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였다. 그녀의 귓속을 채우고 있던 파도소리들 사이로 이질적인 것이 끼어든다. 낯익지만 작고 불분명했다. 그러나 희망을 찾던 그녀에게는 천둥보다 큰 소리였다.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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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였다. 이제서야 조금씩 귀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들려온 사촌동생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는 달콤했다. 실낱같은 희망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미아는 다시 눈물을 왈칵 쏟았다.
"로아! 내 말 들려?"
"응"
미아가 있는 힘껏 소리 지르자 로아의 우렁찬 대답이 돌아온다. 한번 트이기 시작한 귀는 빠른 속도로 제기능을 되찾았다. 점점 분명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사실 청력 회복이 현재 상황을 타개하는데 직접적인 도움은 되지 않는다. 대세에 영향이 없는 사소한 변화에 불과한 것이다. 겨우 실낱같이 보이는 희망일 뿐이다. 그러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마음을 희망으로 끌어올리는덴 충분했다. 얇디 얇은 실을 꼭 잡아채 현실로 만들어야한다.
로아가 갖고 있는 단말기를 이용해 보자. 자신의 것은 아무 의미 없이 날려버렸으니.
"그럼 단말기로 어디에 누구든지 도와달라고 연락해 봐!"
미아가 로아를 향해 외쳤다. 그녀의 목이 잠겨 있었던지 사촌 동생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안부를 먼저 물어왔다.
"누나 울었어?"
미아는 괜히 동생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봐. 얼른!"
대답대신 그녀가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로 닥달한다. 로아는 사촌누이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안돼. 사실...... 아까 해봤는데 신호가 잡히질 않아."
'그래. 이미 예상했던 일이야.' 미아는 살짝 실망했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생각해 둔 다른 방법이 있다.
"그럼 대피소로 들어가봐"
로아는 그녀가 시킨대로 대피소로 향한다.
"들어왔어 이제 어떡하면 돼?"
그가 큰 소리로 물었다.
"아마 통신장치 같은 것이 있을 거야. 찾아서 구조대에 연락해봐!"
잠시동안 정적이 흐른다. 로아가 통신장비를 찾고 작동시켜보는데 시간이 걸리는 듯 했다. 물론 다음 대답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돼. 통신 불가라는 메시지만 뜨고 있어."
모든 통신이 불능인 상태다. 이제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아는 힘이 빠지는 걸 느꼈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잡는다.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던질만한 큰 물건이나 밧줄 같은 것이 없는지 확인을 해줘!"
지시대로 로아는 대피소 내부를 뒤적거려 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누나 여기 아무 것도 없어!"
"잘 찾아봐! 정말 없어?"
미아가 자신의 등을 타고 스믈스믈 기어 오르는 불안감을 떨쳐버리며 사촌 동생을 채근한다.
"던질만한 물건은 없고, 안전벨트는 있는데 길지가 않아!"
단호한 동생의 대답. 그녀는 희망의 빛으로 몰아낸 두려움의 그림자가 다시 덮치오는 것을 느꼈다. 대피소에 분명 뭐든 쓸만한 물건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으로 해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녀는 최대한 차분하게 다른 방법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다시 밑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것만 같았다.
차선책은...... 더 이상 없었다.
"누나 괜찮아?"
착한 동생이 그녀의 안부를 확인한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따뜻하게 느껴져서인지 설움이 북받쳐 오른다. 분명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보이지 않고 다가설 수도 없다. 그 사실이 절망감을 더한다. 이럴 바에는 귀가 들리지 않았던 편이 나았다고 속으로 흐느낀다.
"어딨어? 괜찮아?"
로아는 대답없는 사촌 누이가 걱정스러웠는지 재차 안부를 물어왔다. 미아는 답답했다. 위험한 허공에 떠 있는 상황이 괜찮을리가. 괜찮지 않다고 구해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마구 발버둥 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속이 풀리고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다한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로아의 걱정만 키우게 될 것이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 괜찮아. 걱정......"
자신도 모르게 울먹거림이 새어 나왔다. 말을 잠시 멈추고 이래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일러 본다.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사촌 동생까지 같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침과 함께 울음을 목으로 넘긴다.
"......정 안해도 돼. 그러니까......"
몇 마디 이어가지 못하고 다시 말을 멈춘다. 괜찮지 않다는 말이 목까지 차오르지만 억지로 삼킨다. 로아는 대피소로 들어가면 안전할 것이다. 자신 때문에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다. 마음을 독하게 다잡는다. 이를 악물고 평상시 목소리를 연기해 대답한다.
"대피소에 들어가 있어."
오만가지 감정이 부서지고 뭉치고 이내 흩어지길 반복한다.
아까 단말기를 던지는 대신 구조요청을 했다면 통신이 끊어지기 전에 연락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대로 갑작스럽게 중력이 돌아오면 무사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게 공중을 가로질러 반대편 땅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만에 하나 소행성이 포도선에 구멍이라도 내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영화에서 본대로 그대로 빨려나가 영원히 우주를 헤매는 걸까?
미아는 희망과 절망의 경계를 오가며 몸을 웅크렸다. 그때였다.
"누나!"
조금씩 멀어져가던 로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또렷하고 선명한 들린다. 그녀가 눈물 범벅이된 고개를 들자,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로아가 보였다. 이기적이지만, 순간 제일 먼저 그녀를 찾은 건 안도감이었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녀를 위로한다.
그러나 이성적인 사고가 돌아오는데는 그리 오리 걸리지 않았다. 안전한 대피소에서 자기 스스로 뛰쳐나오다니. 그녀는 사촌 동생의 어이없을 정도로 철없는 행동에 화가 났다.
"너? 뭐하고 있는 거야!"
미아가 갈라진 목소리로 그에게 외친다.
"너까지 오면 어떡해!"
그녀가 소리를 지르던 말던 로아는 빙글빙글 웃으며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누나 여기서 뭐하고 있어. 내려 가야지."
로아는 여유있는 표정과 달리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불안감인지, 새로운 상황에 대한 흥분인지 미아는 읽어낼 수 없었다. 이 천진난만한 아이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로아가 무슨 생각으로 올라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동생까지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위험에 내몰린 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멍청아! 이게 무슨 바보 짓이야?"
죄책감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로아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마구 때린다. 로아가 과장된 동작으로 아픈 척 연기를 하며 미소를 짓는다. 억지로 띄운 미소인지 아닌지 그녀로선 알 수 없다.
"아닌데 천재라서 온 건데?"
로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어이없는 말에 미아는 다시 한 번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린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는 동생보다 못하구나. 그녀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 로아가 자신보다 크게 느껴졌다.
"둘 다 위험하게 만드는 천재가 어딨냐......"
한풀 꺾인 목소리로 미아가 흐느끼며 대답한다. 로아는 누이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더니 말없이 그녀의 주변에 방울방울 흩어져있는 눈물을 훔쳤다. 평상 시 같았으면 그녀는 "무슨 닭살 돋는 짓이냐"며 그의 손을 쳐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제 넓은 포도선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그녀의 어린 동생 뿐이었다. 잠시 동안 그들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짧은 침묵을 깬 건 로아였다.
"그럼...... 더 늦기 전에 이젠 해야할 것 같아."
뜬금없는 로아의 말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미처 다른 말을 꺼낼 틈도 없이 로아가 매끄러운 동작으로 자리를 바꾸더니 양발로 그녀를 부드럽고 강하게 밀어냈다.
불시에 일어난 일이라 미아는 미처 대응하지 못한다. 사촌동생의 강한 다리 힘에 그녀의 허리가 크게 한번 뒤로 젖혀졌다. 한순간 숨이 탁 막혀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등 뒤에서 그가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누나! 내가 반대편 땅으로 갈께! 누나는 대피소로 들어가!"
간신히 고개만 돌려 뒤를 바라본다. 로아가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간다. 얼핏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분명한 억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뒤늦게 호흡을 되찾은 미아가 목청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로아!"
그녀의 얼굴이 터져나갈 듯이 붉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아는 야속한 노란 흙먼지 사이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그 순간이 미아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저도 좋아하는데 자주 넣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