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푸른등대의 카샤 상병은 눈을 떴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확실히 기절했다 깨어났단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전혀 기절한 것도 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오랫동안 눈을 감고만 있던 것 같았다. 몸은 모두 잠들었는데 뇌만 멀쩡했던 것 같이, 강제로 명상에 빠졌던 기분이었다.
“깨어났군.”
카샤의 눈앞은 어두웠다. 아주 희미한 빛만이 머리 위에서 내려쬐는 골방. 카샤는 의자에 묶인 채 갇혀있었다. 그에게 말을 건 상대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확실한 건 상대의 말이 가이아어였다는 것 뿐.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가에 뭔가 붙어 봉해져 있었다.
“소리 지르지 않는다고만 해두면 입에 붙은 건 떼 주지. 어차피 소리 지른다고 누가 듣지도 못 하겠지만. 아, 네 갑옷도 전부 해체하고 꺼놔서 음성으로 조작되지도 않으니 헛수고 하지 마.”
어둠 속의 사내가 다가와 카샤의 입에서 뭔가를 떼어냈다. 끈적이는 게 떨어지며 따가운 통증이 덮쳤다. 그래도 사내의 복장을 잠시 볼 수는 있었다. 가이아 검은요원의 복장은 아니었다.
“넌 뭐하는 자냐!”
카샤가 물었다. 그의 말이 골방에 울려퍼졌다. 그러자 사내가 한 손을 카샤에게 내밀었다. 이어서 밝고 작은 번개가 그를 덮쳤다.
“듣기만 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심지어 평생 이걸 직접 경험해 볼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굉장해, 가이우스는. 마르트도 EMP 유도 용도로 밖에 쓰질 못하는데. 너희는 병사마다 개인용 화기로 이런 번개를 쥐고 있군. 네 갑옷을 벗기고 실험적으로 착용해본 건데 이 건틀릿은 주인을 가리지 않는 모양이네.”
전기충격이 휩쓸고 간 전신이 불쾌했다. 소리도 못 지를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본체의 전력이 공급되지 않고 자체적인 전력만 사용했기 때문일 터였다. 전기를 내뿜기만 하고 지속시키지 못 해 몸을 타고 다른 곳으로 전류가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 가장 고통스러운 법이다.
“다행이 죽지는 않는군. 다행이다. 너에게 물어볼 것이 산더미거든. 물론 답변여부는 너에게 달려있다. 결과를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지. 이해했나?”
“고문으로 협박하는 건가? 미개한 짓을 하는 군.”
“미개한 게 아니라 기본적인 거지. 기본적인 게 가장 효과적인 거고. 나도 너와 거래를 하고 싶지만 내가 가진 게 없지. 그래서 네가 가진 것을 뺏어다 인질로 잡고 거래하는 거다. 답을 잘 해준다면, 너의 몸을 멀쩡하게 반납해주마.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한다.”
카샤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내는 그런 그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행성선이 한 대 이곳에 온다지? 전장이나 다름없는 곳에 행성선이 오는 이유가 뭐냐.”
“그걸……가이아인이 어떻게 알고 있지?”
단단한 주먹이 묵직하게 카샤의 복부를 때렸다. 카샤는 몸 안의 공기를 짜내는 소리를 내었다.
“묻는 건 나다. 대답이나 해. 행성선이 가이아로 오는 이유가 뭐냐.”
“……단순한 요새 겸용이다. 불칸과의 장기전에 대비한 보급 목적도 있다.”
“그런 건 전함에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나? 전함의 물자가 부족할 정도의 장기전을 염려한다? 그렇다면 헌병사단이 아니라 전투사단이 왔겠지. 똑바로 말해라. 같잖은 거짓말 말고.”
사내는 다시 카샤에게 전기충격을 주었다. 충격을 맛 본 카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행성선의……목적은……보급이다. 그 뿐이야.”
“그렇단 말이지? 그럼 도대체 너희 전함에 실은 게 뭐기에 그렇게나 물자가 부족해진 거지? 심지어 전함이 한 대 더 오기까지 할 텐데도.”
“……뭐?”
이번에 사내는 번개를 두른 채로 카샤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총 두 번의 충격을 받은 카샤에게 사내가 다시 물었다.
“전함에 실려 오는 것이 도대체 뭐냐고! 시치미 떼지 마라. 확보한 정보가 있어. 가이아에 대체 뭘 설치하려는 거냐! 가이아에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카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내부자가 틀림없다. 이 자가 이 정도 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내부자와 연통했다는 것이다. 그렇대도 이 자는 다 알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말하진 않는 것이 상대를 초조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었다. 무슨 한이 있더라도 말하지 않고 우위를 놓지 않으리라.
“……뭐야, 말하지 않겠다는 거냐?”
“만일 다 알고 있다 해도 네놈 따위가 막을 수 있는 계획이 아니다.”
“그럼 말해!”
“흥, 실컷 발악해봐라.”
사내가 다가왔다. 그러고는 의자에 묶여있는 카샤의 한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체감 통증은 말단부위가 가장 강하지. 한 번 누가 먼저 자제심을 잃나 해보자.”
번개가 카샤의 오른손을 집중적으로 꿰뚫기 시작했다. 사내가 다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덕에 카샤는 비명을 속으로만 질러야 했다.
5-17.
닐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눈앞에서 번개가 반짝였다. 아주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코앞을 스쳤던 것이다. 땅이 아닌 물 위였다면 자신도 감전사 당했을 터였다.
“미친놈들…….”
닐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에게 번개를 쏘았던 푸른등대 병사는 이미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 뒤로 더 많은 인원이 날아오고 있었다. 닐슨은 멀리에 몸을 숨긴 암살병기를 보았다. 전격은 명백히 자신과 가까운 곳을 때렸다. 날아가느라 바빠 잘 못 쏘았다곤 해도, 자신이 맞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뭔가 좀 느껴지나?”
암살병기가 말했다.
“저들이 벌써 공격을 시작했다. 그것도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는 무차별 폭격이었군. 증거로써 부족한가?”
“웃기지 마라. 오인사격일 가능성이 훨씬 높지.”
“그럼 계속 지켜보도록.”
그 말과 함께 암살병기는 숲속으로 사라졌다. 닐슨은 쫓을까 생각도 했지만, 임무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디스플라스를 통해 표시되는 합류지점의 방향을 살폈다. 다른 팀원들을 벌써 인질들과 합류했을까. 계획된 시간은 한참을 지나있었다. 닐슨은 잠시 고민하고 직접 무전을 취하기로 했다. 무전을 켜고 얼마 있지 않아 그는 동료들이 연락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전이 먹통이었다.
욕지거리를 뱉으며 무전을 끄는 순간, 닐슨의 옆에 있던 나무가 벼락에 맞았다. 닐슨은 크게 놀라며 번개가 날아온 곳을 보았다. 푸른등대 병사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 쪽 손을 지면으로 겨누고 있었다. 닐슨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더 깊숙한 숲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 번개가 한 줄 날아와 그의 등을 때렸다. 다행히 번개에 맞은 것은 P.C.S.였다. 그 시험용 장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졌고 닐슨은 충격을 받고 엎어져버렸다.
닐슨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충격이 몸 안으로 전달되었는지 입 안에서 시큼한 맛이 느껴졌다. 그러나 몸의 충격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자신이 피격당했다는 사실이었다. 기능을 잃은 P.C.S.와 들지도 못 할 중화기를 벗어버리며 닐슨은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자신이 공격당한 것인가. 이번에도 오인사격이 아닐까. 암살병기나 자신이나 가이아인처럼 생긴 건 사실이니까. 그의 의문을 해결해 주려는 듯, 한 푸른등대 병사가 내려왔다.
닐슨은 나무 사이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등대 병사는 짧은 시간 닐슨은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가 손을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닐슨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역시나 그가 서있던 곳에 번개 한 줄이 지나갔다.
“……엉?”
이게 뭔가. 어째서 이러는 것인가. 정말 자신을 공격한 것인가. 이유가 뭔가. 무슨 일인가……. 온갖 질문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덕분에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질문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푸른등대 병사는 대답하질 않고 다시 그를 노리기 시작했다. 닐슨도 대답듣기를 포기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것도 자신 있는 그였다. 번개보단 빠르게 달릴 순 없어도, 생물의 반응 속도보단 빠를 자신이 있었다.
다만, 푸른등대의 기술력이 한 수 위였다.
“커억!”
좌반신을 훑는 고통스러운 저림. 번개는 그를 쫓아와 때렸다. 닐슨은 온 몸이 경직되며 땅에 몸을 박았다 그를 향해 푸른등대 병사가 다가오며 말했다.
“이것이 너희가 쓰는 재래식 무기와 같다고 생각했나, 가이아인? 전격은 에너지의 유도를 따라 움직인다. 그 유도를 너의 정보체에 지정해두기만 하면 반드시 따라가지. 그 정도 거리에서 우리의 손아귀를 벗어나겠다는 오만함이 우습군.”
“허억……. 왜, 왜 나를 공격하는 거지?”
닐슨은 간신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병사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없는 것이 편리하니까.”
“뭐?”
“답할 이유는 없지.”
병사의 팔에 전기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닐슨이 각오를 하고 눈을 감는 순간,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닐슨이 올려다보자 두 사람이 겹쳐있는 것이 보였다. 앞에 선 것은 여전히 푸른등대 병사였다. 그의 팔에 튀고 있던 전기불꽃은 사라져 있었고 그는 땅에 가만히 선 채로 굳어있었다. 그 뒤에 ‘업혀’있는 것은 닐슨과 싸우던 암살병기였다.
“무, 뭐어야?”
닐슨이 웅얼거렸다.
“내려찍었지. 나무를 타고 오르는 것만으론 고도가 부족해, 출력을 높여 도약했다. 그 탓에 하반신에 약간의 이상이 생긴 것 같군. 그래도 확실히 급소 두 곳을 으깼다.”
암살병기는 병사의 등 위에서 내려오며, 병사의 목덜미와 가슴팍을 끌어안고 있는 팔을 풀었다. 열기와 피가 엉겨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낫이 팔과 함께 뽑혀 나왔다.
“이제 이건 쓸 수가 없군. 역장과 갑옷을 뚫는 과정에서 균열이 생겼다. 일부 조각도 체내에 유실되었다.”
암살병기는 팔뚝의 낫을 집어넣으며 닐슨에게 손을 내밀었다. 닐슨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직접 일어섰다.
“빚 졌다는 표정 짓지 마라. 그저 우리가 너희의 ‘적의 적’임을 인지시켰을 뿐이다.”
“웃기고 있네. 미안하지만 우리는 삼각관계야. ‘적과 적과 적’의 관계라고.”
닐슨은 흙먼지를 털며 죽어 쓰러진 푸른등대 병사를 보았다. 그는 얼굴을 강하게 찡그리곤 깊은 한숨을 뱉었다.
“……‘닐슨 빌바오(Neilsen Bilbao)’다.”
“그런가……. ‘에스알두 마누에우 데오도루 다 꾸냐(Eduardo Manuel Deodoro Da Cunha)’였다.”
5-18.
“이게 다 어떻게 돌아가는 일이야?”
하진이 혼란스러워했다. 은비는 늠름하던 언니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기가 슬펐다. 그 혼란을 자신이 가중시켰다는 데에 죄책감이 생기기까지 했다.
은비는 자신이 처음으로 암살병기를 만났을 때를 그녀에게 설명해야 했다. 암살병기가 자신을 살려주며 했던 말을 알려줘야 했다. 인상만큼은 강렬히 남았던 그 말. 이해가 되지 않아 잊은 줄 알고 있었던 전언. 흑인 암살병기가 던져준 한 단어가 그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발리스가 전했던 말이었다. 발리스가 은비를 지지한다고 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한 세력의 중심이 은비 개인에게 우호적이라고 한 것이었다.
“생존시켜 보호한다. 우리는 최초 지시 이후 이것만은 이행하고 있었다. 다른 불확실한 대상들은 물론 방해 대상은 전원 제거했다. 동족의 의심을 피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려, 우선 이곳 내에서는 다른 개체와 동등하게 대하였다. 교전 중 발생한 보호 미흡에 대해선 사과한다.”
“……말이 돼? 사건 현장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인솔 중이던 감신자들과 요원들을 죽였어. 민간에 피해를 줬어. 현장을 연구하던 연구원들도 습격했어.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너희 때문이야! 심지어 해안에선 공격까지 가했잖아!”
“오해가 있다.”
“무슨 오해!”
“최초 교전 시엔 ‘차후 지시 전까지 성적의 요구를 이행하라’는 지시만이 있었다. 보호대상이 지정된 이후 지시가 교체되었다. 민간 습격은 세력 확장에 필요했다. 사상자 발생은 의도치 않았다. 전함 기록은 은폐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연구 중이던 현장에서 사상자는 발생시키지 않았다. 너희의 격추는 마르트의 전자기펄스가 원인이다. 당시 우리의 목적은 성적의 제거였을 뿐이다. 해안 사격은 보호대상의 은닉이 목적이었다. 그로 인한 사상자는 없으며, 동시에 너희와 보호대상은 우리의 보호 하로 들어왔다.”
“감신자들은! 무고한 피해자들이야! 검은요원들은! 그……그 녀석은…….”
“별도지시였다. ‘보호대상을 제외한 감신자들은 제거하라’였다. 이 지시만을 이행했다. 부가적 피해는 성적의 영향, 혹은 사고였다.”
“뭔데, 니들 목적이. 도대체 왜! 이 불쌍한 아이를 이렇게까지 괴롭히고! 사람들을 죽여 가며! 이 행성에 억지로 들어와 깽판을 치는 이유가 뭐냐고!”
하진의 외침에 암살병기는 침묵했다. 다행히 하진의 인내심이 모두 불타 사라지기 전에, 암살병기가 입을 열어주었다.
“……너희에게 말해도 좋다는 지시가 전달되었기에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기밀 사항임을 명심해 달라.”
“당장 말해!”
“발리스의 목적은 단 하나다. 가이아의 메시아다.”
“메시아 시스템? 너희 침략과 그 기술이 무슨 관련이 있는데? 그게 왜 우리 행성과, 우리와 관계가 있냐고!”
그 때 갑자기 인드히가 은비에게 다가와 귀에 있던 번역기를 잡아챘다. 은비가 작은 비명을 지르자 하진이 그를 돌아보았다. 인드히는 말없이 하진에게 번역기를 집어 던졌다. 그는 용감하게도 하진의 앞에 직접 섰다.
“하나 말해주겠네 요원. 우선, 이 섬에서 탈출하는 것을 우선시 하세. 진실이야 이야기 할 시간은 많지. 덧붙여 말일세, 메시아 시스템에 ‘기술력’은 필요 없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것은 행성 보호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고도의 기술 집약체입니다!”
“행성을 돌덩이와 광선으로부터 보호하는 데에는 대기권으로도 충분하네. 공기에 기술은 필요 없지. 그렇고말고. 그것보다 내가 한 말부터 들어주게. 여기서 나가야하네. 지금 이 섬에 푸른등대가 상륙해왔네.”
하진은 그제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떠있는 수송선과 푸른등대 병사를 본 하진의 얼굴이 미세하게 밝아졌다.
“그렇다면 급히 나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로봇들은 제거될 겁니다. 저희는 곧 있으면 구조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가 않는단 말이지. 아직 이 섬에 마르트의 전사들이 있을 것이 분명한데, 벌써 천둥소리가 들려와. 그 전사들이 그리 쉽고 빠르게 전장을 내주었을 리가 없는데 말이지. 아마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는 데에 집중하는 게 아닌가 싶으이.”
“무슨 뜻이십니까?”
“낙서를 지우기 힘들 땐 새로 덧칠해버리면 그만이란 뜻이지. 어서 움직이세! 내 가이우스를 잘 아니 하는 말인데, 우리가 직접 스스로를 구출하는 편이 나을 걸세. 이보게, 불칸의 병기! 이젠 어느 해안으로 가면 되는 것인가?”
“……동쪽이다.”
5-19.
“현재까지 마르트와의 교섭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불칸과의 국소적인 충돌 또한 현재 진행 중에 있습니다.”
“가이아 요원들의 구출 여부에 대해선 들어온 보고가 있나?”
“정확한 보고는 없었습니다. 대신 불칸과 접촉 중에 가이아인이 목격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교전 시에 주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알았다. 이어지는 내용은 차후 보고할 수 있도록.”
푸른등대 전술타격대대장이 보고를 마치고 지휘부를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고 난 후 헤서만이 말했다.
“들으신 대로 당장의 전투는 없습니다. 아직 가이아 측 요원들의 구출도 완료되지 않은 것 같긴 합니다만.”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칸이 유리해지겠죠. 그들은 끊임없이 제작되니까.”
퀑이 끼어들었다. 검은요원 간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석연치는 않은 표정들이었다. 그 표정을 읽은 헤서만이 말했다.
“저희도 그 섬을 통째로 격리, 진압시키는 안은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가이아 측에 생겨날 피해는 무시하기 힘듭니다. 마르트와의 충돌은 둘째 치더라도 말입니다. 검은요원 측에서는 직접적인 교신이 없습니까?”
“네. 저희의 교신 장비는 불칸의 방해전파에 영향을 받는 모양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민간인의 사망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합니다만…….”
‘자신들의 책임이 더 늘어나는 건 싫다 이건가.’
이곳에서 발생한 사건. 그 여파로 생겨난 감신자들 모두 한 사람을 제외하곤 사망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인적 재산의 손실도 적지 않을 터였다. 유례없이 큰 피해에 하급 요원들 중 사건 후 후유증을 호소해 임무에 참여시키지 않는 인원이 생겼을 정도라고 한다. 실상 푸른등대가 주둔하지 않았다면 몇몇 지휘관들의 처분이 즉각 시행되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감신자같은 주요 인물 한 명이라도 살려준다면 어느 정도 보상은 될 터. 헤서만은 자신들이 이들의 구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모든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저는 잠시 직접 교신할 내용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양해바랍니다. 다음 상황 보고 이전까지는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헤서만은 지휘부와 작전통제실을 나왔다. 복도에는 푸른등대 병사들이 가운을 뒤집어쓴 채 서성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헤서만을 향해 다가왔다.
“특이사항 있나?”
“실종된 카샤 상병의 행방은 아직 추적중입니다. 우선 장비는 해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어째서인지 자의적으로 해체한 것으로 인식되어, 위치 추적이 되지 않습니다.”
“상대는 불칸일 수 있다. 인원과 수색 범위를 늘려. 피로해하는 인원은 교대시키도록.”
“호위의 수를 줄여도 괜찮겠습니까?”
“오히려 모여서 돌아다니는 편이 안전하겠지. 수색을 하면 상대의 활동반경을 제한할 수 있다. 다만 사각이 없게끔 수색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본선에는 특별한 교신이 없나?”
헤서만이 갑자기 말의 억양을 바꾸었다. 그와 대화하던 병사는 그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가이우스 공용어가 아닌 지역 언어였다. 병사는 그와 같은 억양의 말로 답했다.
“지원하기 위한 함선이 곧 도착할 겁니다. 동시에 행성선이 가이아 제3방공구역 외부 좌표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장치’의 나머지 부품은 지원 함선 내에 선적돼 있을 겁니다.”
“도착 내용은 비밀로 유지하고 있겠지?”
“네. 함선 도착을 신호로 작전을 시작하라는 지시도 내려왔습니다.”
“그래, 도착 후에 발각당할 일은 없겠군.”
두 사람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중, 멀리서 희미한 굉음이 들려왔다. 헤서만이 무슨 일인가 판단하는 사이 검은요원 몇 명이 급하게 그를 스치며 달려갔다. 잠시 후 일반적인 복장이 아닌, 두껍고 질긴 방호복을 입은 요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요원들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헤서만은 근처에 달려가던 요원을 한 명 붙잡았다. 그는 약간 민감해진 표정으로 헤서만을 잠시 훑어보더니, 재빠르게 올곧은 경례 자세를 취했다.
“무슨 일 있나?”
“네, 그렇습니다! 저희 지부 외각 차량 통로 중 한 곳의 입구에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화재가 동반되어 즉시 진화작업에 착수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알았네, 가보게.”
“네, 알겠습니다!”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으로 요원이 저만치 달려갔다.
“이곳에 통로가 하나 더 있던가?”
“전대장님이 이용하신 통로는 비행용 통로입니다. 육상 이동수단을 위한 통로는 따로 있는 것으로 듣긴 했습니다. 총 3개라는 것 같습니다.”
“통로는 수색했나?”
“통로 자체는 이곳 건물과 마찬가지로 지하에 매설되어 있습니다. 입구는 지형에 맞추어 위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현재 폭파가 일어난 곳으로 조사인원을 파견해. 가능한 필요인원만 투입해. 눈길을 끌기 위한 수작일 수 있어.”
“지시하겠습니다.”
“그러도록. 결과는 곧바로 나에게 알려. 내가 없으면 프로스 퀑 대리대사에게 보고해도 좋다.”
“알겠습니다.”
푸른등대 병사는 다른 인원들 사이로 사라졌다. 헤서만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납치당한 자도 저 친구와 같이 일개 병사다. 그 병사를 납치해서 얻는 이득이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일까. 가능성은 있지만 알아낼 수 있는 데에 한계가 있을 것이 뻔했다. 일개 병사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디서 무얼 하는가 까지다. ‘왜’는커녕 다른 것도 알아낼 수 없는 정보원을 납치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폭파를 일으킨 것도 동일인물, 혹은 동료일까. 단순한 시선끌기인가 아님 뭔가 숨은 뜻이 있는 건가. 단순한 파괴공작이라고 하기에는 공격위치가 틀렸다. 성문을 두드리기만 하고 들어오지 않는 공작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오히려 자신의 위치만 드러내는 꼴이 될 것이다. 숨겨진 통로 입구도 알 수 있을 정도라면 차라리 몰래 걸어들어와 중심지를 폭파시키는 것이 확실한 텐데.
알 수 없는 짓을 하는 자가 있다. 그로 인해 헤서만은 찝찝한 기분을 놓을 수가 없었다. 완벽하고 깔끔하게 진행되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자잘한 생채기가 생기고 있었다. 더없이 말끔한 곳에 생긴 잡티는 오히려 거대한 균열보다 거슬리는 법이다. 헤서만은 찡그려지는 눈살을 표정 밑으로 감추었다. 그는 다시 뒤돌아 작전통제실로 들어갔다. 당장 이곳에 문제가 새로 생겼으니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5-20.
은비와 하진, 인드히는 흑인 암살병기를 앞에 두고 걷고 있었다. 사실 훈도 있었으나 그는 하진과 은비가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물론 걷지는 못하고 들려서 끌려가고 있었다.
“언니, 저 위에 날아다니는 사람들이 뭐에요?”
“푸른등대. 알고 있나?”
“들어는 봤어요.”
“우주의 경찰이야. 정확히 말하면 경찰의 역할과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사단이 따로 있지. 지금 저 위에 있는 건 헌병사단일 거야. 우리은하 안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제지하고 진압하는 사람들. 그리고 은하 밖에서 싸우는 전투사단도 따로 있어. 우리은하 전역을 담당하는 군대야. 알기 쉽게 말하면 UN 평화유지군 정도? 거기야 사실 힘이 세지도 않지만.”
“은하 전역의 평화를 담당한다고는 하지만, 어설프긴 마찬가지지.”
갑자기 인드히가 끼어들었다. 다만 번역기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건 하진 뿐이었다.
“구성원이라고는 약간의 지샤흐인을 제외하곤 모두 가이우스인. 심지어 직접 전투에 나서는 인원은 가이우스인 뿐이며 그 외 종족을 고려한 전투 장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네. 지휘관들은 사실상 은퇴 후 가이우스 원로회로 흘러가며, 가이우스 외교관과 푸른등대 지휘관들은 다수가 학우. 가이우스 주민들이 거주하는 행성선 또한 푸른등대가 관리하고 있다네. 은하의 군대가 아니라네. 사실상 가이우스의 군대라 이걸세.”
“외교관님, 지금 저희가 이런 상황이라 이 아이에게 번역기를 넘겨주지 못…….”
“미안하네만 자네에게 하는 말일세, 요원.”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저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들의 목표는 가이우스의 뜻에 달려 있다네. 절대로 정의니 뭐니 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 이걸세.”
“그렇다하더라도 저들은 우군입니다. 오히려 외교관님의 지시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불칸은 더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저도 섬에서 우선 탈출해야 한다는 말씀에는 찬성입니다.”
“그래, 불칸은 믿을 수 없지. 자네가 겪은 대로 마르트도 믿을 수 없어. 조금 더 나아가 보아도 되겠는가? 내가 말한 대로 푸른등대도 믿을 수 없지. 그 위에 있는 가이우스도 믿을 수 없어. 지금 이렇게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나도 믿을 수 없을 것이야. 지휘실수로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남긴, 자네가 속한 집단의 지휘부라고 해도 믿을 수 있겠는가? 말해보게. 지금 진심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집단은 있나? 믿을만한 개인도 많지 않잖은가? 지금은 결코 평시가 아니라네. 단순히 전시라는 의미가 아닐세. 이번 사건은 겉보기에도 거대하지. 자네도 자네 동료들도 모두 겪을 일이 없어야 할 일들을 겪었어. 허나 그 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일지 자네는 아는가?”
“무슨……뜻인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자네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다고 생각하나? 단순히 성적과 불칸이 사고를 친 겐가? 하지만 그 사고는 거대했어. 필요이상으로 말일세. 그리고 성적과 불칸이 쭉 함께 했는가? 아니란 것은 자네 또한 하늘을 날아오며 목격했지 않은가? 불칸이 성적을 위해 온 것이 아니란 사실도 직접 확인했지 않나. 지금 이 상황은 지금껏 자네가 알아오고 믿어온 세상과는 다르게 흐르고 있다네. 그 사실을 깨닫게나.
자네는 임무에 바빠 다른 곳에 정신을 쏟지 못 했겠지만 아마 무언가 이상하단 것을 느낀 자들도 분명히 있을 걸세. 아, 그들처럼 의심하는 데 굳이 시간을 투자하란 말이 아니네. 말했다시피 우리는 이곳을 빠져나가기도 벅차니 말일세. 그저 지금의 세상에 대한 믿음에 자그만 구멍만 뚫어놓으란 말이네. 그 틈새로 보이는 진실을 무시하지 말게나. 그렇다고 곡해해서도 안 되네. 그저 구멍을 좁힐 것인가 넓힌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네. 결국 자네는 틈새를 없앨 수도 있고, 구멍 뚫린 벽을 없앨 수도 있겠지.”
하진은 대답이 없었다. 인드히도 굳이 그녀의 답변을 기다리진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을 은비가 슬쩍 살펴보았다. 인드히는 앞서 가 흑인 암살병기 뒤에 바짝 붙어있었다. 하진은 뭔가 고뇌에 빠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비는 자신이 아무 것도 듣지 못 하고, 알지도 못 하고 있는 게 도움이 된 건가 하고 생각했다. 하진처럼 알 수 없는 고뇌에 빠질 기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멈춰라.”
앞서가던 암살병기가 갑자기 멈춰 세웠다. 나무 사이로 해안이 희미하게 보이는 위치에서였다. 암살병기는 사람들을 멈춰 세우곤 조용히 앞서나갔다. 곧 다시 돌아온 암살병기가 말했다.
“목적에 두었던 수송기가 해안에 착륙해 있다. 하지만 푸른등대에 의해 포위당해 있더군. 내부 조종사의 생존 여부는 알 수 없다. 해안에 매복 중이던 우리 측 전투 개체들도 모두 무력화 되어 있다.”
“그것이 자네들이 생각한 합류 지점이었는가. 어찌할 생각인가?”
“목적은 변동이 없다. 탈취한다.”
“병력을 투자할 생각인가? 어차피 많이 있지 않나.”
“병력은 많지 않다. 일반 전투 개체는 현재 푸른등대의 활동을 방해하는 데에 전부 투입되어 있다. 나와 같은 개체들은 다른 수단으로 이 섬에서 탈출할 계획이다. 이미 준비 중인 개체가 다수다.”
“암살병기들이 탈출? 무슨 뜻인가? 발각되었으니 이곳을 버린단 겐가?”
“그렇다. 저 수송기에는 보호대상이 탑승한다. 우리 측이 사용할 수송 계획은 일반 생명체가 사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이아 측의 선제공격을 막을 수도 있다.”
“허나 빼앗겼지 않는가?”
“다른 계획이 진행 중이다. 그 전까지는 대기다. 다만 당장은 다른 문제가 발생했군.”
그 말과 함께 암살병기가 인드히에게 달려들어 뒤를 잡았다. 은비와 하진은 무슨 일이냐 묻기도 전에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인드히는 인질이 된 것이었다. 협상 상대는, 숲에서 갑자기 나타난 몇 명의 푸른등대 병사들이었다. 일행은 갑자기 포위당한 것이었다.
“불칸의 병기, 미안하네만 효과가 미비할 것일세.”
“현재 유일한 방책이다. 협상은 네가 원하는 대로 진행해라. 빈틈을 잡을 것이다.”
“효과가 없을 거라니까 그러네. 차라리 내가 아예 말로만 구슬리는 편이 낫겠군.”
“그럼 해라.”
인드히가 크게 헛기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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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쌔신 크리드 유니티 트레일러를 돌려본 횟수만 벌써 두 자릿수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