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강의인 하루가 저문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전리품도 두둑하다. ……레포트라는 전리품이. 시부럴.
뭐. 진짜 전리품도 있다. D교수님과의 만남이라던가, D교수님께서 R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던가. 그럭저럭 플러스인 하루였다.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은 마이너스다. 기운 없어. 죽을 맛이야. 밥 하는 것도 귀찮다. 오늘은 저녁은 그냥 시켜먹자.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여니.
“…….”
엎드린 시체가 있었다. 시체의 이름은.
“R.”
“…….”
대답이 없다. 그냥 시체인 거 같다.
그래도 한 번 더 불러보았다.
“R.”
“끄으으으으으으으응!”
R은 미약하게 버르적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은.”
“응.”
“죽을 만큼 힘을 내도 더 죽을 만큼 힘을 낼 수 있더라.”
“응.”
“그리고.”
“응.”
“더 죽을 만큼 힘을 내도 더더 죽을 만큼 힘을 낼 수 있더라.”
“응.”
“그리고.”
“응.”
“더더 죽을 만큼 힘을 내도 더더더 죽을 만큼 힘을 낼 수 있더라.”
“응.”
“사람 체력 하나는 잘 짜내더라, 시발 놈의 교관 새끼.”
그렇게 유언을 남기고 다시 시체가 되어버렸다. 보아하니 우리 집에서 쉬고 갈 생각 만반인거 같다. 숙취로 죽는 소리를 내도 실없는 농담을 하던 녀석이 저러는 걸 보니 진짜로 힘든가 보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물었다.
“야. 저녁 어쩔래? 난 시켜먹으려고 했는데.”
“팔도 못 들겠어. 바닥에 접시를 두면 핥아먹을 수 있는 걸로.”
H랑 그런 플레이를 해본 적이 있기는 하지. 아, 아니. 지금 그 생각은 하지 말고.
나는 냉장고를 열어 뭐가 있는지 확인했다. 음. 그럭저럭 있기는 있네. 오늘은 시켜먹으려고 했는데. 저 녀석 꼬라지를 보아하니 제대로 못 먹을 거 같고.
음. 음. 음. 음. 음. 그걸로 할까.
“야. 밥 먹어.”
상을 펴고 접시와 그릇을 올려놓았다.
“바닥에 내려놔. 알아서 먹을게.”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 행세는 하자. 일어나.”
R의 손을 잡고 일으키려고 했다.
“아파파파팟!”
R이 발작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놀라서 R의 손을 놓았다.
“힘들다니까!”
R이 역정을 낸다. 하지만 그 역정도 기운이 없다.
“그, 그 정도로 힘들어?”
“말했잖아! 바닥에 내려놓으면 알아서 먹는다고.”
과장인 줄 알았는데 과장이 아닌가 보다. 하지만 누워서 먹으면 보기 흉한 건 둘째 치고 탈 날 텐데.
……어쩔 수 없지.
나는 이불을 꺼내 밥상 앞에 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R의 허리와 다리를 받쳐 들었다.
“응? 어? 뭐야?”
R은 버둥거리다가 내 목에 매달렸다.
“사람 행세 하라고.”
나는 R을 이불과 밥상 사이에 내려놓았다. 이불이 등을 받쳐주니 그래도 힘을 덜 들이고 앉을 수 있을 것이다.
R을 앉히고 난 맞은편에 앉았다.
“자. 밥 먹어라.”
R이 밥상을 내려다보았다. 반찬들을 잘게 다져 밥과 섞어 한입 크기로 뭉친 후 김가루를 묻힌 한입 폭탄 주먹밥과 종이컵에 담긴 건더기를 뺀 콩나물국.
“고기가 없잖아. 고기.”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어느 정도 기운 차렸나보네.
“안에 장조림이랑 참치도 넣었으니까 그냥 쳐 잡수셔요, 어머님.”
“애미야, 밥은 멀었느냐!”
짧은 상황극 후에 우리는 웃었다.
“으. 아프다.”
R은 잠시 낄낄 거리다가 배를 부여잡았다.
“지금도 이런데 자고 일어나면 더 끔찍하겠네.”
“죽여줘. 고통 없이.”
“일단 밥 먹고.”
“이게 내 최후의 만찬인가.”
우리는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R이 젓가락질도 못할 것 같아서 일부러 맨손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을 만들었는데.
“……너 진짜 가관이다.”
한 입 크기의 주먹밥. 그게 무게가 얼마나 된다고 부들거리면서 들고 입에 옮기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헛웃음이.
“그거 알아? 너 며칠 굶은 사람이 밥 먹는 꼴이다.”
“몇 시간 동안 비행실습 하고 온 사람이 밥 먹는 꼴이지. 그냥 팔 드는 것도 힘들어.”
내가 다섯 개를 먹는 동안 한 개를 간신히 먹을까 말까 하다가 떨어트리는 R을 보다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게 됐다.
“야 됐다. 됐어.”
나는 주먹밥을 하나 집어 R의 입가에 갖다대었다.
“보는 내가 답답하다. 먹여 줄 테니까 입 벌려.”
R은 나와 내가 들고 있는 주먹밥을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나는 R의 입에 주먹밥을 넣어주었다. 우물우물 주먹밥을 씹어 삼킨 R이 말했다.
“음. 쌀을 관리도 안 된 전기밥솥에서 한 밥에 냉장고에 오래 묵힌 반찬들을 대충 다져서 섞어 놓으니 전부 따로 놀아요. 심지어 맛의 밸런스도 고려를 안 해서 짜죠! 하다못해 김도 조미가 안 된 것을 했다면 나았을 텐데 조미가 된 김을 묻혀놓았으니 물 없이는 못 먹겠어요.”
“이거 우리 부모님께서 농사지으신 쌀이고,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반찬이다.”
“……하지만 맛있어! 진짜로! 장난친다고 심술궂게 말한 거야! 더 줘! 더!”
다급하게 말하며 입을 벌리는 R. 날개가 달려 있는 녀석이다 보니 먹이를 조르는 새끼새 같았다.
기운이 없다곤 하지만 식욕은 있는지 새끼새는 밥을 전부 먹어치웠다. 처음에 낸 주먹밥을 다 먹어서 급하게 다시 만들어야 했고 간식으로 내온 사과 4개와 쿠키 1상자까지.
“……엥겔지수(생계비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 치솟는 게 눈으로 보였다.”
R은 민망한지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미안. 하루 종일 비행하니까 몸에 칼로리가 안 남아나서.”
“나중에 밥 사라. 꼭.”
“응.”
R은 이불 더미에 드러누웠다. 나는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나 너 실습하는 거 봤다.”
“응? 아. 응. 나도 너 봤어.”
“진짜냐? 그 넓은데서 어떻게 날 찾았냐?”
“그냥 보였어. 너희 실습동 옥상에서 커피 마시고 있었지?”
“그 먼 거리에서 커피라는 것도 보였어? 진짜 눈 좋네. 그러고보니 D교수님께서 고공비행이 가능한 종족은 대체로 눈이 좋다고 하시더라. 자연선택설로 눈이 안 좋으면 도태 되니 대체로 좋다고 하시던가?”
“아. 그거 우리 이론 수업 때 들었어. 그것 말고도 몇 가지 더 있었는데. ……까먹었어. 책 보면 기억날 거 같은데.”
“어차피 우리가 배우는 건 우리가 필요한 지식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대충 위치를 기억하는 거라 잖냐. 아예 아무것도 안 배우면 그 지식을 어디서 찾을 지도 모르는 거고.”
“그래도 가끔씩은 그 지식을 전부 암기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잖아.”
“그건 사람이 아닙니다.”
“동의.”
아마 D교수님이 그런 부류시겠지.
설거지를 끝내고 드러누운 R에게 물었다.
“너 어떡할 거냐? 자고 갈 거야?”
“응. 안 될까? 너무 지쳐서 집까지 갈 엄두가 안 나.”
“뭐. 처음 자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라.”
바로 그 때 머릿속에서 지난번에 보았던……R의 알몸이 떠올랐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그게 왜 지금 떠올라.
“그러면……응. 저기. I.”
그리고.
“마, 마사지도 좀 해주면 안 될까?”
너는 그걸 왜 지금 부탁 하냐?
“마사지?”
R은 부탁하는 자신도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응. 근육을 제대로 풀어주고 자라고 했거든. 교관이. 그런데 지금 너무 지쳐서 스스로 하는 것도 힘들고. 손이 안 닿는 곳도 있고. 부탁할 만한 사람이 너밖에 없기도 하고.”
“……잠시만. 마사지를 어떻게 하더라.”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말한 것과 달랐다.
내 안에서 R의 부탁을 받아들이려는 나와 R의 부탁을 거절하려는 내가 싸우고 있었다.
‘친구의 부탁이니까 받아들이자. 그리고 덤으로 R의 몸 여기저기를 만질 수 있잖아.’
‘친구의 부탁이긴 하다. 하지만 친구를 넘어서는 단계로 안 넘어갈 자신이 있나?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훗날에. 이미 연인인 H를 두고도. 외도를 안 할 자신은? 방금 전에 R의 알몸을 떠올린 이유는?’
‘외도를 하려고 해도 상대의 동의가 있어야 하지. 그리고 R이 날 유혹하려고 저러는 건 아닐 것이다. R은 H의 친구이고 H와 내가 사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R의 성격을 생각하면 H와 불화를 일으킬 일, 그러니까 나를 유혹하는 일을 할 리가 없다. 정말로 단순히 마사지를 부탁하는 것이다.’
‘그러나 R이 나를 유혹한다고 해도 H가 R에게 화를 낼 일은 없을 것이다. H의 이상성욕을 고려하면. 오히려 H는 반길 텐데? 만약 H가 부추기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분명하게 H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H도 그 경고를 받아들였고. 그리고 H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R이 나에게 친구를 넘어서는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H의 부추김을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이고, 호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상한 부탁을 받고 수긍하는 것은 또 다른 이상성욕이다.’
‘R의 몸을 만지고 싶다는 욕망은? 그것도 일종의 외도의 시작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닌가?’
…….
“나……보다는. H가 더 나을 것 같은데. 지난번에 H한테 마사지 받아봤는데 좋더라.”
그리고 마사지가 다른 의미의 마사지가 되기는 했지만 R에게도 그러지는 않겠지.
“그래? 그런데 H지금 집에 있지 않을까?”
“그렇겠지. 그래도 네가 부탁하면 와주겠지. 너 각오해. H라면 마사지를 빙자한 성희롱을 남발할 테니까.”
“하하하핫! H라면 그럴 거 같긴 해.”
“부를까?”
“응. 대신 H가 좀 심하게 한다 싶으면 말려줘야 해.”
R의 태도를 보아하니 H가 R에게 사주를 하고, R이 나를 유혹한다는 것은 이번에도 나의 의심암귀였나 보다. 아무래도 나를 못 믿는 것을 연인과 친구에게 투사하는 것 같다.
나는 H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I를 사랑하는 H의 전화입니다. 무슨 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내 폰으로 건 거면 어쩌려고 그랬어?”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돈독한지 보여주는 증거가 되겠지.-
그러네.
“응. 어디야?”
-집. 그런데 이제 곧 나가야 해.-
“뭐? 왜?”
-으응. 집안일 때문에. 친척 중에 좀 크게 사고 친 사람이 있거든. 전에 가족모임 있었다고 했잖아. 그거 연장선.-
“그러면……못 오겠네.”
-응. 미안해. 그런데 왜 전화했어?-
R의 마사지를 부탁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H가 못 오는 이상 H는 나에게 대신 하라고 말을 할 것이고. 이는 간신히 잠재운 H의 이상성욕을 다시 깨워버릴 테니까.
나는 폰에 속삭였다.
“보고 싶어서.”
-후후후. 우리 강아지 어른의 놀이 하고 싶어서 그렇구나? 미안하지만 오늘은 안 돼. 기다려.-
이런 제기랄. H에게 길들여진 나의 몸이 H의 목소리와 말투만으로도 흥분해버렸다.
“어쩔 수 없지. 조심히 다녀와.”
-응.-
----another side----
H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가족모임이 있었던 건 사실. 크게 사고를 친 친척이 있는 것도 사실. 하지만 그녀가 그 사고를 수습하는 장소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오늘의 남은 시간 전부 자유 시간이었다.
연인에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하지만 H의 거짓말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I에게 I가 싫어하는 짓을, I가 외도를 하게 하는 일을 시도하지도 계획하지도 않겠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I에게 무슨 일로 전화했는지 물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R이 그녀에게 이미 알려줬으니까. 오늘 어떤 계획을 세웠고 어떻게 할 건지. H는 R의 계획을 전해 들었을 뿐만 아니라 계획을 좀 더 가다듬었다. 덜 의심을 받을 수 있게.
지금부터 연인인 I의 집에서 연인인 I가 친구인 R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오붓? 아니 그것보다는 야한이라고 말하는 게 더 바른 표현일 것이다.
H가 원하는 것까지는 하기 힘들겠지만 제삼자가 본다면 연인사이라고 오해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일을 할 것이다.
자신의 연인이 자신 외의 사람과 그런 짓을 할 것을 상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자신만의 소중한 것이 다른 자에게 더럽혀지는 고통. 자신의 연인을 다른 자에게 빼앗기는 상실감.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등이 그녀의 내면에서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녀를 흥분시키기도 했다.
H의 숨길이 뜨거워지고 거칠어졌다. 그녀의 심장이 전신으로 뜨거운 피를 빠르게 뿜어냈다. 그녀의 전신이 번식행위를 원하고 있었다.
H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H는 I의 집에서 일어날 일을 상상하며 자신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another sid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