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꿈꾸는 휴가는 어떤 것인가요? 숲속 평상에 느긋하게 누워 책을 보는 휴가? 태양보다 더 뜨거운 백사장을 뛰어다니는 활동적인 휴가? 아니면 둘 사이의 적절한 조화? 휴가를 어떻게 즐길지 상상만 해도 행복하죠.
‘배케이션 시뮬레이터’를 플레이하기 전 제가 기대한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내가 가고픈 휴가를 미리 대리 체험해보는 거 말이죠. VR로 더욱 실감나게 즐기는 나 혼자만의 쾌적한 휴가.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휴가는 사치란다, 인간이여
● 최고로 느긋하고 기억에 남을 곳, 휴양섬에서의 생활을 즐기세요!
● 완벽한 셀카 사진으로 나와 똑 닮은 가상 아바타를 만드세요!
● 다채로운 봇들과 교류하세요!
● 매력 넘치는 장소들에서 기발한 레크레이션을 즐기세요!
● 실리콘의 바다와 가상의 햇빛에 몸을 담그세요. 손을 모래투성이로 만들지 않아도 되니 좋죠!
● 복잡한 일과 회사는 잊고 낙원 속으로 하이킹을 떠나세요!
● 얼음 조각 기술을 연마하고 눈사람 장갑을 떠서 최고의 아늑함을 만끽하세요!
● 모든 것이 갖춰진 편안한 VR 환경을 즐기세요. 멀미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상세 페이지에 적힌 게임 소개만 봐도 이 게임이 줄 휴가의 달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 제목이 ‘휴가를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 아니라 ‘시뮬레이션 된 휴가’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휴가 아일랜드(Vacation Island)’의 6성급 ‘배케이션 리조트’에 도착한 우리 인간(플레이어). 가이드인 ‘휴가봇(VacationBot)’의 안내로 섬 안에 있는 산과 숲, 그리고 해변을 다니며 휴가를 만끽하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효율봇(EffeciencyBot)’이 모든 것을 바꿔 놓습니다. 알고보니 이곳은 인간의 휴가 행동과 그에 따른 즐거움을 수치화 하는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습니다. “인간은 왜 일을 안하고 놀고 싶어하는가?”가 궁금해진 로봇들이 직접 연구 데이터를 얻을 수 있도록 프로젝트를 만든 것이죠.
인간의 즐거움을 데이터로 수치화 한 것이 ‘메모리’입니다. 다양한 레크리에이션에서 임무에 성공하면 메모리를 얻습니다. 일종의 미니게임이죠. 메모리를 더 많이 얻을수록 더 다양한 장소에 방문할 수 있습니다.
여유롭게 해변에 누워 바다를 감상 한다거나, 숲 속을 돌아다니며 상쾌한 공기를 마시는 휴가는 사치입니다. 메모리를 얻기 위한 임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 보이는 장소 뿐 아니라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임무를 해결하기 위한 힌트는 거의 없습니다. 플레이어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과 상호작용하고, 필요한 장비를 배낭에 보관하고, 머리를 굴려 임무를 해결해야 합니다. 마치 패키지 관광에 끼인 필수 코스에 끌려다니는 기분입니다. 이 정도면 휴가가 아닙니다. 노동입니다.
그러고 보니 배케이션 시뮬레이터의 전작이 ‘잡 시뮬레이터(Job Simulator)’입니다. 인간에게 일을 시키고 연구를 하던 로봇들이 이제는 휴가를 시키고 연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뿔싸.
바다, 숲, 산이라는 공간 때문에 플레이 환경이 넓고 쾌적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주 좁은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시점 또한 고정되어 있어 앉아서 플레이하기에는 좋지만 갑갑한 느낌이 듭니다. 주변 모든 사물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또는 해야 하는) 자유도에 비해 공간 이동 또한 제한되어 있습니다. 출시된 지 오래된 게임이 가지는 한계일 듯 합니다.
VR을 시작하는 이의 가장 완벽한 가이드
비록 한적한 휴가의 대리체험을 즐길 수 있는 게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게임까지 별로인 것은 아닙니다. 배케이션 시뮬레이터는 VR을 보유한 유저라면 꼭 사야 할 필수 게임입니다.
배케이션 시뮬레이터에서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냉장고를 열어 과자봉지를 뜯고, 동전을 넣어 자판기를 이용하고, 카메라로 셀카도 찍을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들이 게임 속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억지로 버튼에 행동을 할당하거나 조작을 복잡하게 만들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설명에 시간을 할애하거나 조작 연습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게임 속에 등장하는 배낭이 있습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모으려면 내 등 뒤에 있는 배낭을 가져와서 물건을 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조작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알려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현실에서 하는 그대로 행동하면 되니까요.
현실 같은 가상 현실 속에서 유저들은 금방 게임에 녹아듭니다. 이것저것 만져보고 해보는 재미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도 금방 자연스러워집니다. 휴가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게임이 주는 재미 그 자체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직관적이고 어렵지 않아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게임입니다. 집고 던지고 돌리다 보면 VR의 조작법에도 금방 익숙해지고 VR이라는 환경에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죠. VR을 처음 해보는 분들이나 접대용으로도 손색없는 정도입니다. 이 게임이 괜히 오큘러스 리프트 런칭 타이틀이었던 게 아니에요.
유쾌함을 모르는 봇들의 유쾌함
휴가 아일랜드에서는 정말 다양한 봇들이 등장합니다. 가이드를 해주는 봇 외에도 각 장소마다 임무를 주는 봇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공간의 봇은 어떤 모습이고 어떤 성격인지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죠.
봇의 대사 중에는 인간들이 흔히 하는 관용구나, 인간들의 문화를 ‘봇’의 언어로 재해석한 언어 유희가 많습니다. 한국어 자막이 제공되기 때문에 이런 언어 유희를 꽤 즐길 수 있죠. 개중에는 이게 언어 유희인지 모르고 ‘기계적으로’ 번역한 것들도 있지만 한글로 즐길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입니다.
비록 한글화가 되어 있고, 모든 연령 대상의 게임이긴 하지만 이런 고오급 유머를 이해하면서 즐기기까지 하려면 아무래도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일과 휴가라는 양가적 선택지에서 한 번쯤 고민해본 경험이 있을수록 이 게임의 모든 것이 와 닿을 거예요.
휴가 가려고? 그럼 일해야지
배케이션 시뮬레이터는 출시된 지 꽤 된 게임입니다. 2019년 12월 오큘러스 리프트 런칭 타이틀로 발매됐으니까요. 하지만 꾸준한 업데이트로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핸드 트래킹 2.0 업데이트가 적용되면서 컨트롤러 필요 없이 오직 손으로만 플레이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손에게도 ‘휴가’가 주어진 것이죠.
하지만 이 게임의 진정한 완성은 2년 전 적용된 ‘업무복귀(Back to Job)’ 확장팩입니다. 휴가의 매력을 알게 된 봇들이 휴가를 즐기는 동안, 우리 플레이어는 ‘알바’가 되어 봇들의 다양한 요구를 해소해 줘야 합니다. 역시 ‘잡 시뮬레이터’ 개발사답네요.
일과 휴가, 휴가와 일. 결국 모두 만족시켜야 100%
생각해보니 ‘내가 가고픈 휴가를 대리 체험 하는 게임’일 거라는 제 첫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도 같습니다. 정신없이 업무에 몰두하다가, 멀리 떨어진 휴양지로 휴가를 가고, 그 휴가지에서도 뭔가 열심히 즐기고, 그 즐거운 기억으로 다시 업무에 복귀하는 평범한 사람의 1년 사이클이 배케이션 시뮬레이터에 제대로 담겨 있습니다. 할 것이 넘치는 휴양지에서의 레크리에이션과 봇들의 유쾌함, 다양한 사물과의 상호작용이 주는 재미에 빠지다 보면 머리를 굴려야 하는 퍼즐마저 즐겁습니다.
총평
VR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만들 유쾌한 미니 게임 퍼즐 어드벤쳐.
이런 분들에게 추천
VR을 제대로 경험해 보고 싶다면.
VR을 제대로 전파하고 싶다면.
단순한 미니게임을 좋아한다면.
호기심이 많다면.
귀엽고 쉬운 게임을 좋아한다면.
여유있게 게임을 즐기고 싶다면.
이런 분들에게 비추천
복잡하고 심각한 게임을 좋아한다면.
자막 읽기 귀찮다면.
빨리빨리 진행되는 게임을 원한다면.
휴가를 싫어한다면.
전자공학에 두드러기가 있다면.
마치 직장에서 강제로 부장님들이랑 휴가 보낸 것 같은 게임이네요 ㅋㅋㅋㅋㅋ
그런 일은 가상현실에서도 현실에서도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