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8년 음력 4월 13일 누르하치는 몇 개월간 진행되었던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종지부를 찍고 허투 알라에서 하늘에 칠대한을 고한다. 칠대한은 지금까지 명나라와 누르하치-건주/후금 사이에서 존재했던 갈등의 총망라였으며, 전쟁에 나선 누르하치의 공식적 명분이었다. 하지만 실제적인 전쟁의 이유는 본인의 여진 통합과 그 마무리 공정인 여허 병합이 명나라와의 이해관계 상충으로 인해 저지된 탓이었다.
명나라는 여진이 하나로 통일되는 현상을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것은 누르하치가 충순했건 충순치 못했건 관계가 없었다. 관외의 강력한 통일 세력의 출현은 그 지도자의 성향이나 명에 대한 협조 수준과 관계없이 기존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패권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저지해야 마땅했다. 하물며 누르하치는 명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고분고분한 충견도 아니었고, 자신의 세력의 신장과 유지를 최우선시하는 군주였다. 그렇기에 명나라로서는 당연히 누르하치의 여진 병합을 막기 위해 여허와의 공조체제를 구축하는 한 편 통일을 앞두고 있던 누르하치를 가로막았고, 그것은 대 건주/후금 압력의 고조로 귀결되었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여진 통합을 명나라로부터 이해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러한 행동이 명나라로부터 이해/지지 받지 못하고, 명나라가 자신에 대해 지속적인 압박책을 진행하자 최종적으로 전쟁을 선택하여 명나라와 여허의 공조체제를 무너뜨린 뒤 여허를 병합, 여진의 통일을 완성코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칠대한의 선언을 통한 명분의 구축과 전쟁의 선포로 나타났다.
1618년 음력 4월 13일 집결한 2만여 명의 후금/바유트군, 그리고 사할차군은 그러한 누르하치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군대였다. 누르하치는 칠대한의 선언과 제례 이후 그들을 이끌고 무순으로 출병했다. 그것은 후금, 후일 대청 세력의 대명에 대한 최초의 국가 주도적 무력 행위였다.
후금과 명, 세력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삽화 출처 : 칼부림
출병한 누르하치는 허투 알라에서 출성하면서 수하의 버일러, 암반, 그리고 각군 지휘관들에게 다시 한 번 칠대한을 강조하였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작은 원한들이 있으나 굳이 열거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전쟁의 대의명분을 강조하면서 포로들의 옷을 강제로 취하지 말고, 여자들을 강제로 취하지 말 것이며, 부부를 가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1
이러한 지시는 인도주의적 차원이기보다는, 선전의 차원이었다. 노략이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일반적인 전쟁의 유형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전쟁을 대의명분하에 진행되는 전쟁으로서 포장하기 위한 지시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포로들의 저항을 최소화 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다수의 포로들이 저항을 한다고 해도 무장한 후금군이 제압하기에는 어렵지 않겠으나, 그것은 곧 시간의 소요 및 체력의 손실로 이어진다. 누르하치의 기본 전략은 빠른 공격 이후 명의 요격부대가 제대로 된 행동을 취하기 전에 빠르게 이탈하는 것이었으므로, 시간의 필요 이상의 소요는 방지해야만 했다.
물론 이러한 지시가 내려졌다고 하더라도 저항자에게는 가차가 없었으며, 저항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후금의 포로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들 중 재산과 신분을 보전받는 이들도 다수 있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았다.
어쨌건, 버일러들과 암반들에게 이러한 지시를 내린 누르하치는 이후 30여리를 행군하고서는 그 지점에서 군을 둘로 쪼개어 계속 행군하게 했다.2여기서 한 군대는 누르하치가 직접 지도하는 무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병력이었으며 나머지 한 군대는 무순 인근의 동주와 마근단, 그외 성보에 대한 공격병력이었다.
동주, 마근단에 대한 공격병력은 좌익 4개 구사의 병력에서 호위/정예군인 바야라군을 뺀 숫자였고, 무순에 대한 직공병력은 누르하치 휘하의 우익 4개 구사 병력에 더하여 각 구사의 바야라, 거기에 더하여 후금군에 함께 종군한 바유트군과 사할차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3
이로 보건대 누르하치 휘하의 무순직공병력이 동주, 마근단에 대한 공격병력보다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는데, 아마도 무순이야말로 이번 전역의 공격대상중 최중요 대상이었기에 바야라들까지 모두 배치하여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비록 거짓정보를 흘리며 무순과 그 인근지역의 방비를 최대한 약화시켰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혹여나 공성전이 발생할 수도 있었고, 그러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도 의외로 방비태세를 갖춘 이영방을 상대로 초전에 항복을 요구할 때에, 보다 병력이 많은 상태로 요구하는 것이 아무래도 항복요구의 성공가능성이 더 높기도 했기 때문이다. 누르하치의 그러한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삽화 출처 : 칼부림
한편 당시 구사들이 좌익 4구사와 우익 4구사로 나뉘어졌다곤 하지만 여기서 호칭하는 좌익과 우익은 후일 정립되는 좌익4기(양황기, 정백기, 양백기, 정람기)와 우익4기(정황기, 정홍기, 양홍기, 양람기)의 체제를 일컫는 것은 아니었을 공산이 크며, 단지 8개의 구사를 두 부대로 나누어 진격시키면서 보다 간편히 지칭하기 위해 좌익 4구사와 우익 4구사의 표현을 썼을 공산이 크다.
당시 누르하치가 이끌던 구사의 경우 앞서 언급했다시피 우익 4구사였으며 동주, 마근단으로 향한 군대는 좌익 4구사였는데, 그 탓에 무순진공군에는 누르하치의 양(兩)황기와 다이샨의 양(兩)홍기가 존재했음이 유추된다. 이는 후일 정립되는 좌익 4구사와 우익 4구사의 배치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이 때의 좌/우익 구분은 그저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 진군한 두 군대를 각각 따로 지칭하기 위한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군을 나눈 뒤 구러 지역에 도착한 누르하치는 그 곳에서 하룻밤을 숙영한 뒤 이튿날인 4월 14일 행군을 재개했다. 해당 날짜의 날씨는 그리 좋지 않았는데, 오전서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 누르하치는 각 군을 다시 쪼개어 여덟 개의 부대를 나누어 진군시켰다. 각각의 구사가 따로 움직이게 된 것인데, 비가 오는 날씨 탓에 대군을 움직이기 힘들었을 뿐더러 대군으로 움직이자면 명군에게 움직임이 노출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사료된다.4이 중에서 사할차군과 바유트군등 후금의 외부 군대는 누르하치와 함께 움직인 것으로 판단된다.
사할차와 바유트군이 누르하치의 통솔 하에 움직인 이유는, 누르하치와의 직접적인 인척 관계로 묶인 외부 세력의 수장들이 통솔하는 군대인 만큼,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여 누르하치와 장인과 어푸(efu, 부마) 관계로 묶인 이들의 군대인 만큼 누르하치 본인이 통솔하는 것이 훨씬 나았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이들을 다른 버일러들 하에 배치하여 움직이게 하면 버일러들과 이들의 상하관계가 정립되어 버리지만 누르하치 본인이 직접 통솔하면 이들이 다른 버일러들보다 아래로 정리되지 않는다. 누르하치는 타 세력 수장으로서 원정에 종군해 준 이들을 구태여 버일러들의 아래에 배치해 이들과의 감정의 골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더해 외부 세력에서 파견된 군대인 만큼 후금의 한인 자신이 직접 통솔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장악력을 유지하는 것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이렇게 분산된 군대중 누르하치 휘하에서 무순으로 진격하던 군대 소속 4개 구사는 일단 갈라졌다가 추후 와훈 오모 지역에서 합류하는 것을 기동계획으로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 실록에 의하면 당일날 와훈 오모 지역에서 팔기의 지휘관들과 버일러들이 집결하여 회의를 하였기 때문이다.5 그것을 보건대 최소한 무순으로 진격하던 군대는 비와 노출등의 문제로 각 구사별로 진군했다가 와훈 오모 지역에서 집결하고 그 후부터는 다시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날 저녁 와훈 오모 지역에 이른 누르하치는 군에 종군한 엉거더르와 사할리얀을 본인의 군영으로 호출하여 이번 전쟁의 대의명분을 다시 한 번 강조하였는데, 이는 동맹 세력중 유이하게 자신의 군대에 함께 종군한 두 사람에게 전쟁의 명분을 강조하며 계속해서 동맹으로 붙잡아 두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
1.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13일
2.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13일, 만주실록을 비롯한 청태조실록에 의하면 음력 4월 14일날에 군이 둘로 쪼개어졌으나 여기서는 만문노당의 논지를 따른다.
3. 『만주실록』 무오년 음력 4월 14일
4. 『만문노당』 무오년 음력 4월 14일.
5.『만주실록』 천명 3년 음력 4월 14일.
작성자 : 필자 본인
추천 주시면 감사하겠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