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불타고 하늘은 불에 물들여 검게 변해갔다.
사람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색의 인형에게 종이 찢기듯 찢겨나가고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나는 어떻게 할 말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이 상황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이건 내 기억 속에 있는 풍경이다.”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은 너무나도 순백한 하얀 색의 망토와 커다란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장착한 이 남자, 나는 이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다.
“더 퍼스트 맨, 이게 너의 기억이라고?”
더 퍼스트 맨, 왜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무언가의 책임을 지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 내가 이 세계가 멸망하는 걸 막으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어느 순간 내가 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막으려고 했었다고?”
군인들은 총을 들고, 어떤 이는 검을 들었다, 어떤 이는 화염을 내뿜는 주먹으로 이들과 상대하며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 나도 내 모든 능력을 써서 이 세계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나는 너무나도 무력했고 마지막 구원자조차도 이 일을 해내지 못했지.”
그리고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 시체도 군인들도 인형들도 남지 않게 된 지금 땅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그저 거대한 탑과 황폐한 땅만이 남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내가 지키고자 했던 평화는 없어지고 말았다.”
더 퍼스트 맨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비록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그 암흑 속에서 어째선가 슬퍼하는 얼굴이 느껴졌다.
“다행히도 살아남은 인류들은 다시 세계를 만들어 나가려고 하지만 만약에 다시 이 일을 일으킨 제로가 각성한다면 인류는 멸망하겠지.”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정말이야, 네모. 이제 인류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 밖에 남아 있질 않아.”
푸른 하늘, 뜨겁게 비춰오는 태양과 초록색으로 빛나오는 풀들, 그리고 사람들.
“그래서 너에게 부탁하고 싶어. 이 세계를, 이 세계만큼은 어떻게든 다시 지켜내고 싶어.”
“더 퍼스트 맨.”
푸른 빛,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 그것은 바로
“부디 이 세계의 영웅이 되어다오.”
이 세계를 지키는 영웅이 되는 일이다.
-
“···아침부터 그 기억으로 꿈을 꾸게 될 줄은 몰랐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익숙해질 만한 천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도 없으니 원래 세계에서 하듯 일단 씻은 다음에 검은 티셔츠와 검은 가죽 슈트, 검은 면바지를 입고서 이불을 개고서 밖에 나왔다.
아침 치고는 따뜻한 바람이 부니 꽤나 기분은 ···좋지 않다.
내 이름은 네모, 진짜 이름은 아니지만 이 세계에서는 인터넷에서 쓰던 별명인 네모라는 별명을 이름으로 쓰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23세의 프리터이고, 10시부터 있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갈 준비를 맞췄어야 했을 것이다.
원래 세계에 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의 너무나도 한적해서 강도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야밤의 도로를 걷던 도중, 나는 거대하고 둥글고, 무엇보다 하얗게 빛나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하얀 구체와 부딪치고 말았다.
그때는 오토바이가 빠르게 나를 향해 돌진하는 줄 알았고, 나는 병원에 가서 이번에는 또 뭐라고 해야 하나라며 고민하고 있던 찰나, 꿈에서 더 퍼스트 맨이라는 남자와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꿈속에서 봤던 장면들을 그대로 보여준 뒤에 나보고 이 세계의 평화를 구하라면서 내가 꿈 꿔왔던(내가 그 능력을 가지고 싶어 했는지는 나조차도 모르겠지만.) 개그 캐릭터와도 같은 무적과도 같은 신체능력과 던지는 능력과 어떤 도구를 받고서는, 다른 세계로 떨어지게 되었다.
너무 진부한 차원 이동 소설의 도입부와 같은 일이라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아무리 진부한 차원 이동 소설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그 일을 실제로 겪게 된다면 더 이상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런 일을 강제로 맡게 됐으니 더더욱 더 진부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그냥 화가 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일을 받아드리는 수밖에 없는 것과
“배고파.”
배가 고프니 일단 배부터 채우러 가는 일이다, 여긴 내 자취방이 아니니 그들이 알려준 식당에 가야겠지.
다행이도, 식사를 하는 데 돈은 들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영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어처구니가 없지만, 진짜로 이유가 그렇다.
내가 이 세계를 구할 영웅이 되었기 때문에 식사비를 하나도 지불하지 않고, 구석 진 곳에 앉아 예전에 세계에서 먹던 백반을 즐길 수 있다.
이렇게 된 건 일단 나를 주워준 단체 크루세이더즈의 덕이 크다.
“좋은 아침입니다, 같이 동석해도 괜찮겠습니까?”
흑발의 수컷 늑대와도 같은 머리카락, 날카롭지만 깨끗한 에메랄드빛의 눈빛, 거대한 키와 어깨, 그리고 보디빌더라고 말해도 당연히 믿을 근육을 가진 남자, 이수현
“그런 말 할 것 없이 그냥 옆에 앉으면 될 것 같아 오빠.”
머리카락이 황금으로 코팅된 것 마냥 빛나는 포니테일의 금발과, 수현과 다르게 날카롭지만 그 눈동자에는 부드러움도 순진함도 남아 있지 않은 붉은 색의 눈동자를 가진 여성 레이자.
푸른 수단을 입은 이 남매는 이 세계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 방황하던 날 거둬준 사람들이다.
“네모 님, 알고 있으시겠지만 아침 식사를 하신 이후에 수현 오라버니와 훈련이 있다는 걸 잊지는 않으셨죠?”
“아, 예 기억하고 있어요.”
이들은 날 거둬줬다.
날 거둬준 이유는 단 하나, 교주의 신탁 때문이라고 한다.
교주의 신탁이 아직까지 뭐였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예상컨대 세계를 구할 영웅이 세상에 나타났으니 그를 거두라는 신탁이었겠지.
내가 어딜 봐서 세계를 구할 영웅인지 나조차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한다.
뭐··· 원래 세계에서는 아르바이트만 하던 망한 인생이었으니 차라리 숙박숙직 전부 되고 내가 원하는 데로 뭐든 살 수 있는 지금이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지만, 일단 그걸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오빠, 아무래도 훈련은 나중에 해야 할 것 같아.”
레이자와 수현 씨의 손목 쪽에서 진동과 푸른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설마 이런 때에 인포인트의 습격이··· 위치는?”
아무래도 훈련보다 실전을 먼저 치룰 것 같단 생각이 들었고, 이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인포인트··· 이 세계에 갑자기 나타나 세계를 멸망직전까지 몰아간 인간형 괴물이라고 나는 저 둘에게 설명을 들었다.
그런 위험한 괴물을 지금부터 나 혼자 쓰러트려야 한다, 설명을 듣자하니 이 마을의 동쪽과 서쪽에 인포인트가 나타났다고 한다, 하나는 강가, 하나는 마을의 입구 쪽.
누구 하나는 나에게 붙어줘서 전투를 지시해줬으면 좋겠지만.
“전투는 실전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아무리 전투가 미숙하더라도 싸울 수 있을 거라고 판단 돼서 그런 건데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우리들의 영웅 네모 님?”
수현에게 보이지 않도록 나에게 입 꼬리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무시하는 듯 한 표정과 말투로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수현 씨는 레이자와 다르게 비꼬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프로로서의 냉정한 표정으로 나에게 부탁한다는 듯 끄덕였다.
“아, 알았어요, 알아서 해볼 게요. 두 사람이 이기고 나서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바로 좀 지원을 와주세요.”
···크루세이더즈에서 영웅으로 취직(이라고 할 수 있을 진 의문이지만) 2일째, 연습이고 뭐고 하지 않은체 나는 실전에 나선다.
-
일단 나는 싸워본 경력이 없는 편이다, 해본 거라곤 머리 뜯고 뭐, 그런 막장 싸움뿐이었다.
심지어 내가 다 졌다는 걸 생각해보면 훈련하나 받지 않은 내가 질 확률이 매우 크다.
하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신입답게 말을 듣는 것뿐이다.
어쨌든, 5분간을 뛰어 도착한 곳은 조약돌과 수위가 얕보이는 강물이 흐르는 말 그대로 강가였다.
이야기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조용해 주변을 살펴보며 적이 어디 있는지 살펴봤다.
···그때였다, 마치 노렸다는 듯 얇다고 생각했던 강물 속에서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며 무언가가 나타났다.
“뭐, 뭐야!?”
찢어진 붉은 눈동자, 파충류 같은 비늘, 그리고 머리카락을 대신에 붙어 있는 가시, 그 가시는 등 뒤에 누구도 두지 않겠다는 듯 다달이 붙어있었다.
손 또한 마찬가지였다, 딱 누군가를 긁고 그 사람을 바로 죽일 만한 손톱이 길게 나있었다.
그런데 팔에 뭔가 붉은 인식표 같은 게 달려 있는데 기분 탓일까?
“이거, 완전 괴수잖아?!”
인간형 괴물이라곤 했지만 이래서는 완전히 TV 특수촬영물 울트라 히어로에 나오는 괴수와 다름없다.
게다가 첫 상대부터 이런 인포인트라니, 괴로운 싸움이 될 것 같다.
“하는 수 없어.”
떠들 사이도 없이 인포인트는 입을 열었다, 입에서부터 거대한 하얀 빛의 구체가 모이기 시작했고 고개를 위로 꺾고 원통 모양의 광선을 발사했다.
피할 수 있었지만, 하필 뛰려는 곳에 발이 걸려 넘어져 그대로 광선에 맞은 나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검게 타들어 즉사했거나, 살아 있다고 해도 몸이 불탄 체 있었을 지도 모른다.
모른다고 말한 이유는 내가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은 탓도 있고, 지금 내 몸은 전신의 옷과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을 뿐이다.
심지어, 그 불도 잠깐 땅에 구르자 꺼졌다.
···하지만 돌무더기에서 굴러서 그런 걸까, 아까 맞은 광선의 뜨거움과 돌의 뾰족한 부분이 주는 통증이 나를 괴롭힌다.
아, 짜증나.
상하차 아르바이트 할 때도 이렇게 고통스럽진 않았는데, 역시 숙박과 숙식을 제공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래도 능력인 개그 캐릭터와도 같은 신체 능력 덕분에 상처가 남지 않아서 잠깐 뜨거운 거 외에는 괜찮다.(옷은 왜 괜찮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게 내가 가진 첫 번째 능력이다.
더 퍼스트 맨이 내가 이 세계로 떨어지기 전 내가 바라는 능력을 두 가지 줬는데 이게 그 중 하나다.
난 이런 능력 바란 적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낀다, 그래봤자 아프다는 건 변치 않지만.
“쿠악!”
어쨌든 정신 차리고, 다시 한 번 일어나 거대한 발소리와 날카로운 손톱을 들어내며 인포인트는 나를 향해 돌격해왔다.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나를 향해 날카롭게 내민 손톱이 달려 있는 손을 잡아 돌격을 막아냈다.
강대한 힘과 질주력이 두 손과 다리로 느껴진다.
이 힘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신발은 땅에 끌려 닳아가는 것 같고, 손은 벌써부터 떨린다.
하지만 나에겐 오히려 기회다, 이를 악물고 인포인트를 밀어내고 인포인트가 반동으로 어지러워할 때 두 손으로 인포인트의 두꺼운 팔을 잡았다.
“이야아악!”
이 상태로 나는 온 몸을 회전시켰다, 살짝 씩 허리를 굽히면서 중심점을 잡고서 인포인트의 발이 땅에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인포인트의 발이 떨어지고 이내 온 몸이 가로로 자세가 잡히자 다시 허리를 피고 좀 더 빠르게 몸을 회전시켰다.
“울트라 허리케인!”
이제 어지러워서 못 참겠다고 느낀 순간 그때 적을 돌무더기로 향해 내던졌고, 인포인트의 몸 정면으로 그 돌무더기에 맞게 만들었다.
“허억, 하악,”
너무 심하게 돈 탓인지 뭔지 어지러워서 나 또한 돌무더기에 넘어졌지만 넘어지면서 본 건 돌무더기 덕분에 큰 상처를 입은 인포인트였다.
“좋았어!”
이게 내 두 번째 능력, 던지는 능력이다, 물건이나 상대, 뭐가 됐든 일단 집히면 상대를 그대로 던져버릴 수 있는 능력··· 같다.
이 던지는 능력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능력 같다, 능력에 대해서 그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으니 이런 식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던지는 능력으로 어느 정도의 피해를 준 것 처럼 보였지만 인포인트는 피를 흘리면서 일어나려고 했다.
이 정도로는 끄떡도 없는 거겠지, 수현 씨가 설명했던 걸 생각해보면 겨우 이 정도의 공격을 가지고 쓰러질 인포인트가 아니다.
수현 씨는 인포인트를 쓰러트리려면 인포인트의 회복력이 버티지 못할 정도의 큰 위력의 공격을 가하면 된다고 했었다.
인포인트마다 다 회복력이 다르니 연속해서 위력적인 공격을 날려 쓰러트리라고 하셨지만 요건은 단 하나다.
공격을 맞고서 인포인트는 회복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 가이다.
다행이도 그렇게 회복력이 빠른 것 같진 않지만, 확실한 결정타를 먹여줄 뭔가가 나에겐 없다.
어떻게 해야 바로 끝낼 수 있을 까 생각하던 때, 누군가가 나에게 기름병과 검은 가루가 든 병, 그리고 라이터를 던져줬다.
“네―모 씨! 이걸로 쓰러트려버리세요!”
그걸 던져준 건, 이 마을의 여성 의사인 로어 펠 씨였다, 줄여서 롱 씨, 어떻게 이걸 깨지지 않게 던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걸로 어떻게 하란 건 진 잘 알 것 같다.
기름을 일단 전신에 뿌리고, 그대로 라이터로 내 몸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괴물이 달려들기 전, 내가 먼저 괴물의 폼으로 달려든 뒤 준 검은 가루, 아니 강력한 화약을 이용해서···
“고마워요 롱 씨!”
적과 함께 자폭했다, 회복력이 좋지 못했던 인포인트는 화약들이 폭발하면서 신체가 터진 듯하다.(일부러 터지는 장면을 볼 필요를 느끼지 않은 탓에 눈을 감아서 그렇게 추측한 것 뿐 이지만.)
“아― 그렇게 쓰라는 건 아니었는데 일― 단 강물에 들어갔다 나오세요. 네모 씨”
일단 또 한 번 내 몸은 스턴트 맨 마냥 불타고 있었다, 이런데도 뜨거운 걸로 끝이라는 걸 다행으로 여기면서(그렇게 여기는 거 자체가 글러먹은 것 같지만) 나는 강물로 들어가 불부터 끄고 나왔다.
좋아.
“한 건 해결!”
이걸로 내 첫 업무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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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이름으로 연재중인 문피아 작품입니다. 원래는 인게이지 인포인트라는 작품으로 연재했었다가 제목 수정 및 내용 수정들을 심히 느껴서...
읽고 어떠셨는지 소감 부탁드립니다.
특별히 흥미가 생기는 내용은 아니네요. 무엇보다 요즘 이세계가 너무 범람해서 그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