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뭐라 할지 모르지만 제일 힘든 시기에 재난지원금(기본소득)과 지역화폐가 그나마 도움이 됐어요.”
지난달 30일 경기 수원 못골종합시장 한 상인은 지역화폐의 효과를 묻는 말에 짧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10년 넘게 장사하면서 이렇게 힘든 때가 없었다”며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성남 모란시장 인근 한 과일가게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선 “지역화폐로 재난지원금을 지급할 때는 도움이 됐다. 오는 손님마다 지역화폐를 많이 들고 왔다”고 귀띔했다.
◆정치권에서 실효성 논란… 현장에선 “가릴 때 아니다”
지역화폐의 실효성을 두고 정치권이 한바탕 홍역을 치른 가운데 경기 지역에선 어느 때보다 지역화폐 활성화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경기도 전역에 지역화폐가 발행된 지난해 4월 이후 1년7개월여 만이다. 전통시장 상인과 소상공인들은 대체로 지역화폐가 도움이 됐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다만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던 때는 지역화폐 사용도 늘었지만 지금은 동력이 떨어진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경기 지역화폐는 올해에만 1조6000억원 이상 발행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불러온 경기불황에 맞서 지난해 발행 규모(5600억원)의 3배 안팎이 쏟아진 것이다. 경기도는 최근 지역화폐로 20만원 이상을 쓰면 도가 3만원의 소비지원금을 더해주는 소비 촉진책을 시작했다. 이런 ‘한정판 소비지원금’ 덕분에 한때 지역화폐 충전량은 하루 2배 이상 급증했다.
지역화폐는 지역사회 구성원 간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대안화폐를 일컫는다. 국내에선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송파 품앗이(1999), 대전 한밭레츠(2000) 등으로 전파되면서 2000년대 초반 70곳 넘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역화폐를 이용했다. 최근 인천시 ‘인천e음’, 대전 대덕구 ‘대덕e로움’, 전남 곡성 ‘심청 상품권’ 등 다양한 화폐도 등장했다. 특히 경기지역 31개 시·군이 발행하는 ‘경기지역화폐’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재명 지사가 성남시장 재임 시절 ‘성남사랑상품권’의 연착륙을 이끌면서 촉매 역할을 했다.
◆경제 격차·불균등 해소 대안… 골목경제 활성화 역할도
지역 간 경제 격차와 불균등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골목경제 활성화를 국정과제로 채택한 것도 확산에 일조했다. 이한주 경기연구원장은 “이 지사는 성남시장 시절부터 기본소득제(청년기본소득)와 지역화폐(성남사랑상품권)를 부분적으로 도입해 왔다”며 “가장 앞장서 실험을 진행 중인 경기도가 주목받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정부가 주는 수당이나 배당, 정책과 일정 기간 사용할 수 있는 지역화폐를 결합해 사용한 건 (국내에선) 처음”이라고 전했다. 이어 “이 지사가 성남시장 시절, 성남시가 보증하는 지역지불수단을 묶어 청년배당, 무상교복, 산후조리원 지원비로 지급하니 반응이 좋았다. 유흥주점, 백화점, 대형매장에서 사용을 제한하고 유통기한은 3∼6개월로 통제해 정책 효과를 높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최근 한국조세재정연구원 보고서로 빚어진 지역화폐 실효성 논란에 대해선 “국내 대표연구원이 지역화폐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직전인 2018년까지의 자료만 모아 보고서를 발표한 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역화폐 전문가인 양준호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조세연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냈다고는 보지 않는다”면서도 “국책연구기관이 내놓은 결과물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게으른’ 보고서로, 발품을 판 흔적이 안 보인다”고 비판했다. 지역화폐 발행 지역의 중소상공인 매출 증가분과 부가가치세 통계를 업종별로 세분해 분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양 교수는 “일본 내 지역화폐는 200개가 넘지만 모두 자립적 발전이 가능했다. 자생력을 갖춘 지역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제로섬 게임이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앞서 조세재정연구원은 지난 9월 조세세정 브리프에서 “지역화폐는 인접 지역을 궁핍화하는 전략으로, 지역화폐 발행으로 소비지출을 특정지역에 가둬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현재 경기도에선 카드·모바일 지역화폐와 지류(종이) 지역화폐가 9대 1의 비율로 발행 중이다. 소민정 경기도 지역화폐팀장은 “카드·모바일 지역화폐는 결제 이력이 남아 원천적으로 ‘깡’이 불가능하다”며 “지류는 어르신이나 단말기 없는 노점상을 위해 9개 시·군에서만 발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소 팀장은 ‘기본소득’과의 연계도 강조했다. “한정된 재원인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지역상권과 공동체를 살리는 핀셋 지원이 가능하다”면서 “기본 매출과 고용 유지, 나아가 콩나물을 사러 동네 슈퍼를 찾듯이 소비자의 소비습관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카드·모바일형이 90% 차지… 해외 언론도 기본소득에 관심
미국과 일본의 주요 언론들은 최근 지역화폐와 연계된 경기도의 기본소득 실험을 집중 조명했다. 미국의 경제전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0월 온라인에 6분44초 분량의 영상 미니다큐멘터리를 공개했다. WSJ는 이 영상에서 “경기도민 일부가 기본소득 실험에 참여 중이며, 코로나19 사태 동안 1300만명에게 기본소득이 지급됐다”고 전했다. 또 “(기본소득의) 지역화폐 사용으로 시장 등에 낙수효과를 일으키고 소비 유입 효과가 가시화됐다”고 덧붙였다.
지난 9월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과 미국의 국제문제 권위지 포린폴리시(FP) 등이 기본소득과 지역화폐를 분석하는 기사를 잇달아 내놨다. 니혼게이자이는 핀란드와 스페인, 미국 등에서 벌어지는 기본소득 실험을 소개하며 “국토보유세나 탄소세, 디지털세 등으로 세수를 확보하면 15∼20년 뒤 (1인당) 월 50만원의 기본소득 지급이 가능하다”는 이 지사의 인터뷰를 전했다. FP는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지급해 소비 진작과 소비 선순환을 견인하는 ‘창의적 해결책’을 내놓았다”고 소개했다.
기본소득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모든 구성원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을 일컫는다. 가구 단위가 아닌 개인별 보장소득이라는 점에서 보편적 복지에 가깝지만 찬반이 맞서고 있다.
이 원장은 “미국과 핀란드, 독일, 캐나다, 스위스 등 이미 많은 나라에서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 중”이라며 “복지국가론이 불평등과 유효수요 부족 등의 한계에 봉착한 가운데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유럽 곳곳에서 기본소득의 일부를 지역화폐로 지급하고 있다”며 “다만 한국형 지역화폐는 과도기를 넘어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시민화폐’로 바뀌어야 한다. 지역 소비 촉진을 유도하는 쿠폰이 아니라 지역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대안 화폐로 진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수원=오상도 기자 sd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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