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하 전투 당시 있었던 일.
1618년 7월 명과 후금간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치열해 지고 있던 시점, 청하를 지키는 책임자 추저현은
후금군이 쳐들어 오자 청하를 끼고 농성할 것을 생각했지만 부장인 장패와 수보관 장운정은 출성전을 생각했다.
추저현은 청하의 지형을 생각해 보면 현재 성에 주둔하고 있는 6천~8천여명의 병력과 함께 농성을 하면 승산이 있다고 고려했던 것 같고
장패와 장운정은 청하에 갇히면 결국 말라죽게 되거나 사방에서 후금군에게 공격당할 것을 염두에 둔 것 같다. 16세기에 요동이 맞이했던 몽골계나 통일 이전 여진 약탈자들과 다르게 후금군의 공성능력은 이미 지난 두 차례의 전투로 증명되었고 자칫 잘못하면 청하도 그런 꼴로 함락당할 수 있었으니까.
명군의 화기전력을 이용하면 야전으로 어떻게든 해볼 만 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책임자는 추저현이었기에 추저현은 그들의 간언을 거부하고 농성했으나 명군은 하루 내지는 이틀만에 전멸당했다.
근데 사실 애초에 상대로 당대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야전사령관이었던 누르하치가 직접 나선 탓에
장패 말대로 전투를 도모했어도 사실 패배 가능성이 높긴 했기에
패전의 책임은 누구도 물지 않았고 추저현, 장패, 장운정 모두 장렬히 전사한 선열로 대우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