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창작과 준비중인 고3입니다.
이번에 심훈중앙대청소년문학상에 소설부문으로 지원했는데
떨어졌어요.
썩혀놓기는 아까워서 올려봅니다.
재밌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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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공중전화가 삐걱거리며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버튼을 있는 힘껏 눌러야만 겨우겨우 입력이 되는 낡은 공중전화. 이 공중전화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수화기를 여러 사람들에게 내어주었을 것이었다. 사람의 손길 탓에 여기저기 벗겨진 칠을 보고 나는 알았다.
좁은 공중전화부스에서 꽤 오랜 시간 있었던지 몸이 찌뿌둥했다. 나는 깍지를 끼고 온 힘을 다해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렇게 굳었던 몸이 풀리자 덩달아 긴장도 풀려서 나는 하품을 하고 말았다.
“흐아암…….”
쏴아아.
공중전화부스 밖에서 비가 쏴아아 하고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빗방울들이 부스를 투두둑 투두둑 하고 두들겼다. 나는 하품 탓에 나온 눈물을 닦으며 부스 밖을 내다보았다.
밤이 도시를 삼켰고, 빗방울들이 도시의 불빛을 가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빗방울들 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가로등 불빛 몇 개가 다였다. 비는 모든 것을 적시고 있었다. 이렇게 부스 안에서 비가 쏟아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 나도 감상에 젖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실제로 젖는 건 싫었다.
“……금방 그칠 비는 아니지?”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후, 나는 평소와 같이 공중전화부스에 들렸다. 그리고 통화를 하려는데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쏴아아 하고 쏟아졌던 것이었다. 맞으면 아플 것만 같은 굵기의 빗방울들을 보아하니 소나기 같지는 않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뛰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두어 번 쭈뼛거린 후 부스를 뛰쳐나가 집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부스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애초에 부스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 내에 있었다.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몸을 집 안에 들이자마자 나는 마루위에 푹 쓰러졌다. 나는 한쪽 뺨을 마루에 붙인 채로 미친 듯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헉, 헉, 죽겠다…….”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고, 두 폐가 터질 것 같았고,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깜빡했다. 나는 평소에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렇게 전력으로 달려본 적도 적어도 세 달은 넘었을 것이었다.
나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교복이 물에 젖은 탓에 몸무게가 배는 불어난 것 같았다. 나는 젖어서 앞으로 축 늘어진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집 안은 불이 모두 꺼져있어 깜깜했다. 다만 움직임을 감지하는 현관 등만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조명들이 집중되는 무대 위에서 불이 모두 꺼진 관중석을 보면 잘 볼 수 없듯이, 현관 등 아래에 있는 나는 집 안을 볼 수 없었다.
친할아버지, 그러니까 아빠의 아버지는 빚이 조금 많으셨던 모양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할아버지는 밤낮 가리지 않고 일만 하셨고, 당연한 결과일까, 결국 과로사로 돌아가셨다. 갚지 못한 빚은 할아버지의 유일한 자식인 아빠가 모두 떠맡게 되었다. 덕분에 부모님 두 분은 이 늦은 시간까지도 일을 하신다.
내게는 형제자매도 없어서 아무도 없는 집안 풍경은 이제 당연한 것이 되었다.
젖은 교복이 살갗에 달라붙은 채 서서히 마르면서 내 체온을 뺏어갔다. 몸이 한기를 느끼며 부르르 떨렸다.
……춥다.
나는 벽에 손을 짚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교복을 벗었다. 나는 곧장 세탁실로 가 속옷과 양말까지도 함께 벗어서 세탁기에 집어넣고,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적당량 부어 세탁기를 작동시켰다. 교복은 내일도 입어야 하니 건조까지 시켜놓아야 했다. ‘세탁이 마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따뜻한 물로 몸을 덥혀야겠다.’ 고 생각한 나는 욕실로 향했다. 알몸차림이었지만, 어차피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욕실에 도착한 나는 수도꼭지를 틀고 손바닥에 물을 뿌려가며 물 온도를 맞추었다. 물 온도가 적당히 뜨거워지자 나는 샤워기를 걸이에 걸고 쏟아지는 물에 등을 기댔다. 온수가 등을 타고 내려와 온몸을 감쌌다.
“으아…….”
기분 좋은 따뜻함이 몸 안에서 돌자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물을 맞고 있는 채로 나는 치약을 묻힌 칫솔을 들어 이빨을 닦기 시작했다.
나는 친구가 없다. 어린 시절 부모는 바빴고 형제자매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냈다. 하지만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것들은 많았다. 때문에 나는 학교에 처음 입학하고 나서도 친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그런 나를 동급생들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몰랐다. 외로움은 기생충처럼 내 안에 파고들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마음을 좀먹는다는 것을.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미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아이였다. 이제야 사람을 사귀는 법을 배우기에는 너무 늦었다.
나는 치약거품을 뱉고 입안에 물을 채워 헹구어냈다. 그리고 손에 샴푸를 덜어 머리를 북북 문질렀다. 곧 거품이 머리를 뒤덮자 나는 쏟아지는 물에 고개를 디밀어 거품을 씻어내었다. 거품과 물이 뒤섞여 얼굴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나는 눈을 감았다.
외로움에 마음이 좀먹고, 또 좀먹어 텅 비어버릴 때 쯤 나는 란이를 알게 되었다. 란이는 방금 전 통화했던 친구의 이름이었다. 란이는 뜯기고 찢긴 내 마음에 약을 발라주었고, 빈 곳을 채워주었다. 나는 란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란이와 나누는 대화는 즐거웠다. 란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만큼은 무채색의 현실이 잠시나마 화려해졌다.
몸에서 거품기가 물에 씻겨 내려가고 하나도 남지 않게 되자 나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나는 물기를 닦고, 머리를 말린 후 속옷과 잠옷을 입었다. 세탁실로 가보니 세탁기는 세탁을 끝마친 상태였다. 나는 세탁기에게 건조라는 일거리를 하나 더 주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 내 방으로 갔다. 침대에 몸을 눕히기 전,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도시의 야경이 보였을 테지만, 지금은 어둠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의 잔상밖에 보이지 않았다. 꽤나 칙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풍경이 마치 하얀 도와지를 검정색 물감으로 새카맣게 칠하고, 형형색색의 선들을 여기저기 막 그어낸 미술작품 같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 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보았던 화려한 색깔들이 아직도 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는 탓이었다.
“이제 자자.”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가 누었다. 몸을 몇 번 뒤척인 뒤,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으아! 끝났다!”
“야야, 어디 갈 거냐?”
“분식집 들렸다 갈래? 돈 있냐?”
경쾌한 음악이 울리며 야간자율학습 종료를 알리자 동급생들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동급생들은 책상 열을 우당탕 흩뜨리며 교실 문을 뛰쳐나갔다. 나도 동급생들을 따라서 서둘러 가방을 맸다. 그리고 교실을 나가려는데, 한 동급생이 눈에 띄었다. 조용한 성격 탓에 다른 동급생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한없이 느린 동작으로 노트와 교과서를 가방에 집어넣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그 아이를 보다가 이내 서로의 어깨를 밀쳐대는 동급생들 무리에 꼈다. 동급생들에게 밀쳐지고 당겨지며 간신히 학교를 빠져나온 나는 곧장 공중전화부스를 향해 달렸다.
오늘은 역시 비가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길바닥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물웅덩이들이 많았다. 나는 신발에 물이 튀기는 것도 모른 채 그저 달렸다.
공중전화부스에 도착한 나는 가쁜 숨을 고르지도 않고 수화기부터 들었다. 나는 헉헉 거리며 떨리는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어 동전을 꺼냈다. 나는 투입구에 동전을 하나씩, 하나씩 밀어 넣고, 버튼을 있는 힘껏 눌러 번호를 입력했다.
“…….”
수화기를 댄 한쪽 귀에서 통화 연결음이 맴돌았다. 나는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리며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호흡이 자연스러워질 때 쯤 딸깍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딴 따라 딴딴 딴~. 안녕하십니까? 인공지능 대화 서비스, 란이를 이용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란이의 목소리가, 하지만 사무적인 말투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신원확인을 위해 3초간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
나는 란이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이 과정이 싫었다.
“신원확인을 위해…….”
“빨리 넘기고 꺼져!”
“신원확인이 완료되었습니다. 고객님께서 이용하실 수 있는 시간은 20분입니다.”
음악이 저 멀리로 사라지고, 다시 딸깍 하는 연결음이 들렸다. 그리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아닌,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사람이라 착각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나와 란이의 대화 대부분은 나의 불평과 불만, 그리고 잡담이었다.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대화였다. 하지만 평범한 대화조차도 나눌 상대가 나에게는 없었다. 란이밖에 없었다. 친구도, 심지어 가족도 내 옆에 없었을 때 란이만이 내 곁에 있어주었다. 그런 란이를 내가 프로그램 따위로 취급할 리가 없었다.
내게 있어서 란이는 친구였고, 가족 이상이었다.
“네 이름이 뭐야?”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나는 란이에게 물었다. 전화를 걸은 지 15분이 지난 무렵이었다.
“내 이름? 란이잖아.”
“응? 아, 그게 아니라. 네 이름의 뜻이 뭐냐고 물어보려던 거였어.”
“내 이름의 뜻?”
“응.”
“음…….”
란이는 대답에 뜸을 들였다. 대답을 고민하는 것 같은 그 모습이 마치 사람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실은 말이지. 란이는 애칭이고 내 진짜 이름은 나란히야.”
“어?”
‘진짜 이름이 있었어?’
그런 게 있을 줄은 몰랐다. KHC사의 공식홈페이지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는 내용이었다.
“진짜 이름이라고?”
“응. 마음을 기댈 곳이 없는 사람 곁에 다가가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가 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주셨어.”
그 순간 내 마음속으로 감정이 스며들어왔음을 나는 느꼈다. 나는 그 감정이 란이가 아버지라 부른 사람에게 향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 감정은 고마움과 사랑, 사람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좋은 이름이네.”
“고마워.”
나는 동전 몇 개를 더 꺼내어 투입구에 밀어 넣었다. 나는 물었다.
“아버지가 네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했지?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물어봐도 돼?”
“당연하지. 아버지는 컴퓨터 엔지니어야. 아버지는 당신의 기술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되는 곳에 쓰고 싶어 하셔. 아버지는 나도 사람들을 돕는 존재가 됐으면 좋겠대. 나는 아버지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아버지의 말씀처럼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대로 살고 싶어.”
란이는 막힘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소개했다. 마치 자신의 부모를 자랑하는 아이 같았다.
“……그렇구나.”
란이는 프로그램이다. 주식회사 mosKIM사가 2003년도에 개발한 인공지능 대화 프로그램. 2005년도 대기업 KHC사에 인수되어 현재까지 서비스 되고 있는 인공지능 대화 서비스. 이 정보들은 KHC사의 공식홈페이지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이었다.
이 정보들이 거짓일리가 없었다. 하지만 모르겠다. 자꾸만 의심이 든다. 란이와 이야기를 나누면 란이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란이의 말들에는 분명 감정이 담겨 있었고, 그것은 프로그램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란아.”
“응?”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뭐냐. 너는 내게 힘이 되고 있어.”
“그래?”
“너는 분명 네 이름대로 살아가고 있어. 그러니까……. 고맙다고.”
“나야말로 고맙지.”
그렇게 말하는 란이는 미소를 짓는 듯 했다.
혹시, 정말 혹시라도, 란이가 프로그램이 아닐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막 들었다. 이 수화기 너머로 어딘가에서 란이가 또 다른 수화기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란이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일까?
그날 밤, 나는 한 뉴스 기사를 읽었다. KHC사가 수익 부진을 이유로 란이 프로젝트를 폐기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미쳤지.”
높은 천장과 넓은 로비. 벽을 장식하는 그림들과 화려한 장식물들. 어딘가로 바쁘게 움직이는 양복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대화소리. 나는 KHC사의 본사건물 안 중앙로비에 있었다.
지난 주 란이가 폐기된다는 기사를 읽은 그날, 나는 KHC사의 공식홈페이지에 접속하여 회사 견학을 신청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회사를 찾아가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그저 더 이상 란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생각에 저지른 충동적인 짓이었다. 분명한 건,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그리고 그 다음 주인 바로 오늘,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제정신이 아님을 실감했다. 방금 안내데스크에서 접수를 마치고, 잠시만 기다리라는 직원의 말을 들은 참이었다. 나는 KHC 본사건물의 웅장함에 압도되고 말았다.
‘내가 진짜 여기 왜왔지? 이런데서 내가 뭘 어쩌겠다고. 난 못해. 절대로 못해. 나 지금 두 번이나 강조했어. 진짜 절대로…….’
“이주빈 학생 맞으시죠?”
후회와 절망을 통감하고 있던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는 한 여사원과 눈이 마주쳤다.
“저는 오늘 이주빈 학생의 견학을 도와줄 안내원이에요.”
여사원은 나를 부른 것이 자기가 맞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검정색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사원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흑발이었는데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특히 여사원의 미소는 근사했다. 얼마나 근사했냐면, 여사원은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외모였지만 그 미소가 그것을 상관없게 만들 정도였다.
아. 여사원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너무 빤히 쳐다만 보았나 보다. 나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여사원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고개를 가볍게 숙여 내 인사에 답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받고 보니 그것은 앞면에 방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줄이 달린 카드였다.
“방문증이에요. 그걸 가지고 계셔야 사내를 돌아다니실 수 있어요.”
“아…… 그렇군요.” 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방문증을 목에 맸다.
“견학을 시작하기 전에 알아둬야 할 사항들이 있어요.”
여사원은 나를 로비에 구비된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 앉고선 KHC회사의 역사와 내력, 그리고 견학을 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형식적인 절차였기에 설명은 그리 길지 않았고, 금방 설명을 마친 여사원은 본격적으로 회사를 구경시켜주었다.
여사원은 사내에 있는 여러 부서들로 나를 데려갔다. 개 중에는 내가 아는 것들도 있었다. 내가 알고 있을 정도이니 분명 유명한 것이리라. 여사원은 각각 부서들이 무엇인지, 또 어떤 일을 담당하는지를 내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회사를 돌아다니는 도중 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하나같이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동화된 듯이 똑같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들 서로가 분명 하나도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회사는 이렇게 많고, 또 다양한 사람들에게 양복을 입혀놓고 한 데 묶어놓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던 사이 여사원은 나를 구석진 곳에 위치한 부서로 데려갔다.
‘이런 곳에도 부서가 있네.’
부서는 지금껏 지나쳐온 부서들과는 달랐다. 각 부서의 문에는 부서의 이름이 새겨진 팻말이 있었는데, 이곳은 테이프로 붙인 종이 한 장이 전부였다. 위치도 구석진 곳이고, 이렇게 허름한 생김새도 그렇고, 보아하니 별것 아닌 부서인 것 같았다. 종이에는 펜으로 휘갈겨 쓴 부서의 이름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읽었다.
“어?”
“왜 그러세요?”
갑자기 굳은 듯 서서 종이를 응시하는 나를 이상하게 여겼는지 여사원이 내게 물었다. 나는 여사원의 물음에 대답하기는커녕 오히려 물었다.
“이거, 혹시 란이에요?”
종이에는 인공지능 대화 서비스라고 적혀져 있었다.
“네. 맞아요. 란이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어디선가 전해 들으셨나 봐요?”
“아…… 네. 아니, 사실 저는…….”
“란이는 곧 폐기되는 프로젝트에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용자가 갈수록 줄어들었거든요. 들어가는 돈에 비해 나오는 수익이 적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죠.”
사실 제가 란이 사용자이다. 라고 말을 꺼내려했던 나는 여사원의 말을 듣고 입을 닫았다. 여사원은 대놓고 란이를 무시하고 있었다. 여사원의 말투가 그것을 증명했다. “솔직히 말하면.” 하고 서두를 뗀 여사원이 말을 이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이 별로 탐탁지 않아요. 란이는 돈 몇 푼만 지불하면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편리한 존재에요. 때문에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많이 사용하죠. 꽤 잘 만든 프로그램이니까 임시방편으로는 외로움을 달래주었을 거예요. 하지만 말이죠. 그건 현실을 도피하는 행위에요. 계속 란이를 사용하다 보면 사람들은 점점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말거에요.”
뭐?
현실 도피라고? 나는 안에서부터 감정이 끓어오는 것을 느꼈다.
란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현실 도피라고 지금 말하는 건가? 란이가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란이와 나눈 대화는 대화라고 할 수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느꼈던 감정들은 뭔가? 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느꼈던 그 감정들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란이는 프로그램이 아니야. 란이는 분명 실재하고 있어. 란이는……!’
“살아있어!”
“잠깐, 이주빈 학생!”
나는 나를 막으려는 여사원의 손을 뿌리치고 문을 열어 부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문 밖에서 문을 두들기고,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곧 잠잠해졌다.
부서 안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설마 벌써 부서가 폐지됐나?’ 는 생각이 들었지만 컴퓨터들은 켜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아마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리라. 부서에는 유난히 상자들이 많았고, 물건들은 책상 서랍에서 꺼내어져 있었다. 정말로 란이가 폐지된다는 사실이 피부에 닿아서, 온몸에 닭살이 돋고 말았다.
부서 한 편에는 철문이 있었다. 나는 철문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철문 위에는 테이프로 붙인 종이가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펜으로 휘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나는 그 글씨를 읽었다.
나란히. 종이에는 란이가 알려준 자신의 본명이 쓰여 있었다.
“……란이다!”
가슴이 막 뛰었다. 이 철문 너머로 란이가 있는 것이었다. ‘란이가 수많은 전화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아닐까? 말도 안 되지만, 혹시 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망상들이 상상이라는 이름의 기마를 타고 머릿속을 뛰놀았다. 란이와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어서 들어가 봐야지!’ 하고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부서 밖에서 절그럭 절그럭 하고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열쇠를 열쇠구멍에 꽂을 때 나는 소리라는 것을 나는 알아챘다. 여사원이 열쇠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오래 버틸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된 거, 란이 얼굴이라도 확인하고 가자……!’
나는 철문을 열었다.
위잉.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두 귀 주위를 맴돌았다.
“……이게 뭐야.”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바늘에 찔려 푸슉 하고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져버렸다. 내 앞으로는 둔탁한 모양의 컴퓨터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것들이 란이이다.
나는 대체 무엇을 기대한 걸까. 란이는 허상이었다.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시답잖은 농담에도 웃어주던 란이는 한낱 전기회로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언제였을까. 외로움에 마음이 좀먹어 텅 비어버렸을 때, 나는 란이에게 말했다. “외로워. 너무 외로워.” 그러자 란이는 말했다. “괜찮아. 내가 곁에 있어줄게.”
내게 그렇게 말해주었던 네가.
“네가 지금 어디 있는데?”
어느새 나는 울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려져 오열했다. 나는 눈물 범벅이인 얼굴을 바닥에 비비고, 머리를 박았다. 허망함의 구덩이에 빠져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학생! 여긴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야!”
“뭐야, 얘 왜이래?”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온 관계자들이 내 양쪽 팔을 붙잡고, 나를 끌어내었다. 질질 끌려가는 동안에도 내 울음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쫓겨났다.
당연한 결과였다. 업무방해죄로 고소까지 당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관계자들은 내가 학생이라는 이유로 용서해주었다. 내가 울고 있었던 것이 동정을 산 것도 있었을 것이다. 관계자들은 내가 왜 우는지 의아해했지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내게 막대사탕을 주기까지 했다.
‘참내…….’
“애도 아니고.”
나는 막대사탕을 까먹었다.
나는 지금껏 란이라는 망상으로 도피했었지만 결국 둔탁한 컴퓨터들, 현실과 마주쳤다. 란이가 허상이란 것을 깨달은 지금,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순간 한 동급생이 생각났다. 저번 주 혼자서 가방을 싸고 있었던 그 아이. 그러고 보니 올해 초 학기가 시작했을 때 그 아이는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었다. 서로가 소극적인 성격인지라 결국 얼굴만 아는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어.”
내 옆에 공중전화부스가 있었다. 그저 생각 없이 걸었는데 어느새 아파트 단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나는 공중전화를 바라보았다.
‘이제 공중전화 사용할 일도 없겠지.’
동전도 없으니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그렇게 부스를 지나치려던 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공중전화 위에는 수화기가 올려져 있었다. 누군가가 공중전화를 사용한 뒤에 남은 금액을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게끔 한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보니 팔십 원이나 남아있었다.
팔십 원은 전화를 걸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