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둣가에 나란히 줄지어 선 건물들 중에서 파란 지붕을 나자리아가 가리켰다.
“저곳이에요.”
나자리아는 언덕을 내려가며 범선들을 살폈다. 네 척의 범선 중에 전갈 깃발을 건 배는 보이지 않았다. ‘발라스의 군인들이 타고 온 배는 다른 부두에 있나 보군.’ 그중 가장 크고 화려한 배에는 사선으로 교차한 황금빛 나뭇가지와 단검이 수놓인 깃발이 걸려있었다. 근처에서 유심히 보니 단검이 나뭇가지를 둘로 쪼개는 형상이었다.
‘나무를 베는 단검? 크기나 장식이 상단에서 운영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느 곳의 배일까?’ 나자리아는 그 배로 짐을 옮기는 일꾼들을 보며 부둣가에 늘어선 건물들 뒤편으로 들어섰다. 직원의 말대로 파란 지붕 건물 앞에서 두 명의 드워프들이 수레에 실린 원목을 내리고 있었다.
“여기가 오케아 창고가 맞죠?”
“그렇소만.”
노란 두건에 굵은 팔뚝을 가진 남자가 말했다.
“매장에서 제임스 씨가 여기 오면 원목을 볼 수 있다고 해서요. 원탁에 쓸 블루파인을 보고 싶어요.”
“블루파인은 들어가서 제일 안쪽이우.”
“제가 무늬는 고를 수 있는데 나무 질은 잘 몰라서요 같이 좀 봐주시겠어요? 선물할 것이라 좋은 것으로 골라주시면 사례하겠습니다.”
나자리아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란 두건의 일꾼은 그녀를 위아래로 보고는 목에 건 수건으로 얼굴과 뒷목의 땀을 쓱쓱 닦았다.
“이봐, 잠깐 쉬자고. 따라오시우.”
다른 일꾼이 고개를 끄덕이고 파이프를 꺼내들었다. 나자리아와 아자니는 노란 두건을 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3층 높이 정도 되는 창고에는 둘레가 한 아름이 되는 통나무부터 장정 두 세명이 끌어안을 만한 크기까지 크기와 종류별로 나눠져 층층이 쌓여 있었다. 앞쪽에 있는 나무들은 벌목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숲냄새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일꾼은 쌓은 나무들 사이를 지나 가장 안쪽에서 걸음을 멈추고 통나무 한 무더기를 가리켰다
“저것들이 숙성이 끝난 블루파인이우. 나라면 저 중에서 이것으로 하겠…!”
갑자기 나자리아가 일꾼의 목덜미를 내리치자 억 소리도 못 내고 짚으로 만든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뭐 하는 거예요!”
아자니가 놀라 소리쳤다.
“여길 떠날 때까지 당분간은 우릴 본 사람이 없어야 해요.”
나자리아는 근처에 나무 묶는 밧줄로 일꾼의 손과 발을 묶고 수건을 입에 물렸다.
“무슨 일 있어?”
밖에 있던 다른 일꾼의 소리가 들렸다.
“네, 오셔서 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다른 일꾼을 부른 나자리아는 아자니와 함께 쓰러진 남자를 한쪽 구석으로 옮긴 뒤 통로 옆 나무더미에 몸을 숨겼다.
“뭔데 그러시우?”
아자니에게 다가온 일꾼을 나자리아가 재빨리 쓰러뜨렸다. 정신을 잃은 그를 아까처럼 밧줄로 묶어 동료의 반대편에 뉘여 놓았다. 창고 입구로 가서 밖을 살핀 뒤 문을 닫고 돌아온 나자리아가 아자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무 더미에 기대었다.
“됐어요. 일단 한숨은 돌렸어요.”
“고마워요. 애런은 언제 오나요? 당신은 누구고 왜 이렇게까지 날 돕는 건가요?”
후드를 벗고 질문을 쏟아내는 아자니를 나자리아는 찬찬히 살펴보았다. 날카로운 선 하나 없이 미려한 곡선이 조화를 이룬 이목구비에 한여름의 녹음을 담은 것 같은 연녹색 눈동자는 순수함이 가득하면서 어딘가 처연한 구석이 있어서 은근히 보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수수한 시골뜨기를 생각했는데….’ 나자리아는 아자니를 볼수록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당신을 실제로 보면 어떨까 했는데 정말 아름답군요. 머리칼이 길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나자리아가 아자니의 가는 목선을 가리켰다.
“아.. 아니에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이렇게 강하기까지 하니 너무 부러워요.”
아자니는 손으로 내려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전 아자니에요. 이미 아시겠지만요, 당신은 누구시죠? 애런은 지금 어디 있나요?”
“그보다 먼저 제가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정말 중요한 것이니까 솔직히 말해줘야 해요.”
나자리아가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네? 중요한 것이라니요. 무슨…?”
아자니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뒤로 물러나다 통나무 더미에 등이 닿았다. 한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두고 앞에 선 나자리아에게서 시원하면서도 아련한 향내가 선명하게 풍겨왔다.
“당신…, 숫처녀인가요?”
“네?”
“동정이 맞냐고요. 애런이나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런 건 왜 묻는 거죠?”
아자니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자리아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질문은 내가 하잖아요. 어서 대답해요. 숫처녀인지 아닌지.”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그런 질문은 굉장히 불쾌하군요.”
아자니가 쏘아보며 옆으로 몸을 빼자 나자리아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신 기분 따위는 관심 없어. 처녀인지 아닌지 그것만 말해!”
아자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자리아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지만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내가 처녀인 게 자기랑 무슨 상관이라고. 혹시 애런 때문에 나를 구한 것이 아닌가? 뭐가 됐든 이건 경우가 아니야.’ 아자니는 두 눈에 힘을 주어 나자리아의 시선에 맞섰다.
“미안해요, 너무 답답해서 그만 흥분했어요.”
나자리아가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부탁이에요. 제발 대답해 줘요.”
그녀의 목소리에 애처로움이 묻어났다. 긴장이 풀린 아자니는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런 건… 아직… 없어요.”
아자니의 두 볼이 찬바람을 맞은 것처럼 발그랗게 물들었다. 나자리아는 망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그 자리에서 얼음처럼 굳었다.
“이제 당신도 말해줘요. 누구고 왜 날 돕는지. 애런은 지금 어디 있는지.”
바로 앞에서 말하는 아자니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나자리아는 초점 없는 눈으로 나무 더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난 나자리아 라고 해요. 애런과는…. ‘결혼’ 할 사이에요.”
아자니는 너무 놀라 입을 벌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당신이 애런에게 선물한 반지가 그를 나에게 데려왔어요.”
나자리아는 나자레스의 선택으로 애런과 함께 여기까지 온 이야기를 했다. 아자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날 저들에게 넘길 건가요? 날 못 찾는다고 애런이 당신과 결혼할 것 같아요?”
“솔직히 그 생각을 안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까 당신 대답으로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게 내가 처녀인 것과 무슨 상관이죠?”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난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에요.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사랑을 얻어낼지, 한없이 이어지는 고통을 끝내야 할지.”
“네? 그게 무슨 말이죠? 헉!”
갑자기 나자리아가 손바닥으로 배를 눌러치는 바람에 아자니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미안해요, 내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는 이 편이 나아요.”
나자리아는 아자니를 묶고 재갈을 물려 통나무 더미 옆에 눕혔다. 건너편에서 무릎을 감싸고 앉은 그녀는 아자니의 녹색 머리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냥 발라스에 넘길까? 애런이 저 여자에게 마음이 깊은지는 모르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기 마련이야. 저 여자만 없다면 애런의 마음을 얻는 건 자신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함께 사는 사람을 평생 속이는 건 불가능해. 언젠가 애런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날 원망하며 떠나버릴 거야. 신녀의 대는 잇겠지만 난 남은 시간을 외롭게 살게 되겠지. 그런 삶은 싫어. 그럼 저주는? 지금 나한테 나자레스가 있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을 텐데. 아니야, 나자리아. 정말 나자레스가 있으면 아무 잘못도 없는 저 여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할 수 있겠어?’
고개를 거칠게 흔드는 데 드르륵하고 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재] 엘더사가 - 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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