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그 날도 언제나같은 날이다. 케이엘은 언제나처럼 씼고, 여관을 지나 학교로 향한다. 수업을 받는다. 케이엘은 이제 모범생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무언가 할 수 있던 것을 지금까지 안해온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는 케이엘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얼음 화살의 연습을 끝내고 새로 배우는 주문인 얼음 회오리를 시작하려 할 때—
“호드다! 호드가 쳐들어온다!”
저 멀리서 어렴풋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스톰윈드 전체에 비상이 걸린다. 저 멀리 모험을 나간 모험가들에게도 연락을 하기 시작했고, 선생님들도 전투 태세를 취했다. 케이엘은 몸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귀환석을 썼고, 다이언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스톰윈드의 장대한 정문 앞에서, 스톰윈드를 공격하려는 호드와 그를 지키려는 얼라이언스가 맡붙었다. 치유를 할 수 있는 자는 치유를, 공격을 할 수 있는 자는 공격을, 방어를 할 수 있는 자는 방어를. 아군과 적군만을 간신히 분간할 수 있는 전장에서, 모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싸운다.
라세인은 지금껏 이런 전투에서 치명상을 받아본적이 없는 베테랑이었다. 꽤나 불안한 시기이긴 했지만, 전투는 낮이니까 문제 없을 것이라 생각해 여관을 빠져나온 것이다.
생각보다 전투는 긴 시간을 끌었다. 전투가 장기전의 국면을 띔에 따라, 양쪽 다 점차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라세인도 몇번 부상을 입긴 했지만, 전투에서 물러날 정도는 아니었다.
밤이 다가오자, 다시 한번 양쪽 다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호드 쪽은 밤이 되면 물러나기로 한 것이다. 라세인은… 점점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런… 벌써 달이 하나가 떴군… 전장에 나가야겠어… 여기에 있으면 안되겠어…’
라세인의 이성과 야성은 싸우고 있었고, 점점 야성의 힘은 강해져가고 있었다. 전투에 뛰어들어, 야성의 주린 배를 채우고자 했다. 앞의 사람들을 해쳐 최전방으로 나아가 싸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두개의 달이 모두 뜨고, 야성이 이성을 압도했다. 한 마리의 흉포한 늑대가 되어, 호드 한가운데로 돌격했다. 그때 라세인과 맞선 것은 어떤 언데드였다. ‘저놈부터 처치하자.’고 생각했다. 상대는 꽤 잘 싸웠다. 호적수라는 말을 붙이는게 어울릴 정도였다. 양쪽 다 최선을 다해 싸웠다. 주변의 다른 전투는 그들에겐 논외였다. 늑대인간의 눈엔 흉포한 야성의 빛이 가득했고, 언데드의 눈은 차가운 살기로 불타올랐다. 그때 상대가 갑자기 사라지더니, 라세인의 신경을 찔렀다. 신경을 찔린 드루이드는, 변신이 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야성은 사라지지 않아 아직도 그르렁댔다. 어떻게든지 할 수 있는 한 버둥댔다. 패배를 인정할 순 없다. 그 때 언데드의 눈에서 갑자기 살기가 사라지더니, 한 마디의 말이 늑대의 이성을 파고들었다.
“어? 라세인? 맞지! 오 미안! 어쩐지 익숙하더라! 나야! 헬레나!”
이성이 힘이 빠진 야성을 겨우 제압했다.
“크윽... 크르르.. 윽... …… 헬..레나? 진짜 너...야?”
“나지! 그럼 가짜겠어? 자, 잠깐 좀 쉬자. 여관에 가자…”
“이번에도, 당신이 이겼…긴 했는데, 언제까지...”
“널 박살내주마!”
케이엘은 할 일도 없겠다 다이언과 하스스톤을 하여 기록적인 23연패를 달성 중이다. 그 전에 타엘과 칼린과 엘렌과 한 38연패를 제외한다면, 말이지만. 심지어는 제이나도 지는데에 지친 듯 보인다. 하스도 9연패때까진 10골드씩 계속 돈을 줬지만, 여관 잔고가 사라질 것 같다는 두려움으로 3승 보상 제공을 거부했다.
“또 졌어! 하루 종일이라고!”
“...약해.”
다이언이 말했다.
“그나저나, 달이 모두 다 뜬 것 같소. 앞으로 30분, 라세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녀를 찾으러 가겠소.”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타엘과 하스는 걱정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 때,
“하스 아저씨! 타엘 아저씨!”
헬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헬레나! 어디서 뭐하다 왔...”
케이엘은 반갑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다 말이 막혔다. 헬레나가 품에 심각하게 다친, 조금이라도 더 다쳤다간 영혼의 치유사 앞으로 갈 것만 같은 라세인을 안고 있었다.
“…라세인 언니? 왜 이렇게 다쳤어? 어, 너도 꽤 다쳤네! 괜찮아?”
“헬레나! 라세인! 괜찮소? 설마… 둘이, 맞붙은 것이오?”
타엘이 말했다.
“일단 치료를! 난 괜찮으니까, 라세인부터!”
헬레나의 목소리에는 평상시엔 잘 느낄 수 없는, 다급함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눈에서는 어제의 그 살기의 빛이 보였다. 무언가 굉장히 날카로운. 무언가 굉장히 강렬한.
“아! 괜찮으세요? 금방 치유해 드릴께요!”
라 말한 것은 신성 사제, 엘렌이였다. 곧 엘렌은 빛의 힘을 소환하여 라세인을 치유하였다. 마치 노래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창백했던 라세인의 피부에 생기가 돌고, 곳곳의 상처는 아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치명상에 가까웠던 터라 라세인은 겨우 의식만이 되돌아왔을 뿐, 쉽사리 회복되진 않았다.
“이거… 힘들겠네요.. 좀 걸릴 것 같…”
“……나무…”
라세인이 기진맥진한 소리로 말했다.
“예?”
케이엘이 되물었다.
“내… 카드들 중… 생명의… 나무… 가져와줘……”
“예! 잠시만요!”
매일 라세인이 있는 자리로 케이엘은 급히 달려갔다. 그 자리에서 한 가지 물건이 이목을 끌었다. 달력. 그 달력엔 아제로스의 두 달의 위상이 그려져 있었다. 직접 손으로 그린 듯 했다. 당연하게도 오늘의 날짜엔 가득 찬 달 두개가 그려져 있었다. 문득, 케이엘은 달력이나 구경할 때가 아님을 깨닫고, 라세인이 보관하고 있는 카드 뭉치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생명의 나무… 생명의 나무… 생명의 나무… 아!”
9마나의 영웅 카드.
급히 달려가 라세인에게 카드를 건냈다. 밖에서 전투로 심하게 부상을 입은 그로한과 탈레스가 돌아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라세인은 자신의 자연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내 모아, 자신의 야성을 최대한 억제하며, 바닥에 카드를 내려놓았고, 기진맥진하여 다시 쓰러졌다. 곧, 그 자리에서 나무, 조그마한 나무 순이 돋아났다. 잠시 후 그 나무가 점점 빠르게 자라더니, 더 크게, 더 크게 자라고, 천장까지 자라 더 자랄 곳이 없어지더니, 이내 휘어서 자라, 천장을 뒤엎고, 벽면을 뒤엎어, 여관 전체를, 여관 내의 모든 생명을, 살아있든 살았었든 관계 없이 뒤덮었다. 모두가 볼 수 있는건 주변의 나무들 뿐이었다. 자신의 주위를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 휘감은 나무 덩쿨과, 그 덩쿨이 나온 줄기, 그 줄가가 나온 둥치, 그리고 나무의 잎사귀들. 그리고 그 나무는 천천히 희미해지더니, 곧 사라졌다. 그리고, 나무가 사라져 모두가 서로를 볼 수 있게 되었을 땐, 그 누구도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상태였다. 호드건, 얼라이언스건, 상처가 깊었던, 얕았던. 단지… 단지 헬레나는 왜인지 흐느끼고 있었다. 정적 속에 그 작은 소리만이 퍼졌다.
“겨우… 다들 회복된 모양이네.”
라세인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오, 그러고보니, 모두가 모였군요! ”
하스도 입을 열어 분위기를 띄웠다.
이내 여관은 시끌벅적해졌지만, 케이엘은 왜인지 모를 헬레나의 흐느낌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헬레나에게 다가갔다. 헬레나는 케이엘의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생명…… 따뜻한 기분..이네… 포근해…… 나… 이런거… 한번도…”
무언가 그리운 듯, 무언가 쓸쓸한 듯. 헬레나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나왔다. 케이엘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나… 살아서도, 죽어서도… 차가웠어. 가족도…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가족… 이런 느낌일까… 따뜻한걸 좋아했지만, 이렇게까진… 눈물이 나네……”
헬레나는 무언가 씁쓸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케이엘에게는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언데드는 생명 그 자체를 싫어한다, 그렇게 알고 있던 터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이 앞의 언데드는 생명을 동경하고, 약간은 슬픈 듯이 울고 있을까.
“그런데 왜일까? …이미, 죽었는데… 난 왜 살아있는걸, 생명을 동경하는걸까? 살아 있었던 때에도,난 살아 있던게 아니었던 걸까? 그저 지금처럼 몸 안에 가둬져만 있던걸까? 생명은… 난 이미 죽었는데, 왜 생명이 싫지 않은거지?”
약간은 횡설수설하며, 헬레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케이엘과 같은 것을, 자신도 의아해하는 모양이다. 그저 감정이 북받쳐오른 듯. 또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이 흐르는 입가는, 약간 웃고 있었다. 반쯤 씁쓸하게, 반쯤 아련하게…
“왜 난 눈물이 나는데… 왜 슬프지가 않지? 이건… 기쁜건가? 살아 있었을 때도, 죽은 이후에도, 나...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케이엘은, 헬레나가 어떻게 살았었는지, 또 어떻게 죽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무언가, 거기엔 알아야 할 것이, 헬레나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단서가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 미안하지만, 혹시 너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니?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 말이야.”
“그래…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