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가구야 공주!, 사랑해 온 모든 걸 설화 위에 엮어
초 가구야 공주!,
사랑해 온 모든 걸 설화 위에 엮어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문무겸비 완벽한 여고생, 이로하.
엄마와의 의견차이로 독립해 홀로 서기를 하고 있지만 학교, 알바, 덕질 무엇하나 빠지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앞에 무지개색으로 반짝이는 게이밍 대나무가 나타나게 되는데.
초 가구야 공주!는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젊은 애니메이터들이 하고 싶은 걸 다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20대 30대가 보고 자란, 그리고 현재 즐기고 있는 보컬로이드, 온라인 게임, 버츄얼 아이돌, 00~10년대 유행했던 작품 등등 정말 욕심 가득하게 다 담아온 작품이라고 볼 수 있죠,
그렇다보니 정말 최선을 다해 모든 요소를 튀지 않고 다듬고 정리하려 했음에도 상당히 급하고 요소가 포화되어 있다는 감상을 주고 중심이 될만한 소재들의 힘이 약해져버렸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오늘은 초 가구야 공주!의 어떤 부분이 좋았고 또 어떤 부분이 아쉬웠는지 짧은 감상을 적어 보고자 합니다.
초 가구야 공주!의 스토리는 기본적으로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현대적인 배경에 얹어놓은 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렇다보니 플롯 자체는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죠. 처음 가구야가 이로하와 만나고 가구야 공주 이야기, 해피엔딩에 대한 꾸준한 언급만 봐도 솔직히 어떤 흐름으로 이야기가 전개될지 대부분 예상이 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껏 수도 없이 많이 다뤄져온,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설화 중 하나인 가구야 공주를 차용한 이 작품은 과연 어떤 걸 하고 싶었나.
제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자신들이 영향 받은 모든 서브컬쳐 문화를 헌사하는 게 가장 큰 목표지 않나 싶습니다.
전뇌세계는 요즘 같은 AI 보편화 시대 이전부터 꾸준히 다뤄지던 소재입니다.
특히나 전통과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일본의 문화에 영향을 주며 여러 창작물에서 거스를 수 없는 변화, 막연한 두려움,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단초 등 여러 모습으로 표현되어왔죠.
이런 흐름에서 현실에 우리가 상상하던 전뇌세계가 이젠 거의 가시권 내로 다가왔고 초 가구야 공주!는 이를 달과 츠쿠요미로 표현합니다.
사실 달에서 온 공주 가구야라고는 하지만 이 작품에서 표현되는 달은 보통 달나라하면 떠오르는 황량함 혹은 인간의 문명이 잘 닿지 않아 어느 시점을 보존한 형태와 조금 다릅니다.
가구야가 달에 돌아가고 나오는 모습이나 츠쿠요미가 달과 가장 가깝다는 말로 봤을 때 달은 사실상 또다른 전뇌세계에 가깝죠.
따라서 달이라는 전뇌세계와 근 미래의 지구 중간 사이가 바로 츠쿠요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중간자인 츠쿠요미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하면 또 낯선 것들로 채워져있지 않습니다.
콘텍트 렌즈로 풀다이브를 한다던가 하는 기술은 픽션이지만 그 공간을 채운 AI 라이버, 협동 온라인 게임, 아바타를 입고 가상공간에서 친목을 쌓는 등의 활동들은 현실에서 보기 쉬운 익숙한 것들이죠.
이런 아름답지만 오타쿠들에게 익숙한, 반가운 세계를 만들고 그 안을 보컬로이드, 버튜버, 온라인 게임 등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한 오마주와 패러디로 꾸며놓은 게 바로 초 가구야 공주!입니다.
20~30대 오타쿠라면 반가워 할만 장면, 음악, 요소가 엄청나게 많이 등장합니다.
어레인지되어 나오는 보컬로이드 곡들도 요즘 것들이 아닌 거의 초창기 노래인 해피 신디사이저, 월드 이즈 마인, 멜트 같은 것들이고 몇 년 안된 봇치의 오마주부터 포카포카까지 장면에 대한 오마주도 가득하죠.
특히나 초반부 설정과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할애되는 조우-일상 파트에서는 거의 매 장면마다 수많은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는 연출을 마구 쏟아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야기와 깔끔히 맞물렸냐고 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꽤 괜찮은 수준으로 엮었다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단순히 비슷한 장르, 같은 심상을 가진 작품들이 아닌 기술의 발전과 겹치며 매년 트렌드가 격변한 00~10년대라는 시기의 오마주를 퍼부어 만들었다보니 어느 정도 요소들이 튀는 건 물리적인 한계라고 봐야하고,
가구야 공주 설화라는 익숙하고 튼튼한 뼈대 위에 어떻게든 말이 되게 엮어놓은 점은 인상적입니다.
긴 상영시간을 고려해 이야기 중심에서 살짝 벗어나더라도 시선을 잡아끌 수 있는 액션과 반가운 곡들을 배치한 센스도 돋보였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한계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요소들을 집어넣다보니 정작 액션, 아이돌, 백합 세 중심 소재가 비주얼적으로는 훌륭히 구현됐지만 결국 세 소재의 중심이 되는 핵심은 옅어졌거든요.
전투가 벌어지는 이유와 흐름을 이해시키는 액션의 당위성, 성장과 꿈이라는 서사 끝에 무대로 피워내는 아이돌, NL과 다른 플라토닉하고 감정적인 면의 사랑이 강조되는 백합.
사용한 세가지 소재가 다 얕은 깊이로 휙 지나가버리면서 분명 장면은 화려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없는, 씬이 아닌 기분만 남는 아쉬운 작품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최후반부 반전요소인 윤회와 야치요의 정체는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지만 얕은 복선에 비해 다소 비대하게 느껴지고 이 또한 자신들이 영향을 받은 문화와 그 역사에 대한 헌사인 것은 알겠지만
결국 앞선 이야기 그리고 뼈대가 되는 가구야 공주와는 미묘하게 어긋나게 느껴져 아쉬웠습니다.
아예 단순히 가구야가 돌아오는 정도의 이야기로 끊고 이로하와 가족에 대한 서사를 이로하가 가진 오타쿠로서의 정체성과 엮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물론 윤회부터 나오는 급 SF적 설정 또한 시대에 대한 오마주이자 애정표현 같긴 하지만요.
볼만한 작품인가 하면 충분히 볼만하다고 답할 거 같습니다.
비주얼은 굉장히 훌륭하고 이런 문화를 향유해온 20~30대 오타쿠는 분명 재밌게 볼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시 볼 거냐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야기가 가진 신선함이 떨어지고 비주얼을 받쳐주는 당위성이 약하다보니 짧은 감상이 남는 가벼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문화를 사랑해온 오타쿠가 본인들과 같은 또 다른 오타쿠들에게, 초 가구야 공주!가 말합니다.
있잖아, 계속 들떠서
앙코르를 거듭하며
또 새로운 풍경의 이야기를 그려 가자
-초 가구야 공주 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