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 (승)
영제(靈帝:168-189) 말, 황건(黃巾)이 봉기하자 주군(州郡)에서 각각 의병(義兵)을 일으켰는데,
선주는 그 부속들을 이끌고 교위 추정(鄒靖)을 좇아 황건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안희위(安喜尉-중산국 안희현의 현위)에 제수되었다.
vs 장순 (패)
평원 사람인 유자평(劉子平)은 유비가 무용(武勇)이 있음을 알았다.
이때 장순(張純)이 반란을 일으키자 청주에서 (토벌하라는) 조서를 받게 되었다.
종사(從事-주목이나 군수의 속관)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장순을 토벌하게 했는데,
평원을 지나다 유자평이 유비를 추천하니 이에 함께 뒤따르게 되었다.
들판에서 적을 만났는데, 유비가 상처를 입어 죽은 척 하자 적들이 뒤쪽으로 떠났고 이 때문에 그를 수레에 태워 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유비는 독우가 전사(傳舍-객사)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만날 것을 청했으나 독우는 병을 칭하며 만나려 하지 않았다.
유비는 이를 한스럽게 여겨 치소로 되돌아가서는, 다시 이졸(吏卒)을 거느리고 전사(傳舍)로 와서 문 안으로 뛰어들며 말했다,
“나는 부군(府君-태수)의 밀교를 받아 독우를 체포하러 왔다.”
이에 상(床-좌탑)을 가져와 그를 묶고는 (현의) 경계까지 끌고 갔다.
스스로 인끈을 풀어 독우의 목에 걸고, 그를 나무에 묶어놓고 백여 대를 매질해 죽이려 했는데, 독우가 애걸하자 그를 풀어주고 떠났다.
하비 교전 (황건적)
얼마 후 대장군 하진(何進)이 도위(都尉) 관구의(毌丘毅)를 보내 단양(丹楊)으로 가서 모병하게 했다.
선주가 그와 함께 행동하다가 하비(下邳)에 이르러 적(賊)을 만났는데,
힘써 싸워 공을 세우고 하밀승(下密丞-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다.
황건적? 동탁? (패)
적(賊)에게 격파되자 중랑장 공손찬에게로 달아났다.
vs 유평의 객 (부전승)
군민(郡民)인 유평(劉平)이 평소 선주를 깔보며 그 아래에 있음을 수치스러워 하여, 객(客-문객, 노객)을 보내 선주를 찔러 죽이게 했다.
객(客)이 차마 찌르지 못하고 그 일을 털어놓고 떠나니, 그가 인심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북해 전투 (관해)
“자慈는 동래東萊의 비인鄙人으로 공북해孔北海와는 친하기로(親) 골육(骨肉,부자형제간)도 아니고 가깝기로(比) 향당(鄉黨,같은 향리사람)도 아니고 다만 명분과 뜻(名志)으로써 좋아하며 재앙을 나누고 근심을 함께하는 의리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 관해管亥가 난폭하게 난을 일으켜 북해北海가 포위당하니 외롭고 곤궁한 처지임에도 구원이 없어 위험이 아침저녁에 달려있습니다.(危在旦夕) 그대(君)에게 인의仁義의 명성이 있어 능히 남의 위급을 구원할 수 있다 여기므로
북해北海에서 간절히 목을 빼고 믿고 의존하여 자慈로 하여금 번쩍이는 칼날을 무릅쓰고 두터운 위圍를 돌파해 만번 죽을 위험한 길을 따라
그대에게 부탁하게 했으니 이는 오직 그대만이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비가 검용(斂容,웃음기를 거두고 엄숙한 태도를 취함)하고 대답했다,
“공북해孔北海가 세상에 유비劉備가 있음을 알아주시는구려!”
곧 정병精兵 3천명을 보내 태사자를 뒤따르게 했다.
적賊이 (구원)병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고 흩어져 달아났다.
-태사자 전
평원 전투 (원소, 조조)
원술이 원소와 서로 틈이 벌어지자 공손찬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손찬은 유비를 고당(高唐-청주 평원군 고당현)에, 선경(單經)을 평원(平原-평원군 평원현)에,
도겸을 발간(發幹-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하게 하여 원소를 핍박했다.
태조가 원소와 만나 이를 공격해 모두 격파했다.
-무제기
담현 전투 (조조)
여름, 순욱(荀彧), 정욱(程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도겸을 정벌하여 다섯 성(城)을 함락시키니
공략한 땅이 동해(東海-서주 동해군)에까지 이르렀다.
돌아오는 길에 담(郯-동해군 담현)을 지나는데 도겸의 장수 조표(曹豹)가 유비와 함께 담(郯) 동쪽에서 태조를 요격했다.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분(襄賁-동해군 양분현)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지나는 길에 잔륙(殘戮-살륙)한 곳이 많았다.
-무제기
광릉 전투 (원술)
여포는 하비를 차지하고 장비는 패주(敗走-패해서 달아남)했다.
유비가 이 일을 듣고 군을 이끌고 되돌아왔는데, 하비에 도착하자 군사들이 궤주했다.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어 동쪽으로 가서 광릉(廣陵)을 차지하고 원술과 싸웠으나 또 패했다.
vs 양봉, 한섬 (승)
양봉(楊奉), 한섬(韓暹)은 서주(徐州), 양주(揚州) 사이에서 도적질했는데, 선주가 이를 격퇴하고 모두 참수했다.
-선주전
[영웅기] – 유비는 양봉(楊奉)을 유인해 서로 만난 뒤 그 자리에서 그를 붙잡았다.
한섬(韓暹)은 양봉을 잃고 세력이 외로워지니 이때 달아나 병주로 되돌아가려 하다
서추(杼秋-예주 패국 서추현)의 둔수(屯帥) 장선(張宣)에게 요격되어 죽임을 당했다.
소패 전투 (여포)
선주는 소패(小沛)로 돌아와 다시 군사를 합쳐 만여 명을 얻었다.
여포가 이를 꺼려 친히 출병해 선주를 공격했고 선주는 패주해 조공(曹公-조조)에게 귀부했다.
패성 전투 (고순, 장료)
여포가 다시 원술을 위해 고순(高順)을 시켜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공이 하후돈(夏侯惇)을 보내 유비를 구원하게 했으나 불리했고,
유비는 고순에게 패했다.
-무제기
[영웅기] – 건안 3년(198년) 봄, 여포는 사람을 시켜 금을 지니고 하내(河內-사례 하내군)로 가서 말을 사오게 했는데, 유비의 군사들에게 약탈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여포는 중랑장(中郎將) 고순(高順), 북지태수(北地太守) 장료(張遼) 등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다.
9월, 마침내 패성(沛城)을 격파하자 유비는 홀몸으로 달아났고, (고순 등은) 그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vs 차주 (승)
선주가 하비를 점거하고, 주령 등은 되돌아왔다.
이에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고, 관우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왔다.
vs 유대, 왕충 (승)
조공이 유대(劉岱), 왕충(王忠)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헌제춘추] - 유비가 유대 등에게 말했다,
“설령 너희 같은 자 백 명이 온다 한들 나를 어찌 대적하겠느냐. 조공(曹公)이 직접 온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소패 전투 (조조)
건안 5년(200년), 조공이 동쪽으로 선주를 정벌하자 선주가 패적(敗績-대패)했다.
연진 전투 (조조)
원소의 기장(騎將) 문추(文醜)는 유비와 함께 5-6천 기를 이끌고 앞뒤로 이르렀다. 제장들이 다시 말하길,
“말에 올라야 합니다.”
고 하자 공은
“아직 아니오.”
라 했다. 얼마 후 기병이 점차 많아지고 혹 나뉘어져 치중으로 향했다. 공이 말했다,
“이제 되었소.”
이에 모두 말에 올라탔다. 이때 기병이 6백을 채우지 못했으나 마침내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 원소군을 대파하고 문추를 참수했다.
안량, 문추는 원소의 명장이었으나 두 번 싸워 모두 죽임을 당하니 원소군이 크게 진동했다.
-무제기
여남 전투 (조인)
태조는 원소(袁紹)와 더불어 관도에서 서로 오랫동안 대치했는데,
원소가 유비(劉備)를 보내 은강(濦彊-예주 여남군 은강현) 등 여러 현을 돌며 많은 무리를 일으켜 호응하게 했다.
허현 남쪽에서 관원과 백성들이 안정되지 못하자 태조가 이를 근심했다.
조인이 말했다,
“남방 사람들은 대군(大軍)이 바야흐로 (원소와 대치하느라) 목전이 급박하므로 그 사세상 구원해줄 수 없으리라 여기는 터에 유비가 강병(彊兵)으로 당도하니 그들이 배반한 것은 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유비가 새로 원소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어 그들을 능히 부릴 수 없을 것이니 공격하면 무찌를 수 있습니다.”
태조가 그 말을 옳게 여기고는 (조인에게) 기병을 거느리고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조인은 이를 패주시키고 모반한 현을 모두 다시 수습하고 돌아왔다.
-조인전
여남의 항복한 적 유벽(劉辟) 등이 모반하여 원소에 호응하고 허도 주변을 공략했다. 원소가 유비를 도내 유벽을 돕게 하자 공이 조인(曹仁)을 보내 이를 격파했다. 유비는 달아났고 마침내 유벽의 둔영을 깨뜨렸다.
-무제기
조공은 조인을 보내 군을 이끌고 선주를 공격하자 선주는 원소군에게로 되돌아갔다.
-선주전
여남 전투 (채양)
9월,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원소가 격파되기 전 유비를 보내 여남을 공략하게 했었는데, 여남의 적(賊) 공도(共都) 등이 이에 호응했다.
채양(蔡揚)을 보내 공도를 공격했으나 불리했고 공도에게 격파 당했다.
-무제기
원소는 선주를 보내 본래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여남에 이르도록 하니, 적(賊) 공도(龔都) 등과 합쳐 그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조공이 채양(蔡陽)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선주에게 죽임을 당했다.
-선주전
여남 전투 (조조)
조공이 원소를 격파한 후 친히 남쪽으로 선주를 공격했다.
-선주전
공이 남쪽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유비는 공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유표에게로 달아났고 공도 등은 모두 흩어졌다.
-무제기
박망파 전투 (하후돈)
(유표가 선주에게) 하후돈(夏侯惇), 우금(于禁) 등을 박망(博望-남양군 박망현)에서 막게 했다.
얼마 뒤, 선주는 복병(伏兵)을 두고 하루아침에 스스로 둔영을 불사르고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하후돈 등이 이를 추격하다 복병에 의해 격파되었다.
장판파 전투 (조조)
조공은 군비가 충실한 강릉을 선주가 먼저 점거하는 것을 두려워해, 치중(輜重)을 내버려두고 경군(輕軍-경병)으로 양양에 도착했다.
선주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듣고 조공은 정기(精騎-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이를 추격했다.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달려 당양의 장판(長阪)에 이르렀다.
선주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 기를 이끌고 달아났고, 조공은 그의 무리들과 치중을 크게 노획했다.
적벽대전 (조조)
선주는 오군(吳軍)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공의 군을) 추격해 남군(南郡)에 이르렀다.
이때 또한 질역(疾疫-역병)이 돌아 북군(北軍-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자, 조공이 군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선주전
공이 적벽(赤壁)에 이르러 유비와 더불어 싸웠는데 불리했다.
이때 큰 역병이 돌아 관원과 군사들 중 죽은 이가 많았으므로 이에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유비가 마침내 형주(荊州)와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郡)들을 차지했다.
-무제기
형남 평정 (김선, 한현, 조범, 유도)
선주는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고 또한 남쪽으로 4군(四郡)을 정벌했다.
무릉(武陵)태수 김선(金旋), 장사(長沙)태수 한현(韓玄), 계양(桂陽)태수 조범(趙範), 영릉(零陵)태수 유도(劉度)가 모두 항복했다.
-선주전
선주는 마침내 강남(江南-장강 남쪽)을 거두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賦稅)를 거두어 군실(軍實-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
-제갈량전
무릉(武陵)의 오랑캐(蠻夷)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읍을 공격하고 수비하자, 이에 황개에게 태수직을 맡겼다.
-황개전
vs 장로
선주가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고했다,
“조공이 오(吳)를 정벌하니 오(吳)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손씨(孫氏)와 고(孤-나)는 본래 순치(脣齒-입술과 이)의 관계입니다. 또한 악진(樂進)이 청니(靑泥)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州)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이니 족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유장에게 군사 1만과 물자를 청하고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유장은 다만 군사 4천을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절반만을 주었다.
[위서] – 이에 유비가 격노해 자신의 군사들에게 말했다,
“내가 익주(益州)를 위해 강적(強敵)을 치느라 사도(師徒-사졸)들은 근췌(勤瘁-수고하고 지침)하고 편히 쉴 겨를도 없었다.
지금 창고에 재물을 쌓아놓고 포상에는 인색하면서, 사대부(士大夫)가 출전하여 사력을 다해 싸우기를 바라니, 이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선주전
이후에 여대(呂岱)는 촉(蜀)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백제(白帝)에서 유비를 만났다.
여대는 돌아와, 유비의 부대는 흩어져 버렸고 죽은 자가 거의 절반이므로 일은 반드시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범전
오서 : 건안16년(211) 여대는 낭장(郎將) 윤이(尹異)등을 통솔(督)하여 정병 2천여명으로 한흥(漢興) 건성(寋城)에 이르러,
한중의 장로를 서쪽으로 꾀어내고자 했으나, 장로가 이를 의심하여 길을 끊으니, 계책이 이루어질 수 없음에 손권은 여대를 돌아오도록 하였다.
-여대전
vs 양회
선주가 대노해 유장의 백수군독(白水軍督) 양회(楊懷)를 불러 무례함을 질책하며 참수했다.
부성 전투
선주는 곧바로 관(關) 안으로 들어가 제장, 사졸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고, 황충, 탁응과 함께 군을 이끌고 부(涪)현으로 진격해 그 성을 점거했다.
부현 전투 (유괴, 냉포, 장임, 등현)
유장은 유괴(劉璝), 냉포(冷苞), 장임(張任), 등현(鄧賢) 등을 보내 부(涪)에서 선주를 막게 했으나 모두 격파되었고,
물러나 면죽(綿竹-광한군 면죽현)에 의지했다.
vs 이엄 (부전승)
유장은 다시 이엄을 보내 면죽의 제군을 지휘하게 했으나, 이엄은 무리들을 이끌고 선주에게 항복했다.
낙성 전투 (유순)
선주가 진군하여 낙(雒-광한군 낙현)을 포위했다.
이때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수비했는데 공격을 받고 근 1년이 지났다.
건안 19년(214년) 여름, 낙성(雒城)이 격파되었다.
성도 포위전 (유장)
진군하여 성도(成都-촉군 성도현)를 포위한 지 수십 일 만에 유장이 성을 나와 항복했다.
정군산 전투 (장합, 조옹)
선주는 황충에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하고,
하후연과 조공이 임명한 익주자사 조옹(趙顒) 등을 참수했다.
-선주전
유비가 장합에 싸움을 걸었는데 장합군이 불리했다.
하후연은 지휘하던 병력의 절반을 나누어 장합을 돕게 했는데 유비의 습격을 받아 마침내 하후연이 싸우다 죽었다.
-하후연전
양평(陽平)에 주둔하자 장합은 광석(廣石)에 주둔했다.
유비가 정졸(精卒-정예병) 1만 여명을 10부(部)로 나누고 밤중에 장합을 급공(急攻-급습)했다.
장합은 친병(親兵)을 이끌고 박전(搏戰-치열하게 맞서 싸움)했고 유비는 이길 수 없었다.
-장합전
한중 공방전 (조조)
조공이 장안으로부터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했다.
선주가 멀리서 이를 헤아려 말했다,
“비록 조공이 온다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니 내가 반드시 한천(漢川)을 차지할 것이다.”
조공이 도착하자 선주는 군사들을 모아 험고한 곳을 지키고 끝내 교봉(交鋒-교전)하지 않자 (조공이) 여러 달이 지나도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사망자가 날로 많아졌다.
여름, 조공은 과연 군을 이끌고 돌아가니 선주가 마침내 한중을 차지했다.
-선주전
3월, 왕이 장안으로부터 야곡(斜谷)을 나왔는데, 군(王)이 요지를 차단하며 한중에 임하여 마침내 양평에 도착했다.
유비는 험지에 의지해 거수(拒守-막아서 지킴)했다.
여름 5월, 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무제기
자귀 전투
당초 선주는 손권이 관우를 습격한 일에 분노하여 장차 동쪽을 정벌하려 했었다.
이에 가을 7월, 마침내 제군(諸軍)을 이끌고 오(吳)를 정벌했다.
손권은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선주는 몹시 성내며 허락지 않았다.
오의 장수 육의(陸議-육손), 이이(李異), 유아(劉阿) 등은 무(巫-형주 남군 무현), 자귀(秭歸-남군 자귀현)에 주둔했다.
오반(吳班), 풍습(馮習)이 무(巫)현에서부터 이이 등을 공파(攻破)하고 자귀에 주둔했다.
-선주전
vs 송겸
황무(黃武) 원년(222년) 봄 정월, 육손의 부장군(部將軍) 송겸(宋謙) 등이 촉의 주둔지 다섯 곳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시키고 그 장수들을 참수했다.
-오주전
장무 2년(222년) 봄 정월, 선주군(先主軍)은 자귀로 돌아오고,
장군 오반(吳班), 진식(陳式)의 수군(水軍)은 이릉(夷陵-남군 이릉현)에서 장강을 끼고 동서 연안에 주둔했다.
-선주전
효정 전투(육손)
육손이 말했다.
"유비는 교활한 적이며, 매우 많은 일을 겪었고, 그의 군대가 처음 집결했을 때, 그의 생각은 조밀하고 전일하였으므로 침범할 수 없었다.
현재는 매우 오랫동안 출병하여 우리의 편의를 차지하지 못했고, 병사들은 피곤하고 사기는 떨어졌으며, 또 새로운 계책은 없다.
앞과 뒤에서 협공 하여 적을 잡을 때는 바로 오늘이다."
그리고 나서 육손은 먼저 유비의 한 진영을 공격했지만, 불리했다. 장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헛되이 병력을 소모시킬 뿐입니다."
육손이 말했다.
"나는 이미 유비 진영을 격파시길 방법을 알고 있다."
곧 병사 각각에게 띠풀을 하나씩 갖고서 화공(火攻)으로 격파시키도록 명령했다.
순식간에 형세가 이루어지자, 육손은 각 군대를 인솔하여 동시에 함꼐 공격해 장남, 풍습 및 호왕(胡王) 사마가(沙摩柯) 등의 머리를 베었으며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시켰다.
유비의 장수 두로(杜路)와 유녕(劉寧) 등은 달아날 길이 없자 투항을 요청했다.
-육손전
그 10여 일 뒤, 육의(陸議)가 선주군을 효정에서 대파하고, 장군 풍습(馮習), 장남(張南) 등이 모두 전몰했다.
-선주전
마안산 전투 (육손)
유비는 마안산(馬鞍山)에 올라 주위에 군대를 포진시켰다.
육손이 군대를 격려하고 지휘하여 사방에서 이곳으로 육박해오자 유비의 진영은 붕괴되고 와해되었으며, 죽은 자는 수만명이 되었다.
-육손전
자귀 전투
선주는 효정에서 자귀로 돌아와 흩어진 군사들을 수합(收合-거두어 합침)하여
마침내 배를 버리고 육로로 어복(魚復-익주 파군 어복현)으로 돌아왔고, 어복현을 영안(永安)으로 고쳤다
-선주전
왕국산(王國山)의 이름이 왕보(王甫)이고, 광한군(廣漢) 처현(郪) 사람이다.
그는 인물 평가와 의론을 좋아했다. 유장(劉璋)의 시대에 주(州)의 서좌(書佐)가 되었다.
선주가 촉을 평정한 후 면죽현(綿竹)의 령(令)이 되었고, 돌아와서 형주(荊州)의 의조종사(議曹從事)가 되었다.
선주를 수행하여 오(吳)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군대가 자귀(秭歸)에서 패배하여 해를 입었다.
-계한보신찬
자귀(秭歸)에서 패배 때, 상총의 진영만이 온전했다.
-상총전
독우 매질같은 개인 전적까지 넣으면 무려 21승 17패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우들어간거부터 장난삼아한거네 근대 진지하게 뭐라하는사람 나올것같은기분
엑 아는 선에서 최대한 긁어모은건뎅
조조는 거병하기도 전에 십상시 숙부로 1승따고 시작한거야?
아 이거 웃겨죽겠네ㅋㅋㅋㅋ 나중엔 손권 호랑이 상대로 1승한것도 나오겠네 ㅋㅋㅋㅋ
님아 원소 꼭 써주셈 ㅋㅋㅋ 원소 진짜 개지1랄 날것 같은데 ㅋㅋ
독우 빼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