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뒷끝이 더 무섭다.[남자들의 뒷담화]
한번쯤 읽어보면 흥미로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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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장덕현 |
보험회사에 다니는 주현아(가명·28)씨는 지난 4월 4개월간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이별 통보는 주씨가 먼저 했다. “성격이 너무 달라 못 만나겠다”고 말하는 주씨에게 학원강사인 남자친구 김성환(가명·33)씨는 “헤어질 수 없다”고 맞받아쳤다. 주씨가 끝내 돌아서자 김씨는 ‘뒤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 앞에 찾아왔다. 귀가하던 주씨의 언니를 붙잡고 “현아 좀 불러달라”고 말하는가 하면 창문 틈으로 집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겁이 난 주씨는 회사 선배에게 귀갓길을 함께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날도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씨는 주씨를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회사 선배를 뒤에서 때려 병원 신세를 지게 했다.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말하자 주씨의 메일 계정을 해킹해 회사 동료들에게 메일을 보낸 것이다. 결국 주씨는 김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접근금지 신청을 받아내고 나서 상황은 나아졌지만 정신적 피해가 너무 커 상담소를 찾아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김유진(가명·29)씨도 지난해 겨울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황당한 일을 겪었다. “집 앞에 배달용 치킨박스가 놓여 있더라고요. 누가 먹다가 몰래 버렸다 싶어 열어봤는데 그 안에 사람의 배설물이 들어 있었어요. 복도식 아파트라 CCTV가 설치돼 있어서 확인해 보니 범인은 2주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였어요. 자기 배설물을 담아서 집 앞에 두고 간 거예요.”
김씨는 남자친구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따졌다. “얼굴 보면서 얘기하겠다”는 대답만 되풀이해 집 앞 놀이터에서 만났다. 그날 김씨는 남자친구가 밀치는 바람에 놀이기구에 얼굴이 긁혀 15바늘을 꿰매는 상처까지 입었다. “놀라서 병원으로 달려온 친구들과 얘기를 하는데 저처럼 헤어진 남자에게 당한 사람이 많았어요. ‘아는 언니가’ ‘내 친구가’ ‘내가’로 시작하는 얘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어요.”
옛 애인 성폭행 사건 매년 400여건 신고
‘쿨’할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남자들의 ‘뒤끝’은 여자들보다 더 무섭다. 뒷담화는 여자들의 전유물이라 여기지만 알고 보면 남자들의 뒷담화가 더 무서울 때도 많다. 헤어진 애인을 붙잡는 사람은 대개 남자고, 지나간 일을 잊지 못하고 한참을 되새기는 남자들도 많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연구진은 연인이나 부부 사이 벌어진 싸움을 쉽게 잊는 것이 여성이고 남성은 오히려 싸운 내용을 마음속에 길게 담아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스트레스에 반응해 콩팥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코르티솔(cortisol) 수치를 측정해 발표한 연구 결과를 두고 연구진을 이끌던 마크 페인버그 교수는 “통념과 달리 사랑싸움은 여성에게 유리할 수도 있지만, 남성에게는 장기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남자들의 무서운 뒤끝에 당한 사건·사고 뉴스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10월 17일 강원도 춘천에서는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던 황모(23)씨가 남자친구 차에 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고, 14일 부산 남부경찰서는 헤어진 15살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데 격분해 승용차로 납치해 감금하고 때린 이모(18)군을 붙잡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6월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던 한지윤(가명·25)씨도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 문자며 전화가 왔어요. 새벽 2~3시에도 전화를 하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시험에 늦은 적도 있었거든요.” 한씨는 결국 “만나서 얘기하자”는 남자친구의 말에 응답했다. 한씨 집 근처까지 찾아온 남자친구는 만나자마자 “사람들 지나다니는 길에서는 얘기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자리를 옮겨 한씨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남자친구는 한씨를 성폭행했다. 남자친구는 곧바로 경찰에 붙잡혔지만 한씨는 저항하다가 왼손 손가락 두 개에 골절상을 입었고 요즘은 정신과를 다니며 치료받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1년 신고된 성폭행 사건 중 애인이 저지른 사건은 461건이었다. 2009년 410건, 2010년 440건 등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애인 사이에서 폭행, 절도 등을 저질러 입건된 형법범은 2009년 한 해에만 1만3575건(2007년 1만2937건, 2008년 1만3171건)에 달했다. 반면 한국성폭력상담소 측은 헤어진 애인에게 스토킹·성폭행 등의 피해를 당해 찾아오는 여성이 예전부터 꾸준히 있었다며 최근 들어 보이는 증가세는 “애인 사이의 성폭행 등이 범죄라는 인식이 생겨난 덕분”이라고 설명하면서 “헤어진 남자친구가 매달리고 화내다 폭력까지 행사하는 극단적 사례는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상당히 흔한 일 아니냐”며 남자들의 뒤끝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쿨할수록 뒤끝이 무섭다?
그렇다면 헤어진 이후에 본색을 드러내는 남성의 뒤끝이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 분당제생병원 임상심리전문가 박근영 박사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가장 큰 이유는 ‘남자답다’는 말에 숨겨진 사회적 압박 때문이다. 박 박사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특성이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런 사람인 것처럼 포장해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유지하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심리”라면서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남성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하는 성격에 ‘뒤끝’은 없다”고 말했다.
보통 바람직한 남성은 관대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 박사는 “동양적으로 표현하면 남자는 ‘대인’이 돼야 한다”며 “속 좁게 보이면 남자답지 않다는 말을 듣기 쉽기 때문에 일부러 감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학습된 탓도 있다. 박 박사는 “중국 고서에 보면 자식이 죽었다는 편지를 받고 자기 손을 꼬집으면서 두고 있던 바둑을 태연하게 계속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바람직하다고 칭송받았다”는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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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 심리학과 전우영 교수 역시 ‘남자는 쿨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남자의 뒤끝을 감추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남자는 태어나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에서도 감정 표현을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며 “사회 분위기가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분리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감정을 통제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든다”며 “스트레스 상황이 다가와 에너지가 고갈되고 나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작스럽게 감정이 분출되는 것”이라는 게 전 교수의 분석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쿨해 보이던 남자들의 뒤끝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다.
뒤끝의 원인은 분리불안
남성이 뒤끝을 감추는 데 작용하는 남녀 차이의 원인은 또 있다. 어릴 때부터 남성은 문제에 공감하는 것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길러진다. 인제대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우종민 교수는 공감형 뇌를 가진 여성이 54%에 달하는 데 반해 남성은 17%만이 공감형 뇌를 가지고 있다는 영국의 심리학자 코언의 연구 결과를 참고하면서 여성은 대개 공감을 잘하는 대신 남성은 행동을 통제하고 원인을 분석하는 체계화 능력이 발달했다고 밝혔다. 우 교수는 “감정 표현을 잘하고 공감하는 유형의 남자는 남성 집단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17%의 공감형 뇌를 갖고 있는 남자라도 결국 또래 집단 안에서 체계화 능력을 기르게 된다는 것이다. 우 교수는 “자라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점점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방법을 배운다”고 정리했다.
심리학 전문가들은 감정을 감추던 남자들이 연애가 끝나면 뒤끝을 드러내 보이는 이유를 분리불안(separation anxiety)으로 설명한다. 심리학에서는 연애를 애착 관계로 규정한다. 안정과 보호를 원하는 의존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가장 기본적 관계다. 그런데 이별이 다가오면 안정을 잃기 싫어하는 분리불안이 나타난다. 범죄심리 전문가인 류창현 한국분노조절협회장은 “감정을 통제하는 방법만 배웠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남성들은 분리불안 상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남자들의 뒤끝은 통제할 수 없는 분리불안이 강하게 드러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원래 문제가 생겼을 때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에 남녀 차이가 있기도 하다. 박근영 박사는 “남성은 에너지를 발산해 우울감을 떨쳐버리고 여성은 신체적 증상이나 감정 표현으로 우울감을 이겨낸다”고 말했다. 익숙한 행동을 하면서 우울감을 극복할 때도 많은데 여성은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쇼핑을 하는 등 개인적 행동으로 표현한다. 극단적 경우에도 여성은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등 자신에게 문제를 돌릴 때가 많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나는 활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격려받아온 남성들은 오히려 이별 후 숨겨져 있던 뒤끝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우영 교수는 남자들의 뒤끝을 의사소통의 문제로 설명하기도 했다. 전 교수는 “남자가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다 보니 ‘헤어지기 싫다’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못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 연인 사이에서도 다투다가 문제가 생기면 버럭 화를 내는 남자가 많은 이유는 “그것이 남자들의 의사표현 방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안해진 남성 지위도 뒤끝 부추겨
평소 숨겨져 있던 남자들의 뒤끝이 무서운 이유는 한번 드러나면 폭력적으로 드러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울산 자매 살인사건을 저지른 김홍일은 검거 후 “이별 통보에 화가 났다”고 말했고, 10월 16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주택가 한복판에서는 전 여자친구를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9월 16일에도 전남 여수에서 헤어지자는 여자친구 집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남성이 구속됐고, 같은 날 경기 성남시에서는 교제를 반대하는 여자친구의 어머니와 여자친구를 마구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류창현 협회장은 “의존적이고 분리불안이 강한 남성일수록 뒤끝이 강하게 발현된다”고 설명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남성의 지위는 불안해지고 있다. 예전과 달리 남성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더는 긍정적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게다가 지속된 경기 불안, 불확실한 미래 등으로 인해 애착 관계에 집착하는 남성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이별이 다가오면 평소보다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뒤끝을 표현하는 남자들이 생겨난다는 것이 류 협회장의 설명이다. 이런 남성은 자신의 폭력적 행동을 합리화하는 데도 능숙하다며 “이별 후 남성의 뒤끝은 여자친구 당사자가 아니라 관계에 집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메일 계정을 해킹당하고 남자친구의 전화와 문자에 시달렸던 주현아씨는 남자친구를 두고 “평소에는 과묵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둘 다 직장인이라 바쁜데 일주일에 2~3번 못 만나면 불안해 했다”는 얘기로 전문가의 말을 뒷받침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여자친구에 더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이 큰일을 불러온 것 같다고 후회했다. 김유진씨는 “남자친구보다 연봉이 두 배 정도 많아 가끔 남자친구가 열등감을 드러내곤 했다”며 “‘잘해줬는데 왜 헤어지자고 하느냐’는 말을 들었는데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고 되짚었다. 평소의 열등감이 이별 후에 뒤끝으로 드러났다는 얘기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 역시 사회적 분위기가 남성의 뒤끝을 강하게 하는 데 일조한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가부장적 사고에 갇힌 일부 남성은 여성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과 적대감을 쌓아두곤 한다”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스트레스를 받다가 분노를 속으로 쌓아둔 상태에서 이별을 통보받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화가 표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영 박사 역시 “공격적인 뒤끝을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원래 열등감이 있거나 심리적 이상이 있었지만 감추고 있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오자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