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 Walk to Canossa, Humiliation of Canossa)은 1077년 1월 28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독일왕과 교황이 서로 대립하던 중에 발생하였다. 교황권력이 황제권력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전환기에 벌어진 상징적인 사건
하인리히 4세는 굴욕을 맛보았으나 독일에서의 권력 장악에 성공한 후 1084년 로마를 탈환하여 교황을 폐위하며 복수를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로마를 떠나 이듬해 망명지에서 쓸쓸하게 객사
세줄요약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을 풀기위해 허름한 옷을 입고 교황에게 싹싹 빌었고
파문이 풀린 뒤에는 로마에 처들어가 교황을 폐위시켰다
그리고 교황권이 실추되자 교황권으로부터 신성을 부여받던 황제권도 같이 꼬라박기 시작했다
내가 머리를 조아린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였다-!!!
븅신 같은게, 당시 많은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그레고리오 7세의 정책을 반기지 않았음.
지옥보단 윗놈처럼 권위가 뒤짐 회사에 일하는데 이사가 저ㅅㄲ ㅁㅁ임이라고 선언한거나 다름 없는수준이라
내가 황제 생활을 6살부터 했다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슬라브 제끼고 작센 보내고.... 나를 무릎꿇린 교황같은 ㅆㅂ롬은... 전부 죽였다
무엇보다 말빨이랑 법률 지식도 적어서 파문 원툴이었고.
내가 머리를 조아린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였다-!!!
그리고 교황권이 실추되자 교황권으로부터 신성을 부여받던 황제권도 같이 꼬라박기 시작했다
소탐대실이네...
교황권이 가장 꼴아박게 만든 카를 5세가 로마대약탈 했을때는 사실상 신롬황제가 합스부르크 작위처럼 변해버려서... 비텔스바흐가 신교인정해서 노려봤지만 결국실패함
저 전에도 교황권은 없었음. 저 사건도 황제의 아내랑 아들, 귀족들이 반란을 해서 시간 끌 수가 없어서 눈밭에 서있었던 거임. 이미 황제 군대가 성 포위하고 있었는데 성 함락시키는 데 몇달 걸리고 그 기간동안 아내,아들의 반란세력이 강해질까봐 눈밭에 서서 빨리 합의 본 거. 저 뒤에 바로 돌아가서 아내 세력 쫓아내고 다시 돌아와 교황 쫓아냄
소탐대실이라 할 수 없는게 애초에 레오 3세가 카롤루스에게 제관을 씌워준 순간부터 황제권이 교황권에 묶일 수 밖에 없었고 교황은 그걸 이용해서 계속 황제를 길들이려 시도해서 황제들도 계속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던게 중세 신롬의 역사라
더 정확히 말하면 황제권한이 강해지니 견제하려고 파문을 건 거임
신앙심이 아니라 그냥 wwe잖아ㅋㅋ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다. 하인리히 4세는 7년밖에 안걸렸네 ㅋㅋ
종교적으로 지옥갈까 무서운거랑 별개로 그런데 이놈이 건방지게...!
캣타워
지옥보단 윗놈처럼 권위가 뒤짐 회사에 일하는데 이사가 저ㅅㄲ ㅁㅁ임이라고 선언한거나 다름 없는수준이라
븅신 같은게, 당시 많은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그레고리오 7세의 정책을 반기지 않았음.
중세위키
무엇보다 말빨이랑 법률 지식도 적어서 파문 원툴이었고.
내가 황제 생활을 6살부터 했다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슬라브 제끼고 작센 보내고.... 나를 무릎꿇린 교황같은 ㅆㅂ롬은... 전부 죽였다
마틸다 눈하…
파문도 정작 베네치아는 여러번 받았다는거 보면 당시 신롬 귀족들이 황제 싫어했던거 아님?
베네치아는 종교보다 국가나 이익이 우선이다에 표본 같은 국가라서 일반적인거라고 보면 안됨
저때 황제랑 제후들이랑 권력다툼이 심할 때긴 했음 그 틈을 타서 황제 파문 시전한거였고 물론 윗댓 말 처럼 베네치아는 특수 케이스긴 함
파문빔은 대놓고 교황 무시까기 시작한 신교도들 튀어나올 때 까지 교황의 유효한 무기 맞긴 함.
끝까지 밀었어야지 괜히 갈팡질팡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