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배경
마침내 성도가 함락되자 장수와 병사들은 다 창과 방패를 내던지고 성 내의 여러 창고로 달려가 경쟁적으로 보물을 취했다. 창고가 다 약탈되어 군용물품이 부족하게 되자 유비가 심히 우려했다. 유파가 말했다.
군용물품이 부족해서지 딱히 민생 챙긴거 아님
결말
유비가 이를 따르자 수개월 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수개월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민생?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지
직백전 기록이거말고 더 있던가?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면 기록이라도 더 있었야 할텐데
배경
마침내 성도가 함락되자 장수와 병사들은 다 창과 방패를 내던지고 성 내의 여러 창고로 달려가 경쟁적으로 보물을 취했다. 창고가 다 약탈되어 군용물품이 부족하게 되자 유비가 심히 우려했다. 유파가 말했다.
군용물품이 부족해서지 딱히 민생 챙긴거 아님
결말
유비가 이를 따르자 수개월 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수개월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민생?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지
직백전 기록이거말고 더 있던가?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면 기록이라도 더 있었야 할텐데
결말도 본인들 원하는 결과만 봤다고 할 수 있고
(촉한 쇠퇴기에 화폐품질이 저화됬다는 걸 근거로함)
+(촉한의 화폐가 타국에서 발견되는 것 또한 그저 화폐가치가 있었기때문이라며 한쪽의 주장만 말함)
배경도 본인들 원하는 부분만 쏙 뺐다고 할 수 있음
(동탁이 화폐가치를 똥값으로 만들어서 새롭게 안정젇인 화폐를 만들 이유가 있었음에도 동탁이랑 같은 일한거라며[있는 동전 쪼개서 일부러 악화 만드거랑 새로 동전 만든거랑 뭐가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됬던 같은 짓이라고 함]깜)
당연 할수 있는 주장이고 나올수 있는 말이긴 한데 정설로 취급하고 딱 박아둘건 아니지?
그래서 내가 이건은 딱히 어느 쪽이 맞다고 안함
기록만 신뢰하는 건 아니잖아? 타국에서 화폐가 발견됬다는 점도 이유로 들고 그것얘기하면 '화폐자체가 가치가 있어서' 라는 개인판단일 뿐이고
애초에 동탁이랑 동 케이스라고 주장 하기에도 배경도, 방법도 다르다고 반박했고
당백전 이야기나오길레 그건 또 디플레이션 상황이라 또 다르다고 반박을 했음
사례에 있어서 아무래도 화폐개혁자체가 성공하기 힘든 사례 그 자체다 보니 이 쪽에 깊게 파보지 않은 나로선 가져오기 힘들긴 함
다만 한가지 말하자면 손오나 조위나 촉한이나 결국 시행했던 화폐개혁의 틀은 비슷하다는거
적어도 매우 질이 낮아진 동탁의 오수전을 바로잡을 화폐를 발행했음이 보임
세 나라가 갑자기 수탈할 이유가 없다고 보기도 하고
시행한 정책이 비슷하다면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을 방법은 전부 똑같이 구상 한것으로 보임
하지만 조위나 손오의 환경엔 딱히 알맞지 않았고 촉에는 그게 맞았다고 생각
직백전 관련 기록이 영릉선현전에 기록된거 말고 없는데
여기서 목적자체가 군용물품을 보충할려고 만든거라고 나왔는데
직백전 만들어서 수개월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인데
주목적이 주조차익말고 순전히 민간경제 안정화로 수개월만에 안정화된거라면
그런 대단한 물건의 기록이 이정도고 다른나라가 모방이라도 안할이유가 있나?
영릉선현전 기록을 부정하면 모르겠지만
영릉선현전 기록만 보면 주조차익 목적이 너무 선명한데
아니 그렇게 대단한 성공사례면 무슨무슨사례를 따라서 모방이라도 하자 이런 기록이라도 있어야 아닌지? 영릉선현전 기록대로라면 수개월만에 관부가 충실해진 대단한 경제정책인데 그게 아주 긍정적이었으면 다른시대의 다른군벌들이 유파의 사례를 응용해서 직백전같은 화폐를 발행하자 이런것은 있어야죠
조원명이 아뢰기를,
“처음엔 4문이 1푼이었다가 그 뒤엔 2문이 1푼이었는데도 이로움이 없었으므로 그대로 대전을 통행하여 이제까지 쓰고 소전은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이로 보더라도 대전을 통행한다면 소전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전화(錢貨)의 법은 가치가 알맞으면 나라와 백성들 모두에게 이로우나, 너무 흔하거나 비싸면 백성들이 불편하게 됩니다. 유파의 법 같은 경우는 실로 백성들을 속여 나라를 부유하게 한 술수이니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이정제가 아뢰기를,
“유장(劉璋) 때엔 화폐 제조의 권한이 백성에게 있었으므로 유파가 당백전을 통행하게 하여 권한을 거두었으니, 선유가 인력(人力)으로 조화(造化)를 뺏었다고 한 말이 옳습니다. 손권의 당천전 같은 경우는 액수가 너무 높다고 할 수 있으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였다. 조원명이 아뢰기를,
“대전은 한때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술수이니 오래가지 못하고, 나중에 폐단이 생긴다면 또 소전을 다시 쓸 것입니다. 지금은 소전을 대전으로 바꾸므로 이문이 남겠지만 다시 소전을 주조할 때에는 줄어들어 모자라는 비용이 필시 반은 넘을 테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손실이 어찌 작겠습니까. 이는 우려해야 할 바입니다.”
승정원일기 영조11년12월10일
https://sjw.history.go.kr/id/SJW-F11120100-02200
조원명같은 사람은 유파가 사람을 속였고 오래갈 정책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유파의 경제정책을 백성들한테 좋았다 이런기록을 가지고 오시면 좋겠습니더.
https://db.itkc.or.kr/search/group?q=query%E2%80%A0%E5%8A%89%E5%B7%B4
덕분에 재밌는 기록을 보고왔어 고마워
이것 때문에 역시 좀 더 다양한 관점을 가지게 됬음
기록을 보아하니 우리가 말하는 거랑 별로 다를게 없더라
누구는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서
누구는 당시 시장경제에 알맞는 화폐로서
긍정적으로 적힌 것도 있고 부정적으로 적힌 것도 둘다 존재함
뭐 말 했듯이 결국 '어느 한 쪽을 섣불리 택할 수 없다.' 라 말하고 싶어지네
옛날 사람들도 한가지면만 보고 고려하는게 아니라 개인의 생각과 당시 경제상황과 자신들의 상황에 고려해서 언급하는듯
유비가 촉을 오래다스린것도 아니고 정복자로 3년의전쟁끝에 성도에 입성했는데
겨우 직백전 제조로 경제 안정화라고 해주는 것은 너무 긍정적으로 봐주는거 같음
전근대에서 농업이 주요산업인데 고액권 만들어서 수개월만에 괸부의 부고가 가득찼다는게 주조차익으로 이득본거 말고 뭐라 하기 좋게 말해주긴 힘들다고 생각함.
일단 제시해준 기록을 봤는데 백성들이 부유해졌다라는 언급은 안보이는데
주조차익이라는게 옛날에는 필요하면 하는거라서
약간 팬심이 더해진거 같음
무릇 재화를 조종하는 권한은 국가에 있으니, 그 쓰임새에 따라 가치가 정해집니다. 거푸집으로 만들거나 닥나무를 재단하여 돈을 만들더라도 은(銀)과 포(布)도 함께 써야 하니, 하물며 크기가 조금 크거나 작은 동전이겠습니까. 옛날 유파(劉巴)가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한 것은 재화를 제어하는 권한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제갈량(諸葛亮)도 취하여 썼으니, 역사에서는 물가를 균평하게 하고 창고를 채웠다고 일컬었습니다
(중략)
만약 대전을 주조한다면 10년 안에 부유한 백성과 상인들이 숨겨 둔 저화와 쌓아 둔 돈꿰미들을 조정에서 굳이 명령을 내리고 법을 시행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거의 다 뽑아낼 것이고, 공사(公私)의 창고도 조금 넉넉해지는 방도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시대의 알맞음과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다시 고금에 교자무(交子務)를 운영했던 방법들을 고찰하거나 혹 요즘 중국에서 통행하는 동전의 예를 따라서 또 줄여 작게 한다면 나라는 이로움을 거둘 수 있고 백성들은 감히 권한을 훔치지 못할 것이니, 화폐를 유통하는 도리는 참으로 이와 같습니다.’
영조11년 12월 10일
고액권이라는게 서민들이 많이 쓰는 물건도 아니고
부유층이 제일 많이 쓸 물건이라서 유파의 정책을 칭찬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들이 쌓아 둔 돈을 뽑아낼 수 있다라고 언급함
주(周)나라에서 구부환법(九府圜法)을 시행할 때부터 자전(子錢)과 모전(母錢)을 서로 비교 평가하는 법이 생겼는데, 크기와 무게가 배나 되기 때문에 모전(母錢)이 되고, 가볍고 작음이 반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자전(子錢)이 되니, 큰 돈과 작은 돈을 아울러 시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뒤로부터 한(漢)나라의 8수(銖), 5수, 4수, 반냥의 돈이 한때에 통행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 변하기도 하였는데, 역대에서 이를 바탕으로 가감한 것이 일정하지 않아서, 하나가 천ㆍ백을 당하기도 하고 하나가 열을 당하거나 다섯을 당하기도 하였으니, 처음부터 융통성 없이 한 방법만을 고집하지 않은 것이 어찌 진실로 이것뿐이겠습니까? 천하 재화의 권한은 실로 임금에게 있기 때문에 때에 따라 알맞은 방법을 시행하고 경중을 참작하여, 오직 재물을 넉넉히 하여 나라가 풍족해지고 쓰기에 편리하여 백성을 편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한(漢)나라 소열(昭烈)이 처음 촉에 도읍을 정할 적에 재용(財用)의 부족을 근심하였는데, 유파(劉巴)가 일냥전(一兩錢)을 발행하자고 권하여 시행함으로써 수개월 사이에 부고(府庫)가 충만하였습니다. 한창 어려운 초창기에 또 이의 도움을 얻어 재용이 넉넉해졌는데, 더구나 지금과 같은 평상시에는 효과를 얻기가 더욱 쉽습니다.
대체로 큰 돈을 운영(運營)하는 데는 이로운 점이 세 가지가 있으니, 비용이 적게 들고 이익이 많이 나는 것이 하나이고, 운반하기에 간편한 것이 하나이고, 혼잡함이 적어서 오래도록 부스러기 돈이 되지 않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그러나 큰 돈 가운데에도 장단점을 논할 것이 있으니, 당오전(當五錢)은 손실이 적으나 남는 것이 박하고, 당백전(當百錢) 이상은 지나치게 무거우면서 남는 것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제오기(第五琦)가 비로소 당십전(當十錢)을 만들어서 편리하게 사용하였는데, 중곽전(重郭錢)을 더 만들어 당오십전(當五十錢)이 되면서부터 폐단이 비로소 많이 생겼으니, 당십전이 알맞게 절충되어 오래도록 후환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동(銅) 4전(錢)으로 1전(錢)을 주조하여 당십전(當十錢)으로 사용하되, 현재 쓰고 있는 작은 돈과 섞어서 쓰게 하면, 자모전이 경중의 적의(適宜)함을 얻어 매우 편리하게 유통될 것입니다. 더러 불편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는데, 그 설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 시작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하나는 많이 가진 자가 불어난다는 것이고, 하나는 위조하는 자가 일어나기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저폐(楮幣)를 쓰다가 면폐(綿幣)로 변하였고 면폐가 전폐(錢幣)로 변하였으니, 저폐ㆍ면폐ㆍ전폐가 어느 것인들 새로 만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요즘처럼 심하게 한 사람이 많이 가진 적도 없으니, 어찌 큰 돈을 사용하는 여부에 달려 있겠습니까? 위조가 가장 큰 걱정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은 중국과 같이 땅이 넓지 않아 숨어서 주조하기가 쉽지 않은데다가 부자들은 제 몸을 보호하여 형벌을 두려워하고,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만들 만한 자본이 없으며, 동(銅)은 생산되는 것이
“주화가 바닥났으니 더 주조해야 할 형편입니다만, 더 주조하는 일에는 물력(物力)을 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루에 열 개의 노(爐)를 두고 한다고 해도 아마 그 이익을 빨리 거두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선혜청은 재용(財用)이 바닥났습니다. 10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지급해야 할 비용만 계산해도 부족한 돈이 10만여 냥, 목(木)이 40여 동이나 됩니다. 공물(貢物)의 값을 채워 줄 수가 없어 공인(貢人)들이 밤낮없이 원망하는데, 비록 오늘부터 고주(鼓鑄)하더라도 내년 5월 안에는 그 부족한 액수를 지급해 주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공인들은 농토가 없고 오로지 호조와 선혜청만 바라보고 있는데, 만일 제때에 지급해 주지 못한다면 참으로 궁핍해지거나 무너져 버릴 염려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책이 없습니다. 그만둘 것이 아니라면, 호조에는 종이 뭉치〔紙地塊〕가 제법 많습니다. 옛날에는 저화가 매우 컸으나 지금은 한 장(張)을 나누어 열여섯 조각으로 만들어 전(錢)이나 냥(兩)으로 그 값을 매겼습니다. 《경국대전》을 보니 1품관의 급료가 저화 10장이라고 하였는데, 저화가 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가에서 제도를 명확하게 정해 경비로 댄다면 그 이로움이 매우 커서 거의 8, 9배나 될 것입니다. 칼로 재단하여 자르면 사용하기에 편하고 그 이익이 속히 퍼질 것이니, 동전을 주조하는 일에 비하면 이해(利害)가 쉽게 드러납니다. 다만 저화는 물에 젖으면 쉽게 못 쓰게 되고 불에 닿으면 쉽게 타므로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주화만은 못합니다. 장차 성행하게 된다면 닥〔楮〕이 귀해져서 오래 사용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급한 문제를 해결할 방도로는 저화만 한 게 없습니다.”
하고, 심수현이 아뢰기를,
“이 일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백성들이 아주 어리석다 해도 틀림없이 들어가는 숫자에 따라 그 가격을 정한다는 것을 알 텐데, 지금 1푼의 돈으로 종이 한 장을 사들여 열여섯 조각으로 나누어 1냥의 돈으로 매긴다면 공인들이 어찌 받기를 바랄 리가 있겠습니까. 돈을 주조하는 것은 이익은 적지만 그 수가 많으면 절로 이익이 있게 됩니다. 저화는 물력은 매우 적게 들지만 가치는 매우 무겁게 매겨지는 것이니, 민간에서 어찌 명령을 따르려 하겠습니까. 민속이 순박할 때도 오히려 쉽게 시행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야박한 백성들이 아닙니까.”
하였다. 조태억이 아뢰기를,
“주화는 배가 고파도 먹을 수가 없고 추워도 입을 수가 없는 것인데도 어리석은 백성들이 다투어 귀하게 여깁니다. 화폐를 만드는 권리를 어찌 물력이 많이 드느냐 적게 드느냐 하는 걸로 따질 수 있겠습니까. 한 무제(漢武帝)가 함부로 전쟁을 일으켜 병력을 남용하여 세상의 재화가 고갈되자 마침내 백록비폐(白鹿皮幣)를 만들어 그 값을 황금 40만으로 매겼습니다. 화폐에 어찌 늘 같은 값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국가에서 제도를 정하여 귀하게 하거나 천하게 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지금 만약 주화를 없애고
조선후기 화폐관련이야기를 하자면 외국 문물의 유입과 상업을 발달로 인해 서서히 상평통보 같은 소액전으로는 더 이상 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화폐가 귀해지는 현상이 생기게 되고 정부가 이를 대처하기 위해 고액권을 발권함
좋게 풀리지는 않았지만 당시 상황이라 결국 고액권자체는 필요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음
삼국지 시대 고액권 발행은 궤가 많이 다르지만
어쨌건 지나치게 떨어진 화폐가치에 일어난 초인플레이션을 바로잡기 위해 양질의 고액권을 내놓았다고 봐도 좋을듯
사실 조선시대 사람들도 그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해서 삼국지 시대의 고액권 발행 이유를 제대로 짐작하진 못하고 자기내 시대에 끼어맞추는 식의 언급을 하고 있음
천하 재화의 권한은 실로 임금에게 있기 때문에 때에 따라 알맞은 방법을 시행하고 경중을 참작하여, 오직 재물을 넉넉히 하여 나라가 풍족해지고 쓰기에 편리하여 백성을 편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한(漢)나라 소열(昭烈)이 처음 촉에 도읍을 정할 적에 재용(財用)의 부족을 근심하였는데, 유파(劉巴)가 일냥전(一兩錢)을 발행하자고 권하여 시행함으로써 수개월 사이에 부고(府庫)가 충만하였습니다. 한창 어려운 초창기에 또 이의 도움을 얻어 재용이 넉넉해졌는데, 더구나 지금과 같은 평상시에는 효과를 얻기가 더욱 쉽습니다.
일단 여기서 보면 필요해서 이의 도움을 얻었다고 인식했고 여러가지 봤을 때 유파의 화폐개혁이 필요할때 화폐개혁해서 이익을 얻었다 이런 인식같음
수개월이면 그시대치고는 지나치게 빠름
상황보면 아직 전후 안정화도 제대로 되지도 않았는데 수개월만에 관부가 튼실해진다?
그게 과장이라 쳐서 1~2년이라도 해도
관부가 특실해질려면 세금을 거두어야
관부가 채워지는건데 단기간에 세금을 엄청 뜯었거나
직백전으로 시뇨리지 얻은거 아니겠음?
그리고 양질의 고액권이라는 것도 실제 동전이 가지는 가치와 명목상 가치가 그렇게 동 떨어지지 않아야 양화지
범죄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부분이 배제되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과 별개로, 애초에 반대측이 서현이 사라진 자리를 독점하고 통제했다는 주장도 잘못됨. 마음에 안들 것이라 생각되는 촉한멸망전 항목을 보더라도 나름의 토론이 이루어지고 합의사항이 마련되었음. 조비 항목 같은 경우에는 긍정적 평가 부분을 반달리즘으로 삭제했다가 작성자가 토론을 걸고 상대가 거기에 불응하면서 마무리됐고. 서현이 여기서도 까인 건 아이디를 수십개씩 파면서 달라붙는 모습이 누가 봐도 혐오스러웠기 떄문인 거지 그 수많은 아이디들이 다 다른 사람이고 촉빠 의견을 가진 집단지성이었다면 굳이 까이거나 저격당하지도 않았을 거임.
서현이 쫓겨난 건 개인연구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남이 쓴 글 무단으로 복붙하고 자기 입맛대로 고쳐썼기 때문임.
배경 마침내 성도가 함락되자 장수와 병사들은 다 창과 방패를 내던지고 성 내의 여러 창고로 달려가 경쟁적으로 보물을 취했다. 창고가 다 약탈되어 군용물품이 부족하게 되자 유비가 심히 우려했다. 유파가 말했다. 군용물품이 부족해서지 딱히 민생 챙긴거 아님 결말 유비가 이를 따르자 수개월 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수개월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민생?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지 직백전 기록이거말고 더 있던가?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면 기록이라도 더 있었야 할텐데
물가의 안정은 부가적인 효과고 주된 목적은 군용물품 충당인데 약간 핀트를 잘못 잡으신듯
손권 한무제는 뭐임?? 전혀 칭찬이 아닌거같은데
이궁의 변때 육손이 전종의 아들이 자꾸 손패한테 빌붙으니까 전종에게 김일제의 일을 본받으라고 한거 전종한테 심한 말은 될 수 있을진 몰라도 '전종한테 김일제를 본받으라고 했으니 손권을 김일제 당시의 황제였던 한무제에 비교한거다! 선 넘었다!' 라는 해괴한 내용이 있었음
공허한 주장이네 ㅋㅋ
본래 삼국지 팬덤 싸움은 '한 쪽만 억울하다.'는 소리같은건 들으면 안 됨 걍 똑같은 짓 반복하면서 싸이클 도는 판이라... 나도 거기에서 못벗어나는 기분도 있고
한무제 드립은 ㅈㄴ 뇌절 ㅋㅋㅋㅋㅋㅋ
유파의 화폐개혁은 배경과 결말을 생각하면 주조차익이 목적아니고서는 설명하기 힘들어서
루리웹-6278762111
배경 마침내 성도가 함락되자 장수와 병사들은 다 창과 방패를 내던지고 성 내의 여러 창고로 달려가 경쟁적으로 보물을 취했다. 창고가 다 약탈되어 군용물품이 부족하게 되자 유비가 심히 우려했다. 유파가 말했다. 군용물품이 부족해서지 딱히 민생 챙긴거 아님 결말 유비가 이를 따르자 수개월 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수개월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 민생?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지 직백전 기록이거말고 더 있던가?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면 기록이라도 더 있었야 할텐데
결말도 본인들 원하는 결과만 봤다고 할 수 있고 (촉한 쇠퇴기에 화폐품질이 저화됬다는 걸 근거로함) +(촉한의 화폐가 타국에서 발견되는 것 또한 그저 화폐가치가 있었기때문이라며 한쪽의 주장만 말함) 배경도 본인들 원하는 부분만 쏙 뺐다고 할 수 있음 (동탁이 화폐가치를 똥값으로 만들어서 새롭게 안정젇인 화폐를 만들 이유가 있었음에도 동탁이랑 같은 일한거라며[있는 동전 쪼개서 일부러 악화 만드거랑 새로 동전 만든거랑 뭐가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됬던 같은 짓이라고 함]깜) 당연 할수 있는 주장이고 나올수 있는 말이긴 한데 정설로 취급하고 딱 박아둘건 아니지? 그래서 내가 이건은 딱히 어느 쪽이 맞다고 안함
목적부터 군용물품이 부족하게 된거 보충할 목적이라고 사서에 기재되어 있고 결말도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인데 기록대로라면 정설이 아니라고 할려면 다른 기록이라도 제시해야한다고 생각함 비슷한 짓거리한 손오도 화폐 폐지했는데
물가 평정, 안정화 이야기는 적혀있는지라 이상할 건 없음 촉한이 자급자족보단 수출로 벌어먹을만한 곳이기도 하고
그냥 손오랑 조위가 실패했다고 보면 그만인 이야기잖아 오히려 그 두나라가 실패했으니 촉한도 당연히 실패했다는 기정사실 깔고 들어가며 폄하하는 거 아니냐고 말 나올수도 있는건데 말야
진리는 라면
물가의 안정은 부가적인 효과고 주된 목적은 군용물품 충당인데 약간 핀트를 잘못 잡으신듯
직백전같은 화폐를 발행해서 경제안정화한 사례를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화폐로 물가를 안정화 시키는 것 부터가 동탁의 오수전 발행이랑은 비교 안되는거 아닌가?
님은 직백전의 목적이 주조차익이 아니고 경제 안정화라라는데 직백전같은 화폐를 찍어서 수개월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지고 경제안정화가 되었다는 사례를 제시해주세요
나도 이 쪽 계열은 공부해본건 아니라 사례로 대답하는 건 힘들긴 해 다만 주조차익에 대한 주장에 반박정도는 할 수 있는 정도고
화폐로 관부가 수개월만에 충실해진다는게 주조차익 말고 사례를 제시해주세요. 기록을 신뢰한다면 목적부터 결말까지 화폐로 착취말고 생각하기 힘든데
기록만 신뢰하는 건 아니잖아? 타국에서 화폐가 발견됬다는 점도 이유로 들고 그것얘기하면 '화폐자체가 가치가 있어서' 라는 개인판단일 뿐이고 애초에 동탁이랑 동 케이스라고 주장 하기에도 배경도, 방법도 다르다고 반박했고 당백전 이야기나오길레 그건 또 디플레이션 상황이라 또 다르다고 반박을 했음 사례에 있어서 아무래도 화폐개혁자체가 성공하기 힘든 사례 그 자체다 보니 이 쪽에 깊게 파보지 않은 나로선 가져오기 힘들긴 함
다만 한가지 말하자면 손오나 조위나 촉한이나 결국 시행했던 화폐개혁의 틀은 비슷하다는거 적어도 매우 질이 낮아진 동탁의 오수전을 바로잡을 화폐를 발행했음이 보임 세 나라가 갑자기 수탈할 이유가 없다고 보기도 하고 시행한 정책이 비슷하다면 과거의 폐단을 바로잡을 방법은 전부 똑같이 구상 한것으로 보임 하지만 조위나 손오의 환경엔 딱히 알맞지 않았고 촉에는 그게 맞았다고 생각
직백전 관련 기록이 영릉선현전에 기록된거 말고 없는데 여기서 목적자체가 군용물품을 보충할려고 만든거라고 나왔는데 직백전 만들어서 수개월만에 관부의 부고가 충실해졌다인데 주목적이 주조차익말고 순전히 민간경제 안정화로 수개월만에 안정화된거라면 그런 대단한 물건의 기록이 이정도고 다른나라가 모방이라도 안할이유가 있나? 영릉선현전 기록을 부정하면 모르겠지만 영릉선현전 기록만 보면 주조차익 목적이 너무 선명한데
? 모방안하고 자시고 비슷하게 고액권 발행했잖아? 그냥 성공과 실패의 차이일 뿐이라 생각하는데
아니 그렇게 대단한 성공사례면 무슨무슨사례를 따라서 모방이라도 하자 이런 기록이라도 있어야 아닌지? 영릉선현전 기록대로라면 수개월만에 관부가 충실해진 대단한 경제정책인데 그게 아주 긍정적이었으면 다른시대의 다른군벌들이 유파의 사례를 응용해서 직백전같은 화폐를 발행하자 이런것은 있어야죠
경제모델이란게 각국에 전부 일정하게 적용되는게 아니니까 조위만 보더라도 사람들이 그냥 물물교환이 더 좋다고 촉한보다 화폐가치가 더 좋은데도 안씀 유파가 한게 엄청 특별한게 아닐 수 있음 당시 촉한의 환경에 적절했던 거거나
조원명이 아뢰기를, “처음엔 4문이 1푼이었다가 그 뒤엔 2문이 1푼이었는데도 이로움이 없었으므로 그대로 대전을 통행하여 이제까지 쓰고 소전은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이로 보더라도 대전을 통행한다면 소전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전화(錢貨)의 법은 가치가 알맞으면 나라와 백성들 모두에게 이로우나, 너무 흔하거나 비싸면 백성들이 불편하게 됩니다. 유파의 법 같은 경우는 실로 백성들을 속여 나라를 부유하게 한 술수이니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이정제가 아뢰기를, “유장(劉璋) 때엔 화폐 제조의 권한이 백성에게 있었으므로 유파가 당백전을 통행하게 하여 권한을 거두었으니, 선유가 인력(人力)으로 조화(造化)를 뺏었다고 한 말이 옳습니다. 손권의 당천전 같은 경우는 액수가 너무 높다고 할 수 있으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였다. 조원명이 아뢰기를, “대전은 한때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술수이니 오래가지 못하고, 나중에 폐단이 생긴다면 또 소전을 다시 쓸 것입니다. 지금은 소전을 대전으로 바꾸므로 이문이 남겠지만 다시 소전을 주조할 때에는 줄어들어 모자라는 비용이 필시 반은 넘을 테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손실이 어찌 작겠습니까. 이는 우려해야 할 바입니다.” 승정원일기 영조11년12월10일 https://sjw.history.go.kr/id/SJW-F11120100-02200 조원명같은 사람은 유파가 사람을 속였고 오래갈 정책이 아니라고 비판했는데 유파의 경제정책을 백성들한테 좋았다 이런기록을 가지고 오시면 좋겠습니더.
https://db.itkc.or.kr/search/group?q=query%E2%80%A0%E5%8A%89%E5%B7%B4 덕분에 재밌는 기록을 보고왔어 고마워 이것 때문에 역시 좀 더 다양한 관점을 가지게 됬음 기록을 보아하니 우리가 말하는 거랑 별로 다를게 없더라 누구는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서 누구는 당시 시장경제에 알맞는 화폐로서 긍정적으로 적힌 것도 있고 부정적으로 적힌 것도 둘다 존재함 뭐 말 했듯이 결국 '어느 한 쪽을 섣불리 택할 수 없다.' 라 말하고 싶어지네 옛날 사람들도 한가지면만 보고 고려하는게 아니라 개인의 생각과 당시 경제상황과 자신들의 상황에 고려해서 언급하는듯
대표적으로 순간적인 이익을 언급한 것도 있고 공급할 동전이 부족하거나 상업의 발달로 인해 고액권이 필요할 때 예시로 언급됨 당시 시대에 고려해서 언급되는게 재밌음
여하튼 결국 화폐를 이야기 하려면 당시 시대와 해당 국가의 시장경제를 잘 알아야한다는 생각임
유비가 촉을 오래다스린것도 아니고 정복자로 3년의전쟁끝에 성도에 입성했는데 겨우 직백전 제조로 경제 안정화라고 해주는 것은 너무 긍정적으로 봐주는거 같음 전근대에서 농업이 주요산업인데 고액권 만들어서 수개월만에 괸부의 부고가 가득찼다는게 주조차익으로 이득본거 말고 뭐라 하기 좋게 말해주긴 힘들다고 생각함. 일단 제시해준 기록을 봤는데 백성들이 부유해졌다라는 언급은 안보이는데 주조차익이라는게 옛날에는 필요하면 하는거라서 약간 팬심이 더해진거 같음
무릇 재화를 조종하는 권한은 국가에 있으니, 그 쓰임새에 따라 가치가 정해집니다. 거푸집으로 만들거나 닥나무를 재단하여 돈을 만들더라도 은(銀)과 포(布)도 함께 써야 하니, 하물며 크기가 조금 크거나 작은 동전이겠습니까. 옛날 유파(劉巴)가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한 것은 재화를 제어하는 권한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제갈량(諸葛亮)도 취하여 썼으니, 역사에서는 물가를 균평하게 하고 창고를 채웠다고 일컬었습니다 (중략) 만약 대전을 주조한다면 10년 안에 부유한 백성과 상인들이 숨겨 둔 저화와 쌓아 둔 돈꿰미들을 조정에서 굳이 명령을 내리고 법을 시행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거의 다 뽑아낼 것이고, 공사(公私)의 창고도 조금 넉넉해지는 방도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시대의 알맞음과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고 다시 고금에 교자무(交子務)를 운영했던 방법들을 고찰하거나 혹 요즘 중국에서 통행하는 동전의 예를 따라서 또 줄여 작게 한다면 나라는 이로움을 거둘 수 있고 백성들은 감히 권한을 훔치지 못할 것이니, 화폐를 유통하는 도리는 참으로 이와 같습니다.’ 영조11년 12월 10일 고액권이라는게 서민들이 많이 쓰는 물건도 아니고 부유층이 제일 많이 쓸 물건이라서 유파의 정책을 칭찬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들이 쌓아 둔 돈을 뽑아낼 수 있다라고 언급함
주(周)나라에서 구부환법(九府圜法)을 시행할 때부터 자전(子錢)과 모전(母錢)을 서로 비교 평가하는 법이 생겼는데, 크기와 무게가 배나 되기 때문에 모전(母錢)이 되고, 가볍고 작음이 반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자전(子錢)이 되니, 큰 돈과 작은 돈을 아울러 시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뒤로부터 한(漢)나라의 8수(銖), 5수, 4수, 반냥의 돈이 한때에 통행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 변하기도 하였는데, 역대에서 이를 바탕으로 가감한 것이 일정하지 않아서, 하나가 천ㆍ백을 당하기도 하고 하나가 열을 당하거나 다섯을 당하기도 하였으니, 처음부터 융통성 없이 한 방법만을 고집하지 않은 것이 어찌 진실로 이것뿐이겠습니까? 천하 재화의 권한은 실로 임금에게 있기 때문에 때에 따라 알맞은 방법을 시행하고 경중을 참작하여, 오직 재물을 넉넉히 하여 나라가 풍족해지고 쓰기에 편리하여 백성을 편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한(漢)나라 소열(昭烈)이 처음 촉에 도읍을 정할 적에 재용(財用)의 부족을 근심하였는데, 유파(劉巴)가 일냥전(一兩錢)을 발행하자고 권하여 시행함으로써 수개월 사이에 부고(府庫)가 충만하였습니다. 한창 어려운 초창기에 또 이의 도움을 얻어 재용이 넉넉해졌는데, 더구나 지금과 같은 평상시에는 효과를 얻기가 더욱 쉽습니다. 대체로 큰 돈을 운영(運營)하는 데는 이로운 점이 세 가지가 있으니, 비용이 적게 들고 이익이 많이 나는 것이 하나이고, 운반하기에 간편한 것이 하나이고, 혼잡함이 적어서 오래도록 부스러기 돈이 되지 않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그러나 큰 돈 가운데에도 장단점을 논할 것이 있으니, 당오전(當五錢)은 손실이 적으나 남는 것이 박하고, 당백전(當百錢) 이상은 지나치게 무거우면서 남는 것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제오기(第五琦)가 비로소 당십전(當十錢)을 만들어서 편리하게 사용하였는데, 중곽전(重郭錢)을 더 만들어 당오십전(當五十錢)이 되면서부터 폐단이 비로소 많이 생겼으니, 당십전이 알맞게 절충되어 오래도록 후환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동(銅) 4전(錢)으로 1전(錢)을 주조하여 당십전(當十錢)으로 사용하되, 현재 쓰고 있는 작은 돈과 섞어서 쓰게 하면, 자모전이 경중의 적의(適宜)함을 얻어 매우 편리하게 유통될 것입니다. 더러 불편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는데, 그 설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 시작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하나는 많이 가진 자가 불어난다는 것이고, 하나는 위조하는 자가 일어나기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저폐(楮幣)를 쓰다가 면폐(綿幣)로 변하였고 면폐가 전폐(錢幣)로 변하였으니, 저폐ㆍ면폐ㆍ전폐가 어느 것인들 새로 만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요즘처럼 심하게 한 사람이 많이 가진 적도 없으니, 어찌 큰 돈을 사용하는 여부에 달려 있겠습니까? 위조가 가장 큰 걱정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은 중국과 같이 땅이 넓지 않아 숨어서 주조하기가 쉽지 않은데다가 부자들은 제 몸을 보호하여 형벌을 두려워하고,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만들 만한 자본이 없으며, 동(銅)은 생산되는 것이
“주화가 바닥났으니 더 주조해야 할 형편입니다만, 더 주조하는 일에는 물력(物力)을 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루에 열 개의 노(爐)를 두고 한다고 해도 아마 그 이익을 빨리 거두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선혜청은 재용(財用)이 바닥났습니다. 10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지급해야 할 비용만 계산해도 부족한 돈이 10만여 냥, 목(木)이 40여 동이나 됩니다. 공물(貢物)의 값을 채워 줄 수가 없어 공인(貢人)들이 밤낮없이 원망하는데, 비록 오늘부터 고주(鼓鑄)하더라도 내년 5월 안에는 그 부족한 액수를 지급해 주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공인들은 농토가 없고 오로지 호조와 선혜청만 바라보고 있는데, 만일 제때에 지급해 주지 못한다면 참으로 궁핍해지거나 무너져 버릴 염려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책이 없습니다. 그만둘 것이 아니라면, 호조에는 종이 뭉치〔紙地塊〕가 제법 많습니다. 옛날에는 저화가 매우 컸으나 지금은 한 장(張)을 나누어 열여섯 조각으로 만들어 전(錢)이나 냥(兩)으로 그 값을 매겼습니다. 《경국대전》을 보니 1품관의 급료가 저화 10장이라고 하였는데, 저화가 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가에서 제도를 명확하게 정해 경비로 댄다면 그 이로움이 매우 커서 거의 8, 9배나 될 것입니다. 칼로 재단하여 자르면 사용하기에 편하고 그 이익이 속히 퍼질 것이니, 동전을 주조하는 일에 비하면 이해(利害)가 쉽게 드러납니다. 다만 저화는 물에 젖으면 쉽게 못 쓰게 되고 불에 닿으면 쉽게 타므로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주화만은 못합니다. 장차 성행하게 된다면 닥〔楮〕이 귀해져서 오래 사용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급한 문제를 해결할 방도로는 저화만 한 게 없습니다.” 하고, 심수현이 아뢰기를, “이 일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백성들이 아주 어리석다 해도 틀림없이 들어가는 숫자에 따라 그 가격을 정한다는 것을 알 텐데, 지금 1푼의 돈으로 종이 한 장을 사들여 열여섯 조각으로 나누어 1냥의 돈으로 매긴다면 공인들이 어찌 받기를 바랄 리가 있겠습니까. 돈을 주조하는 것은 이익은 적지만 그 수가 많으면 절로 이익이 있게 됩니다. 저화는 물력은 매우 적게 들지만 가치는 매우 무겁게 매겨지는 것이니, 민간에서 어찌 명령을 따르려 하겠습니까. 민속이 순박할 때도 오히려 쉽게 시행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야박한 백성들이 아닙니까.” 하였다. 조태억이 아뢰기를, “주화는 배가 고파도 먹을 수가 없고 추워도 입을 수가 없는 것인데도 어리석은 백성들이 다투어 귀하게 여깁니다. 화폐를 만드는 권리를 어찌 물력이 많이 드느냐 적게 드느냐 하는 걸로 따질 수 있겠습니까. 한 무제(漢武帝)가 함부로 전쟁을 일으켜 병력을 남용하여 세상의 재화가 고갈되자 마침내 백록비폐(白鹿皮幣)를 만들어 그 값을 황금 40만으로 매겼습니다. 화폐에 어찌 늘 같은 값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국가에서 제도를 정하여 귀하게 하거나 천하게 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지금 만약 주화를 없애고
조선후기 화폐관련이야기를 하자면 외국 문물의 유입과 상업을 발달로 인해 서서히 상평통보 같은 소액전으로는 더 이상 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화폐가 귀해지는 현상이 생기게 되고 정부가 이를 대처하기 위해 고액권을 발권함 좋게 풀리지는 않았지만 당시 상황이라 결국 고액권자체는 필요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음 삼국지 시대 고액권 발행은 궤가 많이 다르지만 어쨌건 지나치게 떨어진 화폐가치에 일어난 초인플레이션을 바로잡기 위해 양질의 고액권을 내놓았다고 봐도 좋을듯 사실 조선시대 사람들도 그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해서 삼국지 시대의 고액권 발행 이유를 제대로 짐작하진 못하고 자기내 시대에 끼어맞추는 식의 언급을 하고 있음
아, 실제로 중국 웹커뮤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중에 유비는 징발이었지만 제갈량에서 부터 시장경제을 활성화 시켰다는 말도 있음 ㅇㅇ 단기간에 부고가 채웠졌다는게 솔직히 미심쩍다고 볼 수있긴 하지.
천하 재화의 권한은 실로 임금에게 있기 때문에 때에 따라 알맞은 방법을 시행하고 경중을 참작하여, 오직 재물을 넉넉히 하여 나라가 풍족해지고 쓰기에 편리하여 백성을 편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한(漢)나라 소열(昭烈)이 처음 촉에 도읍을 정할 적에 재용(財用)의 부족을 근심하였는데, 유파(劉巴)가 일냥전(一兩錢)을 발행하자고 권하여 시행함으로써 수개월 사이에 부고(府庫)가 충만하였습니다. 한창 어려운 초창기에 또 이의 도움을 얻어 재용이 넉넉해졌는데, 더구나 지금과 같은 평상시에는 효과를 얻기가 더욱 쉽습니다. 일단 여기서 보면 필요해서 이의 도움을 얻었다고 인식했고 여러가지 봤을 때 유파의 화폐개혁이 필요할때 화폐개혁해서 이익을 얻었다 이런 인식같음 수개월이면 그시대치고는 지나치게 빠름 상황보면 아직 전후 안정화도 제대로 되지도 않았는데 수개월만에 관부가 튼실해진다? 그게 과장이라 쳐서 1~2년이라도 해도 관부가 특실해질려면 세금을 거두어야 관부가 채워지는건데 단기간에 세금을 엄청 뜯었거나 직백전으로 시뇨리지 얻은거 아니겠음? 그리고 양질의 고액권이라는 것도 실제 동전이 가지는 가치와 명목상 가치가 그렇게 동 떨어지지 않아야 양화지
서현이 쫓겨난 건 개인연구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남이 쓴 글 무단으로 복붙하고 자기 입맛대로 고쳐썼기 때문임.
하지만 맥락은 같음, 멋대로 개인입맛이 잔뜩 들어간 정보통제 둘 다 호감사기 힘든 행위임
작성자의 해석은 삼국지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항목에 다 들어감. 마음에 안들면 가서 토론 걸고 바꾸면 됨. 서현의 문제는 기초 룰을 다 씹어먹었다는 거고, 아예 토론과 수정에 낄 기본적인 자격 자체가 없었다는 거임.
본인이 느끼기에 편향된 것과 그 판에서 '범죄'로 규정될만한 행위를 저지른 걸 동일선상에 넣는 건 한쪽에 옹호적이기까지 한 거라고 봄.
당장 여기서 나오는 말인 '한 항목을 여러명이 붙잡고 있으면 못바꾼다' 는 말 부터 태클 걸어야지 애초에 여기에서 그 양반 까는 것도 그런 시스템을 무시한게 아니라 한명의 사견이 위키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니까 까이는 거임
미안한데 애초에 여기서 그러한 위키입장을 대변삼아서 그 사람을 깐게 아니라 문제
솔까 여기 사람들이 '위키 시스템을 무시했다' 를 들고 까는 거겠어 아니면 '특정 팬덤이 항목을 독점하고 기록을 통제했다' 고 까는 거겠어? 사람들이 무엇을 문제삼고 까는지 알고 거기에 맞춰서 말한 것 뿐임
범죄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부분이 배제되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과 별개로, 애초에 반대측이 서현이 사라진 자리를 독점하고 통제했다는 주장도 잘못됨. 마음에 안들 것이라 생각되는 촉한멸망전 항목을 보더라도 나름의 토론이 이루어지고 합의사항이 마련되었음. 조비 항목 같은 경우에는 긍정적 평가 부분을 반달리즘으로 삭제했다가 작성자가 토론을 걸고 상대가 거기에 불응하면서 마무리됐고. 서현이 여기서도 까인 건 아이디를 수십개씩 파면서 달라붙는 모습이 누가 봐도 혐오스러웠기 떄문인 거지 그 수많은 아이디들이 다 다른 사람이고 촉빠 의견을 가진 집단지성이었다면 굳이 까이거나 저격당하지도 않았을 거임.
그러니까 그 토론시스템도 여기서 까이는 시스템이자 항목독점의 한가지로 손 꼽히는 시스템인건 아냐고... 까말 화폐관련해선 연구했다손 치더라도 한무제 손권 드립은 그러한 체계에서 굴러가니 안전하다- 라는 주장에 물음표를 찍는 문장임
한 세력이 독점하고 있다길래 토론 시스템이 괜찮게 작동한 예시를 들었는데 토론 시스템이 마음에 안든다면 뭘 어떻게 해야한다는 거임? 주관 자체를 없애야한다는 거면 나무위키의 문서 90퍼 이상은 날아가야 할걸.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적어도 비판을 듣기 싫다면 좀 더 설득력 있는 정보를 적어야겠지 결국 사람들이 눈 찌푸리는 제1 순위는 개인의 억측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