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장문주의) 사일런트힐F 클리어 소감 및 비평
안녕하세요, 지난주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사일런트힐F를 플레이하고, 3회차 클리어 후 못본 엔딩은 유튜브로 확인하면서 즐겁게 보냈습니다. 저는 호러물이나 슬래셔물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일런트 힐은 2를 비롯해서 많은 시리즈를 즐겼습니다. 특히 2를 제일 좋아하는데, 죄악감과 트라우마로 비틀린 인간군상이 각자 속죄로 향하는 나름의 구조가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일런트힐F도 큰 기대감으로 구매했고, 그럭저럭 즐겁게 플레이했습니다. 아래는 제가 게임을 하면서 느낀 여러 부분에 대한 감상입니다. 물론 아래 내용은 저 개인의 감상일 뿐이며, 모든 사람의 감상은 다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굉장히 길다는 점 감안하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추가로, 이 글은 원래 레딧에 게시했던 글이며, 영어로 쓴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어투나 어순, 혹은 일부 용어가 어색하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최대한 다시 다듬기는 했지만, 보시면서 혹시 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시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더하여 추가로, 이 글은 커뮤니티에 올린 원본에 대해 여러 존경스러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후, 기존의 내용을 보강하고, 논지를 정리하고, 표현을 보강하여 최종 수정된 버전입니다. 이 감상문의 완성을 마지막으로 저는 사일런트힐F에게 작별 인사를 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덧붙여 댓글이나 토론글을 통해 이 감상문에 대해 대화해주신 여러 친구분들, 개인 메시지로 응원해주신 모든 친구분들, 그리고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서론을 살짝 길게 쓰고 있사오니 양해바랍니다. 그럼, 본론인 '사일런트힐F 클리어 감상'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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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전투 : 나쁘지 않음
2. 기술 : 조잡함
3. 스토리 : 최악
(1) '성차별'이라는 테마를 다루는 방식
(2) '성차별'을 말하는 성차별적인 시각
(3) '성차별'이라는 주제 뒷면의 도착적인 태도
(4) 악의가 없는 빌런
(5) 부족한 핍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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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투 : 나쁘지 않음
사일런트 힐 F의 전투는 타격감이 매우 훌륭합니다. 타격감 하나는 어떤 소울라이크 시리즈보다 나아요. 특히 소울라이크 시리즈는 아무래도 동작의 기계적인 재현성과 합을 중시하기 때문에, 정확한 타격이 들어갔을 경우 서로 쩡! 하면서 멈추는 경직 상태를 강렬하게 표현하지 않는 편입니다. 경직을 하나의 디버프 상태, 그로기 같은 상태이상 위주로 표현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일런트 힐 F는 쇠빠따가 정확하게 꽂히는 순간 시간이 멈춘듯한 강렬한 경직과 함께 쩡 소리가 어울려서 대단히 묵직한 타격감을 선사합니다. 이 쾌감은 상당합니다. 제일 비슷한 건 검은 신화 오공입니다. 그것도 이렇게 경직 효과를 강하게 줌으로써 묵직한 타격감을 표현하죠.
그러나, 딱 타격감 하나만 좋고 나머지는 다 그저 그렇습니다. 나쁜 건 아닌데 그렇다고 뭐 좋은 것도 딱히 없어요. 일단 조작에 대한 반응이 썩 좋지 않고, 적의 패턴 역시 단순한 편인데다 움직임 자체가 지나치게 직선적이라, 전투 자체가 공략으로 해체한다기보다는 감각으로 반응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조작감 부분에서, 특히 캐릭터가 마우스 조작을 이탈하는 문제가 자주 발생합니다. 마우스로 시점을 회전시키는데 히나코는 다른 방향을 보고 이동한다거나, 혹은 록온을 한 상태에서 공격을 해도 전혀 다른 방향의 허공으로 공격을 찔러넣는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버그인지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투가 소울라이크처럼 깔끔하고 정교한 느낌은 아니에요. 주인공이 여고생 피지컬이니까 이해는 가는데, 그래도 소울라이크 기대하고 플레이하면 실망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저는 1회차에서는 모든 부적+엔마를 지구력 보강으로 셋팅했는데도 전투가 막 깔끔하고 재밌지가 않았어요.
특히 좁은 골목에서 다대일 전투를 치르게 짜놓은 구간에서는 썩 좋지 않은 조작감과 시점 문제, 락온의 시야고정까지 겹치는데다, 벽의 피격반정이 애매해서 여유가 있어도 무기가 튕겨나거나, 여유가 없는데도 무기가 휘둘러지는 상황이 너무 자주 발생해서 짜증납니다. 어려운게 아니라 불편하고 짜증스러운 쪽에 가까워요. 잡는 공격이 시야밖에서 들어오면 피하기가 어려운데, 잡힌 상태에서 QTE등으로 탈출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반피가 까이는 것이 상당히 이상했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불편하게 만들어야 했나?" 하는 느낌입니다.
또한 적 몬스터가 딱 5종류밖에 없는데다 그나마도 한 필드에선 2종류만 고정으로 나오기 때문에 전투 자체가 굉장히 반복적이고, 조금만 지나면 금새 지루해집니다. 그러니까 한번 한번의 전투 자체는 재밌는 편인데, 그 재밌는 전투를 게임 한번에 막 2~30번씩 반복하려니까 나중가선 피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소울라이크처럼 전투에 보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몹이 사라져서 맵 탐색하기 편해진다는 정도의 장점밖에 없거든요.
사실 이 부분은 이해가 가는게, 공포게임이니까 전투가 즐거운 것이 되면 곤란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전투가 많고, 강제 전투 시퀀스도 많아서 빠르게 질립니다. 특히 몇몇 구간은 앞뒤가 좀 맞지 않는데, 굳이 싸울 필요도 없고 주변에서 얼른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는데 반드시 적을 죽여야 진행할 수 있는 구간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스토리 짠 사람하고 맵 디자인한 사람하고 다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다 무기가 너무 빨리 소모되어서 매번 찾아다니고 들고 하는게 생각보다 귀찮습니다. 특히 저는 환상적인 타격감을 선사하는 오함마를 제일 좋아했는데, 쇠빠따나 낫에 비해 그리 많이 나오질 않더군요. 한 회차에 대략 3개 정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기를 자꾸 바꿔야 하고, 보스전 같은데서는 무기가 다 떨어지면 어디선가 누가 일부러 잡으라고 던져주는 것처럼 갑자기 생겨나는데 그것도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전투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너무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것은 문제지만, 하나 하나의 퀄리티는 나쁘지 않았고 특히 타격감이 엄청나게 훌륭했어요.
2. 기술 : 조잡함
미술적인 부분에서 분위기는 아주 훌륭하고, 옛날 일본을 잘 구현한 레트로한 느낌은 아주 좋았습니다. 하지만 풍경에 큰 변화가 없다보니 금방 지루해집니다.
이 도시의 맵은 크게 마을 시내/논두렁/학교/산길/주인공네 집(+여우 신전)으로 갈리는데, 학교 빼고는 모든 풍경이 다 비슷비슷해요. 이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똑같은 색, 비슷한 건물, 비슷한 형상의 반복이라 시각적인 다채로움이 굉장히 부족합니다. 그나마 완전 다른 공간인 여우 신전은 처음에는 신선한데, 여기도 똑같은 공간에서 너무 오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금방 익숙해지면서 지루해지고.
3D 모델링의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훌륭하진 않습니다. 그냥 봐줄만했다 정도죠. 대작 AAA급 게임에 비빌 정도는 아닌 거 같아요. 제일 중요한 주인공 히나코마저도 뭔가 자연스러운 느낌이 없고, 그렇다고 막 엄청 예쁜 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목각인형스러운 디테일과 움직임 때문에 컷신 몰입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사양을 굉장히 많이 타고 로딩도 잦은데, 기술적인 역량이 부족한 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습니다.
3. 스토리 : 최악
(1) '성차별'이라는 테마를 다루는 방식
이 게임은 성차별을 메인 테마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게임의 서사는 히나코를 중심으로 (1)결혼 관계 (2)부녀 관계 (3)친구 관계라는 세 지류가 교차하는데, 그 주제들이 하나로 묶이는 지점이 바로 당시의 성차별적 시대상에 의한 억압이거든요. 히나코는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그녀를 가축처럼 대했고, 친구들은 그녀가 결혼한다는 이유로 배신자라고 불렀고, 남자인 친구는 그녀에게 ㅁㅇ을 먹였죠. 사실 이런 배경이라면 좀 다른 주제들, 예컨대 '인원 회전이 적은 닫힌 사회, 인원간 유대가 두터운 좁은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조리한 인습' 등 다룰만한 흥미로운 주제가 여럿 있지만, 그런 주제들은 대체적으로 성차별이라는 핵심 주제의 곁가지로 다루어지거나, 아주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정도로만 다뤄집니다. 부잣집 가문에 여자를 신부로 바치는 인습이 있었다, 여자의 결혼을 상품처럼 매매하는 인습이 있었다, 자식은 부모 일을 도와야 했다, 뭐 이런식으로.
실제로 그당시 성차별이 있던 것은 맞아요. 개인적으로는 지금 다루기엔 한물갔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쨌든 한때 핫했던 주제이기도 하고, 게임에서 다루지 못할 주제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의 스토리는 성차별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미흡하게 다룹니다. 마치 대략 5-60대 남성 기득권층이 "야, 나는 성중립적이고 개방적인 '마음이 젊은' 멋진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성차별'에 대해 설교적으로 이야기하는 느낌이에요. 성차별이라는 주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도, 짚고 있지도 않고, 오히려 굉장히 성차별적인 시각을 기저에 깔고 있습니다.
먼저 게임에서 다루는 성차별에 대해, 주인공 히나코를 봅시다. 그녀가 성차별로 입은 '피해'가 정확히 뭐죠? 그녀가 입은 성차별 피해는 스토리적으로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사회 전반적으로 '남자다움'이나 '여성다움'을 강요당했다. 둘째, 가정에서 가축 취급을 당했다(히나코가 직접 그렇게 말하죠). 셋째,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당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성적 고정관념'을 봅시다.
이 주제는 게임 내내 굉장히 피상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맥주 팜플렛에 "사내답게 마시자!"라며 헐벗은 아가씨가 웃고 있거나, 혹은 여성잡지 표지에 "사랑받는 여성이 되는 법"이라고 쓰여 있거나 하는 식이죠. 너무 피상적이어서 '시미즈 히나코가 입은 피해'와 선뜻 연결되지가 않습니다. 기껏해야 남자애들이 하는 놀이를 못하게 막은 정도? '그 시대에는 그랬었구나'하는 느낌밖에 들지 않아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봐야 '그런 시대적 고정관념이 있었으니, 히나코도 뭔가 강요당하거나 힘든 일이 있었겠구나' 하는 정도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시대는 여성에게 여성성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남성에게 남성성을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위 팜플렛에서, 맥주 한잔 정도는 '사내답게' 들이켜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잖아요. 일본이라는 사회는 오래전부터 이 사내다움, 곧 '책임감'이란 것이 극단적으로 강요되는 사회였어요. 당장 할복이란 게 뭔가요? '책임이라는 미명하에 반강제된 자살'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게임에서 다루는 성적 고정관념에 의한 피해라는 게 정확히 어떤 '피해'인지도 명확하지 않지만, 그게 '명확한 (여성에 대한) 성차별 피해'라고도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시대에 의한 피해'라고는 할 수 있겠죠. 근데 시대에 의한 피해를 받지 않은 인간이란게 이 세상에 존재해요? 그런 것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가 없어요. 거기다 이건 게임이잖아요. 몇십년 전의, 그것도 직접적이지도 않은 시대적 고정관념에 의한 피해상에 대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감하거나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요?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해본 60~70대 노인이라면 모를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랬나보다'라는 느낌이 스쳐지나가는 정도에요.
게임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변주가 하나 더 등장합니다. 바로 사쿠코죠. 사쿠코는 가업인 신사 문제로 골몰하는 소녀입니다. 그러나, 이 주제가 얼마나 의미있게 다뤄지나요? 게임에서 그녀는 '환상을 본다(고 주장하)는 왕따 피해자, 심지어 게임 시작하자마자 죽은 주인공 친구'라는 강렬한 개성이 메인으로 다뤄집니다. 이 인상적인 흐름 속에서, 사쿠코가 신사의 딸로서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야기는 아무 의미없이 휙 흘러가버립니다.
둘째, '가정에서 가축 취급을 당했다'를 봅시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여자가 가축 취급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가부장이라는 제도 자체가 '가장에게 다른 구성원이 귀속된 형태'를 가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게임의 스토리는 이 부분을 굉장히 비겁한 방식으로 건너뛰는데, 히나코의 집안에는 남자아이가 없어서 '가장이 아닌 남자'가 어떻게 대우받는지를 가려버리는 식입니다. 히나코와는 반대로 슈의 경우를 봅시다. 슈는 '가장이 아닌 남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엔 가장, 즉 슈의 부모님을 없애버림으로써 가장이 아닌 남자가 집안에서 어떻게 대우되는지를 가려버립니다. 여우가면을 쓴 고토유키도 똑같습니다. 고토유키 역시 히나코처럼 부모님(혹은 조부모님)에 의해 결혼을 강요당한 '가장이 아닌 남자'입니다. 역시 게임에서는 고토유키 집안의 '가장'을 불확실한 실체, 그러니까 '여우신' 같은 걸로 치환해서 없애버렸죠.
거기다 그 가부장제의 억압, 즉 히나코네 아빠의 잘못이란 것도 결국 '집안 돈을 맘대로 썼다(가 사기당해서 잃었다)'와 '식칼을 던지곤 했다'입니다. 물론 그건 당연히 히나코네 아빠의 잘못이고, 잘했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아주 안좋은 일이죠. 하지만 이 문제들이 과연 '성차별'과 관련된 문제인가요? 사기 피해와 가정폭력 문제잖아요. 그 집안에 남자아이가 있었으면 히나코와 다른 대우를 받았을까요? 예컨대 남자아이가 히나코처럼 아버지한테 바락바락 대들었으면, 아버지가 가만 있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누구나 알잖아요. 그런데 이게 왜 '성차별 문제'처럼 다뤄지는 거죠? 나는 성차별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렇다고 성차별이 좋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게임의 스토리텔링은 성차별과 '가정 폭력', '개인의 성격 문제'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어요. 굳이 따지자면 '그런 가정폭력이 용납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성차별적이었다'는, 아주 간접적인 연관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히나코가 당한 대우는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대우는 히나코가 여자아이가 아니라 남자아이였어도 똑같이, 혹은 더 끔찍하게 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예컨대 식칼을 던지는 위협이 아니라 아예 직접적인 폭력을 당한다거나. 당시에는 남자아이에 대한 가혹한 물리적 체벌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폭력을 당하며 자라야 '강인한 사나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정폭력'이란 말을 들었을 때 '소년을 방으로 밀어넣고 허리띠를 푸는 아버지'를 연상할 겁니다. 나 역시 그렇고. 물론 그런 경험이 미야자키 하데타카같은 위인을 탄생시켰고, 그 덕분에 우리는 여러 소울라이크를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만. 어쨌든 가정폭력이란 게 꼭 여성에게로만 향하는 것은 아니에요. 거기다 엄마가 아이에게 가하는 가정폭력도 분명히 존재하고.
그래서 말한 것입니다. 성차별을 이해하지 못하는 50대 아저씨가 '난 성차별에 반대하는 '마음은 젊은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쓴 것 같은 이야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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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가부장제에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에요.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가장의 가축, 좋게 말하자면 재산의 일부로 취급된 것은 똑같지만, 여자아이는 '시집가면 출가외인' 취급을 받았고, 남자아이는(특히 장남은) '가문의 후계자'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남자아이가 좀 더 좋은 대우를 받긴 했어요. 그러나 그 좋은 대우에 대한 대가로, 남자아이는 성장 후 늙은 부모에 대한 부양 책임을 짊어져야 했습니다.
이것은 애초에 가부장이라는 제도 자체가, 단 한 명의 가장이 대략 5인(자신+아내+아이 셋)을 먹여살리는 엄청난 무게의 책임을 지는 대신, 그 가정 안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구조가 생물적으로, 사회적으로 생존에 압도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거고.
물론, '가부장이 생존에 유리하다'라는 말을 불편하게 보실 분들 많을 거 압니다. 하지만 사실인 걸 어떻게 해요. 가부장을 찬양하자, 부활시키자는 게 아니고, 그냥 사실이 그렇다고요. 의사결정이 빠르고 정확한 단일 의사결정구조, 책임과 권한이 명확한 수직적 계급 구조는 가장 높은 생산성과 효율을 가진 구조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때마다 모든 직급의 사람이 모여 민주적인 토론 같은 걸로 의사를 결정하려 하면 그 회사는 아무 것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각 직급마다, 성별마다, 출신 학교나 지역마다 사람이 다 다른데, 그 사람들 각자는 무한한 이기심과 욕망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 무한한 욕망에 비해 회사가 가진 자원은 유한하므로, 결국 그런 회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망해버리게 됩니다. 하나의 배에 선장이 두 명이면 그 배가 어디로도 갈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죠. 바로 그래서 단일 의사결정구조-즉 리더가 없는 사회는 리더가 있는 사회를 (전쟁이 되었건, 경제가 되었건)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사회가 살아남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물론 이 가부장제가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애초에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없잖아요? 2025년에 '가부장제는 나쁘다'라는 주장을 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거 아닐까요?
셋째,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당했다'를 봅시다.
이것도 위 둘과 마찬가지입니다. 원치 않는 결혼에 대한 강요라는 것이 썩 좋은 느낌이 아닌 것은 맞아요. 하지만 인류사 대부분의 결혼은 연애결혼이 아니라 가문, 즉 혈족이나 일족끼리의 연결이었고, 중매결혼이란게 아주 나쁘기만한 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검증된 집안끼리의 결합은 안정성 면에서 연애결혼보다 훨씬 우월합니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다 만난 사람과 사귀어 결혼한 경우, 상대가 정확히 어느 정도의 빚, 어두운 과거, 전과, 유전병이나 불치병, ㅁㅇ 투여 경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일일이 검증할 방법이 없고, 그 리스크를 다 감수한다 쳐도 결혼 후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휙 떠나버릴 수 있기 때문에 안정성이 매우 좋지 않아요. 가족간의 결합이라는 중매결혼은 가문이라는 사회적 압력을 통해 그 이탈을 방지하므로 안정성이 뛰어납니다. 그러니까 중매결혼이 연애결혼보다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연애결혼만이 옳고 좋고 모든 사람이 연애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각자 알아서 하는거지.
다만, 중매혼이 억압을 통해 개인에게 강요할 때 안좋은 것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은 맞습니다. 근데 게임 내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나요? 게임 내에서, 여우가면 고토유키가 히나코에게 결혼을 강요했거나, 혹은 억압하려는 의사가 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나쁜 뜻이 있던 거에요? 아니에요. 고토유키는 어렸을 때 자신을 구해준 히나코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구애를 한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구애를 신청한 방식이 당시의 방식인 '중매'였던 거고. 심지어 일부 엔딩에서 보면, 히나코가 결혼을 거부하자 고토유키가 결혼을 파혼하고 아버지나 할아버지쯤 되는 여우신의 분노도 자기가 막아내줍니다. 그러니까, 고토유키는 히나코가 결혼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다시 말해 이 게임에서 아무도 히나코에게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어요. 히나코 자신이 싫다는 의사표현을 안해서 '히나코도 좋아하나 보다(최소한 싫어하지는 않나 보다)'라고 오해한거지.
심지어 고토유키는 결혼을 하기 위해 처가의 빚까지 갚아줬어요. 히나코의 부모의 빚이자, 부모가 갚지 못하고 사망하면 히나코에게 물려질 빚 말이죠. 히나코의 어머니는 암환자고, 히나코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이므로 둘 다 언제 급사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부모가 덜컥 죽으면 히나코가 그 빚을 어떻게 갚겠어요. 고토유키는 그걸 갚아준 거에요. 히나코를 사랑하기 때문에.
히나코는 여자아이기 때문에 빚을 물려받았다가 갚지 못하면 유곽에 창녀로 팔릴 위험성까지 있었습니다. 현대에도 빚을 갚지 못해 창녀가 되는 사람이 아예 없는게 아닌데, 그 당시 시대로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죠. 실제로 현실의 일본에서는 그 당시 빚을 갚지 못해 창녀가 된 사람들을 구제하자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고, 농어촌에서 돈을 벌기 위해 여자아이를 매매하는 일도, 여자아이를 전문으로 매매하는 업체도, 매매를 금지하자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돈으로 팔린 여자아이들은 창녀, 하녀, 가게 직원 등 여러 산업분야에 활용되면서 고통받았고요.
최종보스 비슷한 것으로 취급되는, 아마도 현실에서는 고토유키의 부모나 조부모일 '여우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토유키는 사생아인데다 여우에게 물린 후 광견병 의심 증상도 보인 환자입니다. 그런 아이가 어떤 여자아이에게 홀딱 반하니까 도와주려고 노력한거잖아요. 가문의 돈까지 내주면서. 끽해야 20대 정도인 고토유키가 자기 돈으로 히나코네 빚을 갚아준 것은 아닐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우신도(그리고 그 주변의 여우가면 쓴 친척들도) 그런 아이들이라도 행복해지길 빌면서 돈을 포함한 지원을 해준 거에요. 좋은 뜻으로. 실제로 여우가면 친척들도 히나코한테 "예쁘다", "맛있는 것 좀 많이 먹여야되겠다", "편하게 있어라"라고 덕담도 해주잖아요.
현재도 그렇지만, 그당시 일본에서 '지참금'은 남자 측이 일방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랑 측 가족과 신부 측 가족이 공동으로 돈을 출자해서 새로이 결혼하는 부부의 미래를 도와주는 의미의 관례입니다. 실제로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신랑측은 집, 신부측은 가구나 가전이나 생활비'라는 인식이 남아있어요. 근데 시미즈 가는 빚더미에 올라앉았으니 고토유키가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고, 따라서 고토유키 측에서 일방적으로 '선심을 써서' 지참금 명목으로 빚을 갚아준 거고요.
그렇다고 히나코가 그 시점에서 다른 사람, 예컨대 슈를 사랑하거나 사귀는 사이였나요? 아니에요. 그냥 서로 좋은 감정이 있다 정도지. 둘은 명확히 사귀는 사이가 아니고, 슈가 히나코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고 있으며 히나코도 슈를 싫어하지는 않는 정도입니다.
결국 히나코는 결혼을 강압당한 적이 없어요. 가정폭력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결혼' 자체를(정확히는 '가부장적인 가정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했는데, 정작 자기가 그런 이야기를 하질 않으니 고토유키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그 사정을 몰랐던 거죠. 히나코가 성격이 비뚤어지고 ㅁㅇ에 중독되어 20살도 넘은 성인인데도 자기 의견 하나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 소위 커뮤니케이션 장애가 되었다는 사실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정이 있었든간에, 말을 못해서 피해를 입은거면 최대의 책임은 말을 못한 자신에게 있는 것이고, 그것을 강압이나 강요에 의한 피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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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이런 주제를 왜 사용한건지 의도는 알겠어요. "그 당시에 성차별이 있었고 그게 안 좋았다." 거기까진 알겠어요. 근데 그것을 '왜 안좋았는지' 설득하거나, 그것이 현대의 플레이어에게 어떤 의미와 생각할 부분이 있는지 전달하는 걸 못하고 있어요. 그냥 '우리 의도는 이렇게 좋았다'라고 스스로 포장하는 것 이외의 내용물이 없습니다.
창작자가 아무리 깊이있는 의도, 좋은 의도를 넣으려 해도, 그게 창작물을 통해 제대로 표현되거나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 의도는 그대로 사라져버립니다. 왜냐하면 감상자(독자)는 창작자의 마음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창작자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받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언어의 뜻과 전달성을 음식과 그릇에 비유한 랑그와 빠롤이라는 개념이죠. 예컨대 어떤 사람이 돼지 멱따는 목소리로 아무렇게나 막 소리를 질러댄 다음, '이것은 시대에 억눌린 비참한 피해자의 소리없는 절규를 표현한 것이다'라고 의도를 설명해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돼지 멱따는 소리는, 무슨 의도가 담겼든간에, 그저 돼지 멱따는 소리일 뿐인데.
이 게임도 똑같아요. 성차별이 있었고, 안좋았는데, 그 다음이 없어요. 예컨대 여기서 등장하는 모든 여자들은 이름이 코(아들 자)로 끝나는데, 이것은 다음 아이가 남자애이길 비는 당시의 남아선호사상의 상징이죠. 그게 좋은게 아니란 건 알겠어요. 근데 그 다음이 없어요. 그래서 그게 '성차별에 대한 은유'말고 어떤 메시지로 기능하는 거죠? 그런게 없어요. 그냥 '안 좋다'로 끝나고 휙 사라져버리니까. 또는,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마을, 기괴한 크리쳐들, 친구와 부모의 이상한 행동들이 히나코의 내면심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알겠어요. 근데 이야기가 거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해요. 이런 식으로 화제성 있는 주제와 모호함, 난해함, 상징을 무차별로 던져서 소위 '있어보이게' 만드는 인기영합주의의 결과물은 그래서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보면 진짜 아무것도 없는게 대부분입니다.
결국 이 게임은 '그 당시 성차별이 있었다'는 일견 사회고발적인 주제를 던져놓고는 그 주제에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해요. "히나코가 여자아이로써 억압과 성차별을 당했다"까진 좋아요. 근데 그래서 히나코가 그 다음에 '무엇'을 했죠? 히나코는 그 성차별에 맞서 싸우지도, 도망치지도, 그 이외의 다른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어요. 멍하니 살다가 멍하니 끌려가서 멍하니 휩쓸리다가, ㅁㅇ에 취한 채 결혼식장에서 쇠파이프를 휘둘러대거나, 남자에게 비굴하게 빌어서 자유를 '하사'받는 수동적인 상태를 멍하니 유지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 게임이 성차별에 대해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거죠?
(2) '성차별'을 말하는 성차별적인 시각
앞서 (1)에서 짚었듯, 이 게임은 성차별이라는 주제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주제를 말하는 기저에 깔린 것은 오히려 '성차별적인 시각' 그 자체에요. 이 게임의 인물 구성은 "남자는 적극적이고, 노력과 행동으로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성격, 여자는 수동적이고, 남자에게 징징대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성격"이라는, 구세대적이며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이 게임의 등장인물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운명이나 사회압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남성적인' 사람들
다시 말해 '주동적인' 인물들인데, 여기에 속하는 인물이 슈와 고토유키, 히나코의 아빠입니다.
슈는 히나코를 ㅁㅇ으로 중독시킴으로써 원하는 바를 이루려 했죠. 그 행동이 좋았다,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쨌든 그는 행동으로 상황을 타파하려는 인물입니다. 실패를 비관해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조차 명백히 적극적이죠.
고토유키 츠네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생아, 광견병 환자라는 엄청난 사회적 압력, 남녀차이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엄청난 압력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이겨낸 인물입니다. 심지어 그는 그 모든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나코가 결혼을 거부하자 기꺼이 파혼해줍니다. 그 파혼의 책임이 이후에 누구한테 가겠습니까? 수몰된 고향으로 도망간 히나코한테 가겠어요? 아니요, 당연히 고토유키 자신이 다 감내해야 할겁니다. 그걸 알면서도 고토유키는 '사랑을 위해' 기꺼이 파혼해준 거에요.
히나코네 아빠인 시미즈 칸타 씨를 봅시다. 이 인물은 물론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원양어선을 타고 고기를 잡아 가족들을 먹여살리고, 식당을 차려 잘 살아보려다 망한, 즉 '행동이 실패한' 인물입니다. 실패한 이후 하는 짓이 가정폭력이나 빚지고 알콜중독에 걸린 것이라는 점 조차 '성차별적인' 시각이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이 사람조차 어쨌든 행동으로 뭔가 해보려다 망했다는 거에요.
물론, 강조하지만, 나는 슈나 시미즈 씨의 행동이 옳았다, 잘했다, 정당화될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ㅁㅇ을 먹이거나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등의 죄악은 분명 단죄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잘했고 아니고의 가치판단 이전에, 어쨌든 이 남성들은 상황을 '자신의 노력과 행동'으로 돌파하려는,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을 짚고 있는 겁니다. 그에 비해 이 게임의 여자들은 어떤가요?
둘째, 운명이나 사회압력에 휩쓸려 다니면서 징징대는 '여성적인' 사람들
사쿠코를 봅시다. 그녀는 항상 일방적으로 왕따당하고, 쫒기고, 피해받고, 죽임당하고, 히나코에게 버려집니다. 그렇다고 순수하고 선량한 피해자로 그려지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잘 대해주는 히나코에 대한 추악하고 음습한 질투심도 적나라하게 까발려집니다. 거기다 히나코에게 빌린 돈을 갚지도 않고, 히나코를 '배신자'라는 별명으로 부르죠.
린코는 어떤가요? 그녀는 슈를 좋아하면서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슈에게 고백하지는 않아요. 계속 지겨울 정도로 돌리고 돌려서 표현하고, 심지어 그 표현 거의 대부분은 슈와 히나코를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형태, 즉 질투로 표현됩니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질투하는 속좁은 여자의 스테레오타입' 그 자체입니다.
히나코의 엄마와 언니를 봅시다. 이 둘은 사회압력에 순응했고, 그렇지 못한 히나코를 억압하려 듭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순응한 이유, 혹은 히나코도 순응해야 할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라니까 해' 정도에요. 그야말로 수동적이고 남편 뜻에 굴종하는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이잖아요.
심지어 위에 언급한 린코, 사쿠코, 히나코의 엄마, 언니 전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히나코의 심상 속에서 히나코가 재구성한 인물들이잖아요. 즉, "린코가 히나코를 질투했다"가 아니라, "린코가 질투했을 거라고 히나코는 생각했다"입니다. 즉, 주인공 히나코는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여성에 대한 구세대적인 고정관념'을 형상화한 인물입니다.
여기서 히나코 자신을 봅시다. 그녀는 과연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까요? 헤쳐나가지 않아요. 남에게 제대로 표현하지도 않고, 자기 안에 꾹꾹 눌러남으며, 그렇다고 그 감정을 해소하지도 않고, 원망과 질투심으로 내면의 울화를 키워나갈 뿐입니다. 고토유키는 그녀가 결혼을 싫어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잖아요. 그렇다고 슈랑 사귄 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그저 멍하니 상황에 휩쓸리다 비극을 맞습니다.
쇠빠따를 휘두르며 에비스가오카 마을을 평정하는 늠름한 모습 때문에 오해하기 쉽지만, 그 모습은 사실 그녀가 ㅁㅇ에 취해서 보는 환각일 뿐, 현실의 히나코는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예비 신랑한테 '결혼이 싫다'는 한마디를 못해서 결혼식장까지 끌려간 수동적인 인물이에요. 내면에는 울화가 쌓여서 쇠빠따로 다 때려죽이는 상상을 하지만, 실제로는 말 한마디를 하지도 못하는 남자를 우리가 뭐라고 부르죠? 바로 '계집애같은 놈'입니다. 히나코는 그 말 그대로 '계집애'라는 고정관념이 어떤 건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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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이 게임에서 등장하는 인간 중, 남자들은 전부 행동과 노력으로 상황을 돌파하려는 주동적인 인물로, 여자들은 전부 징징대고 압력에 굴복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렇다고 여자들이 그 압력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이해해서 납득한 것도 아니고, 속으로는 끝없는 질투와 의심과 울화가 가득찬 상태인데 그냥 말을 못 꺼내서 굴복한걸로 나오죠.
그리고 그런 여자들의 문제, 혹은 히나코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주체는 누군가요? 최종적으로는 고토유키입니다. 그가 여우신의 분노를 막아서고 히나코를 도망치게 해줌으로써 비로소 히나코의 해방과 자아찾기 여행이 가능해지니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백마탄 왕자님이 그녀를 구원해주는 서사입니다. 마지막에 결혼식 장면만 나오지 않았을 뿐, 그녀가 주체적으로 한 것은 결국 고토유키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내 대답을 기다려 달라"라면서 빌었을 뿐이에요. 쇠빠따를 휘두른 것은 ㅁㅇ 중독의 환상 속에서 그런거고, 실제 그녀가 고토유키나 여우신과 싸운게 아니잖아요. "여자는 무력하게 징징거릴 뿐, 결국 최종적으로는 남자가 문제를 해결한다." 이거야말로 '성차별 교본' 첫장에 수록될만한 성차별 아닌가요?
결국 이 게임은 표면적으로는 성차별을 '나쁜 것'처럼 다루면서도, 내용 자체는 굉장히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에 침식되어 성차별을 고착화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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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이런 성차별적인 시각 때문에 주인공인 히나코의 매력도 극히 떨어집니다. 그녀는 "집안에선 폭군처럼 굴다가도 밖에 나가선 비굴하게 구는 이중적인 아버지"를 비웃고 조롱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도 "아버지에겐 바락바락 대들다가도 예비 신랑에겐 결혼하기 싫다는 한마디를 꺼내지 못하는 이중적인 인물"입니다. 히나코는 마치 자신이 친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오늘 여기는 문 닫았어'라고 읊조리지만, 정작 그 친구들이 자기를 질투하고 시기할거라는 공주병에 빠져있는 상태이기도 하죠.
외면적인 묘사로도, 그녀는 항상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자기 주장이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상황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거나, 남이 시키는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성차별에 의한 억압 때문에 그런 성격이 되었다는 건 알겠어요. 근데 그게 대체 무슨 매력이 있나요? 게임 내내, '히나코가 성차별의 억압 때문에 맛이 가서 저런가보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거기다 순전히 억압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기엔 억압의 주체였던 아버지한테는 소리를 지르고 대들기까지 하죠. 엔딩까지 보고나면 '아하, ㅁㅇ 때문에 맛이 가서 그랬던 거구나'라는 진실을 깨닫긴 하지만, 어쨌든 그 두 모습 모두 어떤 매력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히나코가 주체적으로 삶을 만들어가려 한다기엔 스스로 노력하거나 해낸 것이 아무것도 없고, 과거의 고통에서 해방되려고 한다기엔 너무 잘살았어요. 그 시대에 밥 굶지 않고 자기 방도 따로 있는 따듯한 집에서 깨끗한 옷 입고 고등학교까지 다니는 사람이면 충분히 좋게 산 겁니다. 그렇다고 무슨 죄를 저질러 속죄하려 한다기엔 너무 어리고, 그 이전에 나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에요. 그나마 ㅁㅇ 중독자라는 점은 강렬한 개성이긴 한데 자기가 알고 ㅁㅇ을 투여한 것도 아니고 친구한테 속아서 투여한 거잖아요. 범죄도 ㅁㅇ에 너무 심하게 꼴아서 저지른거고.
그렇다고 히나코가 무슨 신념이나 확고한 주장이 있나요? 최종적으로 현실에서 그녀의 핵심 행동원리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트라우마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정작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지도,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아요. 결국 그녀는 스스로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조차 없어요. 예를 들어, "3이 아닌 숫자"는 무엇인가요? 3을 제외한 숫자 전부잖아요. 그걸 '하나의 정확한 숫자'로 제시할 방법이 있나요? 똑같은 이치에서, '엄마처럼 살기 싫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어린애의 징징거림일 뿐이죠. 심지어 자기 주체의 엔딩에서조차 결국 남성의 도움으로 해방된 후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생각해봐야겠다'라는 식으로 끝납니다.
결국, 히나코라는 캐릭터는 대체 어떤 심리, 어떤 의지, 어떤 가치관을 가졌고, 그것들이 과연 어떤 매력을 가진 거죠? 제가 보기엔, 그저 상황에 휩쓸려 멍하니 떠다니며 징징대는 바보가 한명 있을 뿐인데.
(3) '성차별'이라는 주제 뒷면의 도착적인 태도
더욱 좋지 않은 것은 그렇게 성차별을 피상적으로 내세우면서, 게임에서 여성을 다루는 방법은 굉장히 성도착적이라는 점입니다.
애초에 '세일러복을 입은 여고생이 괴물들에게 쫒긴다'라는 소재 자체가 굉장히 성도착적인 점은 굳이 짚을 필요가 없을 정도죠. 거기다 이 게임은 그 여고생을 계속해서 괴롭히고, 조금씩 벗겨나가면서 사디즘적이고 관음적인 구도를 유지합니다.
'등짝에 가축처럼 낙인이 찍히며 브래지어도 없는 등을 훤히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하거나, 팔이 잘리고 얼굴가죽이 뜯겨나가는 와중 들뜬 신음소리를 애써 참아내는 여고생의 모습'처럼 외적인 부분부터가 굉장한 남성향 'ㄱㄱ 판타지'죠. 여성에 대한 가학이 남성에게 있어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성적 판타지의 일종인 것은 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내면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의 억압과 괴롭힘 속에 고립되어 조금씩 정신적으로 무너져 가는 여고성의 모습' 역시 사디즘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성적 도착증의 한 형태입니다. 요새 많이 쓰는 용어인 '가스라이팅'의 어원이 뭐에요? 여성을 정신적으로 무너지게 만들어 남성에게 종속시키는 내용의 영화잖아요. 이 게임이 바로 그런 식으로, 예쁘고 앳되고 수줍은 여고생을 조금씩 해체하면서 즐기고 있어요. 여기에 비하면 사디즘의 대명사인 가죽 본디지나 채찍 따위는 촌스러운 수준이죠.
히나코만이 아니라 카시마시, 아야카카시, 하라이 카타시로 등의 크리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 스탠딩 자세부터가 가슴과 성기를 대놓고 강조하는 뒤틀린 자세인데다, 다운될 때는 성기를 눈앞으로 들이밀듯이 뒤로 접히면서 쓰러집니다.
UFO엔딩이 개그적으로 표현되어서 그렇지, 그 내용은 여고생의 팬티에 대한 이야기, 혹은 그라비아 잡지에 여학생 사진의 얼굴을 오려 붙이는 행동(딥페이크를 연상시키는 마스터베이션의 은유) 같은 것을 떠드는 내용입니다. 그 장면을 비추는 시각조차 그걸 '귀여운 소동' 정도로 굉장히 관대하게 비추죠. 그야말로 마치 여고생의 치마를 들추는 행동을 '좀 짖궂지만 귀여운 일' 따위로 보던, 성차별이 만연했던 시대의 시각입니다. 50대 아저씨나 좋아할만한 이야기죠. 그런 시각을 기저에 깐 상태로 '성차별'을 안 좋은 것처럼 다루는 모순적인 태도는, 제게는 정말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다만 제가 이 문제의 결론을 짓기 전에 반드시 짚고 싶은 부분이 하나 있는데, 바로 애초에 사일런트 힐은 그런 시리즈였다는 겁니다. 아니, 애초에 호러물이라는 장르 자체가 그렇습니다. 극한의 공포-즉 생존 스트레스는 코르티솔을 과량분비하도록 유도해서 이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활동을 억제하므로, 공포 상태에서 받는 성적인 자극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거든요. 흔들다리 효과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래서 호러물에서는 살인마에게 쫒기는 와중에도 서로를 더듬는 불나방같은 희생자 커플과 여주인공의 나시티가 빠지질 않는 것입니다.
사일런트 힐로만 한정해도 마찬가지입니다. 2편의 제임스는 아내를 간병하는 와중에, 그 아내를 간병하는 간호사들의 가슴과 엉덩이를 훔쳐보던 사람입니다. 그 성적 자극은 가슴골을 활짝 노출하고 한계까지 짧아진 미니스커트를 입은 얼굴없는 간호사라는 크리처가 되어 나타났죠. 3편은 여고생인 헤더가 신의 씨앗을 임신한 상태로 시작하는 게임이고, 4편의 헨리는 벽에 난 구멍으로 옆집 에일린의 모습을 훔쳐보던 인물이었어요. 그러니까 사일런트 힐은 원래 그런 식의 여성에 대한 음습한 ㅅㅅ어필이 세일즈 포인트 중 하나인 시리즈였습니다. 원래 그랬어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그런 도착적인 면이 아주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ㅅㅅ어필이나 성도착은 창작과 예술에서 뗄수 없는 분야니까요. 하지만 그런 도착증적인 시각으로 '성차별'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모순적인 모습은 굉장히 보기가 좋지 않아요. 마치 스테이크를 으적으적 씹으면서 '채식 만세!'라고 외치고 있는 사람을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또는 '연쇄살인마가 설파하는 인권과 생명존중에 대한 담론'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는 이렇게, 각각 떼어놓고 보면 매력적일 수도 있지만 섞어놓으면 이상해지는 요소들이 있죠.
(4) 악의가 없는 빌런
소재나 주제와는 별개로, 이 게임의 스토리는 얼개가 굉장히 헐겁고 애매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치게 반전을 중시한 구조 때문에 각 요소간의 연결이 애매해서인데, 이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바로 '빌런'의 부재입니다.
이 게임에서 가장 큰 잘못을 한 빌런은 누구인가요? 당연히 슈입니다. 친구인 히나코를 속이고 ㅁㅇ을 투여하여 그녀가 살인범죄를 저지르게 만들었으니까요. 사실, 편의성을 위해 ㅁㅇ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정확히는 '뒷산 풀뿌리에서 캔 뭔지도 모르는 향정신성 성분'입니다. 그걸 임상도 없이 대뜸 사람에게, 그것도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투여하는 시점에서 슈는 빼도박도 못할 사이코패스 ㅁㅇ사범입니다. 아무리 그 시대가 막 나갔다고 해도 그렇지, 그 시대에도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는 있었잖아요. 그것들은 대체 어디로 간거죠? 심지어 약효를 제대로 설명하거나 부작용을 고지하지도 않고, 그냥 '두통이 나아진다'정도로 속여서 먹였어요. 정말로, 사일런트힐보다는 브레이킹 배드에 더 어울리는 범죄자입니다.
그런데, 스토리적으로 보자면 이 ㅁㅇ 부분은 반전의 핵심이므로, 엔딩 스텝롤 중간에 나오는 에필로그 장면 이전까지는 아주 미약한 암시로만 주어질 뿐이에요. 그래서 슈는 악당으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최후조차 자신의 잘못에 대한 벌을 받기보단, 히나코를 결국 유인약취하지 못하게 된 처지를 비관한 '로맨틱한' 자살로 끝나요. 잘못에 대한 치죄를 받는 것도 아니고, 대가를 치르는 것도 아니고, 그 문제가 가장 핵심적으로 다뤄지는 호유기미 엔딩에서도 '좋아해서 그랬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갑니다. 그래서 빌런이라는 인상이 굉장히 옅어요. 하는 짓은 빌런이었는데, 서사 내에서 빌런으로 다뤄지질 않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 빌런은요? 여기서부터가 애매합니다. 고토유키는 잘못이 없어요. 그는 진심으로 히나코를 사랑해서 구애한 거고, 히나코네 집안 빚도 갚아줬잖아요. 그는 히나코의 개인적인 트라우마도, 히나코가 결혼을 싫어한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히나코가 표현한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 자신 역시 여러 트라우마를 가졌지만 노력으로 이겨낸 인물이고. 따라서 고토유키는 빌런이 아니며, 실제로 빌런으로 다루어지지도 않습니다.
여우신도 똑같아요. 애초에 여우신은 히나코 자신에게는 별 관심도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저 가문의 사생아인 불쌍한 아이, 그러나 노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얻어낸 고토유키가 반해서 그렇게 좋다고 하니까 도와준거죠. 여우신은 대략 지역 토호쯤 되는 사람으로 암시되는데, 그런 사람이 자기 가문 자식이 빚쟁이에 성실하지도 않은 집안의 딸이랑 결혼하겠다니까 도와준거에요. 심지어 부모 빚도 갚아주고. 지금 시점으로 봐도 대단한 일인데, 심지어 그 시대 기준으로 보자면 정말 굉장히 선진적이고 개방적이며 선량한 사람입니다.
히나코네 아빠인 시미즈 칸타 씨도 똑같아요. 사기 피해를 당한건 시미즈 씨의 잘못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기를 친 사람이 잘못한거니까. 엄마의 요리에 트집을 잡거나, 히나코가 바락바락 대드니까 흥분해서 식칼을 던지는 등 성격 문제와 가정폭력 문제는 물론 있었지만, 그게 죽임을 당할 만한, 혹은 사일런트 힐 현상을 불러올 만큼의 거대한 죄악으로 다뤄지지는 않아요. "그 시대가 그랬어, 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어."라는 식으로 또다른 시대상의 피해자, 혹은 개인의 사소한 일탈처럼 취급하고 넘어갈 뿐입니다. 결국 머리한번 박고 사과하는 걸로 종결되어 버리죠.
린코는 일부러 빌런처럼 보이도록 수많은 혐오스러운 행동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잘못이 정확히 뭐죠? 히나코를 계단에서 밀친 것? 그 장면을 잘 보면 린코가 히나코를 밀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장면을 자세히 보면 계단을 내려가다 린코가 멈춰서고, 히나코가 그 이후에도 대략 10계단 정도 더 내려가다 인형을 보고 멈칫한 후 갑자기 굴러떨어지는데, 10계단 밑에 있는 사람을 손으로 밀치는 것은 각도상 불가능하고, 걷어차서 밀었다기엔 다리가 미동도 없고 발차기를 회수한 모습도 아니에요. 심지어 이 린코는 실제의 린코조차 아니고, 히나코가 자기 마음속에서 재구성한 인물이고 실제 린코는 이미 오래 전 사고로 사망한 상태입니다. 즉, 이 린코는 히나코의 피해망상이에요. 예쁘고, 귀엽고, 슈가 좋아하는 히나코를 질투했을 거라는 피해망상.
사쿠코도 똑같습니다. 자기 자신은 히나코한테 뭔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사당에서 히나코한테 버려져요. 사쿠코가 잘못한 일이라고는 히나코에게 돈을 빌린 것과, 히나코를 배신자라는 별명으로 부른 것밖에 없는데. 히나코에게 원망이 있던 것? 히나코한테 이야기한게 아니잖아요. 굳이 따지자면 일기를 훔쳐본 히나코가 잘못한거죠. 히나코도 똑같이 일기장에 남들에 대한 원망을 썼잖아요. 근데 사쿠코는 기괴하게 비틀린 형태로 보스화되어 등장해서 퇴치당하고, 자신은 어둠 속에 버려지죠. 실제 사쿠코는 이미 굉장히 비극적으로 사망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얘도 히나코의 피해망상입니다.
여담으로, 이 게임의 서사가 전체적으로 이상하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사쿠코 관련 파트는 특히 더 어색합니다. 차라리 린코는 (환각이란 점을 차치하고 보면) '질투'라는 강렬한 동기가 있기 때문에 보스로 나오거나 용암다이브로 처형되는 것이 개연성이 있어요. 그런데 사쿠코는 그런 동기 자체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쿠코는 과자가게에서 나오는 초반, 보스로 나오는 중반, 갇혀있는 걸로 나오는 후반에서 세번 등장하고, 전부 등장하는 즉시 살해당하는데, 대체 왜 그렇게 몇번씩 죽는 건지가 설득력있게 제시되지 않습니다. 뭔가 사쿠코 관련해서 다른 스토리가 있다가 급하게 변경되거나 삭제된 느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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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게임의 스토리는 과연 뭐였을까'를 차분한 마음으로 되짚어보면, 모든 문제는 가정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도 못해 상황에 휩쓸린 멍청한 소녀와, 그 소녀에게 ㅁㅇ을 먹여 유인약취하려했던 미성년 범죄자의 멍청한 행동이 얽혀 만들어낸 괴상한 비극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ㅁㅇ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체 제작진들은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거죠? 반전으로 재미를 주려했던 것까지는 이해하겠어요. 각 요소들에 생각해볼만한 부분이 있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근데 그런 주제나 요소들, 반전들이 제대로 된 어떤 의미를 지니거나, 생각해볼만한 주제를 던지거나, 깊은 고찰을 보여주거나 하는게 아니라 그저 '자극적인 소재'로 휙 던져지기만 할 뿐이라서, 내용이 너무 얕아요. 한심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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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해결책도 마찬가지인데, 3회차 이후 나오는 게임의 더 깊은 이야기들은 대체적으로 '서로 좋은 이야기 한두마디 나누더니 갑자기 모든 트라우마와 갈등이 해소된다'는 식으로 끝납니다. 어머니가 사정 설명하고, 아버지가 머리 한번 박고 사과하는 것으로 해결될만한 문제였는데, 히나코는 대체 왜 사일런트 힐 환각을 볼 정도로 마음을 다친거죠? 원래 멘탈이 약해서? 아니면 ㅁㅇ이 그정도로 세서? 아버지 시미즈 칸타 씨는 사정이야 어쨌든간에 준코(히나코의 언니)의 신부값으로 가전제품을 사거나,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악인이었어요. 그게 "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는 식으로 퉁치고 넘어갈 만한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말했듯, 50대 아저씨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그땐 시대가 그랬어'하고 미화하는 걸 보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ㅁㅇ 문제는 어떻게 되는거죠? 그건 트라우마가 해소된다고 저절로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게임의 스토리는 이 근처에서 텐션이 늘어지는데, 마치 디즈니식 가족주의 서사를 보는 느낌입니다.
슈와 고토유키가 주먹을 마주치는 엔딩을 봅시다. 부잣집 도련님이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ㅁㅇ으로 유인약취하려한 사이코패스 범죄자를 그렇게 보내준다고요? 그것도 그 사랑하는 여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이 ㅁㅇ사범아, 법과 정의의 심판을 받아라, 급급여율령!"하고 후려갈겨도 모자랄 판에 "우리는 같은 여자를 좋아하잖아" 라니요? '억눌린 시대상과 끔찍한 트라우마로 신음하는 잔혹한 사이코 스릴러 이야기'가 갑자기 '우정-노력-승리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소년만화'로 장르가 변하는 상황은 굉장히 당황스럽습니다.
사일런트 힐 엔딩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종적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기다려 주세요"같은 징징거림을 이해해준 고토유키의 배려로 자유를 '하사'받은 현실의 히나코(여우가면을 쓴 히나코)가 동경하는 모습이 바로,사랑을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고토유키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게임의 스토리를 쓴 사람은 이 부분을 히나코보다 고토유키에 감정이입하면서 쓴 것 같아요. "멋있고, 돈많고, 사랑을 위해 헌신적이고, 그러면서도 여자가 바라면 주저없이 희생해줄 수 있는 멋진 남자가 예쁜 여고생의 동경의 대상이 된다"는 식으로.
이처럼, 전체적으로 문제가 조잡하니 해결책도 똑같이 조잡하고 한심할 정도로 깊이가 없습니다. 에비스가오카에 사일런트 힐 현상이 일어난 가장 큰 두 핵심 갈등고리는 성차별 문제와 ㅁㅇ 문제입니다. 근데 성차별 문제는 '시대가 그랬고 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어'라는 식으로 대충 퉁치고 넘어가고, ㅁㅇ 문제는 '슈가 히나코를 좋아하다보니 그런거지'라는 식으로 진짜 대충 넘어가요. 거기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찝찝한 느낌을 주기 위해 꼭 이상한 반전을 하나씩 넣어둡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에 설득력이란 게 없어요. 그저 어떻게든 보는 사람의 기분을 불쾌하고 찝찝하게 만들어보려는 노력만 있을 뿐. 거기다 그마저도 너무 조잡해서 불쾌하기보단 한심하고.
부족한 스토리의 깊이를 온갖 파편화된 단서들과 은유적인 상징, 난해함과 모호함으로 가리려 하지만, 그 핵심 뼈대가 결국 '사과 한마디로 풀릴만한 사소한 감정다툼'의 수준을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에 히나코가 왜 그렇게까지 망가졌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ㅁㅇ 때문에 그 모든 일이 일어났다기엔 ㅁㅇ 문제를 깊이 다루는 것조차 아니에요. 그래서 스토리를 이끄는 힘 자체가 모자랍니다. 공포게임인데 하나도 안 무서운 건 그럴수 있다고 이해하는데, 스토리 위주의 게임인데 스토리가 약한 것은 정말 별로입니다.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고'하면서 온갖 모호성과 상징, 파편화된 힌트들, 이리저리 꼬아서 주어지는 정보들을 통해 '뭔가 있는 듯' 포장하고 있지만, 끝에서 되돌아보면 애초에 내용물 자체가 별게 없다는 사실이 뻔히 보이다보니 오히려 조잡해보입니다.
그렇다고 이 게임이 특별한 예술적 가치를 추구한 것조차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고발적이거나 투쟁적인 성격을 띈 것도 아니고, 주제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철학적 메시지를 담은 것조차 아니잖아요. 교복 여고생으로 시작하는 ㅅㅅ어필부터 주술, 괴물, 가면, 늑대 변신, 여우신, 액션성 있는 전투시스템, 여자 하나를 둘러싼 두 남자의 러브라인과 그걸 질투하는 친구까지, 그저 대중에게 팔릴만한 통속적인 요소를 잔뜩 쑤셔넣은 대중작품인걸요. 그런 대중작품에서 내용물 없는 과도한 상징과 모호성, 의도된 불쾌함은 오히려 스토리의 설득력과 흥미로움을 해치는 요소로 작용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제 느낌에는 사일런트힐F가 딱 그래요.
그래서 결국 이 스토리가 플레이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뭐였죠? '친구가 성분표시 없는 약을 권할 때 넙죽 받아먹지 마라, 엿되는 수가 있다', 혹은 '약은 약사에게'같은 약물 오남용에 대한 교훈? 아니면 'ㅁㅇ 중독자에게 잘해줘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경고? 혹은 '할 말은 미리미리 하고 삽시다. 나중에 정신병 걸리지 말고' 같은 권고일까요? 저는 그 이외에는 의미있는 내용을 도저히 못찾겠습니다. 혹시 다른 거 찾으신 분 계시면 꼭 좀 알려주세요.
(5) 부족한 핍진성
다시 말하지만, 이 게임의 서사는 '모든 것은 ㅁㅇ중독자의 환상이었다'라는 반전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어서 모든 측면에서 굉장히 허술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핍진성 측면에서 가장 크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괴물이 쫒아와서 한명이 죽고 한명이 사라진 상황에서, 히나코와 슈는 한참 도망치다가 갑자기 논에 들어가 과거의 추억 이야기를 하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냅니다. 딱 봐도 이상하지 않나요? 이런 말이 안되는 상황이 게임 내내 반복됩니다. 목숨을 걸고 마을에서 탈출하는 와중에 교실에서 쉬겠다는 생각도 이상하잖아요. 벽이 단단하니 적이 침입했을 때 도망치기 어렵고, 그렇다고 나무판자인 문이 쇠붙이를 휘둘러대는 몬스터의 공격을 막아줄 리도 없고, 그렇다고 외부로 시야가 확보되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포위당하면 그대로 몰살인데. 거기다 쉬려면 바닥에 누워서 쉬던가, 불편하게 책상에 엎드려 쉴 필요가 있나요?
철교가 끊어진 부분을 보면 판자를 대고 건너가거나, 줄을 걸고 타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짧습니다. 논두렁길도 신발에 진흙이 묻는 것을 감수하면 충분히 건너갈 만한 곳을 못 지나가요. 주인공은 쇠빠따나 나기나타를 능숙하게 휘둘러대지만, 종이로 된 창문이나 나무로 된 문은 절대 열지 못하고 반드시 열쇠를 찾아내려 합니다. 다시 말해, 전체적으로 아무도 생전 처음 보는 기괴한 괴물에게 생명을 위협당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광경들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최후반 반전,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ㅁㅇ중독자가 보고 있는 환각이다'라는 비겁한 설명이죠.
왜 종이로 된 문을 열지 못하고 굳이 열쇠를 찾아야 할까요? ㅁㅇ중독자가 보는 환각이기 때문입니다. 왜 괴물에게 쫒기다가 갑자기 멈춰서서 추억담을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까요? 그것이 ㅁㅇ중독자가 보고 있는 환각이기 때문인 것이죠. 왜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는데 긴팔 블라우스의 소매부분이 통째로 뜯겨나가 사라지는 걸까요? 물론 ㅁㅇ중독자 처녀의 환각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두가지 측면에서 동시에 안좋게 작용하는데, 하나는 반전을 모르고 볼 때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어설프고 이상하게 보여 몰입을 해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반전을 알고 볼 때 이야기 자체의 의미가 사라진다(=어차피 환각이므로 개연성을 따질 필요가 없어짐)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네, 모든 것은 환각이니까요. 환각이라는데, 개연성이나 핍진성이 대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어차피 환각, 그것도 제정신도 아닌 ㅁㅇ중독자가 보는 환각일 뿐인데. 이게 얼마나 어설프고 한심한 변명입니까?
저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실제로 무슨 무기를 장비하든 컷신에서는 무조건 쇠빠따를 들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는 부분이 기술적 역량 부족이나 성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글 쓰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도 히나코가 보는 환각이기 때문이다'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게임 내에서 확보할 수 있는 문서들의 내용은 진짜일까요, 가짜일까요? 그거, 환각을 보는 ㅁㅇ중독자가 '이렇게 쓰여있다'라고 보고 있는 환각이잖아요. 진짜 그 문서가 맞는지, 애초에 히나코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실존 인물인지조차 확실하지가 않죠. 이 게임에서 명확한 진실이라고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시미즈 히나코로 인식하는 정신나간 ㅁㅇ중독자 한명이 ㅁㅇ에 취해 환각을 보고 있다'뿐입니다. 세상에, 그 수많은 상징, 수많은 모호함, 은유와 내러티브 다 모으면 책 한권은 나올만한 수많은 파편화된 메모들로 한다는 이야기가 고작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습니다'라니, 에라이.
사일런트힐F와 아주 비슷하게, 수많은 상징, 모호함, 은유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일런트힐2만 봐도, 제임스가 메리를 죽였다는 반전이 밝혀짐과 동시에 이전의 어색한 부분들을 플래시백으로 다시 짚어주는 식으로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환각인지'를 정리해서 전체 서사의 구도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컷신에서 일일이 비교하면서요. 그럼으로써 '진짜 서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야기의 앞뒤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맞춰주죠. 근데 F는 그런 과정조차 없이, '환각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에서 이야기가 멈춰버립니다. 심지어 그것도 1회차에서는 엔딩 크레딧 올라가는 도중에 잠깐 무전으로 스쳐지나가는 식입니다.
안 그래도 이 게임은 느릿느릿하고 정적인 컷신 연출, 소년만화에나 나올 법한 상투적인 대사들, 모호한 상징들과 파편화된 메모들을 하나씩 모아 전체 이야기를 거꾸로 추측해야 하는 스토리텔링 방식, 시각적 다채로움의 부족, 무엇보다 계속 똑같은 몬스터만 반복적으로 나오는 점 때문에 엄청나게 지루합니다. 1회차 플레이조차 꽤 지루한 편인데, 심지어 그걸 3회차까지 해야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라도 할 수 있고, 심지어 각 회차마다 미묘하게 바뀌는 부분들을 틀린그림 찾기처럼 매번 일일이 찾아야 합니다. 이 회차플레이 구조에서는 일종의 오만함까지 느껴집니다. "이렇게 훌륭하고 재밌는 게임은 누구나 3회차 정도는 기본적으로 플레이할거야"같은 오만함 말이죠.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강조하겠습니다. 거의 똑같은 내용을 3회나 반복하면서, 그 수많은 지루한 과정을 이겨낸 다음 마침내 확인할 수 있는 충격적 진실은 '이 모든 것은 ㅁㅇ중독자가 보고 있는 환각입니다'뿐입니다. 세상에, 대체 누가 이걸 좋은 스토리라고 생각한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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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저는 이 게임을 꽤 재미있게 즐겼습니다. 적어도 최근 했던 게임 중에서는 그나마 할만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결코 명작은 아니고, 특히 몬스터의 부족이나 기술적인 최적화 부족 문제 등을 보면 예산이 좀 부족했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무엇보다, 스토리 짠 사람은 가급적 조속히 퇴사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스토리 하나만 보면 정말 올해 했던 게임 전체 중 최악이었으니까요. 회차플레이 설계한 사람도 같이 퇴사해주면 더 좋구요.
제가 이 게임에 주고 싶은 점수는 10점 만점에 4점입니다. 한줄평으로는 '망작이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야...'를 남기겠습니다.
그럼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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