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9년 4월17일 오후 7시14분]
- 랩 15/21
- 순위 3
- 1위 -4.05초
- 2위 -1.57초
- 4위 +0.89초
- 코너링 오차 +0.0025rad
현의 오른쪽 망막을 통해 상태 메시지가 간략하게 떠올랐다. 그가 메시지를 보며 선두와 시차를 체크하는 사이 스타팅 포인트에 위치한 현장 객석이 우측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앞으로 남은 6랩 안에 두 녀석을 제칠 수 있을까?’
1위까지 4초. 오늘 같은 경기에서 4초는 극복하기 힘들 정도로 큰 차이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보다 먼저 제 1 코너에 접어드는 지구 뮌헨 팀의 황금빛 날개를 쫓았다. 녀석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다. 뒤이어 현의 눈 위로 제 1 코너 위로 숫자가 떠오른다. 운행 보조 장치가 진입 시간을 계산해서 띄운 것이다.
- 제 1 코너 접근까지 50, 48, 42, 38……
현은 코너링 보조 시스템의 숫자가 줄어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시스템의 보조를 받으며 기체의 속도를 코너 진입에 맞추기 위해 천천히 줄인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안정적인 속도로 진입할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그가 잠시 벌린 틈새를 비집고 왼쪽 뒷편에서 검은 기체가 불쑥 끼어 들어온다. 미처 대응하지 못한 현의 기체가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자리를 비켜주고 말았다. 검은 기체 위로 떠 있던 숫자 4가 이내 3으로 바뀐다. 아까부터 꽁무니에서 계속 귀찮게 굴던 화성 런던팀 녀석이다.
“빌어먹을 까마귀 자식이!”
기습에 당한 것이 분했는지 현이 거칠게 외쳤다. 그러자 그를 조롱하듯, 놈의 검은 색 날개 끝에 달린 추진기가 파랗게 점멸하다 붉은색으로 바뀐다. 감속 표시다. 코너를 앞두고 안쪽 코스를 차지한 다음 속도를 줄여 현을 막아 서려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녀석보다 더 깊은 안쪽 코스로 진입해 훼방을 놓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놈의 옆구리를 콱 들이받고 말 것이다. 성질대로 했다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둘 다 레이스를 접어야 할 판이었다.
현은 잠시 성질을 죽이고 냉정하게 판단해보려 노력했다. 앞선 경기에서 성질대로 했다가 얼마나 때려 박았던가. 충돌은 더 이상 반복하면 안 된다. 냉정하게 작전을 세워 볼 필요가 있었다.
- 우측 코너 충돌 주의. 감속 필요.
평소와 달리 머리를 쓰려고 한 탓일까. 그는 감속 시점을 한 박자 놓치고 말았다. 감속 필요 메시지를 보며 현은 혀를 찬다. 여기서 안전을 위해 감속하면 순위가 한 순간에 몇 계단 아래로 밀릴 것이다. 6랩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순위가 3위권 밖으로 밀려났다간 선두와 영원히 안녕이다. 현은 잠시 발끝에서부터 식은땀이 몸을 거꾸로 타고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아직 여유 있어’
재빨리 평정심을 되찾는다. 여기서 당황하게 되면 정말 경기를 접어야 한다.
일반적이라면 안정적인 코너링을 위해 지금이라도 속도를 줄여야 했다. 감속 시점이 늦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낮은 속도로 진입해야 안정적으로 코너를 탈출할 수 있다. 허나 그럴 경우, 방금 전에 판단한 대로 눈 앞의 런던 까마귀를 놓칠 뿐만 아니라 레이스 내내 뮌헨의 황금 날개를 다시 볼 가능성도 없어질 것이다.
코너가 가까워지고 점점 생각할 여유가 사라진다. 이렇게 된 이상 선택지는 하나였다. 비참하게 주저앉아 순위가 밀리던지 늘 그래왔듯이 레이스 전체를 걸고 승부를 내던지. 모 아니면 도.
코너로 진입하면서 그는 감속하는 대신, 발치쪽 날개에서 느껴지는 보조관절을 힘주어 크게 들어올렸다. 그리고 발끝에 달린 추진기의 출력을 최대치로 올려 가속도를 더 붙인다. 우측 코너에 진입하기 전에 미리 우측으로 회전 가속을 주어 코너 탈출 속도를 최대로 끌어올릴 셈이었다.
- 주의! 과도한 기동으로 신체 손상 우려됨.
눈 앞에 빨간 글씨가 떠오른다.
‘신체 손상 따위’
현은 메시지를 무시하고 그대로 오른발을 바깥으로 꺾어 코너링 속도를 최대한 살리고 회전력을 실었다. 그의 순백색 기체가 빨려 들어가듯 코너로 진입한다. 현은 발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중이 허리로 집중되면서 가해지는 부담이 장난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뼈마디가 부러질 것만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낸다. 덕분에 오른발쪽 날개 끝이 레인가이드 홀로그램 패널을 스치듯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다. 날개에 매달린 추진기에서 나오는 열에 홀로그램 패널이 녹아내리며 하얀 불꽃을 몇 차례 튀겼다.
진입할 때 속도를 거의 잃지 않은데다 회전 가속이 붙어 오히려 속도가 붙은 현의 기체가 화성 런던팀의 기체보다 먼저 코너를 탈출한다. 현은 그대로 바깥에서 안쪽 코스로 들어서면서 검은 기체의 앞 길을 막아선다. 화성 런던팀의 기체는 어쩔 수 없이 감속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레이스 정보 표시에 순위가 4에서 3으로 바뀐다. 허리가 뻐근한 것 빼고는 완벽한 코너링이었다.
비교적 무난한 제 2,3 코너를 통과하니 쭉 뻗은 가속 코스가 나타난다. 직선 가속의 관성력이 현을 강하게 압박한다. 잠시동안 이를 악물고 버텨내자 이윽고 최대 속도에 도달한다.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겼다. 여유가 생긴 동안, 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이마에 맻힌 식은땀을 떨쳐냈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요란한 목소리가 현의 청각을 타고 들어왔다.
“너 임마 그렇게 하면 지난 라운드랑 똑같이 된다! 제발 완주를 목표로 하라고!”
팀 감독 인후였다. 그가 흥분해 닥달하는 목소리에 골이 울린다.
“시끄러. 차단해버리기 전에 기체 서포트나 제대로 해.”
현이 무성의한 목소리로 툭 내밷었다. 인후는 전혀 살갑지 않은 그의 반응에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다.
“뭐 이 자식아?”
인후의 목소리 톤이 한급 더 올라간다. 그 동안 경험한 바에 비추어 볼 때 더 이상 인후와 통신해봤자 좋을 게 없다. 게다가 현은 좀 더 집중하고 싶었다. 이대로 방해를 받는다면 아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말리라. 현은 신경과 직접 접속된 연상 인터페이스를 통해 인후의 음성 전달을 차단하고 메시지를 날렸다.
- 방해된다. 남은 6랩 지켜보기만 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한다.
그 사이 가속 코스가 끝난다. 현은 윗방향으로 급하게 펼쳐진 상방향 제 4 코너를 진입을 위해 팔과 다리를 뒤로 뻗어 몸을 활처럼 꺾었다.
인후는 팀 내부 대형 홀로그램 모니터에 현이 보낸 메시지가 떠오르자 손에 쥐고 있던 프리젠테이션용 단말기를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최근 몇 경기 동안 정신을 좀 차리나 싶었더니 지난 경기부터 다시 망나니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속이 터진다.
“야! 저 자식 알아서 하게 냅두고 아무 서포트도 하지마!”
인후는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바람이라도 쐬고 싶다. 그대로 스태프들에게 의미 없는 지시를 내리곤 전략실을 뛰쳐나간다.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어봤자 어쩌지도 못할 테니 미련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감독이랍시고 자리를 지키면서 화면만 쳐다보다간 울화통이 터져서 제 명에 못 죽겠다 싶었다.
“똥멍청이 같은 자식!”
인후가 문을 발로 걷어차며 나가 버리자 나머지 스태프들이 잠시 술렁거린다. 그러나 연례행사가 끝난 것마냥 금새 조용해진다. 물론 인후의 마지막 지시대로 계기 조작을 멈추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열받아서 마음에 없는 말을 쏟아낸 것을 다들 잘 안다.
레이싱 팀 전략실을 뛰쳐 나온 인후는 로비로 걸음을 옮겼다. 로비 입구에 들어서자 한 여자가 허공에서 나타나 인사를 건네며 옆에 사뿐히 내려선다.
“안녕하세요. 우주 최강의 박진감과 스릴을 여러분께 드립니다. 어서오세요. 포뮬러 R-5615입니다!”
로비의 천장에 설치된 홀로그램 프로젝터에서 투사한 영상이다. 비록 홀로그램이지만 실제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진짜 사람처럼 보인다. 숨쉬는 것처럼 어깨가 가볍게 들썩이며 피부에 살짝 비치는 솜털이 흔들리는 것까지 영락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로비에 있는 사람들 옆에는 어김없이 똑 같은 모습을 한 여자가 하나씩 붙어있지 않았다면 홀로그램이라고 믿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봤자 가짜.’
인후는 홀로그램의 속눈썹이 자연스럽게 떨리지는 것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홀로그램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포뮬러 R-5615는 2056년 1월5일에 발의한 화성 협의체 가니메데 개발 선언문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대회입니다. 대회에 사용되는 R 머신은 길이 3미터에 폭 0.5미터의 크기와 총 4개의 날개와 8개의 관절로 이루어진 기체입니다. 고성능 원자 융합기가 동력원인 R 머신은 추진기의 개수가 16개이기 때문에 16개 방향으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녀가 손을 뻗자 공인 기체의 모형이 손 위에 떠오른다. 인후는 지긋지긋한 기체를 또 보고 싶지 않아 바닥만 바라보면서 어그적어그적 걸음을 옮긴다.
“레이서와 신경 접속을 통해 레이서는 기체를 자신의 몸처럼 느끼게 됩니다. 예전에 지구에서 이루어지던 F1 머신이 선수의 운동신경과 신체능력에 좌우되는 요소가 강했다면, 포뮬러 R-5615는 선수의 기량이 반사신경과 판단력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체를 조종하는 신경 접속 기술은 최근 3세대 일반사용자 단말기에도 적용되어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은 기술이 되었습니다. 특히 연상 인터페이스는 그 중에도 단언컨대 꽃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연상하는 것만으로 모든 명령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전화 걸기나 받기, 메시지 작성 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실현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사례를 통해 포뮬러 R-5615의 최신 기술이 어떤 식으로 일상생활에 녹아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터페이스 여성은 인후의 뒤에 바짝 붙어 그와 함께 이동한다. 그 와중에도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현재 여러분이 계신 우주 정거장 ‘푸른하늘’호에서 열리는 이번 14회차 대회는 달 궤도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소행성 서킷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인후는 홀로그램이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하면서 로비의 구석으로 향한다. 그가 향하는 로비 모서리에는 기다란 벤치와 사람보다 더 큰 원형 관측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인후는 벤치에 걸터 앉으며 관측창을 통해 바깥을 바라본다. 큼지막한 달과 그 옆으로 인공으로 만든 소행성지대가 아련하게 보였다. 소행성지대의 트랙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간헐적으로 빛이 번쩍인다. 레이스가 후반에 접어들면서 무모한 도전을 하는 선수들의 사고가 계속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현은 걱정되는 마음이 살짝 들었지만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떨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