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이 완역되면서 여러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졌는데 그중에는 조광조도 있다. 이 양반의 기존 평가를 엎어버린 일화 하나를 소개함.
1518년 8월 17일 여진족 토벌 안건을 주제로 열린 군사회의때 일어난 일이다. 중종과 영의정 정광필, 우의정,병조판서, 지나가다가 잠깐 들린 조광조 등등이 참석.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방어사 이지방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영의정 정광필·우의정 안당·병조 판서 유담년도 명패(命牌)로 부름을 받고 들어와 있었다. 부제학 조광조가 마침 숙배(肅拜)하러 예궐(詣闕)하였다가 장차 방어사를 보내려 한다는 말을 듣고 ‘가벼이 의논해서는 불가하다.’ 하므로, 상이 곧 불러들이니, 광조가 아뢰기를,
- 조광조: 잠깐. 님들 군대 보낸다면서요? 그거 반대임.
"이 일은 묘당 대신(廟堂大臣)과 지변사 재상(知邊事宰相)이 이미 자세히 의논하여 처리한 것이므로 신처럼 오활(迂闊)한 유자(儒者)가 가벼이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은 작은 듯하나 실로 큰 것이니, 신은 이것 때문에 변방에 일이 일어나는 조짐이 될까 두렵습니다. 속고내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제왕(帝王)의 거동은 만전해야 합니다. 반드시 사리가 바른 뒤에 거행해야 합니다. 지금 속고내가 모역하는 마음이 없고 다만 사냥하러 왔을 뿐인데, 우리가 불의에 엄습하여 사로잡으려 한단 말입니까? (이하 생략)
지금 변경에 요란을 피운 것이 아닌데 몰래 군사를 내어 엄습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합니다. 비록 장수를 보내더라도 사로잡지 못하면 호인(胡人)이 반드시 우리를 믿지 아니하고 간사하다고 할 것입니다."
- 조광조 : 사실 내가 전문가는 아닌데 한마디 할게. 비겁하게 기습해서 잡아죽이는건 좀 너무 심한거 아님?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옳다. 만약 속고내가 지금 와서 변경을 요란하게 하면 사로잡는 것이 옳다. 그러나 사냥하러 왔는데, 도적의 꾀를 행하여 엄습해서 사로잡는 것이 사체에 어떻겠는가?"
- 중종 : 그러게?
하매, 정광필이 아뢰기를,
"조광조의 말은 참으로 유자(儒者)의 지극한 말입니다. 그러나 삼대(三代) 이후로 변방 일을 처치하는 데에 한결같이 제왕(帝王)의 도를 따르지 못하였으니, 지금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 정광필(영의정) : 조광조 니말은 선비나 할말이고, 이건 전쟁이니까 원래 하려던 대로 해야함
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전쟁의 기회도 또한 한마음에 있을 뿐입니다. 옛날 제왕이 이적(夷狄)을 대함에 있어서 도(道)에 맞게 하는 것도 반드시 친히 그곳을 가 보고서 안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다 인(仁)과 의(義)로 한 데 불가합니다. 그리고 올해 북방에 서리가 일찍 와서 농사 수확이 전혀 없으니, 만약 변경의 환란을 만나면 반드시 제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왕자(王者)가 이적을 대하는 데는 변경을 충실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여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고, 저들이 먼저 변경을 요란하게 하여 적이 우리에게 침범하면 부득이 대응하되, 서서히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본디 사리에 마땅합니다. (이하생략)
- 조광조: 사람이 인정을 가지고 설득하면 안될게 없음. 먼저 갸보고 사과하라고 하고 시작하시고 기습은 반대임
하자, 유담년이 버럭 화를 내어 소리를 지르며 아뢰기를,
"일이 만약 처리를 잘못하면 과연 사단이 생기겠지만, 그러나 옛말에 ‘밭가는 일은 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한다.’ 하였으니, 이와 같은 일은 신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 유담년(병조판서) : 아 저 밀알못이 일 다 망치네.
하니, 전교하기를,
"조광조의 말도 또한 깊은 뜻이 있으며, 일이 매우 가볍지 않으니 가벼이 움직일 수 없다. 정부 및 지변사재상을 다시 모아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중종 : 다시 생각해보니 조광조말도 맞아.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실록 번역 전 조광조 : 비운의 개혁가.
실록 번역 후 조광조 : 머리속이 꽃밭으로 가득한 유교 탈레반.
주초위왕 주작을 당할 정도로 미움받을만 했네 ㅋㅋㅋ
주초위왕 주작을 당할 정도로 미움받을만 했네 ㅋㅋㅋ
중종이 자기 친위세력으로 만들려고 계속 감싸줬는데. 소격서 폐지 강행으로 중종까지 등돌리게 만듬.
개혁도 당시 조선 기준으로도 기독교 근본주의자스런 개혁이라 현대 기준으론 좀 많이 그럼
성공했으면 왕망 테크 탔을지도 모르겠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