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팔남으로서 그의 뒤를 이어 후금의 2대 한이 된 인물이다. 그는 즉위 이후 내치와 정복활동에서 모두 뛰어난 역량을 선보이며 후금을 황제국인 청으로 변화시키고 이어서 청의 황제로 즉위한 인물이었다.(청 태종, 숭덕제)그의 본명에 대해서는 몇가지 흥미로운 견해가 존재하는데, 그러한 견해들 중 어떠한 것들은 완전히 틀린 정보이기도 하다. 특히 서구권에는 그러한 '틀린 정보'중에서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존재하는데, 바로 홍타이지의 이름이 아바하이(Abahai)라는 이야기이다.
홍타이지의 이름이 아바하이라는 정보의 근원은 애초 동양권에는 존재치 않는 이야기이다. 홍타이지가 한/황제였던 후금/청 본국은 물론이고 몽골, 조선, 명나라, 그 어떤 나라의 당대 사료와 서적에서도 홍타이지의 이름이 '아바하이' 혹은 그 비슷한 이름이라는 이야기는 쓰여있지 않다. 즉슨, 근원 사료나 이에 대한 논의가 존재하는 서적이 동양권에 존재치 않는다.
이렇게 보건대, 홍타이지의 본명이 아바하이라는 가설/이야기 자체는 홍타이지의 세계인 동양권이 아니라 서구권 혹은 서구권의 사람을 통해서 만들어진 가설/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홍타이지=아바하이 가설이 만들어지고 서구권에 널리 퍼지게 되었을까?
가장 유력한 가설은 홍타이지의 후금시기 연호 천총(天聰)의 만주문 호칭인 압카이 수러(Abkai sure)1의 '압카이(하늘의)'가 청나라를 방문한 서구인에 의해 홍타이지의 이름으로 혼동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당 혼동정보가 서구권에 전해지면서, 여러 서술가들의 무차별적인 인용으로 인하여 서구권 학계나 대중계에 해당 '이름'이 널리 퍼졌고 그로서 '아바하이'가 홍타이지의 이름으로 널리 '오인'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지오반니 스타리에 의한 가설제기이다.2
여기서 '최초로 혼동을 만든 서구인'으로 가장 유력한 것은 스타리에 의하면 러시아 정교회 및 정부 차원의 북경교회 사절단원으로서 19세기 중반 북경을 방문한 학생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고르스키(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Горский, 통칭 В. В. Горский)이다. 고르스키는 12차 북경교회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1840년에서 1847년까지 북경에서 활동했다. 러시아의 북경교회 사절단의 경우 청나라 사람들에 대한 광범위한 포교활동을 중점목적으로 두지 않았고, 알바진인 계도와 청나라의 언어, 역사, 사회 연구에 비중을 둔 활동을 전개했는데 고르스키 역시 이 때에 만주문헌 번역과 연구에 집중하였다.3
고르스키는 한참 활동할 나이인 1847년에 요절했으나, 그의 연구는 버려지지않고 북경교회 사절단에 의해 관리되었다. 고르스키 사후 출간된 그의 유고작인 Начало и первые дела маньчжурского дома(만주왕조의 시작과 초기사정)에서 홍타이지의 이름은 'Абахая', 또는 'Абахай', 그리고 'Абахаю'등으로 서술되었다.4 이상의 러시아어 단어는 모두 '아바하이' 혹은 그와 비슷한 발음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이는 지오반니 스타리가 발견한 '홍타이지의 이름을 아바하이로 서술한 기록'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해당 저작물은 1852년경에 출간된 Труды членов Российской духовной миссии в Пекине Т.1(북경교회 사절단 저작집 1집)에 실려 있으므로 확실히 오래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 형태는 확실히 홍타이지의 후금시기 만주문 연호 압카이 수러(Abkai sure)의 전체 혹은 일부를 황제 본인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인용한 흔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고르스키가 해당 실수를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당시 서양권에서는 동양의 연호가 익숙한 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르스키가 압카이가 아닌 아바하이혹은 그와 비슷한 발음으로 단어를 서술한 이유는 묄렌도르프 전사가 없던 시기에 해당 단어를 오인,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고르스키는 필시 의도치 않았겠지만, 그의 이러한 명칭오인으로 인한 잘못된 정보는 서구권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홍타이지가 아바하이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서구학계에서 마치 정설처럼 굳어졌다.-는 것이 스타리의 논지이며, 실제로 타당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오용은 해당 정보가 서구권으로 넘어간 이후 독일의 에리히 하우어와 미국의 아서 험멜, 영국의 허버트 자일즈등 많은 이들이 인용해왔지만, 최근에는 연구의 발달로 인해 잦아드는 추세이다. 하지만 여전히 몇몇 서양권 교양서적등에서 인용되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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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후술할 학자이기도 한 지오반니 스타리는 만주문 연호 압카이 수러에 대해서 이견을 제시했다. 그는 압카이 수러는 본래 당대에는 쓰이지 않았던 연호이며 후일 번역과정에서 해당 시기 연호이자 한문연호인 '천총'을 만주문으로 직역하는 바람에 압카이 수러라는 만주문 연호가 "만들어졌다"고 평가한 바 있다. 자세한 것은 Giovanni Stary, The Problem "Abahai"~Hong Taiji: A Definitive Answer to an Old Question?, Central Asiatic Journal Vol. 43, No. 2 (1999), pp. 259-265. 참조. 하지만 필자는 그에 대해 확답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또한 여기서 그에 관한 바는 자세히 언급치 않는다.
2.Giovanni Stary, The Manchu emperor "ABAHAI" analysis of an historiographic mistake, Central Asiatic Journal Vol. 28, No. 3/4 (1984), pp. 296-299.
3.강인욱, 17-20세기 러시아 만주학 연구의 시작과 전개과정 -북경교회사절단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73호, 2016, p.74. 단, 해당 논고에는 고르스키의 활동시기가 1840년에서 1849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르스키의 활동시기가 아닌 그가 참여한 12차 북경교회 사절단의 활동기간이다.
4.В. В. Горский, Начало и первые дела маньчжурского дома Часть 2, СПб , 1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