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기다리던 중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바로 지난 주 이 때 즘에 H가 자신의 친구랑 자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 때는 내가 너무 감정적이 되어서 심한 소리를 할까봐 잠시 떨어져 있자고 말했지만 바로 다음 날에 H가 와서 사과를 했었지. 그래서 내가 연인 외의 사람과 자는 것에 혐오감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만약 그 때 내가 제대로 알렸다면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연인을 의심하고, 친구를 의심하는 이 상황이.
H가 오면 제일 먼저 내가 연인 외의 사람과 자는 것에 얼마나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지 알리자. 어떻게 이야기할 지는 대충 생각해뒀다.
“앗! 변태다!”
하늘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내가 ‘유생과 성체가 전혀 다른 형태, 생리로 변화하고 있는 중’이 아니잖아. ‘이상하리만큼 왕성하고 정상이 아닌 성욕을 가지고 있는 자’는 맞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시인하고 싶지는 않고.
“아아아이이이!”
아 쫌!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드니 주황색에 여러 가지가 덕지덕지 붙은 위아래가 일체형인 옷, 비행과의 실습용 옷과 고글달린 헬멧을 쓰고 있는 R이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이 녀석이 또!
하지만 R은 무언가 생각난 듯이 갑자기 속도를 줄이고 얌전하게 내 옆에 착지했다. 전에 화낸 보람이 있구나.
“넌 도대체 이 넓은 학교에서 어떻게 날 정확하게 찾아 내냐?”
R은 손으로 쌍안경을 만들며 대답했다.
“하핫! 하늘에 있는 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도다!”
R이 쓰고 있는 고글이 자동으로 위로 올라갔다. R의 팔과 날개가 일체이다 보니 이런 장치가 달려있나 보다.
“비행과 실습 중이었어?”
“응. 원래는 더 늦게 끝나는데 내가 목표를 조기에 다 마쳐서 일찍 끝났어.”
R과 대화를 하는데 뭔가 마음 속 한 구석이 간질간질했다. 이게 뭔가 싶어서 들여다보니 쑥스러움이다. 이상하다. 이 녀석과 나는 그런 걸 느낄 정도로 어색한 사이가 아닌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R은 이상한 웃음소리를 길게 냈다. 자세히 보니 녀석의 얼굴이 붉다. 나는 녀석의 반응으로 내가 왜 쑥스러움을 느끼는지 알아차렸다.
“어, 어제는 즐거운……시간을 보냈어?”
R은 장난스럽게 말하려고 하지만 쑥스러움에 먹혔는지 말끝이 흐려졌다. 쑥스러워 할 거면 차라리 말을 말지. 나도 쑥스럽잖아.
이 녀석과 내가 쑥스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어제 있었던 일. 내가 R의 알몸 사진을 찍은 것 때문이다.
“으음. 쪼금 데이터가 부족해서 불만족스럽더라.”
나도 어떻게든 장난스럽게 받아주려고 했지만 나도 얼굴이 상기되고 말았다. 평소보다 좀 더 진한, 그리고 직접적으로 서로를 향한 음담패설이라서 그렇다.
그리고……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가슴속에서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죄책감과 자기혐오가 질척거렸다. 방금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만족해버렸기 때문에. H와 사귀고 나서부터 그러는 일이 적기는 하지만 가끔씩 야동을 보고 자기 위로를 하는 나다. 그럴 때에는 전혀 느끼지 못한 감정과 느낌이다.
그 원인을 나는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와 R사이에 어색하게 침묵이 흐른다. R은 아마 쑥스러움 때문이겠지. 하지만 나는 거기에 몇 가지가 더 추가된 감정 때문이었다.
“I! R!”
나는 흠칫 놀라 우리를 부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H다. H는 경쾌하게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나는 감정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냥 별 이야기는 없었어. 지금 막 만났거든.”
“으음?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데. 앗? 설마? 내 욕?”
“진짜로 지금 막 만나서 네 욕 할 시간도 없었다.”
“그래?”
H는 나에게서 R로 시선을 돌렸다.
“R. 너는 실습중이야?”
“응. 으응.”
R은 어색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서 나는 한 가지 알아차렸다. R은 어제 내가 R의 알몸을 찍은 사건 때문에 H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제 일어났던 일은 정말로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안도했다. R과 H가 공모하여 R이 나를 유혹한 것이라는 것은 나의 의심이 만들어낸 망상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너 뭔가 이상하다? 나한테 죄졌어?”
대신 H가 R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사실을 밝힐까? 안 돼. 그러면 H가 화내……지는 않겠지. 오히려 좋아하겠지. 하지만 H의 이상성욕이 자극받아서 정말로 R에게 나를 유혹하라고 부추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거짓말을 하자.
나는 H의 어깨를 감싸고 R과 거리를 벌린 후에 H의 귀에 속삭였다.
“그. 뭐시냐. 음. 어제……내가……네 사진으로 자위하던 거 들켰거든.”
“에이. 뭘 고작 그 정도 가지고.”
H는 R에게 다가가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R을 들어올렸다.
“뭘 그거 가지고 쑥스러워 해. 네가 원하면 직접 눈앞에서 시현해줄 수도 있는데.”
R이 취중에 완전히 골아 떨어져있던 상태였긴 하지만 실제로 R의 근처에서 그 짓을 한 적이 있었던 적이 있기에 나는 딴청을 피웠다.
H는 R을 내려놓고 R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another side----
H는 R의 귀에 속삭였다.
“시나리오 수정해. 복잡하게 연기 할 필요 없어졌어. I가 네가 쑥스러워하는 이유가 자신이 내 사진으로 자위하던 걸 들켜서 네가 어색해하는 거라고 했으니까. 아직 우리가 의심 받지는 않는 것 같아. 그리고 좋겠네.”
H의 목소리에 장난기와 희락이 섞였다.
“널 지켜주려고 하네. 어때? 좋은 남자지? 더 좋아지지?”
----another side end-----
H와 R이 떨어졌다. R의 얼굴이 붉었다. 무슨 소리를 했기에.
“무슨 소리 했어?”
H는 이번엔 나에게 다가와 내 귀에 속삭였다.
“네 물건에 대한 이야기.”
“음.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그걸 친구한테 말하지는 맙시다. 우리.”
H는 깔깔 웃으며 R에게 말했다.
“R, 실습시간 이라고 했지? 안 가도 괜찮아?”
“괜찮아. 일찍 끝났어.”
“그래? 그러면 옷 갈아입고 와. 같이 밥 먹자.”
다행히 R와 어제 있었던 일이 들키지 않은 것 같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밝히거나 영원히 숨기자.
R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때 마침 적절하게 둘만 남았다. 내가 H에게 확실하게 해둬야 할 이야기를 하기에 적절한 순간이다.
“H.”
“응?”
H는 꼬리를 흔들며 나를 끌어안았다.
“왜?”
예쁘지만 막무가내인 면이 있고 사랑스러운 나의 연인. 이를 밝히지 않는다면 너는 내가 너를 용납하지 못하는 짓을 저지르게 되겠지.
“아! 깜빡했다. 어제 일찍 가버려서 미안해. 내가 보내 준 사진은 잘 썼어? 장소가 좀 안 좋아서 좋은 사진은 못 찍었어. 나중에 둘이서 제대로 된 사진 찍을까?”
H가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또 다시 가슴속에서 시커먼 것이 질척거렸다. 하지만 이 감정은 H때문이 아닌 나의 문제 때문이다. H가 보내준 사진을 보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중에 나는……그 직전에 보았던 R의 알몸도 떠올리고 있었다.
나의 문제. 내가 평생 동안 용납하지 못할 문제. 나는 연인인 H가 이것만큼은 건드리지 않기를 바란다.
“H. 우리가 지난번에 싸웠던 것 있지?”
H의 얼굴에서 즐거움이 사라졌다. H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응.”
“그 때 네가 먼저 사과를 해서 명확하게 밝히지 못한 게 있어.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이건 정말로 확실하게 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H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양손을 붙잡았다.
“너 나에게 다른 사람이랑 자 달라고 했잖아.”
“응.”
“절대로,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부탁하지 마. 계획을 짜지도 마. 단순히 싫다 수준이 아니야. 난 그걸 죽어도 용납 못해. 네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 때문에. 너를 의심하기는 싫지만. 그래도 만약을 위해 말하는 거야. 만약에 네가 내가 다른 사람과 자도록 일을 꾸미고 있다면……나는 증오하고 혐오할거야. 나도. 너도.”
H의 표정이 굳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 혹시 너희……아니. 미안해. 더 이상 안 물을게.”
H는 나를 끌어안았다. 강하게. 그리고 위로해주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안도했다. 억지로 나의 과거에 대해서 숨기지 않게 되어서. 그리고 고마웠다. H가 더 이상 자세히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서.
“미안해. 내가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너한테 그걸 부탁했지? 미안해 네가 얼마나 그걸 싫어하는지 몰랐어.”
“이해해줘서 고마워.”
나는 H의 볼에 입을 맞췄다. H는 웃으며 내 볼에 자신의 볼을 문질렀다.
내가 사랑하는 연인.
나는 더 이상 너를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몰라.
오늘 이 일로 나는 더욱 너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어.
“사랑해, H.”
----anotehr side----
H는 I가 외도에 이토록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에 놀랐다. 혹시 과장된 표현인가 생각은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보아하니 I의 과거에 외도와 관련된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 높은 확률로 부모님들 중 하나 혹은 두 분 다 외도를 해서 상처를 받은 일이 있었던 것이리라.
H는 자신의 이상성욕이 I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통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H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 하면 I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외도를 하게 할 수 있을까?’
배려심 넘치는 이기주의. 이는 H가 I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H는 그 이상으로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성적인 판단도 기인하고 있었다.
사람은 평생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지 않는다. 있다고 해도 그건 소수의 사례일 뿐. 실제의 경험 그리고 이혼율 같은 통계를 가지고 이를 증명할 수도 있다. 두 사람 다 서로가 첫 연애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I의 외도를 위한 계획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아까 전 R과 H와 대화를 나누며 그 계획이 실효를 거두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 그만두기에는 아깝다.
그리고 I가 지금 외도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 것으로 인한 장점도 있었다. I는 H가 이미 계획을 짜고 있는 중이고 그걸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것을 덜 의심하리라. 들켰을 때의 반응은 이전보다 격렬해지겠지만 들키기 위한 역치(반응이 일어나기 위한 최소한의 물리량 혹은 자극)는 지금보다 더 커졌을 것이다.
나중에 전체적인 계획을 다시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은 정해져있다.
“응. 나도 사랑해, I.”
이것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평생을 함께 할 반려를 고르라고 묻는다면 아무런 주저 없이 I를 선택할 정도로 H는 I를 사랑하고 있었다.
----another sid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