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가져온 케이크에 촛농이 흘러넘치도록
나는 사족을 다한다
나에게 처음 케이크를 가져다준 중학생 소녀는
나를 처음 사랑하였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삐삐머리를 하고, 엄마가 곱게 입혀
준 옷을 입고,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을 들고, 무슨 큰일이라
도 하는 것처럼 짊어진 가방끈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유치
원 버스를 기다리는 길, 놀이터에서 흙을 던지고 햄스터처
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데 하루를 다 쓰던, 어린 저녁
을 함께 보내던
그의 편지에 비하면 ㅅㅅ의 어떤 자극도 운동 같았다
그래서 무서웠고 나는 촛불을 모조리 껐다
엄마, A가 나를 사랑한대
나는 그날 이후로 A를 보지 못했다 아니 만나지 못했다
A의 교실은 한 층 위에 있었는데
A가 지나갈 때마다 오히려 내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걔네 엄마가 뭐라고 한 걸까
A는 마그마처럼 부글거리는 촛불을 간신히 불어 끈 나
의 입술에
같은 모양으로 만든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일곱 동의 아파트 가운데 있는 놀이터는 지하 주차장 위
에 있어 꽤 컸다
수풀로 빙 둘러져 있었지만
이미 빛은 저물었지만
누가 보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었고
덜컥 겁이 났다 겁이 난 이상
아무도 보지 않았더라도 누가 본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오버하는 사람이야
모르겠니? 나는 너와 시를 쓰고 싶어
너의 피를 밤새 마시고, 너를 돌돌 말아 담배를 피우고
나의 첫 누나를 추억하고
뭔지 알지
아가
그 애가 나를 사랑한다고 한 건 아가페적인 거야 왜 그
걸 몰라
그만 좀 울어 뭘 잘했다고 울어
아가페적인 사랑을 처음 내게 베푼 누나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신입 사원이 되어
고등학생인 내게, 나이키 신발을 사 줬다
DVD방에서,
말도 안 되는 영화를 빌리고,
우와, 벽이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
조잡한 뿌연 비닐 스티커를 사납게 붙인 창문이 있다는
이유로,
벗겨진 가짜 가죽 부스러기가 엉덩이를 콕콕 찌르는 끈
적끈적한 소파에서,
내 바지 속에 손을 넣었다 이런 거 해 봤어?
토할 것 같았지만 참았다 눈을 떠 보니
나는 아파트 안의 놀이터
녹은 촛농 속에 있다
촛농 위에서 누나가 묻는다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최재원, 민음의 시 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