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 출처: https://www.pixiv.net/artworks/89901162)
이전 편 링크::
어느 날, 도쿄 모처의 카페.
공권력이 URA와 중앙 트레센을 향해 ‘계속 법으로 줄넘기 하면 법봉으로 머리를 쪼개주마’라며 주먹을 들어 보이자 즉시 학생회장직을 인계한 후, 바로 은퇴 및 졸업이라는 급행열차로 질주한 옛 ‘황제’에게 한때 그녀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에어 그루브가 문득 의문을 느낀 듯 말했다.
“회장,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보좌해주던 학생회장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는 건 물론, 미뤄뒀던 졸업까지 하기로 결정하자 그 뒤를 따라 미련이라곤 조금도 없이 역시 졸업의 길로 향했다. 이는 또 다른 부회장이었던 나리타 브라이언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사회로 나온 후, 다소 객관적인 시선으로 ‘황제’를 보기 시작하자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이 스믈스믈 기어 올라왔다.
“음?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보통 궁금한 수준이 아닌 거 같은데.”
“뭐, 다른 건 아닙니다만….”
학창 시절부터 애늙은이 패션이라고 온갖 소문을 다 탔던 차림새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심볼리 루돌프가 커피잔을 드는 걸 보며 잠깐 머릿속을 정리한 ‘여제’는 이내 입을 열었다.
“회장께선 직책에 앉아 계시던 시절, 토카이 테이오를 어떻게 바라보셨습니까.”
그 말에 루돌프의 손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현역에서 내려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예리함이 무뎌진 것일까, 에어 그루브는 ‘황제’의 그 행동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어서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 뿐.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이상한 점이 몇 개 있었습니다. 당신께선 토카이 테이오를 그렇게 아끼는데도 어째서 골절이 일어났을 때 회복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지 않았을까, 왜 그 애가 연속으로 다리에 문제가 생기는 데도 말로써만 챙겨주지 직접 행동을 하진 않았을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제왕’이 겪은 좌절과 고난은 솔직히 그 당시엔 지켜보는 것도 힘들었다. 그녀에게 애착이 있다거나 하진 않았음에도 이 지경인데 그걸 옆에서 지탱해 주는 것처럼 보였던 ‘전’ 학생회장의 행보는 솔직히 뭔가 좀 석연치 않았다.
그녀가 복귀전이었던 아리마 기념에서 1착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네 번째 골절이 터지자, 미련이나 설득이라곤 없이 곱게 잠정적인 은퇴를 받아들여 줬던 것이 특히 ‘여제’의 마음속 어딘가에 기이함을 느끼게 했다.
아니 세 번째 골절을 겪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가 꺾이지 않게 말이라도 잘 해줬거늘, 네 번째 부상을 겪은 후에는 왜 테이오의 의사를 따르지 않고 그녀의 트레이너가 요청한 걸 그대로 받아줬단 말인가. 심지어 그 사일런스 스즈카도 복귀 의사가 있으면 얼마든지 오라고 문을 열어놨으면서.
“회장, 혹여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토카이 테이오를 아끼셨던 건 당신을 따르는 후배이자 유망주라는 이유가 아니었던 겁니까?”
침묵.
그것도 공기가 착 가라앉는 침묵이 내리깔렸다.
그나마 사람이 적은 시간대라 다행이지, 다른 손님들이 있었다면 숨 막히는 느낌에 몸서리를 쳤으리라.
‘스슥.’
그 분위기 속에서 심볼리 루돌프는 수첩을 펼친 후 무언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9.】
【4.】
처음 쓰인 건 단순한 숫자였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에어 그루브의 눈치가 나쁘진 않았다.
테이오가 터프에서 뛰던 시절의 승리 전적.
그리고 4번에 걸친 다리 부상.
제아무리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이 없더라도, 새로운 형태의 기록을 써나간 ‘제왕’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었으니까.
여기까지는 일종의 사실확인에 가까웠다.
【모든 걸 계승할 자.】
【제왕.】
그러나 뒤이어 쓰이는 문자의 나열은 마냥 가볍게 보기 힘들었다.
‘황제’는, ‘전’ 학생회장은 토카이 테이오를 자신의 뒤를 이을 자로 여겼단 것이 드러났으니까.
하지만 당장 잘못 생각하면 넘겨짚기가 될 수 있기에, ‘여제’는 사파이어색 눈으로 심볼리 루돌프가 써 내려가는 것을 지켜봤다.
【희망.】
【절망.】
【기적.】
【부활.】
지금 트레센의 황금 옥좌에서 모든 진이 다 빨려 나가고 있을 ‘제왕’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연달아 쓰이는 가운데, 여전히 노련미가 느껴지는 ‘황제’의 손은 마치 필기체를 쓰듯 가벼운 움직임으로 단어들을 나열해 갔다.
【방조.】
【자립.】
그리고 이어 쓰인 단어들은 루돌프가 어째서 그렇게 행동해야 했는지 명확히 전달했다. 그녀는 자신의 뒤를 이어 옥좌에 앉을 자가 스스로 일어나서 쟁취하기를 원했음이 느껴졌으니.
【후계자.】
【토카이 테이오.】
이제 확실해졌다.
이건 방치나 방조가 아닌, ‘제왕’이 제 기량을 보여 ‘황제’의 뒤를 잇게 만들려 한 처음부터 짜인 판이었다. 그걸 알게 된 순간, 에어 그루브의 머릿속에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테이오를 후계자로서 아끼셨던 겁니까, 아니면 친밀한 후배로서 아끼신 겁니까?”
종이를 북, 찢은 후 잘근잘근 한 손으로 뭉치듯 가루로 만들고 있던 심볼리 루돌프는 그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답했다.
“에어 그루브, 그 질문엔 어폐가 있군.”
“예?”
“생각해보게, 왜 도구에 정을 주는 거지?”
“…도구?”
순간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단어에 ‘여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게 그 ‘황제’의 입에서 나올만한 단어가 맞는가? 아무래도 그녀가 카페인을 오래간만에 대량으로 들이켜 현기증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래, 도구다. 에어 그루브, 그대는 한낱 도구에 애정을 주고 아끼나?”
한순간에 에어 그루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거 진짜다.
그녀가 하루 이틀 심볼리 루돌프를 봐왔던가. 평상시의 아재 개그를 즐기며 가끔은 엉뚱한 면도 뜻밖의 장소에서 보이던 모습관 전혀 달랐지만, 이게 본심이라고 느낄만한 근거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지금, 심볼리 루돌프의 눈은 마치 현역 때 터프를 달리면서 보인 차갑고, 위압적이며, 오만하던 모습하고 똑같았으니까.
그렇게 티아라의 여제가 살 떨리는 느낌을 받는 사이, ‘황제’는 다시 그녀가 익히 잘 아는 풀어진 눈빛과 표정으로 돌아왔다.
“라는 건 농담. 그리 긴장하지 말아도 좋아.”
“하, 하하. 그렇죠. 농담이겠죠.”
식은땀으로 등골이 축축해지는 가운데, 진정으로 압도 당해버렸다는 걸 숨기기 위해 에어 그루브는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어 남은 커피를 마저 쭉 들이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다음에 뵐 기회가 있기를.”
“음, 아마 URA에서 다시보지 않을까 싶지만 말이지.”
황제가 하는 말에 여제는 순간 정색했다.
“전 다시 회장의 케케묵은 말장난을 감당할 여력이 없습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운지 컨디션이 절부조로 떨어질락 말락 하는 기미를 보이는 에어 그루브는 그렇게 자리를 떠났다.
-⏲-
-뭐, 테이오를 도구로 본 건 아니었지만.
한편 루돌프, 아니 루나는 일부러 자신을 옆에서 도와주던 ‘전’ 부회장에게 위압감을 주고자 골랐던 단어들을 곱씹어보며 혼잣말했다.
“하지만 테이오가 없었으면 벗어날 수 없었을 테니 방법이 없었어.”
‘황제’는 어느 날 그녀가 겪은 본능적인 감각을 떠올리며 오한을 느꼈다. 갑자기 숨이 막히게 하는 학생회장이란 자리의 압박감. 학생회실에 발을 들일 때마다 찾아오기 시작하는 모래주머니와도 같은 엄청난 부담. 몇 년째 반복되던 일상이 서서히 목을 옥죄는 느낌이 오자, 루돌프는 자신을 영광의 길로 이끌어준 재상이자 지팡이에 급히 상담한 끝에 결국 탈출을 계획한 후 실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 멋지게 성공한 계획으로 인해 지금에 이르렀다.
-때론 모르는 것이 약이란 소리도 있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어 다오, 에어 그루브.
모든 우마무스메의 행복을 위하여 회장의 짐을 짊어지던 때도 분명히 있었고, 지금도 인생의 신념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느낀 때를 놓치면 결코 자리에서 물러날 수 없으리란 직감은 신념과 삶이라는 균형에서 삶을 추구해야 하는 쪽으로 천칭을 기울게 했으니, 결국 자리가 어느새 루돌프의 인생을 옥죄는 금색 관이 되어버렸던 셈이었다.
-다음에 트레센에 방문할 때는 테이오한테 줄 선물을 좀 많이 들고 가 볼까….
탈출을 대가로 대신 그 자리에 앉게 하는 지독한 짐을 넘길 수밖에 없었던 후배를 생각하며 루돌프는 물건들을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젠가 그 아이 또한 탈출을 갈망할 날이 올 것이고, 그날이 오면 뒤에서 최선을 다해 도와야겠다고 다짐하는 ‘전’ 황제의 왼쪽 약지에는 계획이 성공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징표가 있었다.
루돌프는 진정한 모습, 루나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우리가 누구인가!”
“선도부!”
“우리가 하는 건 무엇인가!”
“학생회의 의지에 따라 풍기를 어지럽히는 불량 학생들을 전부 찢고 죽이는 것!”
한편 중앙 트레센.
외치는 것만으로도 학원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새로운 선도부장, 정글 포켓의 외침 아래 그녀의 아래에 포섭된 새로운 학생들은 그야말로 눈이 시뻘겋게 변할 정도의 광란에 사로잡힌 채 외치고 있었다.
“좋아, 그럼 가라! 가서 학생회장의 뜻을 거스르는 놈들을 모조리 찢고 죽여라! 모든 게 끝날 때까지!”
뱀부 메모리의 졸업이 이루어져 공석이 되어버린 선도부를 짬처… 아니 맡기기 위해 ‘목소리가 크고 근성이 넘치는’ 재학생을 찾던 와중에 후지 키세키의 추천을 받아 내정되어 버린 정글 포켓은 초기에는 매우, 극렬히, 악을 쓰고 반발했다.
그런데 학생회장이 조용히 불러서 무언가를 말하자, 이전까지의 반항적 태도가 싹 사라지고 그냥 광견병 걸린 로트와일러가 되어버렸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머리를 쓰는 일을 한 탓인지 현역을 뛸 당시에도 상한선을 긋고 마시던 벌꿀 드링크를 최대 당도로 아주 커다란 양동이 같은 통에 넣은 채 쪽쪽 빨면서 ‘일이 좋게 풀렸으니 아무튼 된 거지’라고 ‘제왕’이 구렁이 담 넘듯 넘겨버리자, 부회장들은 결국 생각하는 걸 포기해야 했다. 물론 또 다른 부회장인 메지로 맥퀸은 ‘머리를 쓰기는 무슨 순 정치질이면서’라고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뭐 그 말 대로긴 했다.
학생회에 내정된 이래-테이오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터보에 의해 팔아넘겨진 거긴 하지만 아무튼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처음에는 FM에 따라 빡빡하게 하려 했지만, 가면 갈수록 그게 한계가 명확하다는 걸 체득하면서 가끔 이런 식의 대처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나이스 네이처는 물론 메지로 맥퀸까지 품게 했으니까.
그 결과가 지금 눈에 펼쳐진 이 광란의 도가니였다.
당최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한바탕 돌아버린 것이 분명한 학생들의 목줄을 풀어버리는 선언을 하자, 한순간에 사방으로 흩어진 우마무스메들은 옛 부장 뱀부 메모리가 들던 것과 마찬가지인 죽도는 물론 대체 저게 왜 손에 들려있는지 의심스러운 시뻘건 무언가가 묻은 빠루까지 들고서 입에 거품을 문 채 교내로 흩어졌다.
-이게 맞나…?
부회장으로서 이들의 ‘첫 임무’를 지켜보고 보고하기 위해 참석한 나이스 네이처는 이마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가 터지면 돈으로 해결하면 되니까 안심하라고!’
왠지 귓가에서 학생회를 물려받은 지 반년도 채 안 되어 자본주의의 화신으로 타락해 버린 학생회장, 토카이 테이오의 말이 환청처럼 들리는 거 같았지만 아무튼 무시했다.
“나도 몰라, 이제….”
자포자기해 버린 네이처는 테이오에게서 받은 벌꿀 음료를 쪽쪽 들이켰다.
-문제 생기면 돈으로 해결하면 되지 뭐.
어느새 자본 타락해 버린 ‘제왕’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오늘도 중앙 트레센은 평화로웠다.
"다음은 너다"
왠지 테이오 다음자리로 누가될지 예상은 될거 같......?
"다음은 너다"
둠 포케 무엇...?
아 그쪽 황제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