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현재 임용고시를 준비하느라 바빠야 하는 게 정상인데, 요 며칠 사이에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더군요. 마냥 인터넷만 붙잡고 있기에는 심기가 불편하고 가족들 눈치도 많이 보여서, 뭐라도 좀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자 미국 내 정교회 사이트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대해 적은 글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 몇 년 동안 전혀 영어를 사용한 적이 없어서 영어 실력이 퇴보한 것 같아 제대로 번역을 할 수 있는지 걱정되네요. 저의 미숙한 영어 실력으로 인해 번역문에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리며, 심각한 오역이라 판단되면 댓글로 지적해주세요. 번역할 때 원문의 뜻을 최대한 살리고자 노력하였고, 추가적인 정보는 각주로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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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이하 "유스티니아누스", 혹은 "황제")는 정교회 성인으로서, 11월 14일은 그를 기념하는 날이다.¹ 그는 동로마 제국사의 주요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여러 교회들을 설립하고 신학에 대하여 저술한 정교회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일리리쿰(Illyricum) 속주 태생인 유스티니아누스는 제위에 올랐던 38년(527년~565년) 동안 페르시아와 아프리카, 이탈리아 등지에서 승전을 거두어 게르만계 반달족과 서고트족 내부에 잔존한 이교도들을 완전히 뿌리 뽑는 위업을 이루었다. 그의 명령으로 아테네의 이교적인 학교들(플라톤의 아카데미아 등)이 폐교되기도 하였다.² 그리고 에페소스의 주교 요안네스는 크리스트교를 전파하라는 황제의 뜻에 따라 소아시아 일대로 가 7만 명 이상의 이교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렇게 개종한 새로운 크리스트교도들을 위하여 유스티니아누스는 90채에 달하는 교회를 짓도록 명령하였고, 제국의 강역 내에 교회를 건설하는 일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시나이반도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가 이 시기에 지어진 건축물 중 가장 훌륭하다고 손꼽히며, 그의 치세에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많은 교회가 건립되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교육을 받은 황제는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이 수사학과 철학, 신학을 배우도록 하는 등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을 교육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임하였다.
정통파 교리를 신봉한 그는 당대에 이단인 네스토리우스의 교리를 부활시킨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믿는 집단을 단죄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그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성가(聖歌)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영생하시는 독생자시여. 당신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가 작곡되었는데, 그들의 이단적인 교리에 맞서기 위하여 황제는 이 성가를 모든 교회에서 부르도록 의무화하였다. 그 이후로 현재 시점에 이르기까지, 정교회 신도들은 성찬예배를 드릴 때 제2안티폰 이후 소입당(원문은 "Small Entrance") 이전에 해당 성가를 부른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제5차 보편 공의회(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열어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정죄하였으며, 제4차 보편 공의회인 칼케돈 공의회에서 의결된 사항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비(非) 칼케돈파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제국 내의 종교적 통합을 이루어내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제국의 법률과 원칙이 잘 정돈되기를 바랐던 그는 "로마법 대전"을 집대성하는 과정을 관리 및 감독하였고, 이렇게 완성된 "로마법 대전"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교회법"을 러시아어로 편찬한 모음집을 변형한 모든 자료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의 "교회법 대전"을 다루고 있다.
사생활 측면에서 굉장히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종종 금식(禁食)하였는데, 사순절 기간에는 빵이나 와인을 입에 대지도 않을 정도였다. 종교적인 면과 세속적인 면 사이에서 조화(원문은 "symphony")를 고취한 사람이기도 한 그는 565년에 세상을 떠났다.
¹ 원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의 반려자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테오도라 황후도 성인으로 시성되어 동일한 날에 기념한다.
² 원문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당시까지 이집트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이시스 신전도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에 폐쇄되었다. 달리 보면 크리스트교가 국교화된 지 몇백 년이 흐른 상황 속에서도 이시스 신앙이 유지되었을 정도로, 이시스 여신에 대한 믿음이 예부터 굉장히 인기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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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언급된 성가의 일부인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영생하시는 독생자시여. 당신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의 한국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영생하시는 독생자시여. 당신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평생 동정 성모님에게서 육신을 취하시고, 본성에 변함없이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죽음을 죽음으로 멸하셨나이다.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광받으시는 그리스도 하느님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³
영문판 가사 원문은 다음과 같다.
Only-Begotten Son and Immortal Word of God,
Who for our salvation didst will to be incarnate of the holy Theotokos and Ever-Virgin Mary;
Who without change didst become man and was crucified;
Who art one of the Holy Trinity, glorified with the Father and the Holy Spirit:
O Christ our God, trampling down death by death, save us!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이 성가에 대한 정보가 "독생자시여(Only-Begotten Son)"라는 제목의 문서로 기록되어 있다. 추가적인 정보를 알고 싶다면, 이 주소를 통해 해당 문서로 들어갈 수 있다.
³ 번역본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s://blog.naver.com/jogaewon/221460419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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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트교, 특히 정교회의 세부 사항에 대해 잘 모르다 보니 번역하는 데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추가적인 정보를 찾느라 예상보다 글을 완성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쓴 것 같네요. 그래도 정보를 찾고 영문을 읽는 데 시간을 들인 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것 같아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 3월 6일 오후 2시 4분 즈음에 표현을 약간 손봤습니다.
DieRoteFahne
크게 틀린 건 없군요. 사실 표현을 어떻게 살릴지 고민하다가 "게르만계 반달족" 파트나 "이렇게 새로 개종한 크리스트교도들을 위해" 부분은 조금 생략했거든요. 에페소스의 주교 요안네스 부분은 피동형 표현을 가급적 능동형 표현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서 문체가 약간 바뀐 것 같고요(한국어에선 피동 표현을 최대한 지양하는 편이라서요). 피드백 감사합니다 :)
추가로 설명하면 제2안티폰의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어......알릴루야" 까지를 제2스티호스에 맞춰서 세 번 하고 다음에 "하느님의 말씀이시며......"를 부르는 겁니다
그렇군요. 정교회에 대해선 제가 문외한이다 보니, 세부 사항에 대해선 잘 몰랐습니다. 추가 정보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반달족은 카톨릭이었을텐데... 동로마 제국에서 정교회 사제를 보냈나보군요 ㅇㅇ
반달 왕국의 마지막 왕인 겔리메르는 아리우스파를 믿었습니다. 확실한 이단이었죠. 그리고 겔리메르가 정통파(아타나시우스파) 교리를 믿는 힐데리크를 축출한 이후 정통파 신도들을 탄압하는 바람에 왕국 내에서 반발도 심했고요. 그래서 정교회 측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가 계획한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 정복 전쟁을 지지했습니다.
그랬군요. 게르만족이 모두 카톨릭으로 개종한 게 아닌데 그건 간과하고 지나가다 보니 제가 잘못 안 부분이 있나보네요...
게르만족 대다수는 본래 아리우스파를 믿었다가, 서로마 멸망 이후에는 점차 정통파(가톨릭 및 정교회)를 믿는 게르만인들이 많아졌습니다. 아리우스파가 확실한 이단이기도 하고(실제로 지금도 아리우스파를 믿는 종파는 없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를 믿는 종파는 현재도 아주 소수나마 잔존하는 것과 대조적이죠), 실제로도 아리우스파를 신봉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딱히 없었거든요. 그리고 크리스트교 역사에서 가톨릭-정교회는 보통 1054년 상호 파문 기점으로 구분됩니다. 그 전까지의 주류 크리스트교는 그냥 칼케돈파(양성론파)라고 부릅니다. 로마 총대주교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간 갈등(그리고 이슬람의 발흥으로 시리아와 예루살렘, 이집트 상실 이전에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및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등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간 갈등도 심했습니다. 칼케돈파 및 비칼케돈파-합성론파- 간 갈등이 꽤 오래 갔거든요. 이 문제는 유스티니아누스나 이라클리오스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이 수백 년 동안 꾸준히 존재하긴 했습니다만, 1054년 대판 싸우기 전까지는 로마 총대주교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간 갈등이 '아 쟤네 또 싸우네' 수준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이 게시판의 크리스트교 역사를 다루는 분의 게시물을 읽으시는 걸 추천합니다. [종교] 카테고리에 있는 글입니다.
아리우스파 최후의 종단이자, 힘이 쎘던 종단이라 할 수 있는 보스니아 국교회도 끝은 결국 무슬림화였죠. 그럴만도 합니다.
정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