온 다른 직업 길드의 길드마스터들은 서사대원이 전한 가장 가까운 록락과 연락이 끊겼다는 소식에 큰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록락과의 연락이 끊긴데다 피난민들을 바르바레로 향하도록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만, 진정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지금 이 시국에 민간인 피해보다 더 큰 문제라니, 말이 된다 생각하오?”
“예, 대양에서 분화한 화산의 폭발 규모에 대한 계산이 얼추 끝나서 말입니다.”
따지듯이 묻는 시 의원에게 서사대장은 그림자를 드리운 얼굴로, 그 여느 때보다 절망감이 깊게 베여 들어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어두운 분위기는 그나마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학술원장도 동일했기에 순간 모인 이들은 무언가가 상상 이상으로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학술원이 기록한 화산 중 가장 거대한 규모였던 것은 현재는 사화산이나 다름없는 수해의 일부를 덮고 있는 폰란 초 화산이었습니다.”
“대체 얼마나 규모가 거대하기에 그런 초 화산이 언급되는 것입니까.”
폰란 초 화산.
칼데라만 해도 상식을 부술 정도로 거대한 초 화산. 인류가 나타나기도 전, 아득한 고대에 분화한 그 화산. 단 한 번의 분화로 당시 바다였던 폰란 지방의 기반을 만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용암을 쏟아내며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지각 판의 경계를 생성하였을 정도로 거대한 화산이었다.
하지만 학자들과, 특히 근래의 대중에게 있어선 현대의 그 어떤 생물보다 다양하게 분화하고 엄청난 개체수를 자랑하던 삼엽충들을 포함한 그 당시의 생물군의 약 9할 이상을 멸절 시킨 ‘멸종의 어머니’라 불리는 첫 번째 대멸종의 뇌관을 당긴 근원으로써 그 유명세를 퍼트려 나가고 있었다.
그런 화산의 이름이 언급되자 불안감에 휩싸인 탄지아 시장이 사색을 넘어서 어마어마한 무력감과 절망만이 밀려오려는 것을 어떻게든 숨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최대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그 폰란의 초 화산 대 분화에 필적하는 규모입니다. 더 클 지도 모릅니다.”
“하얀 용이시여..”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심정마저 산산조각 내는 답이었다. 어마어마한 절망에 시장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 반응을 보고도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지 상인 길드의 길드마스터가 난색을 표하며 다시금 질문했다.
“대체 그 규모가 어느 정도 길래 그러는 겁니까? 용암도나 고도의 화산보다 더 큰 겁니까?”
“차라리 모르시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길드마스터.”
평소의 학술원장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말에 상인 길드의 길드마스터를 포함하여 폭발의 규모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그런 가장 큰 당부를 무릅쓰고 다시 그는 되물었다.
“시장님은 얼추 아신 거 같은 눈치라 더 궁금합니다. 학술원장, 부디 알려 주십시오.”
“후우...”
결국 꺾이지 않는 그 의지를 확인한 학술원장은 어떻게 말해야 하나 깊게 고민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렇게 어찌 쉽게 풀어야 할지 머릿속을 정리하려던 찰나, 서사대장이 깊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마 이건 서사대장님도 아시는 사실일 테지만, 폰란의 초 화산은 그저 무시무시한 양의 화산분출물과 유독가스를 내뿜게 만드는 폭탄을 터트린 뇌관일 뿐이었죠.”
“뇌관이라니... 대체 얼마나 큰 영향을 줬기에...”
“시초가 된 분화는 얼마 가지 않고 멈췄지만, 분화가 완전히 멈추기 까지는 그로부터 약 100만년이 지나야 했습니다.”
“100만년이나...”
실로 상식을 벗어난 그 엄청난 분화 기간에 길드마스터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것을 봤지만 학술원장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 분화의 충격으로 생명의 역사상 가장 종의 다양성이 다양하던 시기에 전체 생물 개체들과 종들의 9할 이상이 사라지며 황금기가 대번에 끝나버렸죠.”
“황금기를 끝내다니, 대표적으로 어떤 종이 살던 시기를 끝내버린 거요?”
좀처럼 짐작이 안가는 표정으로 대장장이 길드의 길드마스터가 묻자, 이번에는 서사대장이 답했다.
“지금은 오로지 화석으로 밖에 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그 당시 그 어떤 생물보다 번성했던 건 삼엽충이었습니다. 녀석들을 포함하여 대지 위에 생명이 다시 거닐기도 위태로울 정도로 쓸어버린 멸종은 그것이 처음이었기에... ‘첫 번째 대멸종’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 첫 번째 대멸종과 판박이인 이상,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 종과 개체수의 9할 이상은 대지와 바다에서 지워질 것입니다.”
“잠시, 지워진다니. 설마...”
“예, 인류 문명의 멸망을 넘어서, 인류 자체가 다른 무수한 종들과 함께 멸종할겁니다.”
“맙소사...”
서사대장이 말한 것에 뒤이어 학술원장이 너무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한 말은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자 여기저기서는 공포에 섞인 탄식이 아닌, 압도적인 절망에 의한 침묵이 내리깔렸다.
“하지만 폰란은 내륙이고, 이번은 해저화산이지 않소? 대응만 잘하면...”
“해저라서 더욱 문제인 겁니다, 길드마스터. 유독한 해수, 지진 해일... 게다가 아직 제일 두려운 것은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제일 두려운 것이라니?”
“하늘로 치솟은 재의 기둥이 무너져서 사방으로 쏟아지는 걸 말하는 것이오. 밀려오면서 닿는 모든 것을 불태우면서 대지를 독과 죽음으로 모조리 뒤엎어 버리는...”
폰란의 초 화산에 대한 언급이 나온 시점에서 모든 것을 알아버린 듯한 시장의 덤덤한 말은 그저 본능에 가까운 무의식 속에서 느끼던 절망을 확연히 드러내게 하여 모여 있는 이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쿠구구구...’
“아니, 그러니까 여기는 관계자 외...”
“길드마스터가 여기 계신다면서 왜 막는 겁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게 안 된다니까요, 지금은 출입금지입니다.”
그 저항할 수 없는, 본능 속에 각인된 절망으로 인해 내리깔려있던 침묵은 이제는 익숙해지려하는 대지의 진동이 울려도 깨질 생각을 않았다. 도리어 그 침묵을 깨트린 것은 밖에서 아옹다옹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였다.
“거기 밖에 누가 왔는가? 들여보내게.”
“거 보쇼, 들어가도 된다고 하잖습니까. 그럼 실례합니다.”
“아앗..”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표정의 시장이 들여보내라고 한 말에 문 너머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여직원을 나무라듯 하는 말이 들린 후, 노크라곤 없이 문이 거침없이 열렸다.
“무슨 일인...”
“길게 질질 끌지 않겠습니다, 함대 전멸하고 방위군도 박살난 거 알고 있으니 이번 대 방위 작전의 모든 결정권을 동원된 사냥꾼들에게 주시죠.”
문이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강하게 밀고 들어온, 경 석궁을 짊어지고 있는 검은 색과 회색이 섞인 갑옷을 연상케 하는 두터운 복장을 입은 채로 투구를 벗어들고 있는 남성. 그는 들어온 직후 시장이 무슨 연유로 왔는지 채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여기 노인 분들이 나름대로 여기서 머리 굴리고 있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3000명이나 되는 인원을 제 멋대로 막 지옥도로 몰아넣는 건 심하지 않슴까.”
“잠깐 3000명? 자네 어디 소속인가?”
다른 부연 설명 없이 거침없이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들으며 시장은 당혹스러운 듯 질문했다. 비단 시장 뿐 아니라 탄지아 헌터 길드의 길드마스터 외에 전부 곤혹스러움을 적나라하게 표정에 드러낸 가운데, 그는 헛기침을 한번 한 후 입을 열었다.
“이거 실례, 바르바레 사냥꾼 길드 소속의 리엘이라고 합니다.”
“바르바레? 바르바레의 헌터가 여기엔 어쩐 일로...”
“아니 뭐 떠돌이 헌터일 뿐이니 그건 신경 쓰지 마시고... 권한 주시겠습니까, 안 주시겠습니까.”
록락과는 정 반대 위치에 자리한 캐러밴의 도시 바르바레 출신이라 간단히 소개한 후 다시금 날카롭게 되묻는 리엘의 말에 전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권한이라니, 무슨 권한을 말하는 것인가.”
“음, 아직 시장님은 모르는 것인가. 뭐 아무렴 설명해드립죠.”
귀찮은 듯 머리를 벅벅 긁은 후 그는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이미 탄지아 함대가 그 고룡인지 뭐신지 하는 거에 궤멸했다는 것은 피난하는 이들과 사냥꾼들 사이에 소문으로 쫙 퍼져있습니다. 뭐, 개인적인 루트로 그게 사실인지 확인한 이들도 많고요.”
“그게 무슨...”
어떻게든 기밀로 하려던 사실이 줄줄 세어나갔다는 것에 놀란 찰나, 그걸 깔끔히 무시하며 리엘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저렇게 대 고룡 무장을 잔뜩 챙겨갔을 탄지아 함대를 고기밥으로 만들어 버린 놈한테 정규군도 아닌 사냥꾼 3000여 명 긴급 소집해서 방위를 강요한다, 이거죠.”
“사냥꾼 3000명을 방위 작전에? 길드마스터 이게 사실이요?”
처음 듣는 엄청난 숫자의 인명이 투입되는 작전 때문일까, 초췌한 얼굴의 탄지아 시장은 경악한 표정으로 헌터 길드의 길드마스터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실은...”
“아, 좀 말을 정확히 해보면 ‘탄지아’ 길드의 의지가 아니라 ‘돈도르마’ 길드의 고룡에 대한 처리 법안을 따르는 거겠죠. 안 그렇습니까?”
마치 송곳으로 후벼 파듯 조목조목 짚어나가는 리엘의 말에 다시 길드마스터의 말은 끊겼다. 그 엄청난 인명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자신들에게 통보하지 않고 보내려했다는 것 때문일까, 따가운 시선이 탄지아 헌터 길드의 길드마스터에게 쏟아졌지만 그 모습을 보고 헛기침을 다시 한 후 리엘이 입을 열었다.
“흠흠, 뭐 그래도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긴 했습니다만. 일단 제가 온 건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무의미한 죽음이나 다름없는 작전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니? 그럼 왜 온 건가?”
도통 이해가 안 가는 리엘의 말에 시장이 직접 되물었다. 죽음은 누구나 피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리엘의 태도는 더더욱 이해가지 않았고, 탄지아 시장은 물론 다른 이에게 깊은 의문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작전에 참가할 이들이 작전을 직접 바꿀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굳이 하나 더 바란다면 참가자들이 요청할 수 있는 바에 따라주시는 겁니다. 크게 힘든 것도 아니잖습니까?”
“정말로 권한은 결정권만 달라는 거군.”
“예, 크게 바라는 것도 아니라 저것만 있으면 끝납니다.”
“그보다 참가자들이 요청할 것이라니? 그건 또 뭔가?”
정말로 오직 작전 권한만 달라는 것에 놀람을 느끼면서도 뒤에 덧붙여진 말에 또 다른 의문을 가진 채로 묻는 시장의 말에, 리엘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입을 열었다.
“뭐, 지금 이 시각에도 어떻게든 작전을 손보고 있는 녀석의 요청이니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녀석이라니? 자네 누가 시켜서 온 건가?”
“아아, 저는 누가 시켜 온 것도 아니고 그저 아무런 지원 없이 홀로 대해룡을 격퇴해야했던 녀석의 대리일 뿐입니다.”
“대해룡... 카를 군의 친구였구먼.”
“뭐 하여튼, 결론은 권한 주실 겁니까?”
아무런 지원 없이, 라는 말에 힘을 넣어 강조하며 말하는 리엘의 말에 누구의 대리로 온 것인지 알게 된 탄지아 사냥꾼 길드의 길드마스터. 하지만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들게 할 그 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틈도 안 주고 리엘은 바로 연달아 되물었다.
“후우... 자네들의 입장도 생각하지 않고 내가 너무 독단적으로만 밀어 붙였던 것 같구먼.”
“아뇨, 길드마스터도 나름대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시도하신 거 아닙니까. 그냥 저희가 요청한 것만 해주시면 됩니다.”
“일단 탄지아 시에서는 최대한 자네들이 요청할 것을 받아들여보도록 하겠네.”
또다시 많은 수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한다는 죄책감이 얼굴에 극명하게 떠있는 시장이었지만, 그렇게 죽음에 직접 대면해야 하는 이들을 사실상 대표하는 이의 요청이기도 했기에 그 것에 대해 시장은 결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후.. 탄지아 사냥꾼 길드의 길드마스터로써, 자네들에게 최대한 작전 권한을 인계하겠네.”
“감사합니다, 졸지에 결정을 강요 드리게 되어서 좀 죄송하군요.”
“아닐세, 정말로 목숨을 걸고 나가는 건 자네들인데 나같이 탁상놀음 하는 노인네가 머리 굴려봤자 아무런 쓸모도 없지 않나.”
모인 이들이 절실히 느끼고 있는 사실을 끌어올리는 말. 그 말에 리엘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러면 대충 정리된 거 같으니 저도 얼른 작전 수정하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하면 상인길드와 대장장이길드도 최대한 지원 가능한 무장을 지원하겠네.”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고 그 시간에 최대한 낙오된 사람들을 모아서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주십쇼.”
추가로 지원을 해주겠다는 말을 단칼에 거절하며 단호하기 짝이 없는 말로 답하자 말한 이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걸 본 건지 안 본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리엘은 한숨을 짤막하게 내쉰 후 벗어들고 있던 투구를 썼다.
“최대한 빨리 필요한 물품들을 추려 낼 테니 목록이 오는 대로 준비를 부탁드립니다.”
“알겠네, 목록이 들어오면 최대한 빨리 준비하도록 하지.”
‘쾅.’
다시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크게 울리며 닫히는 문, 그와 함께 옥랑룡을 연상케 하는 투구를 다잡아 쓴 리엘은 밖으로 나섰다.
“후, 제독님 모습이 안 보이는 걸보니 설마 했던 궤멸인가... 군의 지원을 받기 어렵겠구먼.”
안타까운 듯 중얼거리며 힐끗 문을 돌아본 후 리엘은 등에 메고 있던 라이트 보우건의 위치를 바로 잡은 후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얼른 이 그나마 좋은 소식을 전하러 가볼까...”
‘쿠구구구...’
날이 갈수록 더욱 하늘에 짙고 화려하게 넘실거리는 오로라를 올려다본 후, 낮은 음으로 진동하는 대지에 맞춰서 리엘은 발걸음을 탄지아 길드로 향했다. 대지의 황혼이 탄지아 항구에 도달하기까지 이제 약 이틀이 남아있었다.
-
“본디 이건 대암룡을 상대하기 위해 고안된 대토벌 작전이라서 해안 지대에 알맞도록 개선을 좀 더 가해야하는데, 그건 아시고 쓰시려는 거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이것 외에 대안이 없어.”
‘쿠구구구구...’
탄지아 사냥꾼 길드.
낮은 음을 울리는 천장과 바닥의 진동에 몸이 흔들렸지만, 탄지아 길드에서 제시했던 방위 작전을 전면 개선하기 위해 모인 이들에게는 이제 충분히 익숙해졌고, 그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어서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일단 다시 짚어보자면, 라비엔테의 대토벌 작전을 기반으로 변경하는 거기에 아무리 지금 최대한 머리를 굴려도 공백이 생길 건 알고 계시죠?”
“몇 주를 검토해도 모자를 일을 몇 시간 만에 하는 거니 그건 당연히 알고 있지.”
라비엔테의 대토벌 작전.
메제포르타 시국의 영해인 절도(絶島)에 위치한 거대한 사룡이 눈을 떠 대지를 뒤엎기 시작할 지도 모를 때를 대비한, 길드의 미신적인 금기인 4인 수렵을 깨트린 터무니없는 작전. 그 작전을 기반으로 짧은 시간 안에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대 방위 작전을 수정하고 있는 것임을 재차 확인하는 저맘의 말에 카를은 이미 안 다는 듯 빠르게 답했다.
“사실 그걸 떠나서... 애초에 이건 방위 작전이라 보기에도 힘들 정도에요, 음 그러니까...”
“대 피난 작전이지. 애당초 이 용은 3000명의 인력을 들이 부어도 막지 못할 거야. 군대가 못 막은걸 어떻게 사냥꾼들이 막아.”
무심한 듯 말한 카를의 말 안에는 모두가 느끼고 있음이 분명한 현실을 느끼게 해줄 정도로 예리한 날이 서있었다. 그 때문에 저맘은 섣불리 답을 못 하다가 이내 그가 수정을 제안한 초안에 깊게 어려 있는 요점을 말했다.
“그 말인즉슨, 애초부터 카를 씨가 수정을 하여 계획되어진 7차 방어선까지는 절대 못 갈 거란 말도 되요. 처음부터 저희 넷이서 막아서 끝내야하는 일이 된다고요.”
“말이 7차지 아마 2차 방어선까지 가기도 전에 탄지아는 완전히 폐허가 될 거야. 그 꼴이 나기 전에 우리 선에서 막아내야 하는 거지.”
“그렇긴 하지만...”
막상 초안을 제안한 사람의 입에서 자신이 예상한 말이 그대로 나오자 저맘은 말끝을 흐렸다. 그것이 눈에 들어온 카를이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쐐기를 박기 위해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그 사이에 해일이 두어 번 몰려오면 아마 방어고 나발이고 헌터들은 죄다 쓸려나가서 죽고 없을 걸.”
“후, 역시 예상한 대로네요. 그럼 최대한 수정하고 길드마스터한테 제출하고 오도록 할게요.”
“부탁할게, 시간이 촉박하니 최대한 빨리 해야 해.”
“예, 알겠습니다.”
결국 카를의 말에 현 상황을 다시 직시하게 된 저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다시 고개를 숙여 작전의 초안을 빠르게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약간이나마 안도한 카를은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벨라가 무언가를 메모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거 뭘 그리 쓰고 있는 거냐.”
“이거? 지진의 간격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 거 같아서 확인해보려고 어제부터 기록하고 있는 거야.”
“지진의 간격이 줄어든다, 라... 좋게 들리진 않네.”
카를의 말에 시간을 기록하려 했는지 회중시계를 닫으며 답하는 벨라는 그 여느 때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으며 펜으로 노트에 무언가를 빠르게 기록해갔다.
“좋게 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맞아.”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무래도 그 ‘용’이 가까워지면서 점차 간격이 짧아지는 것 같거든. 한번 봐봐.”
그녀가 오빠를 향해 건네준 메모장에는 쓴지 얼마 안 되었음이 분명해 보임에도, 어느 새 한 면을 뻑뻑하게 채울 정도로 지진이 일어난 횟수가 기록되어 있었다. 불과 하루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그토록 꽉 채운 기록에도 놀람에 잠시, 카를이 제시했던 수정안을 개선하기 위해 펜을 놀리고 있던 저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말이죠... 그 용이 뭍으로 다가올수록 지진은 꾸준히 강해져왔지만, 이상하게도 쓰나미는 첫 2회 이후 들이닥치지 않고 있어요.”
“설마 해일이 몰아치게 하는 것도 통제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게 가장 합당한 생각이 아닌가, 싶어요. 원채 상식을 벗어난 존재라...”
“이건 그야말로 대지의 화신이 아니고서야...”
‘쾅,쾅.’
그야말로 할 말을 잃게 만들 정도로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임을 재확인하며 혀를 내두른 순간, 누군가 문을 세게 걷어차듯 두드리는 소리에 다시 그들은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문이 부서질 정도로 호쾌하게 두드린 후 열고 들어올 인물은 하나 밖에 없기도 했기에, 서서히 들이닥쳐 오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재앙에서 잠시나마 눈을 돌릴 수 있게 했다.
“여, 작전 수정은 잘 돼가고 있나?”
“거 좀 사람 놀라게 하지 마시죠, 리엘 형님. 뭐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아아, 좋은 소식 있지. 나쁜 소식도 있고. 뭐부터 들을래?”
“그럼 좋은 소식 먼저 듣죠.”
문이 부숴 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힘차게 열며 들어온 리엘의 모습에 한숨을 작게 내쉬며 카를이 빠르게 질문을 던졌다. 마치 함박눈처럼 방어구에 쌓인 재를 털면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 벨라와 저맘하고 눈인사만 살짝 한 후, 그는 들어오자마자 받은 질문에 투구를 벗으며 답하기 시작했다.
“일단 길드에서는 지휘권을 우리에게 인계하기로 했다, 탄지아 시청과 다른 직업 길드들도 필요하다면 추가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고.”
“아무리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시간이 없으니 있으나 마나하긴 할 텐데... 그래도 뭐, 좋은 소식이긴 하군요.”
“그렇지, 근 며칠 사이에 들은 그나마 가장 좋은 소식이어서 네가 좋아할 거 같더라.”
“그럼 나쁜 소식은?”
“후, 좀 앉고 말하자.”
‘쿠구구구구...’
투구를 벗으며 자리에 걸터앉음과 동시에 대지를 울리는 진동. 그 진동을 느끼자마자 부리나케 기록을 하는 벨라를 카를이 눈을 살짝 돌려 보는 찰나, 리엘의 얼굴에 그 여느 때보다 어두운 그림자가 내리깔린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 일단, 탄지아 함대가 궤멸한건 확실하고...”
“그거야 뭐 익히 돌던 소문이니까요, 다른 소식이 있는 거죠?”
함대가 궤멸했다는 이야기는 용의 진격을 막기 위해 나선 함대가 돌아올 기미조차 없자 급속도로 나돈, 이미 널리 퍼진 소문이었다. 확증만 없었을 뿐, 함대가 힘을 쓰지 못할 정도로 파괴되었다는 건 사냥꾼과 탄지아 시민 사이에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정보였기에, 사실로 드러나도 크게 충격적이지 않았다.
“어, 진짜 나쁜 소식은 아무래도 우려했던 대로 화산재 기둥이 슬슬 무너지려는 거 같다는 소식이다.”
“그건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긴 하지만 중요한 건 규모인데... 규모에 대한 정보는 나왔나요?”
“그게 문제야.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규모가 어느 정도기에 표정이 그리 죽을상이세요?”
며칠 동안 그 기둥이 어마어마한 양의 분출물에도 불구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치솟았으니, 언제든지 기둥이 무너져 고열과 유독가스를 사방에 쏟아 부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맘은 기둥을 직접 봤기에 리엘의 말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 처음 보다시피 한, 리엘의 어두운 표정에 저맘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공포가 번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눈치 챈 리엘이었지만, 자신을 짓누르는 절망으로 무거워진 입을 힘겹게 떼며 자신이 물어온 정보를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화산재가 무너져 내려서 전 세계를 휩쓸게 되면, 생물 중 9할은 사라질 거라 하더군.”
“생물의 9할? 맙소사...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죠?”
생물의 9할.
그 충격적이기 그지없는 말은 벨라의 펜을 멈추게 만들었고, 저맘에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듯 리엘에게 되묻게 만들었다. 벨라는 그 충격적인 사실에 안색이 시체 빛으로 변하며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무언가를 들은 것처럼 얼어 버렸지만, 저맘의 되물음에 일말의 희망을 가지며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해보였다.
“똑바로 들은 게 맞아. 여기 저맘 널 위한 보고서 사본도 얻어왔다.”
“대지 위의 모든 생명의 9할이면.. 맙소사, 이건 첫 번째 대멸종의 재래인데...”
‘부스럭.’
리엘이 꾸깃꾸깃하게 품에 넣어온 갈색 봉투를 급히 받아 열면서 하는 저맘의 말에는 완전히 상식 외의 것을 들은 것 마냥 공황에 빠져있다는 느낌이 역력했다.
“인류도 그 문명과 함께 지워질 거라는 이야기도 하던데.”
“이건 이미 고룡이라 할 수도 없는 레벨이잖아...”
비록 카를이 나발데우스를 상대할 때 다른 의뢰로 인하여 모가 마을을 잠시 떠나있어야 했었지만, 그래도 마을을 뒤흔들던 그 지진을 느낀 적이 있는 벨라였기에 고룡이란 생물들이 단순한 물리적인 완력만으로 지진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한 존재임은 이미 어느 정도 피부로 체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길드에서 방위 작전을 명령한 용은, 그런 경험과 지식조차 아득히 초월한 존재였다. 압도적인 절망, 그 자체였다.
“그거, 확실한 정보 맞죠?”
“내가 언제 잘못된 정보를 들고 온 적이 있나, 해군 출신의 연줄을 무시하지 마라.”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정보에 자신의 정보력마저 의심하는 것만 같은 되물음을 받자 리엘은 언짢은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 하여튼 카를 네 생각은 어떠냐.”
“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긴 했는데 화산재가 몰아칠 때의 규모는 상식을 뛰어 넘었군요.”
“그건 저맘하고 벨라도 한 이야기니 더 하지 말고, 내가 묻는 건 진짜로 방위 작전을 할 거냔 말이지.”
‘쿠구구구구....’
리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동하는 건물. 그 진동 속에서 카를은 턱을 짚은 채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듯 좀처럼 바로 답을 못하고 있었지만 그 잠깐의 침묵 사이에 리엘과 벨라, 그리고 저맘의 시선이 자신에게 일제히 향한 것을 느끼자 이내 한숨을 쉬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저 존재를 용으로 분류한 것은 서사대와 학술원이 약간이나마 근거를 가지고 한 것일 테니 그것을 전제로 일단 제 의견을 말해보도록 할까요.”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될 만한 거면 좋겠다만, 뭐 일단 들어보자.”
“그러고 보니 왜 방위 작전을 고집하시는 지 한 번도 얘기를 안 하셨네요...”
나름대로 고심한 흔적이 묻어나는 무거운 투로 시작되는 말에 리엘은 팔짱을 끼며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저맘은 종이를 넘기다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카를은 천천히 입을 열어나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탄지아 항구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저 존재가 어느 정도나마 고룡의 특성을 가졌을 경우, 방위 작전으로 격퇴해야하는 근거가 있어서 말입니다.”
“격퇴라... 애당초 넌 고룡을 수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군.”
“나발데우스를 상대했을 때 확실히 느낀 거지만, 고룡은 애초에 인간이 토벌이니 뭐니 할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탄지아에서 어쩌면 고룡을 유일하게 홀로 상대해보신 분의 말이니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는... 어라?”
나발데우스를 언급하며 하는 그 말에 자료를 빠르게 훑어보고 있던 저맘은 어깨를 움츠리며 나지막하게 말하다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듯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 예상하지 못한 저맘의 행동에 리엘은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물었다.
“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이 보고서대로면 첫 번째 대멸종의 원인인 폰란 초화산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라는 것인데, 그걸 고려하면 이 계산 이 뭔가 좀 안 맞는 게 있는데요?”
턱을 괸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저맘의 말에는 무언가 모순을 발견한 듯 의문이 서려있었다. 그 모습에 이제 벨라도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어떤 모순이기에 그래?”
“그러니까.. 이 용, 그러니까 연흑룡이 나타나면서 일어난 대분화로 뿜어져 나온 화산재의 기둥이 무너지면 3주 안에 혐기성 생물 외에는 죄다 멸종해버릴 정도로 대기가 오염될 거라는데...”
메제포르타 고생물학 서사대와 탄지아 고생물학 서사대의 도서들을 줄곧 읽어왔던 저맘이었기에 금세 말을 이어나갈 것 같았지만, 자신이 아는 것이 맞는지 다시 읽고 있던 페이지를 바라봤다가 시선을 천장으로 올려 깊이 생각을 거듭한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대멸종은 분명 화산의 분화만 백만 년을 이어졌는데 사멸한 개체 수는 총 97퍼센트였거든요.”
“백만 년간 97퍼센트? 어라, 잠시만... 그걸 3주일 안에 이 용은 끝낼 수 있다고?”
“여기서부터는 좀 위험하고 어이없는 가정이긴 하지만...”
다시 곰곰이 보고서를 훑어본 후 저맘은 그 여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같은 유형의 분화를... 이 보고서대로 용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존재로 인해 그 먼 고대와 지금 두 번 일어난 거라고 가정을 할 경우가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고작 3주로 지상과 바다의 대부분의 생명을 절멸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이 백만 년간 지속되었으면...”
그 뒤로는 차마 말을 잊지 못한 채 저맘은 다시 보고서로 눈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보고서에 쓰여 있던 이야기라고는 하나, 도저히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든 그 가정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모두의 앞에서 모순되는 점을 발견한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리라 생각하는 것도 있었기에 더더욱 좀처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머나먼 고대부터 살아온 용이라는 허무맹랑한 가정은 숙명의 싸움이 실존한다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어이없는 말이기에 더더욱 그 가정을 인용한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뭐, 납득이라곤 안 되는 허무맹랑한 소리긴 하지만 그런 존재라면 더더욱 물러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저맘의 말을 들은 직후라 그런 걸까, 방금 전까지만 하던 이야기의 연장으로 카를이 넘어가자 리엘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놀라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리고 방의 다른 인원이 해도 이상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로 저런 존재를 막을 방위 작전을 실행할 거냐?”
“예, 정말로 저 존재가 서사대와 길드의 판단대로 고룡이면 토벌은 무리일지라도 격퇴는 가능할 겁니다.”
“그럴 만한 근거는 있고?”
리엘의 말에는 확실한 근거를 원한다는 의지가 명확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토벌이 아닌 격퇴로 완전히 뒤바꿀 것임을 벨라는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저 오빠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근거야 당연히 있죠, 형님. 다른 지방에서 고룡 격퇴 기록을 열람하다가 방위 작전을 고집할 이유를 찾아냈습니다.”
“다른 고룡 격퇴 기록? 돈도르마 전투 요새의 방위 기록이라도 본 거냐?”
“돈도르마 뿐 아니라 다른 지방에도 나타났던 고룡들의 격퇴 기록을 좀 뒤져봤죠.”
“서사대 기록보관소에서 받아본 문헌들이 그거에 대한 거였구나... 그걸로 뭐라도 좀 힌트를 얻었어?”
작전을 짜면서 룸서비스 아이루에게 부탁하여 서사대에 아직 남아있는 자료들 중 뭔가를 부탁하여 가져오게 하여 받은 그 문헌들을 빠르게 훑어보며 무언가를 확인하던 카를을 미심쩍게 바라보던 벨라였지만, 이제야 그렇게 급하게 문헌을 훑어 내려가던 이유에 대한 의문이 풀리자 내심 바보라고 부르던 자신이 더욱 우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벨라가 조심스레 던진 질문에 카를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좀처럼 바로 답을 못하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것 보다는... 고룡들 중에는 환경을 그 특성을 통해 침식시켜서 뒤바꿔버리는 종이 다수 존재하지.”
“강룡, 염왕룡, 폭풍룡... 그런 쪽의 특성을 지닌 고룡들은 확실히 꽤나 많지요.”
“여기서 부터가 중요한데, 그런 종들이 요새를 침공하는 등 인간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떠나가서 격퇴되면 그 특성에 의해 침식되던 환경들이 다시 원상복구 된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확실히...”
토벌된 것이 아닌 격퇴된 것만으로도 환경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어떻게 보면 쉬이 흘러 넘길 수도 있는 그 중요한 사실에 벨라와 저맘의 귀가 솔깃해졌다. 게다가 벨라는 오빠의 입에서 어떤 말이 뒤이어 나올지 예상이 되기도 하였기에 더욱 일말의 희망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론을 말해보면... 저 대지의 화신이 고룡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어떻게든 물러나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재난이 가라앉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잘 알겠다. 그런데 다른 고룡들하고 비교는 뭣한 것이 지금 오고 있는 용은 세계 전체를 뒤흔들고 있잖나, 예시의 규모가 크게 잘못 되었다고.”
“후, 그건 저도 알고 있죠.”
예리하게 후벼 파는 리엘의 지적에 카를은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리 규모가 거대하다한들, 자그마한 산의 환경을 바꾸는 선에서 끝나버리는 다른 고룡들과 달리 세계를 뒤흔들며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을 멸종의 시련으로 몰아가고 있는 대지의 화신은 그 규모부터가 하늘과 땅 마냥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 감안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를 가진 대상 간의 비교는 애당초 성립이 불가능함을 카를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냉정히 말하자면... 그 이론은 허점투성이에요, 개인적인 바람이 잔뜩 섞여 들어간 거나 다름없잖아요.”
“저맘이 정확히 짚었군, 결국 억지를 부리려는 거나 다름없지 않나.”
‘쿠구구구...’
어느 새 몇 번을 속독한 보고서를 다시 봉투에 넣은 후 카를이 스스로도 느끼고 있던 문제점을 정확히 짚는 저맘과 그에 대해 리엘이 동의하며 머리를 끄덕인 순간 다시금 건물을 뒤흔드는 진동. 그 지진 속에서 카를은 좀처럼 그 표정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머리를 살짝 숙인 채로 묵묵히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억지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생각을 하지 않으면 맨 정신으로 저 존재를 상대하긴 버거울 거 같아서 말입니다.”
“결국 희망이 없다는 뜻인 거냐? 그럼 이 작전을 애초에 할 필요가 없잖아 전부 개죽음을 당하는 게 될 텐데.”
개죽음이라는 말에 카를은 평소라면 역정을 내면서 바로 반박했겠지만, 이번에는 마치 어느 정도 그 말을 수긍하는 듯 그 여느 때보다 착 가라앉은 투로 답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모래알만한 희망입니다..”
“마지막 희망이라..”
그 여느 때보다 필요하지만, 동시에 더욱 큰 현실의 절망을 느끼게 하는 그 말을 리엘은 곰곰이 곱씹었다.
“정말 오빠 말대로 저 연흑룡..이란 놈이 그렇게 물러나줘서 이 재앙이 멈추면 참 좋을 텐데...”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정말로 그렇게만 돼 준다면 목숨을 걸고 해볼 만한 가치는 있겠죠.”
‘댕, 댕, 댕, 댕, 댕, 댕’
저맘과 벨라는 항상 철저하게 검증된 지식만 추구했다. 그런데 지금은 카를이 말한, 불확실하기 그지없는 희망을 긍정하고 있다. 두 사람을 잘 알고 있는 리엘은 이 상황에 뼈에 사무칠 정도로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난 경보와는 확연히 다른 6번의 커더란 종소리가 탄지아 항구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6번이라면 고룡 경보인데... 생각보다 그 용이 가까이에서 관측되기 시작했나 보군.”
“50해리 경계선 까지 접근한 거 같은데.. 혹시나 경로를 바꾸지 않을까 싶었는데 변경 없이 항구로 향하고 있나 보네요.”
‘쿠구구구구....’
리엘은 그 6회의 종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는 진동으로만 느끼던, 세상의 끝을 불러올 대지의 황혼이 항구 가까이 왔음을 모두에게 똑똑히 알렸다. 그 말에 동조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저맘이 말을 끝낸 찰나, 일주일 새 가장 짧은 간격으로 들이닥친 지진에 전원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도 못할 정도로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없군, 다른 선택의 여지도 안 보이고.”
“과연 오빠가 구상하고 저맘이 수정한 이 방위 작전의 개요를 길드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한테 납득시킬 수 있을까요?”
그 지진 속에서 점점 시간이 부족해지고 있음을 느끼며 던진 리엘의 말에 벨라는 형용할 수 없는 절망과 회의감을 함께 느끼며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 회의감이 짙게 깔린 질문에 답을 한 것은 겨우 진동이 가라앉으며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된 저맘이었다.
“만에 하나 정말로 카를 씨의 말대로 격퇴하는 것만으로도 재앙이 물러나준다면,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으니 다들 어느 정도는 동조를 해줄 거야.”
“하지만 그 대 고룡 무장을 하고 갔던 함대가 모조리 수장되었는데...”
ㅡ쿠콰쾅...
“군의 마지막 방어선이 뚫리면 모두들 알게 되겠지, 무의미해 보이는 이것이 마지막 희망이란 걸.”
근본적인 작전에 대한 회의감을 다시금 되새기는 벨라의 말에 대해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한 대포가 발사되는 소리를 들으며 답하는 리엘의 말. 그 말은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착 내리깔려 있었다. 하늘에 짙게 드리운 암회색 구름은 점점 더 굵은 재를 흩뿌리며, 모든 것의 종말이 점차 가까워짐을 알리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암담하기 짝이 없는 미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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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말고 계속 쏴라! 여기서 못 막으면 정말로 끝장이다!”
“중위님, 탄환들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젠장, 그냥 다 쏟아 부어! 어떻게든 놈을 저지해야 해!”
탄지아 항구에서 약 50해리 밖 해상.
이제 시력이 좋은 이들이라면 쉬이 탄지아 항구의 상징과도 같은 긴 등대들을 볼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암초와도 같은 작달막한 섬. 그곳에 자리한 요새에서 탄지아 시의 마지막 해병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쉬지 않고 포탄을 옮겨 대포를 장전하며 언뜻 보면 바다 한 가운데나 다름없는 곳으로 포격을 쏟아 붓고 있었다.
ㅡ펑, 펑!
ㅡ쿠콰쾅...!
하늘을 흩날리는 재에 베여들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캐한 화약 냄새가 가득한 요새는 잠깐의 간격을 가진 후 다시금 포탄이 쏘아지는 폭음에 휩싸였다.
대해룡이 모가 마을을 위협한 이래, 혹여나 항구에 위해가 되는 고룡이 나타나지 않을까 우려하여 지어진 요새의 화약고에는 그 규모에 걸맞지 않게 엄청난 양의 화약과 포탄이 비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난 몇 시간 동안 접근해오고 있는 용을 향해 쉴 틈 없이 장전하여 발사한 결과, 어느 덧 그 어마어마한 양의 탄환과 화약은 바닥을 보이며 서서히 한계에 치닫고 있음을 해병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망할, 격룡선들은 아직도 준비 중인가?”
“구형함이라서 아마 지금쯤이면 준비가 완료되었을 것 같은데 녀석에겐 통할지 조차 의문입니다! 중위님도 보셨잖습니까, 포탄이 아예 녀석의 몸에 닿기도 전에 터져버리는 걸!”
엄청난 공포와 절망에 짓눌린 그 외침이 요새에 유일하게 남은 장교인 중위를 다시 현실로 되돌렸다.
-몸에 포탄이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터지듯 폭발한다.
탄지아 함대가 철저한 대 고룡 무장을 하고 갔음에도 어찌하여 허무하게 고기밥이 되었는지 알려주는 현상. 쉴 새 없이 발사된 포탄은 상어 지느러미처럼 수면 위로 튀어나온 용의 돌기에 닿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공중에서 폭발했다. 모든 게 공허했고, 절망적이었다.
“그렇다고 포격을 그만두면 유효타를 먹일 기회마저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징징거리지 말고 계속 쏴!”
“예, 예!”
ㅡ제길, 함대가 왜 궤멸했는지 알거 같군...
그 무력함과 탈력감만 감도는 상황 속에서 중위는 이를 악물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공격을 계속 하도록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생각했다.
고밀도 멸룡재를 품은 포탄이 아무리 강력해도 목표에 닿지 못하면 의미 없다. 돈도르마의 고룡 방위대를 햇병아리로 보이게 만들 정도로 철저히 무장한 탄지아 함대는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수장된 것이다.
“정말로 충각 전술을 써야 할 줄이야.. 제기랄! 하사, 항구에서는 뭐라 소식 안 날아왔나?”
“비둘기는 안 왔지만, 10분 전 빛 신호로 재난 특보가 떨어졌습니다! 대피 명령입니다!”
“재난이라면 며칠 전부터 매 초마다 닥치고 있잖아! 빌어먹을 대체 윗대가리들은 하는 게 뭐야!”
쉬지 않고 들이닥친 지진이 익숙해지고도 남았기에 나오는 당연한 반응. 하지만 그 격노 어린 반응에도 불구하고 하사는 평소 같으면 그 분위기를 읽고 입을 다물었어야 하는 그 상황에서 파리해진 얼굴로 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중위님, 지진이 아니라 해일 특봅니다! 항구 70해리 밖의 모든 섬에 대피령이 떨어졌어요!”
“70해리? 70해리면 여기하고 몇몇 섬들뿐이잖아! 진짜로 대피령이 떨어진 게 맞나?”
“확실합니다! 얼른 대피하셔야 해요! 충각 전술도 불가능합니다!”
해일 특보.
며칠 전, 첫 번째 해일이 몰아닥쳤을 당시의 악몽 같은 기억이 포탄 소리와 파열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서있는 중위의 머릿속에 꿈틀꿈틀 떠올랐다. 인간은 모든 재난 특보를 확실한 대피 가능한 시기에 내리는 것이 불가능함을 그에게 뼈저리게 알려준 그 날의 기억. 그 기억이 떠오르자 그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전 중지, 전원 대피를 준비해라.”
“예? 하지만...”
“해일 특보가 너무 늦게 내려졌는지도 몰라, 준비된 격룡선을 타고 최대한 빨리 항구로 돌아가라!”
“그러면 녀석을 어떻게 막습니까! 중위님은 어쩌시려고요!”
“빌어먹을, 얼른 내려가라! 잘못하면 뼛조각도 못 찾는 신세가 될지도 몰...!”
‘쿠구구구구....!’
그 절박한, 절망만이 느껴지는 외침을 끊어버린 것은 며칠 간 느낀 지진을 가벼이 능가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진이었다. 마치 온 세상을 뒤집어버릴 것만 같은 그 지진은 섬을 녹아내리는 얼음 조각 마냥 뒤흔들고 산산이 부서트려 바다로 집어삼켜지도록 하고 있었다.
‘쿠르르르...!’
“역시 늦었나...”
거대한 괴수의 뱃속에서나 날 법한 무엇이 크르렁 거리는 것만 같은 폭음에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탄지아 해군의 마지막 병력들은 허무하리만큼 힘없이 굴러서 불그스름한 바다로 집어 삼켜졌다. 그 무의미한 죽음의 향연을 보면서 중위는 기울어져 가는 바위 위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다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쿠구구구구....!’
대지가 뒤흔들리면서 붕괴를 재촉했다. 그 덕분에 중위가 매달려있던 바위와 지반은 완전히 뒤집히며 산산이 조각났다. 그 여파로 힘없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던 중위는 이내 떨어지는 바위에 내리 깔리며 붉은 수면 위로 떨어졌다.
ㅡ쏴아아아....
섬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듯 바다로 빨려 들어가며 일으킨 엄청난 운동 에너지는, 출항을 준비하던 탄지아에 남은 최후의 구형 격룡선 두 척을 손쉽게 움직이며 서서히 너울치기 시작한 붉은 해수와 함께 탄지아 항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오오...’
마치 솟대처럼 우뚝 서있는 탄지아의 명물 등대들을 하나, 둘 기울이기 시작할 정도로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돌진하기 시작한 파도의 한 가운데를 고래 울음 같은 소리가 갈랐다. 대지의 화신이 내지르는 포효였다.
대지의 화신은 여전히 물 위에 드러난 돌기들이 수면 아래 잠기도록 깊이 잠수했다.
‘쿠구구구구....’
물 아래로 그 모습을 감췄음에도 탄지아 항구로 향하고 있는 그 속도는 느려지지도, 빨라지지도 않은 채 서서히 얕아져가는 해저에 발을 뻗어 기어가며 한 발짝 씩 내딛을 때마다 해저를 맹렬히 진동시켰다. 탄지아 항구에 대지의 황혼이 당도하기 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채 하루하고도 반나절 밖에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