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저는 이번 작품에 대해 좀 실망했다는 전제하에 소감을 써볼까 합니다. 들어가기에 앞서서 이브 버스트에러를 먼저 클리어하고 난 후 이 작품을 접했음을 미리 밝힙니다..
이번 작품은 ever17의 그 우치코시 씨가 시나리오를 담당하여 나름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너무 기대한 탓일까요.. 엔딩을 보고나서 시나리오에 너무 큰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일단 칸노 히로유키 씨 그 특유의 개그를 이번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어서 좀 아쉬웠습니다. 칸노 씨의 특기는 바로 대사비꼬기(말장난)인데(버스트에러에서는 코지로와 니카이도의 대화에서 이를 엿볼 수 있죠.), 이번 작품에서는 개그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입니다.
게다가 우치코시 씨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원리나 개념 등을 등장시켜 서로 얽히고 얽히게 만드는 게 특기인 사람인데 이번 작품도 그만큼 복잡하게 엮어놓아서 가뜩이나 진지한 분위기를 더 지루하게 만들어 놓았네요.
사실 초반에는 나름 긴장감도 있고 재밌습니다. 하지만 제가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중반 이후의 부분입니다. 중후반부로 갈수록 스토리 진행보다는 상황설명 부분이 너무 길어서 플레이를 하다보면 '아, 이놈의 대사는 언제 끝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입에 담배 생각이 저절로 나게 됩니다.(특히 후반부에 코지로 일행이 섬에 도착하고나서 에피하고 에피 어머니와의 대화 부분은 더더욱..)
게다가 아까 언급했던대로 시나리오를 반전에 반전, 또 반전에 반전, 또 반전에 반전으로 구성해 놓아서 나중에는 '아니? 이게 어째서 이렇게 되는거야?!!' 라고 반박할지도 모릅니다.. 원래 반전이라는 게 한두번 정도는 나름 긴장감과 카타르시즘을 이끌어 낼 수 있지만 여러번 반복되다보면 오히려 그 재미를 떨어뜨리게 되죠.. 이번 작품은 꽈배기마냥 시나리오를 너무 비꼬아 놓아서 그런지 제게는 이브 버스트에러에 비해서 너무 재미가 없었네요.
게다가 캐릭터들은 왜 이리 거짓말을 잘 하는지.. 나름 진지하게 대사 하나하나 읽어가며 플레이하고 있는데, 나중에 이 모든 게 거짓말로 밝혀졌을 때의 그 허탈감이란.. 게다가 나중에는 이게 또 거짓말로 밝혀지는데 정말 머릿속에서 원자핵이 터진 느낌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럼 이건 진짜야?'하고 의심만 하다가 결국 그대로 게임이 끝나버리고 맙니다.
이브 특유의 재미인 멀티사이트시스템은 이번 작품에서도 건재하지만, 이브 버스트에러에 비해 그 활용도가 낮아서 좀 아쉬웠습니다. 이브 버스트에러에서 해킹하는 장면은 멀티사이트시스템을 정말 잘 활용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에서 멀티사이트시스템이란 그저 기존의 틀을 맞추기 위한 시스템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단, 시점 변경부분이 되면 알기 쉽게 아이콘이 뜬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네요.
이번 작품도 리메이크된 버스트에러처럼 선택지에서 잘못 선택해도 게임오버가 되지 않고, 어떻게든 다음 장면으로 진행이 됩니다. 또한 선택지에서 뭘 선택하든 전반적인 게임 진행에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에 일직선 루트로 진행되는 게임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난이도는 상당히 쉬운 편입니다만, 시나리오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오히려 난이도가 매우 높은 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한글화도 안 되어 있으니..)
결국 모든 문제는 시나리오에 있는 것인데요. 엔딩을 보고나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어드벤쳐 게임 중에서 엔딩을 본 후 "이건 대체 뭥미??"라는 생각이 든 게임은 아마 이 작품이 처음일 듯 싶네요. 우치코시 씨가 시나리오를 너무 복잡하게 비꼬아놓은 바람에 사건이나 인물의 연관성이라든지 트릭 부분에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설정이 조금씩 보입니다. 즉, 반전을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설정해놓은 듯한, 앞에 일어난 사건과 연관짓기 위해 뒤에 일어난 사건이랑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갑자기 시나리오가 완전 판타지쪽으로 치우치는 바람에 좀 황당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뭐 원래 이브 시리즈가 진구지 시리즈처럼 사실주의라기보단 약간은 판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번 작품은 너무 판타스틱해서 그 분위기에 잘 적응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도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요?
일본쪽 리뷰를 찾아보니 대다수가 저와 같은 의견이었습니다.(http://www.psmk2.net/ps2/soft_06/avg/eve.html 참고) 역시 이브 버스트에러가 너무 뛰어난 작품이어서 그런 것일까요? 만약 이브 버스트에러가 없었다면 이 작품도 평작 이상 수준은 됐을텐데 이브 버스트에러가 워낙에 좋은 작품이다보니 그만큼 서로 비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네요.
그래도 '칸노 히로유키'라는 수식어가 계속 따라 붙었을텐데도 우치코시 씨의 그 독창적인 스타일은 제대로 살려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EVE의 후속작이 아니라 인피니티 시리즈의 일환이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요.^^;
이번 작품 소재도 나름 신선했고 트릭기법도 나름 괜찮었는데, 이들을 하나의 접점으로 연결시키는 과정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연결점을 좀 더 깔끔하게 다듬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참고로 플레이타임은 조금 긴 편입니다. 아마 이브 버스트에러랑 플레이타임은 비슷할 듯 싶네요. 대략 25~30시간 정도.. 어쩌면 제가 일어해석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그만큼 오래 걸렸을 수도 있겠네요.
아무쪼록 PC판으로도 발매가 되었으니 기존 EVE 시리즈의 팬이거나 ever17을 재밌게 즐기신 분이라면 이 작품도 한번 해보시고.. EVE를 아직 한번도 못해본 분이라면 이 작품보다는 버스트에러쪽을 추천드리고 싶네요. PS2로 나온 리메이크판은 한글화되기도 했으니..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다음 후속작에서는 꼭 칸노 히로유키 씨가 다시 작품을 도맡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브만큼은 칸노 씨 스타일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제발 쿄코의 비중 좀 높여주길.. 이런 감칠맛나는 캐릭터를 왜 단역급으로 사용한 건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