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 속에 무서운 괴물이 살고 있고 그 괴물이 사람을 잡아 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전설은 전세계에 아주 널리 퍼져 있다. 우는 어린이를 달랠 때 “자꾸 울면 어떤 무서운 것이 내려와서 잡아 간다”라고 말하는 풍속도 여러 나라에서 나타났다. 그렇지만 국토 구석구석이 빠르게 개발 되면서 한국에서 이런 전설은 사라져 갔다. 이런저런 소문이 많이 돌만한 사람 많이 사는 곳일 수록 사방으로 뻗은 아스팔트 도로와 아파트 단지가 먼저 들어섰다. 괴물 이야기가 돌 만한 장소조차도 잠깐 사이에 드물어졌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대략 60년전인 196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괴물 이야기의 힘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무서운 짐승의 공격이라는 짐작이 퍼져 마을 사람들이 두려움에 휩싸이는 사건이 생생히 일어난 사례도 있었다.
오늘 소개해 볼 이야기는 그 중에서도 1962년과 1963년에 걸쳐 경기도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처음 잘 정리해서 알린 신문기사로는 1963년 9월 20일 경향신문 보도를 꼽아 볼 수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곳은 양주군의 한 농촌 마을인데, 지금은 행정구역이 바뀌어 남양주시의 외곽에 해당하는 위치다.
사건이 처음 발생한 것은 1962년 10월경이었다. 이 마을에 사는 30대 초반의 김 아무개가 일을 하러 나가고 비슷한 나이의 부인 우 아무개가 장을 보러 간 어느 날 낮이었다. 며칠 동안 한참 비가 오다가 모처럼 개인 날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저 평화롭고 느긋한 가을 오후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부부의 둘째 딸인 4세의 어린이가 갑자기 실종 되었다. 깊은 밤 길을 걷다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무슨 우범지대에 들어 섰다가 일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모가 어린이를 데리고 낯선 곳에 데리고 갔던 것도 아니다. 평화로운 농촌 마을에서 놀고 있던 어린 아이가 대낮에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마치 무엇인가가 하늘에서 내려와 어린이를 붙들어서 다시 하늘 위로 올라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반 년이 조금 넘게 지나서 두 번째 사건이 발생했다.
두 번째 사건은 1963년 5월 30일에 벌어졌다. 이번에는 거센 비가 한참 오고 있는 중이거나 혹은 큰비가 내리다가 멈춘 직후였던 듯 싶다. 그날은 너무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마을 근처에 있는 개천에 둑이 무너질까봐 마을 남자들이 모두 둑을 지키러 나갔다고 한다.
이 개천은 주변의 도로공사로 물길이 약간 바뀌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개천 주위에 도로가 생기면서 일대가 모두 콘크리트로 마감이 되어 있어서 어지간한 호우에도 아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1963년 당시에는 비가 오면 마을 사람들이 직접 삽을 들고 둑을 지키면서 물이 마을을 휩쓸지 않도록 지켜야 했다.
때문에 마을에 남자들이 별로 없었다. 30대 초반의 이 아무개도 둑을 지키러 나간 참이어서 그 부인인 20대 후반의 최 아무개가 집에 있었다. 그런데 오후 2시 정도가 되어 최 아무개가 잠깐 낮잠이 들었을 때 사건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희생자는 어린이였다. 부부의 딸인 6세의 아이가 그 잠깐의 시간 동안에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첫 번째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어린이는 평화로운 마을에서 놀고 있다가 대낮에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두 사건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도 있었다. 첫 번째 사건에서는 도대체 실종자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두번째 사건에서는 실종된 어린이가 마지막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를 결국 알아낼 수 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6월 14일경 아침, 마을 어귀에 개들이 몰려 있었다. 그 모여 있는 모양이 어쩐지 평소와 달라 보였던 것 같다. 실종된 어린이의 어머니 최 아무개는 그곳을 보고 극도의 충격을 받게 된다. 개들 가운데에는 잃어버린 어린이의 시체가 있었다. 시체의 다른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고 오직 머리 부분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머리는 살점이 거의 없어서 해골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끔찍한 사건은 다시 또 이어졌다. 2개월 정도가 지난 8월 25일에 이번에는 다른 이 아무개의 딸이 희생되었다. 이 아무개가 일터에 가서 집을 비웠을 때, 4세의 딸은 어머니에게 이웃 할머니 댁에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 어린이가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시각은 오후 1시 경이었다. 이번에도 환한 대낮의 별 일 없는 평화로운 마을 한 가운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 어린이는 집 밖을 나간 후에 다시는 집으로 돌아 오지 못했다. 이후 걸어 가고 있거나 누군가를 만난 어린이를 보았다는 소식은 없다.
5일이 지난 9월 1일에 이 어린이도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를 처음 발견한 것은 마을에 사는 7세의 다른 어린이였다. 참혹하게도 역시 시체의 대부분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고 머리와 오른 발목, 옷가지만이 남아 있었다. 시체가 발견된 곳은 부부가 경작하고 있는 콩밭이었다고 하는데 오른 발목은 밭 옆 길에 떨어져 있었고 그곳에서 5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콩밭에 머리와 옷이 있었다. 시체의 일부만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는 두 번째 사건과 비슷하다. 한편으로 세 번째 사건에서 옷과 시체의 발목 부위도 발견되었다는 점은 다르기도 하다. 또한 두 번째 사건과 달리 세 번째 사건에서는 머리 부위의 형체가 그대로 있었고 얼굴에는 상처가 거의 전혀 없이 말끔했다.
세 번째 사건이 벌어진 후에야 이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두 번째 사건이 벌어질 때 까지만 하더라도 세 사건을 연결해서 보려는 시각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지서의 심 아무개 지서장은 이 사건을 보고 했지만 특별히 경찰서의 수사계에서 형사가 나온 일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경향신문은 이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의정부 경찰서를 취재하기도 했는데 경찰서장은 작년에 어떤 소동이 있었다는 정도만 기억하고 있을 뿐, 이 해에 발생한 두 번째 사건과 세 번째 사건은 기억해 내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나마 세 번째 사건을 계기로 신문 보도가 나오자 경찰과 당국의 태도는 바뀌었다.
1962년 하반기에 풀리지 않는 사건으로 악명 높았던 조두형 어린이 유괴사건이 전국적인 화제가 되면서 어린이 실종 사건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크게 커진 상황이었다. 조두형 어린이 유괴사건은 결국 범인을 잡지도 못했고 사라진 조두형 어린이를 찾아 내지도 못했다. 57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우리는 조두형 어린이의 행방을 모른다. 이런 형편에 또 어린이가 실종 되었는데 경찰은 제대로 알 지도 못하고 있다는 식의 비판이 언론을 통해 나온다면 관계 당국은 예민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대로 세 번의 어린이 실종, 살해 사건 이후 겁에 질리게 되었다. 무서운 짐승이 있어서 빠르게 어린이들을 습격했을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실제로 시체를 보고 진단서를 발부한 김정상 선생은 시체의 목 부분에 이빨로 물어 뜯은 것 같은 자국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니 단숨에 어린이를 붙잡아 갈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세고, 재빨리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신속히 움직이며, 온 몸을 먹어 치울 수 있을 정도로 큰 짐승이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생겨 났다. 사람들은 때문에 한 여름에도 문을 꼭꼭 닫고 지내느라 더위에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둑 어귀에 누워서 느긋하게 낮잠을 자는 평화로운 풍경도 사라지게 되었다.
어린이를 공격한 짐승의 정체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 중 몇몇은 구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마을을 드나드는 어느 나이든 무당 한 사람은 짐승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신을 갖고 있는 듯이 말하기도 했다. 그 무당은 이 마을에서 어린이 셋을 공격한 그것이 다름 아닌 호랑이라고 주장했다.
호랑이라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단숨에 사람을 붙잡아 갈 수 있는 무서운 짐승의 모습과 어느 정도 닮아 있다. 한반도에 살던 호랑이와 그 분류가 통하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경우, 2백 킬로그램 가량의 몸무게를 갖고 있는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다. 3백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커다란 것이 있다는 이야기도 곳곳에 남아 있다. 게다가 시베리아 호랑이는 먹이를 찾아 하룻밤에 100 킬로미터 정도를 이동하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힘이 세고, 빠르고,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커다란 짐승이라는 조건에 들어 맞는다.
그런 만큼 한반도에서는 호랑이가 사람을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예로부터 대단히 많이 내려 온다. 서울과 경기도 인근으로 범위를 좁혀도 잘 알려진 이야기가 적지 않다. 지금의 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인근에서 태어났다는 강감찬의 유명한 일화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바로 서울 일대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던 호랑이 떼를 몰아냈다는 전설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 임금 재위 중인 1797년에는 서울 중심지인 성균관 뒷산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기록도 나타난다. 그 외에도 한국의 온갖 신화, 전설, 민담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짐승이 호랑이인 만큼, 과거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흔했고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는 사람들, 어린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이르자 상황이 변했다. 인구가 불어나고, 산의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쓰는 일이 많아 지면서 호랑이가 살 수 있는 공간은 자연히 점점 줄어 들었다. 게다가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무기로 호랑이를 잡는 사냥꾼들이 늘어 나자 사람에게 사냥 당하는 호랑이의 숫자도 빠르게 늘어 났다. 한편 일본 열도에는 원래 호랑이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인들 중에는 호랑이를 책에서나 나오는 신비한 동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건너 온 일본인 사냥꾼들에게 한반도의 호랑이는 인기가 많은 사냥감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반도에서 몇 천 년 동안이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쳤던, 그렇게나 많던 호랑이가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학자들 조차 그 줄어 드는 속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놓칠 정도였다. 현재 남한 지역에는 야생 호랑이가 전혀 없다는 것이 정설이며, 뿐만 아니라 동물원이나 연구 기관에서 사람이 기르고 있는 호랑이들 중에도 한반도 지역에서 생포한 호랑이의 자손은 없다. 심지어 남한 지역에는 한반도 호랑이의 박제 표본조차도 극히 드물다. 확인된 것으로는 특이한 사연 때문에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남아 있게 된 1907년에 붙잡힌 호랑이의 표본이 단 하나 있을 뿐이다.
남한 지역에서 호랑이가 잡힌 것은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것이 거의 마지막 기록이다. 좀 더 애매한 사례를 포함한다고 해도 1950년대 이후에 남한에서 호랑이가 확실히 발견 되었다는 기록을 찾기란 극히 어렵다. 심지어 표범이라고 하더라도 분명히 확인이 되는 것은 1962년에 합천에서 잡힌 표범, 또는 1963년 거창에서 잡힌 표범 정도를 마지막 기록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도 1960년대 당시 사람들은 아직도 호랑이가 산 속 어디엔가 있다고 믿는 경우가 많았다. 워낙 오래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짐승이었기 때문에 호랑이가 있다는 생각은 막연히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었던 듯 싶다. 1963년 사건이 일어난 양주의 마을 역시 근래에 언뜻 호랑이를 본 것 같다는 목격자가 한 사람 있었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거리에 있는 산에서 맹수의 털이 발견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호랑이의 흔적 아니냐는 이야기도 돌고 있었다.
전국으로 범위를 넓혀 보면 호랑이 목격담은 더욱 늘어 난다. 1964년 1월 대전에서는 61세의 노인이 보문산에서 작은 어린 호랑이를 만났는데 엉겁결에 돌을 던져 물리쳤다는 놀라운 이야기 신문 지상에 오르기도 했고, 1964년 6월 21일에는 광주 지산동의 무등산 아래 농가 헛간에 아기 호랑이 세 마리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나오기도 했다. 아기 호랑이를 붙잡아 기르고 있으니 22일 밤에 어미 호랑이가 나타나 으르렁거리는 통에 마을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같이 돌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는 심지어 시대가 한참 지난 후에도 이어졌다. 1992년 5월 2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부산의 장산에 호랑이가 나타난 것 같다는 소문이 실렸고, 세기가 바뀐 2001년 6월 22일에도 대구문화방송이 호랑이로 보이는 짐승이 어둠 속에서 언뜻 지나가는 영상을 청송에서 촬영했다고 하여 그것이 진짜 호랑이냐 아니냐가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 중에 믿을 만한 것은 결코 많지 않아 보인다. 다른 짐승이나 호랑이와 비슷한 무늬를 얼핏 잘못 보고 호랑이로 착각한 사례가 워낙에 많다. 광주 지산동 아기 호랑이 이야기는 그 소식이 제474호 대한뉴스 내용으로 편성되어 지금도 필름이 남아 있는데, 그 영상을 지금 살펴 보면 아기 호랑이라는 그 동물은 아무래도 살쾡이나 다른 고양이과 동물인 것처럼 보인다.(*각주 처리: 이 영상이 있다는 것을 소개해 주신 이문영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마을에서 언뜻 호랑이를 본 것 같다는 그 단 한 명 뿐인 목격자도 아마 빠르게 움직이는 커다란 다른 짐승을 호랑이라고 착각했거나, 살쾡이나 커다란 고양이를 호랑이로 잘못 보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그냥 호피 무늬 옷을 입고 엎드린 채 밭을 매고 있는 사람을 멀리서 본 것 뿐인지도 모른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도 호랑이가 출몰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워 보이는 지역이다. 이 마을은 깊은 산속에 둘러 싸인 마을이 아니라 물 길 사이에 자리 잡은 농지가 많은 마을이다.
마을에 산 비슷한 것이라고 해 봐야 별로 높지도 않은 언덕 배기가 있을 뿐이다. 몇 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 산이 있기는 하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제법 큰 길을 건너야 하거나 둑이나 물을 건너야 하는 경로가 많다. 설령 당시 남한 지역에 호랑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호랑이가 근방의 산까지 오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이고, 어찌저찌 근처의 산까지 왔다고 해도 이 마을에 나타나기는 더욱 어려워 보인다. 20일자 경향신문에 같이 실린 사냥 전문가 이상오 선생의 의견도 역시 호랑이가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는 쪽이었다. 마을에서 20년간 살았다는 74세의 이동빈 선생 역시 “호랑이라고는 구경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내용이 기사에 곁들여져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짐승이 어린이를 세 명이나 붙잡아 간 것일까? 호랑이라면 모르지만 표범이나 늑대라면 1960년대 초, 산간 각지에 좀 더 많은 숫자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시 그런 짐승이 길을 잃고 잘못 흘러 들다 보면 이 마을까지 도착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역시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세 어린이들이 마을 바깥까지 나갔다가 외딴 곳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셋 모두 대체로 마을 한 가운데에서, 그것도 대낮에 사라졌다. 밝은 낮에 사람들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려 하는 이런 짐승들이 마을 가운데까지 나타났다고 생각하기도 어렵고, 마을 한 가운데까지 표범 같은 짐승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오는데 아무도 몰랐다고 보기도 어렵다. 더군다나 두 번째 사건과 세 번째 사건에서는 시체의 일부만이 며칠 후에 마을에서 다시 발견 되었다. 만약 어떤 짐승이 먹이를 끌고 가서 둥지에서 먹었다면, 먹고 남은 일부를 굳이 마을에 도로 돌려 주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어린이가 세 명이나 사라져 버리고 나니 그에 대한 이유를 무엇이라도 찾고 싶었던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호랑이의 짓이라는 소문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던 듯 하다.
예로부터 호랑이를 산에 사는 신령과 동일시하는 풍습은 한반도에 널리 퍼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무당을 불러다가 소와 돼지를 제물로 바치며 산신령을 달래는 굿을 하게 되었다. 몇몇 주민들은 마을 근처에 사격장이 생긴 것 때문에 신령에게 뭔가 악영향을 미친 것 아닌가 하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신문 기사에는 굿을 하는 사진도 실려 있는데, 신문 기자가 “경향 신문에서 호랑이를 잡아 주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무당은 “산신이 안 보내면 호랑이 못 잡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첫 신문 보도 다음 날인 9월 21일에는 당국이 태도를 바꾸었다는 소식이 실렸다. 사람이 어린이를 납치 하여 살인한 사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철저한 수사를 하라는 지시가 치안국에서 경기도 경찰국으로 하달되었다고 한다. 더불어 어린이 실종 사건이 일어났는데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은 책임이 일선 경찰관들에게 있지는 않은 지 급히 추궁하여 책임자를 찾아내기 위해 경기도경의 감찰 주임을 파견했다는 소식도 싣고 있다.
이날 경향신문은 짐승의 짓이 아니라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다는 기자의 추측을 싣기도 했다. 어린이를 어떤 주술을 위해 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거나 사람의 몸을 재료로 써야 하는 이상한 술수를 믿고 있는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이 추측이 맞다면, 범인은 아마 마을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일 것이고, 이러한 믿음을 가질만한 이유나 사정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어쩌면 이 사람이 자신이 어린이들을 납치하고 살해해 놓고 “호랑이의 짓인 것 같다”는 소문을 슬그머니 흘려서 퍼뜨리게 한 장본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세 번째 사건의 시체가 발견된 지 24일이 지난 9월 25일, 취재팀은 새로운 소식을 알게 된다.
마을 사람들 50명 가량이 도둑 맞은 고구마를 찾기 위해 마을의 이 집 저 집을 뒤지다가 젊은 여성인 이 아무개가 살고 있는 집에 고구마가 있는 것을 찾아 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집을 더 살펴 보았다. 그런데 이 집 부엌의 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취가 나는 이상한 고기를 발견했다고 한다. 기사에서 그 고기의 양은 3관 정도라고 하고 있으니 대략 10킬로그램을 좀 넘는 양이 아니었나 싶다.
이 아무개는 기침이 심한 병을 앓고 있는데 낫지 않아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사에서는 “해소병”을 앓고 있었다고 밝혔다. 마을 사람들이 솥에 있던 것이 무슨 고기냐고 추궁하자 처음 이 아무개는 동생의 남편이 붙잡아 준 너구리 고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주변을 조사하여 최근에 너구리가 잡힌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다그치자, 이 아무개는 동생 남편이 잡아 준 너구리라는 것은 거짓말이고 10일 경에 행상에게 오소리 고기를 산 것이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행상은 오소리 고기가 해소병에 특효약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아무개는 해명하기를 자신의 집은 가난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데 오소리 고기를 사는데 돈을 썼다고 하면 욕을 먹을까봐 처음에는 거짓말한 것뿐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아무개의 집은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 몇 집 안에 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네 살 된 딸, 남편, 시아버지와 넷이서 살고 있는데, 시아버지는 신경통으로 주로 자리에 누워 지내며, 남편은 날품팔이를 하러 다니다가 최근에는 어느 양조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결혼 한 지는 5년 정도인데 결혼 전부터 해소병을 앓고 있었고 많은 약을 사용하고 무당을 부르기도 했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는 말도 같이 실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아무개의 집을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발견된 고기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냈다. 27일 기사에서는 연구소의 시험 진행 상황이 실렸는데, 고기를 높은 온도에서 너무 오랫동안 삶았으며 또한 부패도 상당히 많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무슨 고기인지 감정하기는 어렵다는 소식이었다. 고기에 붙어 있는 뼈를 가루로 만들어 실험하고 있으니 이 역시 그 당시의 기술로는 명확한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예상도 나와 있었다.
9월 28일에는 인근 산을 뒤져서 맹수가 살고 있었던 흔적을 확인하려는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만약 근처에 호랑이나 표범이 살고 있었던 흔적이 있거나 그런 맹수가 사람을 먹었던 흔적이 발견된다면 어린이가 짐승에게 공격 당했다는 최초의 추측이 그만큼 더 믿을 만 해졌을 것이다. 의정부 경찰서는 경찰 27명, 사냥꾼 19명, 몰이꾼 40명과 미1군단의 병력 19명까지 지원 받아 당국은 하루 종일 인근 산을 뒤졌다. 하지만 수사팀은 맹수의 흔적을 찾는 데 실패했다. 짐승이 살 수 있을 법한 굴 두 군데를 찾기는 했다는데, 그 굴에서도 결정적인 맹수의 흔적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살인을 했다는 추측의 증거가 확실해진 것도 아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연구 결과는 10월 초에 알려졌는데, 이 아무개의 집에서 나온 고기가 사람 시체가 맞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10월 1일 동아일보 보도에서는 고기로 진행한 실험이나 뼈의 겉모양 관찰로는 사람 시체인지 짐승 고기인지 판단이 어려웠으나 X선 사진을 살펴 본 결과 짐승 고기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 했다. 같은 내용을 10월 2일 경향신문 보도에서는 연구소의 우상덕 소장을 인터뷰하여 소개하면서 “최선을 다했으나 시험불가했다”는 제목을 달았다. 인터뷰에서 우상덕 소장은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은 없었다면서도 동시에 고기가 삶은 상태였고 부패되어 있어 “사람이 것이 아니다라는 단언을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후 사건에 대한 기사가 몇 건 더 나오기는 했지만 수사가 더 진행된 사항이 보도 되지는 않았다. 만약 발견된 고기가 정말로 오소리 고기였다면, 마을 사람들이 처음에는 산신령이 노해서 호랑이가 입힌 피해라고 믿고 굿을 하다가 어느 때부터는 사람의 짓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어 마을에서 가장 가난하고 병든 여성을 몰아 붙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반대로 이것이 정말로 사람이 저지른 일이었다면 범인은 영영 붙잡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느 쪽이든 도대체 1960년대 초 약 2년간 별 특별할 것 없는 이 마을에 세 명의 어린이를 희생시킨 그 괴물이 무엇이었는지는 이제는 알기 어려운 일이다. 무엇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어떻게 대낮에 마을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어린이를 공격할 수 있었는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현재 마을이 있던 장소는 21세기 한국의 흔한 풍경 그대로 아파트들이 들어 서 있는 평범한 교외다. 근처에는 대형마트가 들어 서 있고, 멀지 않은 곳에는 전자회사의 물류 창고가 있기도 하다. 무서운 짐승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하기에는 우스울 정도의 풍경이다. 첫 번째 희생자인 김 아무개 어린이는 그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없는데, 만약 생존해 계시다면 환갑을 조금 넘은 연세가 된다. 만약 그렇다면 어디에서건 지금까지 건강히 지내고 계시기를 기원한다.
- 이상은 잡지 미스테리아 26호의 "펄프" 원고 연재분이었습니다.
이상 곽재식 작가님의 이글루스에 있던 자료의 보존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