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은 오 중서(吳中書) 숭량(嵩梁)의 호이다. 나와 정묘교(丁卯橋), 웅운객(熊雲客)이 더불어 시감(詩龕 시를 쓰는 서재)에 모여서 놀았다. 시감이 매우 정치(精緻)하여 화초, 서화, 필상(筆床), 다로(茶爐), 문방(文房)의 진기한 기물이 지극히 말쑥하고 깨끗하였다. 그 담화를 주워 모아 ‘난설시감’이라 이름한다.
내가 묻기를,
“선생께서는 지금 무슨 관직에 계시며, 슬하에 자손은 많으신지요?”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나는 국자 박사(國子博士)를 거쳐 내각 중서(內閣中書)로 옮겨 지금은 옥첩관 찬수관(玉牒館纂修官)에 충원되었는데, 우서(優叙 특별 승진)되어 자사(刺史)로 나갈 것입니다. 아들은 사내가 넷으로 맏이 17세를 비롯해서 둘째는 6세, 셋째 4세, 제일 어린 것은 수개월이 못 되었습니다.”
하고, 인하여 나에게 묻기를,
“귀국에 금강산이 있어 제일 가는 명승으로 삼는데, 그 풍경을 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명사(明史)》 주지번(朱之蕃)의 시에,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서 / 願生高麗國
금강산에 한번 보고 싶네 / 一見金剛山
한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는 것이지요?”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그 풍경을 붓이나 혀로써는 이루 다 적을 수가 없습니다. 옛사람이 오흥(吳興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지명)의 산수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일천 바위가 빼어남을 겨루고, 일만 골짜기가 흐름을 다툰다.’ 하였는데, 이 글귀로써 갖다 대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가 말하였다.
“남금릉(南金陵)의 시를 보았더니, 그 속에 이 산에도 구룡 폭포(九龍瀑布), 오로봉(五老峯), 향로봉(香爐峯) 등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이름이 양방(楊邦)의 여산(廬山)과 서로 같습니다.”
“푸른 하늘에 금부용(金芙蓉)을 깎아 낸 듯하다는 오로봉(五老峯)을 선생께서는 일찍이 이미 가 노닌 적이 있으니 무엇을 그리 부러워합니까?”
“일찍이 꿈에서 한번 노닐었는데, 이튿날, 김추사(金秋史)가 그림을 부쳐 왔는데 사집(私集) 속에 시로 기록하여 두었습니다.”
“옛사람이 누워서 오악동천(五嶽洞天)에 노닐던 이가 있는데, 선생이 거기에 가깝구려.”
“가지고 온 《청비록(淸脾錄)》 각본(刻本)이 있습니까?”
“내가 가을에 바다와 산에 노닐다가 갑자기 사행에 임하여 짧은 시일에 출발하였기 때문에 서책을 미처 가지고 오지 못하였습니다.”
“꽃이나 나무는 이곳과 서로 어떻습니까?”
“꽃이나 나무는 모두 토질의 적의(適宜) 여부에 따르는 것이니, 편방(徧邦)의 초목이 어찌 중국과 계보를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혹 별종이 있어 특이한 모양과 향기가 사랑할 만한 것도 있지요.”
이어, 떡과 술, 과일을 내왔기에 떡 이름을 물었더니 설화불불(雪華餑餑)과 마병여의(麻餠如意)라고 한다.
“제가 해외에 태어나서 다행하게도 중화의 문명을 직접 보았습니다. 선생께서는 금세의 시종(詩宗)이십니다. 한편의 시를 내려 주시어 그것으로 산방(山房)을 장식하면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겠습니다.”
“선생께서는 왜 수창(首唱)하지 않으십니까? 수창하시면 마땅히 화답하겠습니다.”
“나는 시에 서툴므로 대방가(大方家)에게 배우려고 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묘교(卯橋)가 곧 올 것이니, 또한 연구(聯句)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냉재집(冷齋集)》 한 권을 내어 보이며 이르기를,
“이것은 귀국의 유득공(柳得恭) 공의 시입니다. 그의 회고시(懷古詩)는 산수, 인물이 다 가히 장고(掌故 나라의 전장(典章), 제도, 관례)를 갖추었습니다.”
하기에, 대답하기를,
“혜풍(惠風 유득공의 호)의 시는 사시(史詩)입니다. 이아정(李雅亭)의 《청비록(淸脾錄)》이 있는데, 보셨습니까?”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이 책은 사천(四川) 이군(李君) 조원(調元)이 일찍이 채집해 들여온 각본입니다. 박제가(朴齊家)의 시집은 이미 간행되었습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책을 발간하기가 매우 힘이 들어 아직 간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그가,
“자하(紫霞)가 귀국의 시를 뽑아 휘초(彙抄)하고자 선록(選錄)을 보내 왔는데, 아깝게도 이 책을 아직 손에 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물었다.
“중국 조정에 문형(文衡), 태학사(太學士)의 성명은 누구이며, 별호는 무엇인지요?”
“중국 조정의 문형은 일정함이 없으며, 시험에 임하여 명하여 파견하는데 그것이 회시(會試)이면 파견되는 이가 대총재(大摠裁)가 되고, 또 부총재 세 사람이 있는데 모두 1ㆍ2품 벼슬입니다. 황제께서 친히 파견하는 경중향시(京中鄕試)는 곧 옛 경조시(京兆試)인데, 총재가 세 사람으로서 역시, 1ㆍ2품 벼슬입니다. 황제께서 파견하여 보이는 시험의 시(外省鄕試)에는 이름을 주고(主考)라 하여 정, 부 두 사람이 있는데, 큰 성에는 시랑(侍郞)을 명하고, 중성과 소성에는 어사(御史), 한림(翰林), 강독(講讀), 편수(編修), 중서(中書), 낭관(郞官)이 다 됩니다. 그리고, 회시에 합격한 자는 진사가 되고, 향시에 합격한 자는 거인이 됩니다.”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 보기를 내국과 같이 하여 전후의 특별한 은혜와 총애를 받음이 여러 번국(藩國)과 아주 다르니,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귀국은 예의의 나라(예의지국, 예의지방)로 문장이 또한 성하고 본조를 섬김에 공손함이 가상할 만하여 여러 번국들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대국을 섬기는 정성은 각별히 힘써 한결같으나, 문장, 예의에 대한 많은 칭찬에 이르러서는 감히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귀국의 문형(文衡)을 주관하는 이는 어떤 관직이 많습니까?”
“우리나라의 문형을 주관하는 이는 한 사람뿐입니다. 이름은 대제학(大提學)인데, 재상 중에서 문학이 고명한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에 임하여, 고시(考試)하여 선비를 뽑게 합니다. 향시는 관직이 낮은 문신 중에서 골라 보내어 시험을 보이게 합니다.”
묘교가 뒤늦게 왔기에 내가 말하였다.
“왜 그렇게 약속에 늦었습니까?”
“각중(閣中)에서 숙직을 하다가 이리로 곧 왔습니다.”
내가,
“아침마다 붓을 적셔 군왕을 모시고 / 朝朝染翰侍君王
의관한 몸은 어로향을 끌도다 / 衣冠身惹御爐香
라는 격입니다.”
하니, 그가 답하기를,
“다만 주인으로 하여금 취하게 하려고 / 但使主人能醉客
한 조각 빙심이 옥호에 있네 / 一片氷心在玉壺
이지요.”
한다. 내가 물었다.
“옛날에 맹호연(孟浩然)이 왕마힐(王摩詰)의 대궐 안 숙직방으로 찾아가서,
재주가 없으니 명주가 버리고 / 不才明主棄
병이 많으니 친구도 성기어지는구나 / 多病故人疎
라는 구를 지었는데, 지금 선생께서 숙직하실 때에도 친우의 심방이 있습니까?”
“볼일이 없는 사람과 잡인은 왕래할 수 없습니다.”
인하여 말하기를,
“호연은 기재(奇才)인데 명황(明皇 당 현종(唐玄宗))이 ‘재주가 없으니 명주가 버리고’의 한 구로써 그를 버린 것은 너무 박정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또한 호연의 시가 궁하였던 것입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친구 완산(完山) 이정리(李正履)의 자는 원상(元祥)으로, 경학을 널리 읽고 고문(古文) 익히기를 좋아하며 시는 당(唐)을 주종(主宗)으로 하는데, 그의 시집 한 권이 이미 주인의 책상 위에 있습니다. 난설 노인과 함께 보시고 비평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니, 난설이 말하기를,
“그 분의 고문이 매우 높습니다. 일찍이 그가 남을 위하여 서(序)를 지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 책에서 논한 것과 경학이 모두 뛰어난 식견이 있어서 우리들의 낮은 학문으로서는 짧은 시간 동안에 망녕된 평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 집안에 한 후생이 있는데 이름은 정하(定夏), 자는 군보(君保), 호는 치관(廌觀)입니다. 나이가 아직 약관도 못 되었는데 시학과 글씨 재주가 있습니다. 올 때에 써 준 별장(別章 작별의 글)과 고시(古詩)가 있으니, 청컨대 두 분께서 비평해 주시기 빕니다.”
하니, 두 사람이 머리를 모아 읊어 보더니 손가락을 튀기면서 하는 말이,.“약관도 채 못 되어 이만하니 그의 진보를 헤아릴 수 없소이다. 하늘이 준 재질이 영민하고 고의(古意)가 매우 훌륭합니다.”
하고는, 《원상집(元祥集)》을 남겨 주기를 간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귀국한 뒤에, 마땅히 원상에게 이야기하여 정본(精本)을 부쳐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운객(雲客)이 내가 난설의 처소에 있다는 말을 듣고 또한 뒤따라와서 나에게 묻기를,
“귀국에는 문장, 경제(經濟)에 뛰어난 선비가 많습니까? 원컨대 높으신 가르침[麈論]을 들음으로써 경앙(景仰)하는 사정(私情)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문장, 경제에 뛰어난 이는 중조(中朝)의 인물에 많이 있습니다. 원컨대 청고한 가르침을 먼저 받고 싶습니다.”
하니, 그가,
“어찌 겸손한 말씀을 하십니까? 귀국에는 본래부터 남(南), 유(柳), 신(申), 채(蔡), 윤(尹), 박(朴), 오(吳), 노(盧)의 팔대가(八大家)의 시문과 잡저(雜著)가 있으며, 그리고 신라, 고려에 있어서는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 이목은(李牧隱 이색(李穡)), 이율정(李栗亭 이관의(李寬義)), 정율은(鄭栗隱), 이월사(李月沙 이정귀(李廷龜)), 최간이(崔簡易 최립(崔岦)), 차오산(車五山 차천로(車天輅)) 등 많은 이가 계시는데 반드시 중조에 양보할 것은 못 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기자가 동쪽으로 온 때부터 8조의 가르침을 입어 우리나라 사람은 일마다 중화를 사모하여 조정에 벼슬함에는 절의와 간쟁(諫爭)의 기풍이 있으며, 선비는 정주(程朱)의 학을 정성껏 지켜 현송(絃誦 거문고를 타며 글을 읽음)의 소리가 끊이지 않고, 백성들의 풍속은 예양, 충후의 기풍을 중히 여기며, 대가[鴻匠]와 훌륭한 선비, 문장(文章), 보불(黼黻)이 대대로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라 풍속이 명예를 탐내거나 뽐내지 않으므로, 바윗굴 사이에도 높은 선비가 많아서 통틀어서 어떻다고 논할 수는 없습니다.”
“귀국에 기인(畸人)이 많은 것은 전부터 잘 아는 바이지만 요즘의 박정유(朴貞蕤), 유혜풍(柳惠風) 두 선생 같은 이도 또한 출중하여 범상한 사람들에서 뛰어나며 전에 《패해(稗海)》를 보았더니 4가(四家)의 저작과 함께 《청비록(淸脾錄)》이 실려 있었습니다. 혹 행리 속에 또한 가지고 오신 한두 종류가 있지 않겠습니까?”
“유혜풍, 박정유 두 분의 시문은 우리나라에서 중히 여기는 바이며, 《청비록》은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것입니다마는 미처 가져오지를 못하였습니다.”
내가 묻기를,
“난설 선생의 시사(詩詞)가 멀리 해외에까지 퍼져 있습니다. 한 편의 시를 내려 주시어 하찮은 집[蓬蓽]을 빛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마땅히 각본(刻本) 한두 질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또 그의 아내 금향각(琴香閣)의 시집 한 권을 내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우리나라 이옥봉(李玉峯)의 시재와 흡사한데, 풍부하고 기민하며 소랑(疎朗)하기는 그보다 더하다. 또, 금첩(錦帖) 하나를 내 보이면서 하는 말이,
“이것은 나의 죽은 소실의 서화인데, 죽을 때의 나이가 19세였습니다. 천재(天才)가 슬기롭고 밝으며 화격(畫格)이 더욱 묘하고 난초를 그린 것에 절품(絶品)이 많았는데, 20년 전에 신자하(申紫霞)가 많이 가지고 갔었지요.”
하였다. 내가 남설곡(南雪谷)이 그림을 그린 부채에 화제(畫題)를 구하였더니, 난설이 말하기를,
“화격이 고아 청진(古雅淸眞)합니다. 나에게 남겨 주시어 인풍(仁風)을 받들어 날리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또 그의 여러 아들로 하여금 나와서 절하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취죽(翠竹), 벽오(碧梧), 요환(瑤環), 유이(瑜珥)가 각각 재주와 학문이 있지요. 금향각(琴香閣)은 천재(天才)와 숙덕(淑德)이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게 합니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내 집안이 대대로 모두 문필에 능통합니다마는 꼭 전할 만한 것이 아직 없습니다.”
하였다. 난설이 지난번 묘교의 집에 모임이 있었을 때, 운루가 역리(易理)를 논하는 것을 보고 운루를 향하여,
“어제 경학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매우 심원하고 고아(高雅) 하였습니다. 이 일은 사장(詞章)과 비교할 것이 아니지요. 만일, 저술한 것이 있으면 저희 집에 가져다 두고 자세히 읽어 이별한 뒤 의심되는 바가 있으면 바로잡고자 합니다.”
하니, 운루가 대답하기를,
“나는 배우지를 못하여 방향을 못잡아서 소루함이 특별히 심합니다. 또 가지고 온 저술이 없습니다.”
하니, 난설이 말하기를,
“귀국에는 시인이 매우 많이 있어 나의 변변치 못한 작품을 추려서 전하고 있습니다. 나도 또한 귀국의 시를 좋아합니다. 벽 사이에 걸려 있는 김추사(金秋史), 신자하(申紫霞)의 여러 시를 보아도 알 것입니다. 신자하가 이번 편에 편지와 명주 옷감을 부쳐 온 것 또한 옛사람 제포(綈袍)의 뜻이지요.”
하였다. 묘교가 말하기를,
“어제 대궐 안 숙직에서 공사의 틈을 타서 절구 세 수를 받들어 화답하고, 따로 고시 한 수를 지어 행차하심에 보내드리려 하오나 아직 미처 다 쓰지를 못하였으니, 훗날을 기다려 주십시오.”
하였다.
-심전고(心田稿) 제3권 응구만록(應求漫錄) 난설시감(蘭雪詩龕)
납조교의 이름은 영수(永壽)다. 그는 만주 사람이며 심양부학(瀋陽府學)의 조교인데, 12월 초 8일에 사신의 일행이 심양에 도착했을 적에 그의 집을 주인으로 정하였다.
납씨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수재요 잘 생겼다. 맏아들은 문자를 약간 아는데, 무슨 업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특별히 하는 업(業)은 없고 오직 만주의 사서(四書)를 공부하여 고시(考試)에 대비합니다.”
고 하였다. 그의 책을 청하여 보았더니, 그것은 만주 글자로 번역하여 풀이한 사서로서, 우리 나라의 언해(諺解)와 같았다. 밑은 한문 글자로 되고 위는 만주 글자로 되었으며, 모두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향하였다. 만주식인 듯하다. 판본이 매우 정밀하였다
일찍이 들으니 논어(論語)의 ‘학간록장(學干祿章)’을 만주 해설에는 학(學)에 구두를 떼서 ‘자장이 배우고 또 녹을 구한다[子張學而又干祿]’고 했으며, 그 밖에도 주자의 집주(集注)와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 꽤 많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그 책을 대하고 보니, 만주 글자를 알지 못하여, 그 말들을 고증(考證)할 수가 없었다. 또 내가,
“그대가 이것을 읽어서 무엇을 하려 하는가?”
하니 그는,
“장차 과거를 보아서 관리가 되렵니다.”
고 하였다. 내가,
“공자나 맹자께서 글을 지어 후세에 전하신 것이, 과거를 보아 관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 만이겠는가.”
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선(善)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 하였다. 내가,
“그대의 말이 매우 좋다. 공자ㆍ맹자의 뜻은 오로지 사람들로 하여금 선을 하게 하는데 있으며, 국가에서 이것으로써 과거를 보이는 것 또한, 그 글을 익히 읽어서, 그 말을 높게 보고 그 행(行)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지, 결코 읽기만 하든가 말하기만 하기 위함은 아니오.”
하니, 그는,
“옳은 말씀입니다.”
하고, 다시 글자로 써서 보이기를,
“조선의 군자(君子)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군자라니, 당치 않는 말이다. 그런데 글을 잘 읽는다면 누군들 군자가 아니 되겠소.”
하였다. 그리고 먹 4개를 〈그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모두 좋아하면서 당과(糖果) 한 접시를 나에게 권하고, 또 한 접시는 작은아버지에게 드려 달라고 청하였다.
받아 깊어 막 취침하려는데, 맏아들이 와서 ‘조교인 자기 아버지께서 만나 보기를 청한다.’고 하는데, 이때 벌써 조교가 문에 들어섰다. 나는 방을 내려가 맞이하였다. 그는 나를 붙들어 앉히면서 말하기를,
“아이들한테 들었는데, 조선의 귀한 분께서는, 문장이 훌륭하신 큰 군자시라시지요?”
하고, 이어서 우리 나라의 과거 제도와 관방(官方)을 물었다. 나는 모두, 중국말로 대략 대답하여 주었다. 조교는 그의 아들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처음 중국에 들어온 분으로서 말씀이 아주 정확하시다. 참으로 총명하신 분이다.”
하고 다시 말하기를,
“조선은 참으로 예의의 나라(예의지국, 예의지방)이며, 다른 외번(外藩)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하였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대비달자(아라사, 러시아)는 남의 앞에서 함부로 오줌을 누며, 비록 부인들이 있어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은 담배를 피울 적에, 입으로 피우지 않고 코로 피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들은 금수(짐승)와 그리 틀리지 않습니다.”
하니, 조교는 크게 웃으면서 ‘그렇다.’ 고 대답했다.
내가 말하기를,
“그들의 추잡한 행동은 밉지마는, 굳세고 날래서 전투를 잘하는 것은 두렵다 하겠습니다.”
하니, 조교는,
“용맹은 있지만 지모(智謀)가 없으며, 전쟁에 임하여 군진(軍陣)의 법☐가 없으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고 하였다.
난공(蘭公)이 나에게 “무슨 벼슬에 있는가?”
내가 “맨몸으로 직이 없고, 한번 중국을 보고자 하여 삼촌의 공사(貢使)의 길[行]에 따라왔다.”
난공(蘭公)이 “선생이 양반으로서 벼슬을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입신행기(立身行己)하는 군자일 것이다.”
내가 웃으며 “재주 없고 학식 없으니 벼슬이 저절로 오지 않는다.”
평중(平仲)이 “지금 두 분의 덕의(德儀)를 접하니 더욱 중화인물의 따를 수 없음을 느낀다.”
난공(蘭公)이 “중화가 문물의 나라라 하나 명예와 공리를 추구하는 자가 태반이다.”
내가 “우연히 만나 즐겁게 이야기하니 깊이 나의 소원에 흡족하다. 이 뒤로 어떻게 더 만나볼 수 있겠는가?”
난공이 “신민(臣民)으로서 외교(外交)할 수 없으니 아마 다시 양회(良會)를 도모(圖謀)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이것은 전국(戰國) 때의 말이다. 지금 천하(天下)가 통일되어 하나이니 어찌 피차의 혐(嫌)이 있겠는가?”
난공(蘭公)이 “기뻐하며 천자(天子)는 천하로써 일가(一家)를 삼거던, 하물며 귀국이 예교(禮敎, 예의와 교화 곧 문물)의 나라로서 제국(諸國, 열국, 만국.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을 의미합니다.)의 어른이 되는데 마땅히 이러해야 하지요, 속인(俗人)의 의논을 어찌 족히 이르겠는가? 천애(天涯)의 지기(知己)로 애모(愛慕)하기 끝이 없는데 어찌 중외(中外)로써 피차를 나누겠는가? 혹 다른 때에 미관(微官)을 얻어가지고 동방(東方)에 봉사(奉使)하면 마땅히 댁에 찾아가 뵈겠다. 가슴속에 간직한 생각을 어느 날인들 잊을 손가!”
내가 “저희들이 돌아갈 기한이 아직 남은 날이 있는데 어찌 차마 영영 작별할 수 있겠는가?”
난공이 “교정(交情)의 고의(古誼)는 감명(感銘)하여 잊지 못하겠다. 혹 와주실 수 있으면 다시 찾아 주시어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내가 “저희들이 오기는 용이하겠으나, 다만 여러분의 계신 곳에 불편함이 있을까 걱정된다.”
난공이 “마땅히 길을 쓸고서 기다리겠습니다. 귀관(貴館)에 일찍이 중화인사(中華人士)가 찾아온 일이 있는가? 귀관(貴館)에 가기도 그다지 힘들지 않을 테지요.”
-담헌서(湛軒書) 외집 2권 항전척독(杭傳尺牘) 건정동필담(乾淨衕筆談)
악라사(鄂羅斯, 아라사, 러시아)는 대비달자국(大鼻㺚子國)이라고도 이름 한다. 그 나라는 흑룡강(黑龍江, 흑수, 헤이룽 강, 아무르 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중국과 교통하여 상인이 해마다 온다. 관소는 옥하관(玉河館)의 곁에 있다. 그 나라 사람은 검은 얼굴, 높은 코에 천성이 사나워서 흔히 거리에서 사람을 죽인다. 그래서 건륭(乾隆) 때 그중의 몇 사람을 찢어 죽이게 하였더니, 그 뒤부터 자못 두려워하여 규칙을 지킨다고 한다. 청인(청나라 사람)은 그들(러시아 사람들)을 천하게 여겨 개돼지로 대우한다. 그 나라에서 나는 석경(石鏡)이 가장 좋다.
이는 청나라에서 전세계 제일의 선진국으로 조선국으로 삼고, 최후진국은 대비달자국(악라사국, 아라사국) 곧 러시아로 여겨온 기록들입니다. 상당히 흥미로울 따름이지요.
옥하수 편으로 좇아 가는데, 길가에 큰 문이 있는 그 안에 둥근 탑이 있거늘 물으니, 이는 또한 옥하관(玉河館)이니, 예부터 조선 사신이 드는 곳이러니, 중간에 아라사[愕羅斯 러시아]에게 빼앗기었다 하니, 아라사는 한어(漢語)로 어르쇠라. 어르쇠는 흑룡강(黑龍江) 북편 몽고(蒙古)의 종락(種落)이니, 크기 특별하게 크고 극히 흉악한 인물이라. 이러므로 대비달자(大鼻㺚子, 아라사, 러시아)라 일컬으니, 우리나라에 나오는 유리 거울이 다 어르쇠 소산(所産)이라. 역관 홍복이 말하기를,
“어르쇠 성정이 영악하여 황제도 심히 괴롭게 여기고, 조공을 해마다 아니하되, 군사가 극히 포악하므로 변방에 침노함을 염려하여, 중국에 출입하기를 허락하고 물화 매매하기를 통하니, 문밖을 나면 흥성억매(興成抑賣) 하는 것이 많고, 혹 사람을 상해하며 계집을 겁박하더니, 10년 전에 여러 놈이 길가에 나와 사람을 쳐 죽이고 재물을 겁탈하는지라, 황제 듣고 크게 노하여 대청문에 친히 앉아 군사를 모으고 위의를 성히 차려 두어 놈을 목을 베니, 이후는 작란이 매우 낫다.”
하거늘, ‘지금 있느냐?’ 물으니,
“이 종락을 원래 볼모로 잡아 두었으니, 회자(回子)를 잡아 둠과 같은지라. 다만 이놈은 대국 모양으로 의복을 하여 입는 고로 혹 분별하지 못하되, 지금도 여러 놈이 있다.”
하더라. 수역(首譯) 김윤세 또한 기 상서(紀尙書)를 이별하고 돌아와 그 수작을 전하더라.
김(金) 역관(통역관)이 또 묻되,
“소방(小邦, 조선국)의 진공(進貢) 방물을 이미 특은(特恩)을 입어 머물게 하였는지라, 예부로부터 마땅히 자문(咨文)을 지위(知委 하달하여 알림)하여 하랴?”
기 상서(청나라 조정의 기균 예부[현 외교부 해당]상서)가 말하기를,
“마땅히 귀국(조선국)에 자문할지라. 이전에 이러한 일이 있으면 먼저 기별이 나간 후 본국 자문을 기다려 들이고 머물러 후차 방물에 이순하더니, 이번은 네 가지 방물을 다 황지를 받들어 특별히 머물러 이순하게 하니, 이 또한 격외(格外)에 진념(軫念) 하심이라.”
김 역관이 또 말하기를,
“들으니 27일 전은 황상이 하례를 받지 아니하신다 하나, 속방의 대국 섬기는 정성으로써 금년 진공 방물을 또한 전례대로 나아오리로다.”
기 상서가 말하기를,
“《좌전(左傳)》에 일렀으되 ‘손이 예(禮)를 두매 주인이 갈린다.’ 하였으니, 이는 주인이 정하지 못할 일이로다.”
이 밖에 또한 여러 말이 있으되, 다 한만한 수작이라. 김 역관이 가기를 고하여 말하기를,
“감히 오래 수응(酬應)함으로 수고하시게 할 수는 없으니, 작별을 청하노라.”
기 상서가 말하기를,
“먼 나라 손님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을 기회 얻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 조금 오래 말하나 피곤함을 깨닫지 못하노라.”
하고 만류하여 말하기를,
“내 일찍이 이르되, 조선은 다른 외국과 다른지라,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봉하였으니, 만일 본래 중국 땅이 아니면 어찌 기자로 하여금 임금을 삼아 두었으리오. 내 항상 귀국 사신으로 창화(唱和)하며 수작하면서, 능히 외국이라 하여 간격을 두지 아니하노라.”
김 역관이 말하기를,
“대국이 속방 보기를 내복(內服)과 같이 하는도다.”
기 상서가 말하기를,
“귀국이 본조에 신복함을 가장 먼저 한지라. 이로서 귀국을 으뜸을 삼으니, 이러므로 조정이 대접하는 예모가 특별할 뿐 아니라, 본국이 또한 공근함을 황상이 익히 아시는 일이니라.”
김 역관이 말하되,
“이번에 전례 밖에 한 가지 상을 더 주심이 또한 특은(特恩)이라 감축(感祝)함을 어이 측량하리오.”
기 상서가 말하기를,
“상 주는 물건은 예부터 다른 외국에 비겨 특별히 두터울 뿐 아니라, 다른 외국은 한 날 반상(頒賞)하고 오직 귀국은 홀로 딴 날을 정하여 반상함이 또한 다른 외국으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함이니라.”
김 역관이 말하기를,
“더욱 감황(感惶)함이 간절하노라.”
김 역관이 또한 묘호(廟號)를 물으니, 기 상서가 말하기를,
“이미 고종(高宗)이라 하였으니, 본디 마땅히 고조(高祖)라 일컬을 것이로되, 고종이라 함은 황상의 뜻을 준행함이라.”
하더라 하고, 필담하던 종이를 가져다 뵈니, 기균이 나이 80이로되, 필획이 정하여 노필(老筆)인 줄 깨닫지 못하며, 말을 주고받음이 자세한지라. 이같이 대강을 기록하노라.
-무오연행록(기원후 1799년경 기록.) 기록 중.
이는 잘 보시다시피, 전세계의 최강대국인 청나라의 조정에서 자국의 조정(청나라의 조정)에 입조해와서 자국의 조정을 섬겨오는 형식을 취하는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오직 우리나라 곧 조선국에게만 일등 예우를 넘어서 특등 예우, 특별 예우를 베풀어왔다는 것을 명시한 기록입니다.
1. 신은 예부(禮部)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던 날에 이른바 《흠정예부칙례(欽定禮部則例)》라는 것을 가져다 보았는데, 외국(外國) 조공(朝貢)의 규례에 조선이 제일 먼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유구(琉球, 류큐, 현 오키나와)는 동남쪽 바다에 있는데 2년에 한 번 조공하고 경유하는 길은 복건(福建)이며, 월남(越南, 교지, 안남, 베트남)은 교지(交趾)에 있는데 2년에 한 번 조공하고 4년에 한 번 와서 조회하며 경유하는 길은 운남(雲南)이고, 남장국(南掌國 라오스)은 전남(滇南) 극서쪽에 있는데 10년에 한 번 조공하고 경유하는 길은 운남이며, 소록국(蘇祿國 필리핀, 당시엔 스페인의 식민지[기미주, 속주]였었지요.)은 동남쪽 바다 바깥에 있는데 5년이 넘어 한 번 조회를 오며 경유하는 길은 광동(廣東)이고, 하란국(荷蘭國 화란국, 아란타국, 네덜란드)은 동남쪽 바다에 있는데 5년에 한 번 조공하고 경유하는 길은 운남이며, 면전국(緬甸國 미얀마)은 서남쪽 경계 밖에 있는데 10년에 한 번 조공하며 경유하는 길은 귀주(貴州)이고, 섬라국(暹羅國 섬라곡국, 섬라국, 태국)은 바다 남쪽에 있는데 3년에 한 번 조공하고 경유하는 길은 광동이며, 서양의 여러 나라 중에 통공(通貢)하는 나라는 박이도가리아국(博爾都嘉利亞國, 스페인), 의달이아국(意達爾亞國, 의대리아, 이탈리아), 박이도갈이국(博爾都噶爾國, 포르투갈), 영길리국(暎咭唎國, 영국)이 있는데, 모두 10년에 한 번 통공하고 경유하는 길은 광동입니다. 올해 황제의 만수일에 여러 나라가 어찌 일제히 와서 통공하지 않는지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거리가 다 같지 않기 때문에 모두 오게 하지는 못합니다. 섬라국은 머지않아 사신이 북경에 당도할 것이고 나머지 여러 나라도 차례대로 도착할 것입니다. 늦게 도착하는 나라는 이름하여 「만수일에 뒤이어 와서 축하한 나라」라고 합니다.’ 하였습니다.
-일성록(기원후 1809년경 기록.) 중.
대서양은 한편 ‘이탈리아[意大里亞, 의대리아]’ 라 칭한다. 살결이 하얗고 코가 우뚝하며, 검은 전(氈)을 삼각으로 꺾어서 모자를 만든다. 부녀자들은 머리털을 배배 꼬아서 북상투를 틀고 옷깃에는 금주(金珠)를 단다. 향산 문오(香山門澳)에 임시로 거주하여 해마다 지세(地稅)를 실어 온다.
-황청직공도 대서양 기록.
이는 대서양국 곧 이탈리아의 열국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나라는 열이마니아국(熱爾瑪尼亞國)에 소속되어 있다. 사람들이 모두 충의(忠義)로워 은덕을 받으면 반드시 갚았다. 학교는 국가나 공공 단체에서 설립하였다. 땅에서는 금과 구슬이 생산되고, 산이 많아서 냉기가 심하다. 사람들은 집을 잘 짓는다. 부인들은 정숙하고 질박하고 정직하며 솜씨가 정교하여 베틀 같은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길쌈을 한다.
-황청직공도 합륵미제아성 기록.
이는 열이마니아국(게르마니아국. 독일의 열국들을 의미합니다.)의 합륵미제아성(하노버 공국을 의미합니다.) 곧 독일의 하노버 공국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나라는 파사니아(波斯泥亞)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몽고(蒙古) 사람과 방불한데 몹시 영리하고 말 타기에 익숙하며 항상 칼을 차고 다녔다. 부인들은 글에 능숙하고, 풍속은 예모를 숭상한다. 금, 은, 동, 철이 수출할 정도로 많이 생산된다.
-황청직공도 옹가리아 기록 중.
이는 옹가리아국 곧 헝가리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나라는 열이마니아국 동쪽에 위치해 있다. 지역이 한랭(寒冷)하므로 초여름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우 갖옷을 입는다. 검도를 좋아하고, 집에서 곰을 길러 곰놀이를 제공한다. 부인들은 가사를 전담하고, 내외법이 엄하며, 봉림호박(蜂林琥珀)이 생산된다.
-황청직공도 파라니아 기록.
이는 파라니아국 곧 폴란드 더 정확히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한 기록입니다.
서양에는 교화(敎化)와 치세(治世)를 각각 맡는 두 왕이 있다. 푸른 두모(斗帽)를 쓰고 치의(緇衣)를 입으며, 나들이할 적에는 일산을 받치고 깃발을 꽂으며, 승추(僧雛 소승[小僧])들이 그를 호위한다. 그가 지나갈 적에는 남녀들이 꿇어앉아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일찍이 중국에 들어간 선교사는 수염과 모발을 길렀다.
-황청직공도 양승니(대서양국승니) 기록.
이것은 양승니(대서양국승니) 곧 이탈리아의 로마 교황청(로마 교황국)에 소속된 신부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 나라는 중국에서 만리나 떨어져 있는데, 대서양(大西洋)에 소속되어 있다. 부녀들은 푸른 머리띠를 머리에 얹고 비단폭으로 소매를 꺾어 접으며, 수보(繡譜)를 가지고 뜨개질을 익힌다.
-황청직공도 소서양 기록.
이는 소서양국 곧 스페인, 포르투갈에 대한 기록입니다. 대서양국 곧 이탈리아의 열국들을 섬기는 입장이라고 기록되있습니다.
영길리국(英吉利國 영국[英國])은 하란(荷蘭, 화란, 아란타, 네덜란드)에 소속되어 있다. 남자들은 대부분 다라융(哆囉絨)을 입고, 여자는 시집가기 전에는 허리를 묶어서 가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단의(短衣)에 중군(重裙)을 입으며, 출행할 적에는 금루합(金縷合)에 비연(鼻煙)을 담아 가지고 다녔다.
-황청직공도 영길리 기록.
이는 영길리국 곧 영국에 대한 기록입니다. 네덜란드를 섬기는 입장이라고 기록되있습니다.
법란서는 일명 ‘불랑서(佛郞西)’ 라고도 한다. 누차 여송(呂宋, 필리핀, 당시엔 스페인의 속주였었습니다.)을 깨뜨리고, 홍모국(紅毛國 네덜란드)과 더불어 미락(美洛)을 중분해서 살며, 민(閩)과 월(粤)을 모두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하며, 근래에는 영길리와 패권을 다투는데 약간 약하다.
-황청직공도 법란서 기록.
이는 법란서국 곧 프랑스에 대한 기록입니다.
서국은 또한 하란(화란, 아란타, 네덜란드)의 속국이다. 모자를 벗어서 예의를 표하고, 등편(藤鞭)을 가져 몸을 호위한다. 부인들은 동정을 모나게 해서 가슴을 드러내고 옷 밖에 치마를 묶는다.
-황청직공도 서 기록.
이는 서국 곧 스웨덴에 대한 기록입니다. 영국처럼 네덜란드를 섬기는 입장이라고 기록되있네요.
하란국(荷蘭國)은 한편 ‘영길리(英吉利)’ 라고도 칭하고 일명 ‘홍모번(紅毛番)’ 이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불란서[佛郞機]에 가깝다. 그들은 항상 큰 배를 몰고 다닌다.
-황청직공도 하란 기록.
이는 하란국(화란국, 아란타국) 곧 네덜란드에 대한 기록입니다. 영길리국(영국)이라고도 칭해진다는데, 사실, 네덜란드, 영국 둘 다 게르만족의 국가이기도 하지요. 범게르만권의 국가들의 일원으로 불리기도 하지요.
아라사국(俄羅斯國 대비달자국, 러시아)은 북쪽 맨 끝에 위치해 있는데, 한(漢)나라 때의 견곤(堅昆) 부족과 정령(丁令) 부족이었고, 당(唐)나라 때의 힐알사(黠戛斯) 부족 또는 골리간(骨利幹) 부족이었으며, 원(元)나라 때의 아라사(阿羅思) 및 길리길사(吉利吉斯) 등의 부족이었다. 명(明)나라 300년 동안은 중국과 통하지 못하다가 청(淸)나라 강희(康煕) 때에 이르러 중국에 들어와 조공을 바쳤다. 8도(道)를 두어 ‘사과(斯科)’ 라고 칭하고, 사과마다 또 각각 소사과(小斯科)로 나누었다.
-황청직공도 아라사 기록.
이는 아라사국(대비달자국) 곧 러시아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나라는 남해(南海) 가운데 위치해 있는데, 민(閩)의 장주(漳州)와 거리가 매우 가깝다. 만력 연간에 불란서에게 병탄을 당했는데, 그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사람들은 키가 크고 코가 우뚝하고 고양이의 눈매에 매의 부리로 생겼으며, 옷 속에는 등나무 줄기를 2, 3층으로 빙빙 감아서 댄다.
-황청직공도 여송 기록.
이는 여송국 곧 필리핀에 대한 기록인데요. 당시의 필리핀은 스페인의 속주(기미주, 식민지)였었죠. 기록된 여송국인의 모습도 필리핀 현지에서 머무르면서 필리핀을 다스리고 있던 스페인인의 모습이라고 봄이 합당하겠습니다.
이 나라는 서양에 있어 회회국과 서로 가깝다. 사람들은 팔각 모자를 쓰고 장의(長衣)를 입는데 장의의 무늬는 버들가지와 같다. 좁은 소매로 허리를 묶고 항상 손 씻을 그릇을 휴대하고 다닌다.
-황청직공도 아리만 기록.
이는 아리만국 곧 터키의 오스만 왕조, 오스만 터키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것은 청나라(여진족이 수립한 중국 정복왕조)의 조정에서 청나라의 제 6대 임금인 고종(건륭제)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763년경때 청나라의 조정에 입조해 청나라의 조정을 섬기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에 대한 기록, 그림을 집대성한 황청직공도(황청직공도를 해석하면, '청나라의 조정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들에 대한 기록, 그림' 이지요.)입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나라 곧 조선국이 단연 가장 앞에 서술되어 있는데요. 일단, 청나라의 조정에 입조해와 청나라의 조정을 섬기는 전세계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서구(서역, 서양)권의 국가들만을 발췌해온 것인데요(이 시기때의 인도를 위시한 남아시아권의 모든 국가들은 영길리국[영국]의 속주였었습니다.). 청 조정측에서 서구권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들께서도 잘 보시다시피, 청나라(여진족이 세운 중국 정복왕조)에서 우리나라 곧 조선국이 참으로 '예의지국' 이라서 외번(외국. 조선국을 제외한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에 대한 통칭.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청나라의 조정에 입조하여 청나라의 조정을 섬겨오는 형식을 취하였지요.)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극찬한 게 눈에 띄지요. 나아가 여진족이 세운 중국 정복왕조인 청나라 조정에서는 청나라 조정에 입조하여 청나라 조정을 섬겨오는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 중에서 오직 우리나라 곧 조선국만 일등 예우를 넘어 특등 예우, 특별 예우를 해줘왔다는 것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이 시기때에 이르러서는 유럽[유럽권, 유럽권역, 유럽문명권]의 대표적인 국가들인 의대리아국[의달이아국, 대서양국, 이탈리아], 대서양국승려[이탈리아에 위치한 로마 교황청 소속 신부], 소서양국[스페인, 포르투갈 둘 중에서 하나라고 파악하시면 되겠습니다.], 불랑기국[박이도갈이국, 포르투갈], 박이도가리아국[스페인. 사실, 소록국은 필리핀을 의미하는데, 필리핀은 이 당시에는 스페인의 속주였었습니다.], 영길리국[영국], 법란서국[프랑스], 하란국[화란국, 네덜란드], 열이마니아국의 합륵미제아성[열이마니아는 게르마니아, 합륵미제아성은 하노버 공국을 의미합니다. 즉, 독일 곧 게르마니아의 하노버 공국], 서국[스웨덴], 파라니아국[폴란드를 의미합니다만, 더 정확히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죠.], 옹가리아국[헝가리] 그리고 아라사국[러시아] 역시 청나라 조정에 입조하여서 청나라 조정을 섬겨왔음을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동[아랍, 근동.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아리만국[터키의 오스만 왕조, 오스만 터키] 역시 청나라의 조정에 입조하여서 청나라의 조정을 섬겨왔구요. 당시[기원후 1700년대에서 기원후 1800년대 전반 시점]의 인도를 위시한 남아시아권의 모든 국가들은 영길리국[영국]의 속주[기미주, 식민지]가 된 상태였지요. 또, 대서양국흑귀노[유럽권의 국가들이 부리는 흑인들을 의미합니다. 보통,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권의 흑인들을 정벌해 이들을 노예로 부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엔 이슬람 왕조[백의대식국, 흑의대식국, 대식국, 이슬람 왕조 곧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가 부렸던 자들인데, 이 당시에는 '곤륜노' 라고 불리었지요. 오귀노, 승기동, 승기녀로도 불렸지요.] 역시 유럽권의 국가들에게 딸려서 청나라의 조정에 입조해 청나라의 조정을 섬긴 것도 확인되지요. 이는 황청직공도, 만국내조도 그리고 일성록에 기록된 흠정예부칙례 세 기록들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재판(裁判) 1인이 뭍에 내린 뒤의 온갖 지휘할 일 때문에 먼저 대판성(大阪城)으로 가는데, 밖에 와서 하직을 고하였다. 전후 사신 행차가 도해(渡海)한 지속(遲速)을 살펴보면 거의 다 서로 같으니, 또한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일행 중의 각원(各員)의 노자(奴子) 중에 김가가 많은데 사람들이 김 행수(金行首)라 부르니, 왜사공들이 미칭(美稱)으로 알고서 김 행수라고 불러 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그 바라는 대로 불러 주면 매우 기뻐한다 하니, 크게 웃을 일이다. 대마도 이후로 접대와 공급이 정성스럽고 공경스럽지 않다고 할 수 없는데, 들러 온 길에서 시를 가지고 와서 제술(製述)과 제술(製述)에게 보인 왜인 선비는 문답하며 필담할 때에 사신 행차를 황화(皇華 천자의 사신)라 부르니, 문자를 쓸 즈음에는 마땅한 말을 찾아내지 못하여 꼭 들어맞지는 않으나, 사모하여 따르는 마음은 대개 알 만하다.
이 고을의 선비로 근등독(近藤篤)-호는 서애(西厓)-이라는 자가 가장 문학으로 이름 있는데, 그때 나이가 24세이다. 이 사람이 글을 가지고 와서 제술에게 보이는데 말의 조리가 가장 낫다. 그 글에 이르기를,
“성인의 가르침을 세상에서 경시하여 자취를 따라 몸소 행하는 자가 천이나 백에서 열이나 하나도 없거니와, 선비가 도(道)에 뜻을 두더라도 세상에 밝은 스승이 없으니, 누가 도에 뜻을 둘 수 있겠습니까? 평생이 다하도록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고 초목과 함께 썩으니, 천하의 풍조가 다 이러합니다. 하물며 저희 나라는 중화(中華) 성인의 나라에서 멀음에리까? 듣건대, 귀국에서는 예전에 경학(經學)이 성행하여 도 있는 선비가 이따금 나서, 퇴계(退溪)ㆍ율곡(栗谷) 같은 여러 선생은 저희 나라 학자가 누구나 다 우러러 사모하니, 지금 일을 가지고 예전을 생각해 보면, 어찌 기자(箕子) 성인께서 끼친 공덕이 그렇게 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독(篤)이, 앞서 귀국에서 사신을 보낸다는 것을 듣고 속으로 기뻐서 생각하기를, ‘사명을 받들어 예(禮)를 차리기는 예전부터 어렵게 여기는 것이니, 큰 나라에서 보내는 사신은 다 군자이리라.’하였는데, 독이 때마침 이 때를 당하여 훌륭하신 모습을 뵙게 되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나아가 여러 분을 뵙건대 행동거지가 볼 만하고 배울 만하니, 깊이 도를 체득하지 않으셨으면, 어찌 이러할 수 있겠습니까? 독의 생각이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군자를 만나지 못하여, 근심하는 마음이 답답하도다. 또한 이미 보고 또한 이미 만나고 나면, 내 마음이 곧 후련하리로다.’한 것이 바로 이 독의 경우를 말한 것이니, 천 년에 한 번 만난 때라 하겠습니다.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몸을 닦는 것으로 근본을 삼는다.’하였는데, 우리 같은 한낱 선비로서 어떻게 행하면 몸을 닦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께서 가르침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기원후 1748년경 기록.) 기록 중.
이는 조선국의 제 21대 임금인 영조의 재위시기 도중인 기원후 1748년경때 에도 막부 시대때의 일본국(왜국)으로 파견된 조선 통신사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봉사일본시문견록입니다. 일본인(왜인)들은 조선국을 두고서 큰 나라(대국, 대방, 대도)로 칭했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국에 비해 자국(일본국)을 소도(조그마한 섬)라고 칭한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지요. 또한 조선국의 통신사를 두고서 황제(황상, 천자)가 파견한 사신단이라는 의미인 '황화사' 로 칭한 것을 보면, 일본국이 에도 막부 시대때에도 전례대로 조선국을 두고 상국, 대국, 황제국, 또다른 중화, 군자의 나라, 신선의 나라, 부처님의 나라로써 숭상(사모, 흠모)해왔고, 이러한 조선국의 통신사로부터 국가 운영 사상, 고급학문, 고급철학, 고급예술에 대한 가르침, 인정을 받는 것에 필사적이였음을 알 수 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늙은 왜인 하나가 있어 영(楹)안에 앉아서 젊은 왜인을 시켜 바야흐로 먹을 갈고 있으니, 아마 행중 사람의 필적을 받으려는 듯하였다. 연로한 왜인들이 혹은 비단 족자로 혹은 종이를 작은 판자에 붙여서, 벼루와 붓을 받들고 길가에 늘어서 있다가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머리를 조아리고 애걸하는 자까지 있었는데 곳곳이 다 그러하였다. 마을 안의 두세 어린 왜인을 보니 종이로 갓과 전립(戰笠)을 만들어 쓰고, 또 우리나라 군복을 지어 입고, 풀잎으로 나팔 모양을 만들어 부는데 그 소리가 또한 방불하였다.
강고(江尻)에 이르니, 재판 및 섭진수(攝津守)가 와서 문안하고 또 공궤(供饋)하는 것도 있었다.
-조명채의 봉사일본시문견록(기원후 1748년경 기록.) 기록 중.
이는 보시다시피, 에도 막부 시대때의 일본인(왜인)들 심지어 연로한 일본인들도 자국(일본국[왜국])에 파견되있는 조선국 통신사원에게 시문, 필적을 얻기 위해 비단 족자로 혹은 종이를 작은 판자에 붙여서, 벼루와 붓을 만들고 길가에 늘어서 있다가 조선인들을 만나면 머리를 조아리고 애걸하는 자들까지 있었는데 일본국의 전국 곳곳이 다 그러하였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마을 안의 2~3명의 어린 일본인들이 조선국을 워낙에 사모(흠모, 숭상)한 나머지, 조선 선비의 복식을 종이로 만들어 입었고 심지어는 조선 군병의 복식을 지어 입었으며, 풀잎으로 나팔 모양을 만들어 불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나팔 소리가 방불었다고 하지요. 이는 그만큼 일본국(왜국)이 에도 막부 시대때에도 전례대로 우리나라 곧 조선국을 극히 숭상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록들 중에서 하나라고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북경에 머물렀다. 아버지께서 아침을 3분의 1 드셨다. 유구 관생(琉球官生) 채세창이 그 나라 사람 정효덕(鄭孝德)과 함께 나란히 왔다. 지난번 방문에 보답하고자 한 것이다. 안부 인사〔寒喧〕를 마치자 채생이 시 한 수를 주었다. 제하여 이 선생(李先生 이휘중)의 부채 선물에 감사하며 존운(尊韻)에 화답하여 가르침을 구한다고 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솔 부채 만든 것은 신의 솜씨요 / 製成松箑盡神工
훈현곡(薰絃曲) 한 수가 흰 비단 속에 있네 / 一曲薰絃白繭中
더운 날 기다렸다 흰 깃 부채 펼쳐 / 願待炎天舒素羽
온 자리에 어진 바람 일으키고 싶구나 / 試看滿座拂仁風
하고, 말미에 ‘중산(中山) 채세창 쓰다.’라 하였다. 한번 읽어보고는 훌륭한 솜씨라 하고, 이어서 정생(鄭生)의 나이를 물었다. 정생이 말하기를, “27세입니다.”라 하였다.
(중략)
채세창이 뒤축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며 말하기를, “시고(詩稿) 한 권입니다. 선생의 부삭(斧削 문장 수정을 바라는 것에 대한 겸사)을 부탁드립니다.” 책 위에도 그렇게 썼는데, 내가 받고는 말하였다. “수일 내로 의논하여 보낼 테니 우선 책상에 놓아두십시오.” “네 그렇게 알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두 사람이 함께 일어나 말하였다. “일이 있어서 돌아가 보고자 합니다.” “무슨 일이시오.” 하였더니 “어떤 이가 우리를 청해 술을 먹자고 합니다.”라 하고 문을 나섰다. 정사가 또한 맞이하여 갔다고 한다.
-북원록(기원후 1761년경 기록.) 기록 중.
들으니 안남 통관이 우리 사신을 뵙고 캉 아래 꿇어 절하고, 편지와 물건들을 드렸는데 삼사신께 각각 등 2개와 부채 4자루, 붓 4자루를 보내고 별도로 단자를 갖추었다고 한다. 또 내게 등 1개 부채 1자루를 보냈으니 이는 세밑에 방문한 것에 대해 사례함이라 하였다.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이른다.
"한번 태좌의 얼굴을 접하니 구름과 나무를 그리워함과 같습니다. 관에 돌아온 후 매양 두 쌍부(雙鳧)를 타고, 학 하나를 날려 문창성과 더불어 서로 비추고자 하였는데 홀연히 빛나는 편지를 주어 지극한 은혜로 적시니 진실로 뜻하여 헤아린 바가 아닙니다. 우리〔職等 ‘우리’, 스스로를 이르는 말〕는 만 리에서 멀리 와 농속에 약물이 하루도 없으면 안 됩니다. 요삼(遼蔘 고려 인삼)을 한번 맛보길 청하니 진실로 당돌하나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 한두 가지 편의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사람이 초목이 아니니 감격함을 써서 깊이 새기겠습니다. 가지고 있는 별것 아닌 토산을 별도로 사람을 시켜 받들어 드립니다. 바라건대 일소에 부치시고 받으시길 바랍니다. 안남국 공사 진휘밀, 여귀돈, 정춘주 함께 절합니다."
겉봉투〔皮封〕에 써서 이르기를, ‘조선 대국 세 분 사신집사께 드립니다.’라 하였다.
-북원록(기원후 1761년경 기록.) 기록 중.
북경에 머물렀다. 아버지께서 아침에 흰죽을 드시고 또 밥 반 그릇을 드셨다. 임역배가 몰래 아문에 부탁하여 우리들이 출입하는 것을 조종하게 하니 대개 만인(灣人)이 먼저 물건을 쌓아두고 팔까 염려해서였다. 안남 삼사신(三使臣)이 통관을 시켜 편지와 시를 보내고 또 《군서고변(群書攷辨)》을 보냈는데 전일(前日)에 서문을 받겠노라 약속한 것을 실천한 것이다.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제가 2, 3년 전에 문득 나의 소견을 믿고 《고변》 한 권을 초벌로 써서 이루어냈으나 술독 속의 닭〔醢鷄〕이요, 대롱으로 표범의 무늬를 엿보는 식이니 어찌 족히 대방(大方 문장이나 학술이 뛰어난 사람)을 더럽힐 수 있겠으며, 티끌만큼이라도 맑게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경국(京國)의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서 천애지기(天涯知己)가 되니 어찌 칭찬〔齒牙〕을 아끼겠습니까? 때문에 가지고 와서 질정(叱正)을 취하고자 하니 바라건대 대략 펴보시고 가르침과 교정(校訂)을 아끼지 않으며 아울러 서문을 지어주시면 편단(篇端 문장이나 저작의 맨 앞부분)에 으뜸으로 하여 놓겠습니다. 종이와 붓으로 하여금 수놓은 비단을 더위잡아 영화로움을 더하고 섬독(剡牘 관청에서 쓰는 공문서)은 구슬 같은 빛을 입어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니 이것이 바라는 바입니다. 바라고 바라는 마음을 다 펴지 못합니다.
안남 부사 여귀돈의 시서(詩序)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복숭아와 구슬로 두 번 은혜 베푸심은 대광주리에 영화(榮華)가 가득함으로 나타납니다. 관의 먼지를 떨게 될 때경사가 있으니 또한 이미 즐겁습니다. 다만 정이 사해금란(四海金蘭)의 믿음이 있으니, 무엇으로써 드리겠습니까? 얼굴에 10겹 철갑(鐵甲)을 쓰고 삼가 장회시(將懷詩) 1률을 지어 종정(鍾情)의 뜻을 보입니다.
시에 이르기를,
임금의 조서〔十行書〕 받들고 사신 오니 / 旅圭鉤捧十行書
한 번 봄에 오랜 친구 같음을 뉘 알았을까 / 一見誰知舊識如
유감없이 그대는 호대(縞帶)를 주었지만 / 無憾旣君曾縞帶
정 있어도 유독 나는 옥구슬〔瓊琚〕 없구나 / 有懷偏我莫瓊琚
율운(矞雲)이 빛날 때 초청하여서 / 矞雲景曜招邀際
필담하니 춘풍 속에 가르침 남네 / 和筆春風謦欬餘
길은 각기 동쪽 남쪽 정(情) 또한 반반이라 / 路各東南情各半
매개 없어도 홍려시 만남부터 기억하리라 / 匪媒應記自鴻臚
라 하였다. 그 아래 쓰기를, “안남국 정사 병진과진사(丙辰科進士) 특진영록대부(特進榮祿大夫) 사금자 입내시대참료(賜金紫入內侍大參僚) 형부좌시랑(刑部左侍郞) 패천후(沛川侯) 동산(東山) 진휘밀 혜헌(惠軒)은 절하고 짓습니다.”하고 도장을 찍었는데 ‘혜헌 진씨(惠軒陳氏)’라 새겨 놓았다.
또 시서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귀국은 동방의 군자국이라 신의를 기뻐하고 시서를 일삼으니 족히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과 아끼는 맘을 일게 합니다. 폐읍(弊邑 자국의 겸칭)도 예를 잡았다 일컬어지니 지초와 난초의 기미(氣味)가 대략 서로 같습니다. 이러한즉 양(梁)나라 사람이 초(楚)나라 외밭에 물을 주던 일처럼 하게 하신다면 그 친목은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제가 얕은 재주로 사신으로 충원되길 탐내어 경궐(京闕)에 예물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사군(使君) 또한 천 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오셔서 다행히 사빈(司賓)의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맑은 말씀을 잠깐 접하니 문득 교찰(僑札)의 우호를 정하여 정의(情誼)가 많고 크심이 이를 바가 없습니다. 애오라지 배율을 지어 객차(客次)의 만남을 망녕되게 더럽혔습니다. 제초(齊楚)에 있지 않고 그 사이에 있지만 또한 우리의 우연한 만남을 기록하여 다른 날 아름다운 일화로 삼고자 할 따름입니다.
시에 이르기를,
큰 바다의 각각 동쪽과 남쪽에서 / 瀛海東南各一方
일제히 궁궐로 황제를 뵈러 왔지 / 齊趣象闕拜天王
산원산(傘圓山)은 송악처럼 빼어나고 / 傘圓槪似松山秀
압록강은 응당 이수처럼 길겠구나 / 鴨綠應同珥水長
육경 이래 학문이 흥성해졌고 / 六籍以來多學問
홍범구주 이후로 문장은 새로웠네 / 九疇而後更文章
그대가 준 쥘부채에 그 정 접어놓았다가 / 旅懷摺疊如君扇
새롭게 봄바람 대하면 활짝 펴 보리라 / 新對春風爲展揚
라 하고, “안남국 부사 임신과 진사 급제(壬申科進士及第) 특진영록대부(特進榮祿大夫) 사금자 입시내각(賜金紫入侍內閣) 한림원시강학사 겸 국사원사영성백(翰林院侍講學士兼國史院事穎城伯) 연하(延河) 여귀돈은 절하고 짓습니다.”라 하였다.
또 시서에 다음과 같이 이른다.
잠시 꽃다운 의용(儀容)을 접함에 마치 옥나무를 본 듯 했는데 총총히 한번 말함에 객회(客懷)를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정중히 두서없는 말을 써서 조금이라도 간절한 생각을 펴봅니다.
시에 이르기를,
사신 와 뜻밖에 서로 만나서 / 官碩意外偶相逢
하늘 끝에서 뜻 통함 말하다 깨달았네 / 涯角知心晤語中
육지와 바다의 경계가 다르지만 / 陸海地頭彊界異
공자의 학문은 본래 근원 같구나 / 尼洙墻仞本原同
구의(九儀)는 옥백(玉帛)으로 조회에 참여하고 / 九儀玉帛參王會
모두 의관을 드러내 고풍(古風)을 잇는구나 / 一表衣冠襲古風
모인(慕藺)과 첨한(瞻韓) 기왕에 없었다면 / 慕藺瞻韓情莫旣
돌아가 어느 곳에서 서신〔鱗鴻〕을 바랄까 / 歸來何處倩鱗鴻
라 하였다. “안남국 부사 무진과 정진사(戊辰科正進士) 특진영록대부(特進榮祿大夫) 사금자(賜金紫) 한림원대제회 방백(翰林院待制會芳伯) 동안(東岸) 정춘주(鄭春澍) 작림(作霖)은 절하고 짓습니다.”라 하였다. 아버지께서 저녁 진지를 또 반 그릇 드시고 밤에 화담탕을 드셨다.
-북원록(기원후 1761년경 기록.) 기록 중.
안남국 삼사신이 사행 길에서 지은 《소상백영(瀟湘百咏)》 1책을 보내며 우리나라 삼사신에게 서문을 써 달라 부탁하였다. 부사 여귀돈이 지은 것에 왕왕 경구(警句)가 있었다. 마침내 류군에게 작은 책자에 베끼라 분부하였다. 진휘밀과 여귀돈 또한 ‘왕(王)’ 자 운으로 각각 2편을 지어 화답시를 청하였다. 그러나 유독 부사 정춘주(鄭春澍)만 시(詩)가 없고 단지 끝에 이름만 썼을 뿐이니 아마도 우리 부사(副使 조광규)께서 그의 시에 화답하지 않은 것을 알리려 하였나보다.
소서(小序)에 다음과 같이 이른다.
뒤늦게 등화의 기쁨을 알려주시겠다더니 과연 보름 전 2일, 은혜롭게 보내주신 편지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손을 씻고 외우고 또 외우며 공경하고 공경하며 사모하고 사모하며 흠선(欽羨 공경하고 부러워함)하니 금과옥조(金科玉條)를 어찌 가히 우러러 받들겠습니까? 〈백설양춘(白雪陽春)〉이 진실로 화답함이 적다고 합니다. 다만 듣기로는, 아름다움은 추함이 아니라면 그 아름다움이 전해지지 않고 정밀함은 거침이 아니라면 그 정밀함을 알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에 감히 더러움으로 드리니 오직 다시 명하여 애오라지 마음에 품은 것을 기록하여 대신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시에 이르기를,
어찌 돌아가고픈 생각 없으랴만 간서(簡書) 두려워 / 豈不懷歸畏簡書
타향에서 지기(知己)의 흥(興) 어떠하리요 / 他鄕知己興何如
신교(神交)에 짧은 글로 경개(傾蓋)의 벗됨 기뻐하니 / 神交片語忭傾蓋
뜻 맞아 연이은 시로 패옥이 빛나는 듯 / 意會連篇耀佩琚
높은 명망 떠받침은 용령(龍嶺)의 밖이요 / 峻望高撑龍嶺外
맑은 모습 멀고 넓어 압록강 너머라네 / 淸標遠漾鴨江餘
이(李)ㆍ풍(馮) 이후 훈지(塤箎)의 정 적어졌지만 / 李馮之後塤箎少
시 주머니〔奚囊〕 잘 찾아서 벌여 놓았지 / 好索奚囊再列臚
인자한 이 어디 있어 몇 통의 편지 쓰나 / 惠人何處數封書
글자마다 주옥같아 그림보다 낫다네 / 字字珠璣畫不如
납마(納馬)와 호방한 재주 자산(子産)에게 부끄럽고 / 納馬豪才羞子産
조룡(鵰龍)과 염사(艶思)는 왕거(王琚)에게 양보하였네 / 鵰龍艶思讓王琚
천년 위로 벗을 사귈 수 없었으나 / 未能取友千秊上
오히려 다행히도 만 리 밖에서 사귀네 / 猶幸談交萬里餘
황궁에서 푸른 안개 바라보던 날 / 丹陛望纏靑靄日
훌륭한 시구를 계속 전해 주었지 / 擬摹佳句續傳臚
라 하고, 그 밑에 ‘안남 정사(正使) 동산(東山) 진휘밀’이라 썼다.
또 소서에 다음과 같이 이른다.
손을 씻고 꽃다운 글월을 받아보니 온후홍원(溫厚弘遠)하고 뜻과 맛이 흘러 넘쳐서 사랑하여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인이 이르기를, ‘반드시 천지의 호령(浩靈)이 붓을 얼음 사발 눈 잔 가운데 적심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에서 서로 부합하는 바가 있으니, 마치 먼저 아름다운 제작을 유도한 것과 같습니다. 벽돌을 던져서 옥구슬을 끌어들였으니 그 기쁨이 어떻겠습니까? 은혜를 입어 서문 한 통도 바란 바대로 또한 이미 얻었고, 만남을 인연하여 외람되이 멀리서 편지까지 받자왔으니, 실로 격이 맞지 않음에 절로 얼굴이 붉어짐이요, 미처 얼굴이 익기도 전에 우정을 맺은 격입니다. 지위가 높으시고 미묘한 것을 의론하심에 호리를 다 분석하시고, 일기(一氣 한목에 내치는 기운)로 휘둘러 씻어 내심에 강을 기울여 협곡에 쏟은 것 같으니 실로 명유거공(名儒鉅公)이라 보통 인물이 아니십니다. 3번이나 보잘것없는 제 시를 돌아봄에 삿된 견해에 끌리고 묵은 말을 모아 놓은 지라 육손이와 같은데, 과분하게도 칭찬을 해주시니 다행이자 부끄럽습니다. 서문의 말미에 강례궁리(講禮窮理)로써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고 다정하고 친밀하게 권면해 주시니 감히 성대한 정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편찬한 역사서가 참됨을 가려 뽑음은 구공(歐公 구양수(歐陽脩))의 《박고도(博古圖)》가 아니로되 사군의 글은 채군모(蔡君謨)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서수관(鼠鬚管 쥐 수염으로 만든 붓), 용단차(龍團茶 용무늬가 찍힌 차)로써 윤필(潤筆)해 주신 대가를 드릴 수 없음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다시 원운에 의거하여 욕된 글로써 올려드립니다.
시에 이르기를,
이역서도 뜻 합하면 같은 나라 사람이니 / 異方合志亦同方
학술이 예로부터 공자에 근본해서지 / 學術從來本素王
온갖 복에 함께 기뻐 오선(五善)을 구가하나 / 完福共喜歌五善
빼어난 재주에 나만 부끄러우니 삼장이 결핍하였네 / 逸才偏愧乏三長
측리지와 백추지에 시 써서 주고받아 / 側釐白硾交投贈
복식과 법제를 다투어 표창하였다 / 端委洪疇競表章
붓 가는 대로 고쳐 주셔도 종내 부족할 텐데 / 信筆雌黃終歉歉
찬란한 맑은 의론으로 과히 높혀 주셨네 / 粲花淸欲過揄揚
위대한 재주 경위는 동방에 양보하니 / 韙才端的讓東方
의리의 연원이 백대 임금 관통하였네 / 義理淵源冠百王
사십 일 사귐에 매화 봄소식 무겁고 / 尙友四旬梅信重
2월의 상사(想思)에 버들가지 길어지네 / 相思二月柳條長
외람되이 문자로 이별의 한 이끌어서 / 枉因文字牽離恨
다시금 겸종 편에 짧은 글을 보낸다 / 還借傔從寄短章
풍정을 써 보려 하나 불초함이 꺼려지니 / 擬寫風情嫌莫肖
단대에서 가만히 맑은 그대 떠올린다 / 丹臺殷殷想淸揚
라 하고, 그 밑에 한 줄로 ‘안남 부사 연하(延河) 진휘밀’이라 썼다.
-북원록(기원후 1761년경 기록.) 기록 중.
전세계의 최강대국인 청나라의 조정으로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입조해와서 청나라의 조정을 섬겨오는 형식을 취해왔을 때, 조선국의 사신단이 안남국(월남국, 교지국, 현 베트남)과 유구국(류큐국, 현 오키나와)의 사신단과 별도로 만난 바가 있었는데, 안남국과 유구국의 사신단들이 이렇게 우리나라 곧 조선국을 대국, 대방, 경국, 군자국 등으로 섬겨오면서 자신들의 시문(시와 산문)을 평가해주는 것과 동시에 가르쳐달라고 간청하여서, 이를 수락한 조선국의 사신단에게 자신들의 시문을 평가받는 것과 동시에 가르침을 받아온 기록들입니다.
참조:전세계 문명사에서 중국, 한국의 앞에선 그 어떤 국가라도 근본을 내세울 수 없음을 보다 분명하게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근현대사가 시작되기 이전인 기원후 180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전세계의 모든 문명권들 중에서 종합적으로 보았을 땐 중국, 한국을 양대 최선진국으로 하는 동아시아(동북아시아)문명권이 가장 선진적인 문명권이여왔던 것이 괜한 것이 아니죠(동아시아문명권은 유교[유학, 성리학]문명권, 한자[한문]문명권으로도 볼 수 있지요. 즉, 국가 운영 사상은 유교, 국가 공용 문자는 한자인 문명권, 문화권인 것이죠. 여기에 기인해서 보면, 예로부터 대대로 안남국, 월남국, 교지국 이렇게 불려온 베트남도 지리적으로는 동남아시아~남태평양권이지만, 문화적으로는 동아시아문명권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지요. 베트남인의 외모도 베트남의 본류인 북베트남의 사람들은 동아시아인 형태의 외모인 것과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명백한 동아시아문명권이지요. 동아시아문명권은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서방으로는 티베트고원과 위구르고원 그리고 서북방~북방으로는 몽골초원, 만주대륙 그리고 남시베리아권까지라고 할 수 있죠.).
참조 2:전세계 문명사의 양대 근본국인 중국, 한국을 잘 살펴서 보면, '창조(창의)' 의 대가는 중국, '최적화(응용, 재가공. 항상 중국이 창조해낸 것을 한국이 그 어떤 국가들도 감히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최적화해내왔습니다.)' 의 대가는 한국이 아닌가 싶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가 조선 후기 시대때에도 조선 전기 시대때처럼 국제사회, 국제질서에서 이미지가 굉장히 좋았었음을 알 수 있죠. 전세계의 일등국으로써 굉장히 사모(숭상, 흠모)받아왔으니까요. 조선에게 있어서 기원후 1800년대 전반은 회광반조의 시기고, 기원후 1800년대 중반에서 기원후 1910년경까지의 시기는 쇠락[몰락]기 및 멸망기이구요. 흥미로우니만큼, 유익한 참조가 되어드렸으면 해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