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만 믿었던 과거가 부끄럽다”
“연쇄점 회장님”으로 변신한
왕년의 「정치깡패」 유지광 씨
“옛일 생각하면 죽은 목숨”
이정재 부를 땐 지금도 깍듯이 “회장님”
2년 전 「보스」 묘비 건립하는 데 앞장서
운동 즐기며 궂은일 맡아
자유당 시절 이정재(자유당 감찰부장)·곽영주(경무대 경호관)와 함께 경기도 이천이 낳은 ‘트로이카’로 불리며 정치와 주먹세계를 주름잡았던 유지광 씨(56)가 전혀 딴 모습으로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다.
“극형을 모면한 뒤 나의 인생은 35세에 다시 태어났어요. 무모했던 젊은날의 회한과 사경을 헤매던 쓰사린 체험이 큰 힘이 됐죠.” 유 씨는 옥중에서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겪었던 왕년의 주먹답지 않게 소박한 모습에 평범한 인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현재 직함은 이천군 이천읍 창전리 동부연쇄점본부(주식회사) 회장.
동부연쇄점은 이천·여주·광주·양평 등 4개 군에 가맹점 270여개를 거느린 상품공급회사.
자본이 영세한 상인들을 대표해 생산회사와 계약을 맺고 술과 음료·잡화·식품 등을 공급, 3~6% 정도의 마진을 얻는다.
“사업을 벌인지는 4년째 됐지만 아직 수지타산이 빠듯해요.” 유 씨는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자신이 회장의 감투를 썼지만 33만 원짜리 월급쟁이에 불과하다고 엄살(?)을 부린다.
유 씨는 요즘 향리에서 갈은 중늙은이들끼리 조기축구회를 조직해 운동도 하며 지역사회발전에 보탬도 주고 멋모르고 날뛰는 젊은이들을 타이르기도 해 주민들로부터 유지로 불린다고 쑥쓰러워했다.
“4·19는 제 인생의 고비였습니다” — 구 정권의 범죄자로 검거돼 과도정부 특별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기까지 했던 유 씨는 보스인 이정재를 비롯, 곽영주·임화수 등이 모두 처형당하는 고비에서 몇몇 인사와 함께 목숨을 건졌다.
유 씨는 5년 6개월의 징역을 살고 65년 말 출소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 목숨을 부지하게 됐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당시 재판장에게 죄는 모두 나에게 있으니 나를 사형시키고 부하들을 살려달라고 통사정 조로 진술했던 게 주요했던 것 같아요.” “이정재 회장님과는 동향·사돈이라는 인연으로 맺어졌죠. (그는 이 씨를 지칭할 때 말끝마다 ‘님’ 자를 붙였다) 회장님이 체육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 매력에 이끌렸어요.” 19세에 해방을 맞고 23세부터 청년운동에 뛰어든 유 씨는 이 같은 이유로 이정재의 동대문사단 휘하로 들어갔다는 설명이다.
당시 이정재는 동대문시장상인 연합회장이란 직함으로 주먹과 깡패조직, 금력, 지모로 암흑가를 지배하며 곽영주와 이기붕 씨를 등에 업고 정권의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만 56년의 장충단 시국강연회장 난입 사건과 60년 4·18 고대생 기습사건으로 저의 악명이 높았지요.” 유 씨는 두 사건을 일으켰던 화랑동지회가 처음 조직될 때는 실은 깡패들이 뭉쳐 뭔가 유익한 일을 해 보겠다고 모였던 것이었다고 했다. 당시 모인 깡패들이 거리 청소를 하는 등 새마을운동의 효시가 됐었다며 유 씨는 톤을 높인다.
당시의 유 씨 별명은 짱구. IQ 140의 두뇌에 축구로 단련된 ‘모듬발차기’가 그의 장기였지만 유 씨는 “나의 격투 실력이 대단하진 않았다”며 겸연쩍은 듯한 두툼한 손으로 이마를 쓰다듬는다.
“힘이 전부라고 믿었던 과거가 부끄럽고 후회스럽습니다. 힘에 의한 지배, 힘만 믿고 살겠다는 저의 인생관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4·19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유 씨는 출소 후 대지영화사란 이름으로 영화제작에 투신, 10여 편을 제작해 짭짤한 재미를 보았으나 일부에서 “제2의 임화수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74년 가족들을 이끌고 낙향했다고 했다.
“고향에 돌아와 식당도 해 보고 농장, 지하수 개발, 건축공사 등 손을 안 댄 게 없지만 큰 재미를 못 봤어요.” 유 시는 요즘엔 국산 양주 판매 회사를 차릴 계획으로 서울 출입이 잦다고 했다.
짧은 머리에 부리부리한 눈, 검정색 싱글 차림의 유 씨 모습은 옛 강패라기보다 패기에 찬 사업기의 모습이다.
이천읍내의 연쇄점 가게가 달린 2층 양옥집에서 부인 양재복 씨(47), 딸 셋과 함께 조촐한 생활을 한다고 했다. “처음 낙향 때 아이들이 손가락질받지 않을까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유 씨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가지 옛 ‘보스’에 대한 의리를 지켜 2년 전엔 이천에서 이정재의 묘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여생을 보람있게 살 생각입니다.” 자리를 드는 유 씨에게 ‘보람된 생활’의 내용을 애써 캐물었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천=한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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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12일자 중앙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