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비틀어진 나무들 사이로, 7월의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고글을 쓰고 있었지만, 오후의 햇빛을 완전히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오늘 오전 내내 먹을 것을 찾으러 주변의 대형 마트를 들쑤시고 다녔지만, 굶어 죽은 쥐새끼 한 마리 찾지 못했다. 게다가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혹시라도 돌아오다 비를 맞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발걸음을 돌리는 데 입맛이 썼다. 이제 여기서 더 이상 먹을 것을 구하기는 힘들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조만간 은신처를 옮겨야 되리라. 그러면 어디로? 다른 곳은 지금 은신처만큼 안전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이래저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슴이 조금 답답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바로 오존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기분이 찝찝해서 침을 뱉은 뒤, 물병에 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공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물맛도 시큼했다. 공기에 섞여있는 산성 입자들 때문에, 물은 대개 퍼 올린 지 하루 정도만 지나도 맛이 가버렸다. 가방을 뒤져 베이킹 소다를 꺼낸 뒤, 물병에 약간 집어넣고 흔들었다. 좋아. 내렸던 마스크를 다시 코까지 올리고 발을 뗀다. 앙상한 가지만 덥수룩한 덤불 너머로 이상하리만치 푸르른 담쟁이덩굴들이 잔뜩 덮인 건물들이 으스스해 보였다. 구멍이 듬성듬성 뚫린 포장도로를 따라 걷는다. 이제 공기에 습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비가 곧 올 거라고 생각돼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길 한구석에 방치된 채 퍼진 차가 보였다. 혹시나 가져갈 만한 게 있나 싶어 다가갔다. 운전석 문과 트렁크는 활짝 열려 있었고, 썩어버린 시트는 살짝 건드리자 아래로 퍼져버렸다. 타이어도 성한 것 없이 다 주저앉아 있었다. 배터리나 엔진 같은 거라도 가져갈 요량으로 본네트를 열었지만, 이미 먼저 온 손님이 있었는지 그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만 깔끔하게 텅 비어있었다. 오늘만 두 번째 허탕이다. 입맛을 다시고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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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이는 한 시간째 뚱해 있었다. 원래 이럴 때 핸드폰을 쥐어주면 혼자 게임 따위를 하다가 풀어지곤 했지만, 공교롭게도 배터리 충전을 깜빡 잊고 하지 않아 핸드폰도 오늘 오전부터 쭉 꺼진 상태였다. 급한 대로 마음을 달래주려 사 준 아이스크림도 몇 입 먹지 않은 채로 다 녹아버렸다.
“문석아”
조용히 이름을 불러봤지만, 문석이는 단단히 토라졌는지 날 돌아보지도 않았다. 답답한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야속한 마음도 잠시 들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계속 강짜를 부리는 문석이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슬며시 문석이의 손을 잡았다. 큰아들은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한참을 가만히 그러고 앉아 있었다. 지하철은 덜커덩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머리 위 스피커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나왔다.
[이번 역은 마포, 마포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지석이는 이름이 매우 길고 어려운, 또 그 애를, 그 이름보다 더 길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게 만들 병이 있었다. 지석이가 세 살, 문석이가 다섯 살 때 일이었다. 그 때부터 우리 부부의 생활은 지석이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나는 연구실을 해산했다. 세미나를 나갈 때도, 강의중에도 항상 휴대폰을 들고 있어야 했다. 동료 교수들은 내 사정을 이해해주었다. 그러나 모두 이해해준 것은 아니었다. 퇴출되지는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입지가 좁아졌다.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이정도 희생은 감내할 수 있었다.
지석이를 위해 자신을 포기한 사람은 나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문석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첫 등교 날, 지석이는 네 번째 발작을 일으켰다. 문석이는 그날 학교에 한 시간 반이나 늦게 가야 했다. 지석이의 발작은 시도 때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문석이를 칭찬해주고, 혼내고, 때로는 타이르고, 함께 웃어주고, 사진으로 추억을 남길 시간까지 모두 지석이에게 쏟아 부어야 했다. 그 때마다 문석이의 마음속에서는 서운함과 야속함이 쌓이고 쌓여 오늘 이렇게 폭발한 것이리라.
어제 나는 큰 결심을 했다. 여태껏 한 번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문석이의 생일을 맞아 가족외식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문석이는 뛸 듯이 기뻐했다. 지석이도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지석이의 발작이 또 시작되었다. 하필 그 날 오후 네 시였다. 아침까지는 지석이의 상태가 괜찮았기에, 우리는 더 당황했다.
“이번엔 발작이 심하게 왔군요.” 지석이를 본 의사가 말했다.
“선생님, 심하다니요?”
“축삭이상교반증 때문에 신경계 전체가 교란이 왔어요. 조금만 늦었으면 심장이며 폐까지 다 엉망진창이 될 뻔 했어요.”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아내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다. 의사는 계속 말했다.
“아 걱정하지는 마세요. 아드님의 가슴이랑 머리 뒤에 꽂은 핀 보이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뗄 힘도 없었다. “저걸로 아드님의 신경 상태를 바로잡아 줄 겁니다. 그 심장이 뛰게 하는 그런 거요. 오늘 하룻밤 푹 재워 보고, 내일 다시 경과를 지켜봅시다.”
안도감으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로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지석이의 간호는 아내가 하기로 했다. 나는 문석이를 데리러 갔다. 문석이는 병원 1층 로비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서 옆에 앉았다.
“지석이는요?”
“괜찮을 거래. 내일 아침에 퇴원할거야.”
“그럼 오늘 저녁은요?” 문석이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지석이에게만 정신이 팔려 또 문석이와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나는 문석이와 눈을 맞추려,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고 입을 열었다.
“문석아. 지석이 퇴원하면 내일 먹으러 가자.”
“또 내일이에요? 내일도 지석이가 아프면요? 그 다음에 갈건가요?”
“문석아.”
“어차피 안 갈 거잖아요. 예전에도 그랬잖아요. 맨날 같이 가준다고 해놓고 거짓말이었잖아요. 운동회도 안 왔잖아요. 부모님 오시는 날에도 다 안 왔잖아.” 문석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문석아.”
“아빠랑 엄마는 맨날 거짓말만 하잖아. 맨날 다 해준다고 해놓고 지석이가 아프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하잖아!” 문석이는 마침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나는 미안해서 문석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문석이는 말없이 일어나 병원 문을 향해 걸었다. 나는 말없이 그 애의 뒤를 따라갔다.
[이번 역은 신정, 신정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나는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문석아.”
문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아빠랑, 남자끼리 맛있는 거 먹자. 오늘.”
문석이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요?”
“그럼. 오늘 아빠가 문석이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말만 해. 엄마랑 지석이한텐 비밀로 하자. 남자끼리의 약속이야.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그냥, 다 좋아요.”
순간 문석이에게 맛있는 것 하나도 못 사줬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오늘만큼은 이 아이를 데리고 번듯한 레스토랑 같은 데는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아빠랑 최고 맛있는데 가자.”
“정말요?”
“그래.”
나는 웃으면서 문석이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 때였다. 갑자기 뻑 하는 굉음이 들리면서 지하철 불이 꺼졌다.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단순히 겁에 질려서 내는 비명도 있었지만, 그 중에서는 고통 때문에 흘러나오는 절규도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바로 큰아들을 품에 안았다. 갑자기 바뀐 상황 때문에 겁을 먹었는지, 문석이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작은 팔이 내 허리춤을 껴안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문석이는 별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눈이 어둠에 적응되자, 이곳저곳에서 손이나 다리춤을 부여잡고 나뒹구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닥은 깨진 조명과 이상한 유리나 금속 파편들이 정신없이 널려 있었다. 옆에 앉은 남자가 가방에서 박살난 핸드폰 테두리 쪼가리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볼썽사나운 플라스틱 조각 아래로 실처럼 뭔가가 죽 끌려나왔다. 남자는 경악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문석이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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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점점 거세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하늘도 황갈색 빛을 띠기 시작했다. 아직 은신처까지는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오존 냄새가 옅어지면서, 콧속이 말 그대로 바늘로 찌르는 듯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징조가 좋지 않았다. 5~10분 내로 비가 쏟아질 기세였다.
나는 재빨리 등에 매고 있던 더플백을 열었다. 난삽한 잡동사니 사이를 뒤져 비닐로 된 호흡관 끄트머리를 끄집어냈다. 그것을 죽 당겨 콧구멍에 꽂았다. 그리고 쓰고 있던 외투 위에 후드가 달린 두꺼운 티셔츠를 뒤집어썼다. 이 후드 티는 마음에 들었던 놈인데, 계속 입으려면 비를 안 맞기를 기도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 위에 대충 아무 거나 둘러친 다음, 홀쭉해진 더플백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로 비끄러 멘 공기총이 절그적절그적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느낌이 아주 거슬렸지만 고쳐 멜 시간은 없을 듯 했다. 몇 달 전에 버려 버린 방수 코팅 우의가 절실했다. 하긴 그것도 몇 달이 지나고 나니 걸레짝이 되어 할 수 없이 버렸지만.
계속 뜀박질하면서, 만일의 사태-생각보다 비가 빨리 올 때-에 대비해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건물들은 저 짜증나는 덩굴 때문에 손만 대면 바로 무너질 기세였다. 어떻게 저런 덩굴들은 비 맞고도 멀쩡한지 궁금했다. 한때 저걸 엮어서 우의를 짜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덩굴은 베어내면 몇 시간 내로 시들어서 쓸모가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호흡관을 꽂은 쪽의 콧속도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1분 내로 주변의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서 비를 피할지, 아니면 멍청하게 뛰어가다가 한 줌의 핏물로 사라질 건지 결정할 시간이 왔다. 그리고 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저만치 앞에 그나마 벽이 깨끗한 건물이 보였다. <조하수ᅟᅵᆨ하윈>이라는 다 떨어진 간판과, 다 깨진 유리문이 보였다. 거기까지는 한 200미터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어떻게 달렸는지도 모르게 단숨에 달려갔다. 그새 내린 비 몇 방울이 어깨나 손, 팔 등에 떨어졌다. 비가 떨어진 자국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천장 아래로 다이빙하듯이 뛰어들어갔다. 바닥으로 죽 미끄러지며 무릎 언저리에도 비 몇 방울을 맞았다. 재빨리 장갑으로 털어내고, 장갑과 위에 둘러멨던 옷가지들을 벗어던졌다. 더플백을 뒤집어 흔들어, 안에 있던 물건들도 모조리 꺼낸 뒤 호흡관을 입으로 불어 혹시라도 안에 고여있을지 모르는 것들을 털어냈다. 조금 짭짤한 것 같았지만 기분탓이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아까 넣은 소다 때문인지, 아니면 살았다는 안도감 덕분인지 물맛은 아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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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이를 안고, 어떻게든 신정역 밖으로 나왔을 때, 역 앞에는 지옥도 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처박혀 있었고, 곳곳에서는 연기가 피어나왔다. 뭔가 타는 소리와 다치거나 겁먹은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주변에 가득했다. 문석이도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다고 달래주면서, 일단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병원에 있을 아내와 지석이가 걱정되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병원으로 방향을 돌릴 수는 없었다. 우선은 집에 가서 휴대폰을 충전시키면 병원에서 연락이 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 문석이를 안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도중 본 도로 위는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아비규환이었다. 피를 흘리며 보도로 기어나오는 사람들, 불이 붙기 시작하는 차량 주변에서 황급히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로 몸 어딘가 끼었는지 못 나오는 이가 절규하고 머리 위의 전신주에서 나는 타닥거리는 소리와 연기는 한 폭의 완벽한 지옥도였다. 나는 문석이의 머리를 감싸안고 집을 향해 질주했다.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 남았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하늘은 노을보다 훨씬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 분 정도 달려갔을까, 숨이 턱에 찰-나는 운동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무렵, 갑자기 굉음이 들렸다. 틱틱거리던 전신주들에 일제히 불꽃이 튀고, 유리 깨지는 소리도 어디선가 들려왔다. 갑자기 어지럽고 메스꺼워 발을 멈췄다. 눈 앞에 볼록렌즈를 가져다 댄 것처럼 사물이 온통 이지러져 보였다. 문석이가 토할 것처럼 기침을 해서 잠시 내려줬다. 그래도 그는 토하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간신히 몸 상태가 진정되자 나는 문석이를 다시 업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겨가며 집에 도착했다. 달갑진 않았지만, 예상한 대로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집 안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냉장고는 딱 봐도 양쪽 옆구리가 부풀어 오른 게 뭔가 이상해 보였고, 거실에는 공기청정기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일단 지쳐 잠든 문석이를 소파에 눕힌 뒤, 집에 있던 여분의 배터리를 핸드폰에 끼웠다. 부재중 전화이던, 아니면 다른 메시지던 간에 아내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8시였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무래도 다시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았지만, 문석이를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집 안에 혼자 놔둘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비규환인 길거리를 다시 걸어가는 것도 문석이한테 좋은 것 같지 않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헤드폰을 꺼내 문석이에게 씌운 뒤,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장롱에서 포대기를 꺼내 문석이와 나를 칭칭 감았다. 이렇게 해서 자전거라도 타고 갈 요량이었다. 다행히 옆집의 자전거가 계단참에 묶여 있었다. 잠시 빌려도 뭐라 하진 않겠지.
병원 안은 밖만큼이나 아수라장이었다. 응급실만으로 모자라 로비에까지 피칠갑인 사람들로 가득하고, 그 사이로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보였다. 여기도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나는 비틀거리며-문석이를 업고 오는 것도 힘들었다.-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은 사람도 없고, 조명도 없어 어두컴컴했다. 거기에다 지석이의 병실은 12층이었다. 이미 숨은 턱에 닿았지만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마지막은 거의 기다시피 해서 12층까지 도착한 뒤, 조심스럽게 지석이의 병실의 문을 열었지만, 그곳에는 전원이 꺼진 기계들과 텅 빈 침대밖에는 없었다. 돌연 불안감이 들어 고개를 돌렸을 때-
다시 굉음이 들렸다.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 있던 조명등이 다 나가 버렸다. 아까 전 그것 때문인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장소가 높아서 그런가, 아까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럽다. 필사적으로 잠에서 깨어 우는 문석이를 풀어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비틀대며 병실에 딸린 화장실로 향했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세상 모두가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다리가 휘청 하고 꺾였다. 코 밑으로 뭔가 따듯한 액체가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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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째 비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빗물이 바닥과 벽을 때리는 소리와 비 냄새가 내 머리를 아프게 한다. 나는 비가 그칠 때 까지 이 곳 잔해를 뒤져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건물이 깔끔해 잘하면 뭔가 주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등을 돌리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얼마나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층 한 층 훑어 올라갈 생각이었다. 건물의 구조는 한 쪽 면에 계단이 있고, 그 계단 오른쪽에 그 층 로비가 있는 식이었다. 그리고 로비 양 옆으로 조그만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방 문을 열어젖히자, 나무가 썩어가는 군내와 곰팡이 내가 섞인 공기가 물씬 풍겨온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마스크를 올렸다. 방 안에는 제멋대로 널부러진 다 썩어가는 책상과 걸상이 보인다. 발로 잔해를 이리저리 치워가며 혹시나 무언가 있는지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쇠로 된 부분도 멀쩡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녹슬어 끊어진 모양새가 있는 게 방치된 지 오래 된 장소 같았다. 다른 방도 대동소이했다. 1층은 허탕이라는 생각이 들어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은 개판이었다. 한쪽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복도까지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여긴 아무래도 탐색하기는 글렀다. 라는 생각이 든다. 3층으로 발을 옮기는데, 한구석에 자동차 배터리가 전선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위에 살고 있다.
목 뒤가 서늘하다. 온 털이 곤두 선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평화로운 탐색이 아니었던 거다. 다행히도 빗소리 때문에 위엣놈들은 내 기척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운이 좋았군. 나는 더플백을 내려놓고 장비를 점검했다. 짧게 자른 정글도는 바로 뽑을 수 있게 허리춤에 꽂았다. 그리고 공기총을 꺾어, 쇠구슬을 넣었다. 장전하는 소리라도 들릴세라 조심스럽게. 아닌게아니라 정말 조심해야 한다. 계단은 팔꿈치와 무릎을 이용해 기어올랐다. 3층 어림으로 올라가자, 복도 끝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누운 상태로 고개를 살짝 내민다. 끝에 불빛이 보인다. 지금 저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 새된 목소리 한 놈, 그리고......맞장구치는 목소리가 들리는군. 적은 최소 두 놈. 조용히 총구를 앞으로 밀어넣고 포복 전진하려고 하는데, 약간의 저항감이 들었다. 그리고 빈 깡통이 요란하게 맞부딪히는 소리. 망했다. 초보적인 알람 부비트랩 따위에 걸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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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이마에 흥건한 땀을 수건으로 훔쳤다. 두 시간쯤 파내려가자 꽤 적당한 크기의 구멍이 파였다. 가로 2미터, 세로 70센티미터...... 눈대중으로 쟀지만 깔끔한 사각형 모양이었다. 나는 코를 한번 훌쩍이고,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푹, 푹. 삽이 땅에 박히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공중에 붕 뜬 기분이었다. 이제 세상 모든 일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인다. 푹, 푹, 푹. 가끔 손에 삽질이 익지 않아서 그런지 손이 미끄러질 때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꾸준히 팠다. 삼십 분 정도 더 파내려간 뒤, 나는 허리를 폈다. 햇살은 바늘처럼 내 맨살을 찌르고 있었다. 하늘은 온통 구름이 낀 것 같이 희무죽죽했지만,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햇살은 계속 내리쬐고 있었다. 저만치서 문석이가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눈을 감았다. 땀이 흘러내려 눈으로 들어갔는지 눈이 시큰했다. 눈물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미 흘릴 만큼 흘렸으니까.
아내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
그 날 이후로, 세상은 180도로 바뀌었다. 그 날 우리의 생활을 안락하게 만들어주었던, 모든 전자기기들은 고철로 변했다. 태양풍의 자기장이 전자회로를 과부화시켰다......라는 정도의 설명을 들었다. 내가 짐을 정리하러 학교로 향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전자공학과였나, 하여튼 그 쪽 교수의 말이었다. 나는 그 쪽으로는 문외한이라 내가 들었던 설명을 정확히 이해했다고 자신하지는 못한다. 아무튼, 전기가 사라지면서 우리의 사회는 멈췄다. 사태 발생 후 3일이 지나자 관공서는 모두 문을 닫았다. 그 날의 사고로 환자는 넘쳤다. 사람들이 쓰던 휴대폰은 그들의 손 안에서 폭발했다. 자동차 내부의 라디오와 내비게이션은 차 내부를 완벽하게 작살내는 폭탄이 되었다. 병원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수술실과 수술 도구 등 모두 전기를 쓰던 것이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건, 간단한 응급처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응급처치만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없었다. 발전소도 먹통이 되었다. 길에 보이는 전신주들은 타다 만 성냥처럼 윗부분이 새까맸다. 당연한 수순으로 통신도 두절되었다. 우리는 이제 정부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어떤 대책을 세웠는지는커녕 정부의 공식 발표라곤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온통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누군가는 소위 높으신 분들이 저들만 살겠다고 이미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고 했다. 길거리에서는 심판의 날이 다가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다녔다.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물론 사회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또한 많이 있었지만, 가히 세기말이라 할 법한 상황이었다.
이보다는 조금 더 작은 문제이지만, 우리 가족들에게는 큰 사건도 그날 일어났다. 아내의 말로는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의사는 지석이가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그를 살리려고 주렁주렁 달아 놓았던 생명 유지 장치가 거꾸로 속을 다 튀겨버렸다고 했다. 아내는 정신이 들었다 나갔다 하는 듯 계속 횡설수설했다. 의사가 지석이의 시신을 보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문석이는 기절한 엄마 옆에 두었다. 아무래도 문석이와 아내 모두 서로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영안실 내로 들어가자, 한구석에 누워 있는 지석이의 시신이 보였다. 생각보다 지석이의 상태는 깨끗했다. 코에서 말라붙은 피거품이 살짝 보였다. 나는 소매에 침을 묻혀, 코 밑의 잔해를 깨끗이 닦아주었다. 지석이의 표정은 평온했다. 부디 좋은 곳에서 아픔없이 살기를.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숨죽여 오열했다. 그 뒤의 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도 아직 작동하는 소각장에 연락이 닿아, 지석이의 장례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지석이를 잃고, 아내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나는 미쳐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쇠약해진 아내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문석이를 건사해야 했다. 주변 상황도 그렇게 좋지 못했다. 5일 정도 이어진 폭동과, 이곳저곳에서 자주 벌어지는 다툼들. 그리고 상황이 더 낫기를 바라며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는 이웃들까지. 동네는 점점 텅 빈 집과 아파트로 가득 찬 유령도시처럼 되어버렸다. 주변 환경도 나빠지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기침을 자주 했다. 오후 2시만 되면 목 안이 컬컬하고 가래가 잔뜩 나왔다. 사람들은 아무래도 공기가 나쁜 것 같다고 했다. 기침을 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며칠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일주일쯤 지나자 노인들이나 아이들이 피를 토하고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짐을 싸 더 공기가 좋은 시골로 향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아내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한번 폐가 손상되자, 다음 과정은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며칠 뒤 아내는 숨을 거뒀다. 그녀는 눈을 감으면서 문석이를 데리고 여기를 떠나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힘없이 떨어지는 손을 잡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이마를 어루만지며 밤이 새도록 울었다. 내가 마침내 아내를 떠나보낼 결심을 한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이제 구멍은 내 허리 어림만한 깊이가 되었다. 이 정도면 되겠군. 나는 문석이를 불렀다. 아내는 흰 천에 감싸여 있었다. 어렵사리 구한 천이었다. 문석이는 아내의 발을 잡고, 나는 아내의 어깨 근처를 잡았다. 무거웠을 텐데, 기특하게도 문석이는 힘들다고 칭얼거리지도, 마냥 징징거리면서 울지도 않았다. 내리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완전히 구덩이 안으로 내려놓은 뒤, 나는 먼저 아내의 가슴에 흙을 덮었다.
“문석아.”
문석이는 말없이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엄마한테 잘 계시라고 인사해야지.” 이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나도 놀랄 만큼 쉬어 있었다. 문석이는 영문을 모르는 눈이었다. 문석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약간 거슬렸다.
“문석아.” 나는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문석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마 큰 상처를 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함과 슬픔이 북받쳐 올랐다. 다시 아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 결심했는데, 그 결심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문석이를 부둥켜안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문석이는 조용히 내 몸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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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신 속으로 욕을 하며 2층으로 단숨에 내려갔다. 기분 탓인가, 위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당황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는다. 일단 숨을 고르고 조용히 생각을 하기로 했다. 적은 최소 두 놈. 정면 공격으로는 승산이 없다. 그러려면 남은 방법은 기습밖에 없는데... 생각하자. 생각.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계단. 난간 쪽으로 바짝 붙으면 저 놈들은 내려오면서 나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몸을 바짝 웅크리자. 좋아. 나는 총구를 살그머니 올려 누구라도 내려오면 바로 쏠 수 있게 고정했다. 놈들의 무장 상태를 몰랐기 때문에 긴장감으로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땀을 닦아낸다. 중요할 때 미끄러지면 곤란하다. 숨을 가늘게 내뱉는다. 등골 어림도 흠뻑 젖는 것 같다.
“이상하다, 분명 소리가 들렸는데...”
“아래로 내려가 봐 이 멍청아!” 하며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야! 어디서 명령질이야!”
“하! 쫄았냐? 비켜 멍청아! 내가 내려갈 거니까!” 킬킬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계단참을 뭔가로 훑고 내려오는지 땅땅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얼른 나와 이 새끼야! 빗속에 처넣어 줄 테니까! 아니다, 야! 남자일까, 여자일까?”
이 놈들은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아니면 미쳤거나. 느리지만 꾸준히 소리는 커지고 있었다. 입 안이 바짝 마른다. 일단 다가오는 것은 한 놈. 보이는 즉시 쏜다. 한 방에 골로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나는 밑에서 쏘고 있으니까 머리를 노리기는 힘들겠지. 그러면 무릎이다. 무릎을 맞춰서, 계단 아래로 거꾸러트리자. 굴러 떨어지는 중에 목이 꺾이면 베스트. 아니면 바로 얼굴을 걷어찬다. 그 후 1층으로 내려가서 교실에 숨자. 거기서 침착하게 한 발 더 장전한 뒤 나오면 되는 것이다.
과연 생각대로 될 것인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해야지 뭐. 사실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제대로 된 적은 몇 번 없었지만, 뭘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바로 옆 계단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나는 숨을 멈췄다. 총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개머리판을 어깨에 바짝 대고, 아래로 튀어나온 부분은 겨드랑이로 강하게 감싼다.
땅.
머리 위로 불쑥 찌그러진 알루미늄 야구방망이 끄트머리가 튀어나온다. 놈 중 하나는 일부러인지 야구망방이로 난간을 쳐 소리를 내며 내려왔다. 압박감을 느껴 튀어나오길 바라는 걸 수도. 나는 몸이 최대한 보이지 않게 난간에 매달리다시피 바짝 붙었다. 위엣놈은 설마 바로 시선을 내려다보이면 보이는 계단 옆에 내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안했는지 태평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원래 회색인지 더러워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꼬질꼬질한 발싸개로 감싼 발 하나가 불쑥 보인다. 좋아. 좀 더 내려와....
땅.
방망이는 내 머리 위에 있다. 좋아 한 걸음 더 내려와라 이 새끼야.
땅.
빵!
퓩!
좋았어. 깔끔하게 무릎에 맞았다. 놈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그 놈에게 달려가 얼굴을 걷어차려고 했다. 놈의 얼굴에 발 끝이 닿았을 때, 나는 커다란 파열음을 들었다. 이어서 핑 소리와 함께 오른 뺨을 뭔가가 세차게 후려친다. 나는 빙글빙글 돌며 바닥에 미끄러졌다. 고글 끈이 끊어진 모양이다. 고글은 비가 들이치는 복도를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나도 몸을 주체 못하고 벽에 기댔다. 어라, 이건 계획과는 다른데. 일이 틀어졌다. 생각보다 두 놈 사이의 간격은 가까웠나 보다. 계단참 위에는 또 다른 놈이 총을 겨누고 서 있었다. 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이제 확실히 난 망했다고 생각했다. 왼쪽 시야가 붉다. 이윽고 놈이 입을 열었다.
“무기 버려, 이 AH77I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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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는 오래 버텨주긴 했지만, 문석이의 기침도 이젠 가만히 놔둘 수 없을 정도로 잦아지자 나는 이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다행히도 내 차는 엔진오일과 휘발유를 적당히 넣어주자 잘 굴러갔다. 나는 거의 반 년 동안 모아 놓은 식료품들과 옷가지 몇 개, 그리고 유사시 쓸 도구 약간을 차에 싣고 남쪽으로 가기로 했다. 몇 개월 전 아내가 죽은 뒤로 문석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문석이가 뭔가 잘못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지만 지금 당장 문석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떠오르지 않아, 바람직한 아버지가 할 짓은 아니지만 눈앞의 문제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휘발유는 많았다. 사람이 떠난 주유소에서 얼마든지 퍼다-작동하지 않는 주유기를 뜯어내고 아래의 기름탱크에서 직접 퍼다가- 쓸 수 있었다. 식료품이 많지 않은게 마음에 걸렸다. 하긴 넉넉하게 구할 수 없었다. 지금 세상에서 제일 구하기 힘든 게 바로 음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양도 감지덕지다. 어른 하나와 아이 하나, 아껴 먹는다면 한 달은 버틸 만한 양이었다. 쓸모없는 전자기기를 빼낸 집 안은 휑뎅그레했다. 이젠 이 집과도 이별이군. 나는 문석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문석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여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쭉 내려간 지 3시간정도 되었을까-눈까지 내리는데다, 엉망진창인 길을 이리저리 헤치고 가느라 빠르게 속도를 내지 못했다.- 나는 앞의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 엄청난 인파가 서울을 향해 밀려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차 속도를 줄였다. 며칠동안 씻지 못했는지 다들 꼬질꼬질한 입성으로, 저마다 배낭을 메거나 혹은 리어카를 끌고, 아니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우리가 온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행렬은 마치 중학교 시절 교과서에서나 본 6.25당시의 피난민 같았다. 나는 경적을 울렸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이 움츠려서 길을 내 주었다. 그 와중에 피난민 행렬에서 벙어리장갑을 낀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앞유리창을 두드렸다.
“이보쇼! 차 돌려요! 차 돌려!”
나는 차를 멈추고 차창을 열었다.
“댁들 지금 어디로 가는지는 아쇼?”
“남... 아니, 부산으로 갑니다.”
“하! 부산.” 남자가 코웃음쳤다. “이보쇼, 당장 차 돌리는게 좋을 거구만.”
“뭔 일이라도 났습니까?”
“말도 마쇼. 지금 밑에는 생지옥이오. 2년째 잠잠하다가 무슨 악마가 들렸는지, 영광이랑 고리에 있는 원전이 터졌단 말요. 지금 낙동강 이남은 끝장났수. 내가 댁이라면 당장 차 돌려서 도로 돌아갈거요.”
“하...”
“나도 천안에서 소식 듣자마자 바로 짐 싸서 올라오는 길이요. 뭐, 죽고 싶으면 내려가슈. 그건 댁 마음이니께.”
“......고맙습니다.”
“흐흥.” 사내는 가래침을 퉤 뱉었다. “조심하쇼.” 그리고 그는 다시 행렬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막막하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까. 우선은 앞서 사내의 충고대로 다시 서울로 향하는 것이 가장 나을 듯 싶었다. 당장 차를 돌려서 가고 싶었지만, 좌우로 피난민들이 너무 많아 방향을 돌리는게 쉽지 않았다. 나는 차를 가만히 세우고 피난민 행렬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우리를 힐끗 보고는 피로에 찌든 얼굴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피난민들의 행렬은 너무 느렸다. 먹지 못하고 오래 강행군을 해서 지친 몸이 원인인 듯 했다. 그래도 시간이 한참 지나자, 이제 피난민 행렬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대부분 비쩍 마른 아이들과 여자들 혹은 노인들이었다. 부족한 식량 사정은 남부지방도 마찬가지였는 듯 그들은 두 눈이 퀭하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힘없이 비틀비틀 걷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지만 나는 우리에게 식량이 있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숨기기로 결심했다. 혹시나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먹고 우리에게 해코지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문석이한테도 단단히 일러두었다. 문석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 피난민 행렬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 때, 해골 같은 아이를 안고 걸어가는 여인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여인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여인은 차 앞으로 비척비척 걸어와서 문에 매달렸다. 나는 즉시 문을 잠갔지만, 여인이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물 좀 주세요. 저는 상관없어요. 애한테만... 벌써 3일째 물을 못 마셨어요. 제발...”
그 옆에서 탈수 때문인지 축 늘어져 있는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6살 남짓 되어 보였다. 나는 여인에게 거부의 표시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탁해요! 저는 필요없다잖아요. 애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제발 애를 구해주세요. 제발.” 여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불안감 때문인지 말도 점점 빨라졌다.
“이 저주 받을 새끼야! 너도 애가 있잖아. 애 가진 인간이...”
그 때, 문석이가 문을 덜컥 열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생수병을 건넸다.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병과 문석이를 번갈아 보았다. 문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여자는 연신 울면서 고맙다고 읇조렸다. 그리고 재빨리 차에서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보는 내 마음속은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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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총구가 아른거린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이렇게 대치한지 한참 지난 것 같았다. 계단 아래에 엎어져 있던 사내가 몸을 움찔했다.
“아우우우우우....” 사내의 신음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때, 계단 위에 있는 놈이 다시 재촉했다.
“못 들었어, 새끼야? 무기 버리라고!”
침착하자. 나는 총을 든 놈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일단 총을 내려놓는다. 어차피 공기총은 짧은 시간에 장전이 안 된다. 그리고 계단 앞에 엎드려 있는 놈이 정신이 드는 것 같은데, 완전히 일어나기 전에 처리해야 하지도 않을까. 나는 몸을 숙이면서 총을 내려놓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순간,
나는 고개를 살짝, 아주 살짝 아래쪽 계단 방향으로 틀었다. 그리고 2초간 정지. 역시, 걸려들었어. 내 얼굴을 보던 놈은 멍청하게 내가 바라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바로 돌진했다. 당황했는지 놈이 총을 쏜다. 총알은 허공을 갈랐다. 다행히 천장과 벽이 푸슬해서 그런지 도탄은 나지 않았다. 나는 놈의 명치를 어깨로 들이받았다. 그대로 뒤로 넘어가면 좋았으련만, 버티더니 팔꿈치로 내 등을 찍는다. 눈앞에 별이 번쩍했다. 생각보다 힘이 좋았다. 나는 왼손으로 허리춤에 꽂아 놨던 정글도를 뽑아서 바로 놈의 옆구리에 내질렀다. 한 방, 두 방, 세 방, 그리고 비명. 총을 든 손 쪽 옆구리를 찔러 팔을 제대로 못 들 거다. 바로 오른손을 쳐내 총을 떨구자, 그 서슬에 나와 엉켜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옆구리가 시큰시큰한 게 어디 모서리에 제대로 찍힌 모양이다. 그래도 놈은 힘이 빠져 맥을 못 추는 것 같았다. 바로 그놈을 뒤집어 칼로 어깻죽지를 휘저어 주었다. 그 뒤 바로 목을 그을 심산이었지만, 갑자기 엄청난 충격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아까 무릎을 쪼개버린 놈이 어떻게 비척비척 일어나 알루미늄 배트로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코에서 피가 나고 머리가 띵했다. 눈에 초점이 맞지 않는다. 이런 망할.
“이 7HAH77I야!”
다시 배트가 날아온다. 나는 필사적으로 피했다. 몸이 제대로 가누어지지 않아 자꾸 벽에 부딫힌다. 벽에 등을 기댔다. 놈은 다시 배트를 휘두르려고 몸을 뒤튼다. 그 때 놈의 뒤편으로 비가 들이치는 복도가 보였다. 생각과 동시에 몸이 나갔다. 나는 돌진해서 그 놈을 빗속으로 밀어넣었다. 갑자기 모든 게 느릿하게 보인다.
빗방울이, 놈의 옷 위로 떨어진다. 옷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살갗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살을 녹이고 피와 뒤섞인다. 순간적인 상황에 놈의 입에 헤벌어진다. 그리고 비명.
“으아아아아악! 살려줘 제발!!” 그놈은 손을 허우적거리며 복도를 빠져나오려 했다. 나는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밀어차기를 먹였다. 그 때문에 그는 바닥에 빗물이 고여 있던 곳에 정통으로 자빠졌다. 비명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래 끓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남자는 침묵했다. 복도와 계단참은 피투성이었다. 떨어져 있는 정글도가 보인다. 나는 비틀대며 걸어가 정글도를 주웠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지. 아직까지 머리가 띵하고 붕 떠 있는 것 같다. 나는 쭈그려 앉아 엎어져 있는 놈 위에 올라타 그의 머리를 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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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에 섬칫한 기분이 들어 선잠에서 깨어났다. 피난민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기다리다 깜빡 잠든 모양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도로변에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보조석 창문 옆을 두드리는 실루엣이 보였다.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다시 바라보자, 아까 문석이가 물을 건네 준 그 여자였다. 나는 창문을 살짝 열었다.
“뭐죠?” 잔뜩 긴장해서 그런지 불퉁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샐쭉 웃었다.
“아까 주신 물 때문에 왔어요. 꼭 보답하고 싶어서요.”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거절했다.
“됐습니다. 그냥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창문을 다시 올리려고 했다. 그 때 갑자기 여자가 창문 틈 사이로 손을 끼워 넣었다. 나는 흠칫 놀라 다시 창문을 내렸다. 그것을 노린 걸까, 여자는 갑자기 힘주어 창문을 내리눌렀다. 내려가던 방향에 여자가 힘을 더하자 창문이 갑자기 쑥 꺼졌다. 여자는 바로 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차문을 열어젖혔다.
“지금이야!”
그러자 어디 숨어있었는지 부랑자 행색을 한 사람이 튀어나와서 문석이를 끌어냈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문석이가 잠에서 깼는지 몸부림치는 것이 보였다. 순간 눈이 확 뒤집혔다. 나는 바로 차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그 때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잡았다, 이 새끼야!”
누군가가 자루 같은 걸로 내 머리를 덮어씌운 것이다. 그 손은 바로 내 목을 조르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굶어서 그런지 힘이 약했다. 목을 조르는 손은 뿌리치고 주변을 닥치는대로 붙잡았다. 손에 뭔가가 걸렸다. 감촉으로 보아 내 목을 조르려 했던 그 손인 듯 했다. 나는 손목을-너무 앙상해서 깜짝 놀랐다.- 잡아 비틀었다. 비명이 들리고, 갑자기 뭔가가 명치를 세게 때렸다. 나는 숨을 헉 들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두 팔을 마구 휘젓다가 운 좋게 누군가의 얼굴을 잡았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눈이 있을 만한 부분을 세게 짓눌렀다. 곧 나를 붙잡고 성가시게 하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 나는 자루를 벗어젖혔다.
눈을 부여잡고 울부짖는-분노 때문인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것 같은 형체가 보인다. 그 뒤로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여자의 엉덩이 뒤로 문석이의 작은 발이 보인다. 아마도 올라타서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나는 차 안을 보았다. 차 안쪽을 뒤지는 지저분한 놈팽이의 머리 위로 비죽이 솟은 골프채가 보였다. 나는 망설임없이 골프채를 뽑아 꺼냈다. 차를 뒤지는 놈은 눈앞의 음식 깡통에 눈이 멀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내가 골프채를 가져가도 눈치채지 못한 듯 싶었다. 나는 그년의 뒤로 소리없이 다가가서-
골프채를 휘둘렀다. 골프채는 여자의 두개골을 반쯤 부수었다. 빠르게 주검을 걷어내자, 문석이가 목을 쓰다듬으며 콜록댔다. 보아하니 우리를 습격한 놈들은 너무 오래 굶은 탓인지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문석이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뒤, 아직도 상황이 끝난 줄 모르고 차 안을 뒤지는 놈을 끌어냈다. 놈은 차 안에서 통조림을 따 입에 게걸스럽게 집어넣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던 놈은 이내 엎드려 싹싹 빌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배가 고파 음식에 눈이 멀어 이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다시는 이러지 않을테니 제발 용서해주...”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골프채가 정확하게 관자놀이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분이 풀리지 않아 주검의 머리통을 계속해서 내리쳤다. 곤죽이 된 뇌수가 골프채에 묻어나올 때까지. 나는 침을 탁 뱉고 휘어진 골프채를 내던졌다.
차를 되돌려 돌아오는 길은 매우 깨끗했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피난민이 득시글거렸던 것이 거짓말인 양 말이다.
“문석아.” 역시나 문석이는 대답 대신 나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 때 말이야, 물은 왜 건네 준 거야?”
문석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다시 묻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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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놈을 제법 요란하게 처리했는데도 더 이상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아, 이곳에 한패는 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공기총을 다시 장전했다. 건물은 3층이 끝이었다. 3층도 1층과 마찬가지의 구조였는데, 복도 맞은편에 커다란 유리문이 있는 것만 달랐다. 복도 양 옆에 있는 방 또한 1층과 마찬가지로 별 쓸모 있는 것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복도 맞은편에 있는 문을 열어젖히자, 팔이 뒤로 묶이고 입에는 재갈이 물린 남자가 보였다. 우선 손은 가만히 놔 두고, 재갈만 벗겼다. 남자가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실눈을 떠서 내 얼굴을 확인하는 게 보인다. 나는 말 없이 아까 베어낸 놈의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남자는 기겁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색이 밝아졌다.
“절 구해 주신 건가요?”
“......” 나는 대답 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 세상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엎드린 모습 그대로 고개를 박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 나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건물안에는 모닥불을 만들었던 자국이 있었다. 안에는 불씨도 들어 있어, 불을 다시 피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말없이 모닥불을 바라보던 남자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다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박대현입니다. 원주에서 오는 길이었죠.”
“.......” 나는 계속 이야기하라는 표시로 침묵했다. 박대현은 내 눈치를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원주에서 화전을 일구고 살았죠.” 화전? 화전이 뭐지? 나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는 내 의문은 아랑곳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감자나 고구마도 심고, 때때로는 메밀도 심었어요. 이상하게 저희가 있는 지역은 마실 수 있는 물이 흘렀거든요. 아. 저는 원래 청주에서 태어났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 강원도로 들어갔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불편한 듯 박대현은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운이 좋았죠. 정말 운이 좋았어요. 몇 달 뒤에는 군이 강원도를 봉쇄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거든요. 그리고 몇 달 지나고, 먹을 게 다 떨어져서 풀이라도 캐 먹으려고 산에 들어갔는데, 맑은 물이 흐르는 샘이 있는 거에요. 그래서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죠.”
대현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 입을 오물거리는 것을 보니 목이 마른 모양이었다. 나는 수통을 꺼내 그의 목을 축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무튼, 거기서 나오는 물은 베이킹소다 같은 걸 넣은 물이 아니라, 진짜로 맑은 샘물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무도 모르게 샘을 둘러싸는 움막을 짓고, 주변 흙을 갈아서 밭을 만들었죠. 그리고 쭉 살았죠. 한 5년 정도 산 것 같아요. 그동안 농사도 짓고, 아내도 만나고......” 돌연 박대현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내요 아내...... 사실 전 여기 혼자 온 게 아니에요. 저 놈들이 제 아내를....수현이를...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 그놈들이 저와 수현이...그러니까 제 아내요! 제 아내를 데리고...7HAH77I들...” 그가 말을 잇지 못하는 것 같아,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시 후 박대현은 기분이 약간 진정되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AH77I들은 돌아가면서 수현이-그러니까 제 아내요! 네-를... 그렇게 이틀 정도 그러더니 제가 보는 앞에서 죽여버렸어요... 죽였다구요...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몸서리쳤다. 나는 담담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맙소사, 그걸 먹었어요! 인간 말종 새끼들. 어떻게 같은 사람을 먹을 수 있어...” 쿨쩍 하는 소리가 들린다. “다른 얘기로 넘어가도 될까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수현이랑 만나고-여기서 다시 본인의 아내라고 주지시키려 하는 것을 내가 손을 들어막았다.- 5년 정도 원주에서 살았어요. 근데 갑자기 기관총이랑 방독면 군복 막 이런걸 입은 놈들이 와서 땅을 내놓으라는 거에요. 억울했지만 어쩔수 없었죠. 안그래도 요새 주변이 너무 어수선해서 떠날 참이긴 했어요. 집이랑 땅을 뺏기는게 좀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걸 내가 맞장구 친다는 표시로 받아들였는지, 대현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다리를 건너는데, 정말 무섭더라구요. 발 한번 헛디디면 끝장이니까.” 여기서 그는 자신의 목을 쓱 긋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수현이도 저도 무사했고, 가지고 온 것 중에 잃어버린 것도 없었거든요. 근데... 그때 그놈들이 저희를 잡아갔죠.“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박대현이 흠칫 놀라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계속 이야기하라는 표시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박대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조용히 불가를 한 바퀴 돌았다.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주받을 식인종 새끼들. 사람 먹는 것들은 사람이길 포기한 거라고 생각해요. 개 같은 놈들 분명히 뒈진 뒤에......”
그 때 내가 대뜸 그의 목덜미에 정글도를 내리쳤다.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경악으로 벌어진 입이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후려쳤다. 한 번 더, 다시 한 번 더. 마지막으로 내려치자 거칠게 잘린 그의 머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총알은 아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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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이 울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저 군인들은 억지로 지나가려는 차 한 대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들 사이로 작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아까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군인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경고했습니다. 이 뒤부터는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입니다. 허가없이 접근하면 무조건 발포하겠습니다.”
여기에 질세라 민간인 측에서도 고성이 터져나왔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왜 못 지나가게 하는건데! 너네들은 저쪽 상황 모르냐? 우리는 여기서 다 죽으란 말이냐!”
“들여보내라! 들여보내라!”
아수라장 끝에서 또 차 한 대가 무턱대고 돌진한다. 그리고 군인들은 망설임없이 발포했다. 또 차 한 대가 벌집이 되었다. 믿을 수가 없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개놈의 자식들, 누가 지들 속셈을 모를까봐?” 옆에서 누군가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내 관심을 끌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묻자, 남자는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침을 튀겨가며 설명해 주었다.
“아 그러니까 그게, 딱 봐도 감이 오잖수. 저 윗 양반들 편케 할라고 우리같은 서민 무지렁이들은 몰아내는 것 아니겄수. 이제 나라도 망했겠다, 까짓것 총질해도 거리낄 것도 없고 말이지.”
“예?”
“아 이 양반 답답하구만. 어차피 지들 궁둥이는 붙였다 이거요. 근데 우리도 궁둥이 좀 붙이는 꼴은 못 본다는 거지. 이 강원도 맑은 공기는 지들이 다 처먹겠다 이거 아니요. 우리는 서울에서 피가래나 토하다가 고꾸라지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거고.”
“허어, 멍청한 놈들이네요. 서울 하늘 따로 강원도 하늘 따로 있는 것 도 아닌데.” 이 말에 남자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하 참, 이 양반 말 한번 기막히게 하네. 그래 하늘이 따로 있는 것 도 아닌데 놀구들 있는거지. 나는 돌아가야겠수다. 여기나 서울이나 어차피 뒈지긴 마찬가진데, 더럽게 여기서 총 맞아 뒈지느니 차라리 서울에서 버텨보겠수. 혹시 아나? 바람이라도 겁나게 불어서 매연같은 거 싹 쓸어갈지 말이야.”
사내의 말은 내 마음도 움직였다. 서울에는 건물이 많았다. 잘 찾아보면 오염된 공기가 미치지 않게 꼭꼭 숨겨져 있는 장소도 많으리라. 예를 들어 보일러실이라던가. 나는 차를 돌렸다. 반대 방향 차선과는 대조적으로, 서울로 가는 차선 위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 광경은 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서울로 가는 도로 위를 달리면서, 암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까 남자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여기서 죽든 저기서 죽든, 강원도나 서울이나 어차피 죽기 마찬가지라...... 현재 우리가 살려고 발버둥치고는 있지만, 사실 다 무의미한 것은 아닌가. 그 날 이후로, 사람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차라리 문석이와 함께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자동차는 산간도로를 달리고 있다. 여기서 내가 핸들을 확 꺾기만 하면, 이런 의미없는 짓거리도 끝나는 게 아닐까? 핸들을 잡은 손 안에 땀이 차서 미끌거린다. 슬쩍 조수석을 봤다. 문석이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눈이 부신 것처럼 콧날이 시큰하다. 순간일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마음만 굳게 먹는다면......
차를 멈췄다. 나는 할 수 없었다. 분명 어디엔가 희망이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 1분만 쐬면 피부에 구멍이 날 정도로 독한 자외선, 피를 토할 정도로 지독한 매연에...... 그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인간답게라. 그 날 이후로 인간의 존엄성은 바닥에 떨어졌다. 우리가 빛 바래지 않을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회의 각종 규범들, 경제적 금자탑들...... 하지만 현재는 휴지조각일 뿐. 과연 이런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생존을 위해서 기꺼이 짐승으로 퇴화하려 하지 않을까?
이런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다시 문석이를 바라보았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볼 옆에 잔뜩 떡진 귀밑머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희망, 혹은 이런 상황을 타개할 열쇠를 우리 세대에서 찾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 그리고 그 다음 세대가 존재할 수 있을까? 마음이 복잡해서 핸들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 마음속 절규를 대신하듯 고요한 산자락에 클랙슨 소리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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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쳤다. 나는 다시 더플백을 들쳐메었다. 공기총은 비끄러메고, 왼쪽 허리춤엔 짧은 정글도, 그리고 오른 허리춤에는 권총을 찼다. 탄약은 몇 발 없지만 정말 필요할 때 유용히 쓸 수 있을 것이다.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걸을 때마다 오른쪽 옆구리가 시큰하다. 일부러 더플백 두 개는 모두 왼쪽에 메었다. 더플백들은 매우 빵빵하고 무거웠지만,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피에 젖은 더플백 아래로 피가 뚝 뚝 떨어진다. 핏방울이 아직 비가 고여있는 웅덩이에 떨어지자, 곧 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한 줌 연기로 화했다. 그 남자, 박대현이라고 했던가. 원주에서 왔다고 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죽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주위에서 먹을 걸 구하지 못해 걱정이었는데. 일단 몸이 좀 나아질 때 까지 한 2주 정도는 숨어서 쉴 생각이다. 그 다음은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봐야겠다. 그 놈 말로는 북쪽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했다. 이제 식량은 충분하다. 잘 말려서 보관하면 2주 넘어 원주로 넘어가서 상황이 별로일 때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은신처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홀가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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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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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루리웹은 검열이 엄격하네요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