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에는 한 늙은 남자(마오쩌둥)가 말년에 이르러 개인적인 원한을 해결하려는 목적도 존재했다."
- 프랭크 디쾨터, <문화대혁명, 중국 인민의 역사>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던 마오쩌둥이 옛것을 다 때려엎자! 이러면서
민중들을 선동해 일으킨 희대의 문화적 참사가 아닐까 싶네
고향인 호남성의 농촌을 시찰한 팽덕회는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에 의한 경제 피폐를 목격하고 려산 회의 기간에 모택동에게 문제점을 전하면서 노선 전환을 건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모택동의 지도권을 존중하는 정중한 태도로 작성되었지만, 모택동 노선에 관한 비판이었으니 지도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이었다. 모택동은 이 편지를 회의석상에서 공개하여 토론 의제로 채택하고 팽덕회가 당의 지도에 도전한다면서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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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의 숙청 등 문혁의 본질은 모택동의 대약진운동 및 각종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추궁 원천봉쇄 등의 의미가 적지 않았다고 생각함
결국 최종적인 책임 추궁도 만악의 근원인 모택동은 빠져나가고 휘하의 사인방이 다 뒤집어쓰고
보니까 마오쩌둥은 당원들로 하여금 곡식 및 물자 징발을 잔인하게 시켜놓고는
자신은 선한 이미지로 포장해서 인민들이 "당은 나쁘지만 주석은 선하신 분이다"라고 믿게 했다고 하네. 그래서 파사구란 구호가 인민들에게 먹힐 수가 있었다는 듯..
사실 루산 회의에서 류샤오치가 "천재가 삼할이면 인재가 칠할이다" 이랬을 때 알아먹었어야 했지만 그러면 마오가 아니지..
ㅇㅇ
주은래 시절에 우리가 아니라 북한쪽에 한 이야기지만
“요하(요동강) 너머의 고대사는 우리들의 역사와는 구분되는 것”
이라고 인정을 했었음
그래서 1964년 3월 20일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으로 백두산도 청나라 시대보다 더 많이 양보한 것
물론 주은래 본인은 현지에서 저거 매국노 아니냐고 욕을 좀 먹었지만...
독립운동사 연구만 곱창났는가? 고구려 발해 연구에도 지대한 악영향을 끼쳐서 동북공정의 전주곡을 심어놓음
엄청나게 큰 규모의 나라가 아예 문화 부분에서 쑥대밭이 됐는데 다른 나라가 피해를 안 보겠냐고
김일성도 반동이라고 공격받은 마당에....
일본놈들은 역사유물에 구라를 쳐대고 중국놈들은 역사유물을 박살내고
제대로 된 역사를 자기 손으로 박살냈으니 아무튼 동아시아 문명 전부 내 꺼임 이 지랄이 시작된거지
솔직히, 지금 우리가 독립운동사 연구를 위해 일본이 남긴 자료들을 이용해야 하는게 현실임
고대사 연구도 십창을 내놨다
이런...
엄청나게 큰 규모의 나라가 아예 문화 부분에서 쑥대밭이 됐는데 다른 나라가 피해를 안 보겠냐고
김일성도 반동이라고 공격받은 마당에....
교차검증을 해야 하는데 교차가 안되네?
독립운동사 연구만 곱창났는가? 고구려 발해 연구에도 지대한 악영향을 끼쳐서 동북공정의 전주곡을 심어놓음
고대사 연구도 십창을 내놨다
일본놈들은 역사유물에 구라를 쳐대고 중국놈들은 역사유물을 박살내고
제대로 된 역사를 자기 손으로 박살냈으니 아무튼 동아시아 문명 전부 내 꺼임 이 지랄이 시작된거지
우리나라 사료들도 중국과 교차검증이 가능하면 좋을텐데 쟤네가 지네 손으로 없애버린게 너무 많아서 교차검증을 못하는게 아쉬움. 또 고조선, 부여 같은 진짜 고대사는 중국쪽에 사료가 남아있는데 그것들 상당수가 저때 불타 없어져버렸을 확률이 높음,
"문화대혁명에는 한 늙은 남자(마오쩌둥)가 말년에 이르러 개인적인 원한을 해결하려는 목적도 존재했다." - 프랭크 디쾨터, <문화대혁명, 중국 인민의 역사>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던 마오쩌둥이 옛것을 다 때려엎자! 이러면서 민중들을 선동해 일으킨 희대의 문화적 참사가 아닐까 싶네
고향인 호남성의 농촌을 시찰한 팽덕회는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에 의한 경제 피폐를 목격하고 려산 회의 기간에 모택동에게 문제점을 전하면서 노선 전환을 건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모택동의 지도권을 존중하는 정중한 태도로 작성되었지만, 모택동 노선에 관한 비판이었으니 지도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용이었다. 모택동은 이 편지를 회의석상에서 공개하여 토론 의제로 채택하고 팽덕회가 당의 지도에 도전한다면서 비판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팽덕회의 숙청 등 문혁의 본질은 모택동의 대약진운동 및 각종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추궁 원천봉쇄 등의 의미가 적지 않았다고 생각함 결국 최종적인 책임 추궁도 만악의 근원인 모택동은 빠져나가고 휘하의 사인방이 다 뒤집어쓰고
보니까 마오쩌둥은 당원들로 하여금 곡식 및 물자 징발을 잔인하게 시켜놓고는 자신은 선한 이미지로 포장해서 인민들이 "당은 나쁘지만 주석은 선하신 분이다"라고 믿게 했다고 하네. 그래서 파사구란 구호가 인민들에게 먹힐 수가 있었다는 듯.. 사실 루산 회의에서 류샤오치가 "천재가 삼할이면 인재가 칠할이다" 이랬을 때 알아먹었어야 했지만 그러면 마오가 아니지..
어릴때부터 그렇게 글공부는 나름 빡세게 했다는 인간이 그 꼬라지인 것을 보면, 진짜 투쟁의 시대에는 몰라도 치세를 할 그릇은 아니었던 것 같음
이건 몰랐네....
TMI 오죽했으면 공산당 내부에서도 "장모(장중정) 그 인간이 박물관을 털어가서 그나마 다행"이란 쓴웃음을 지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을 정도다
중국이 북을 최중요 동맹으로 여기는 이유중에 하나가 저때 북한에 도움을 받은 만주지역 동북3성 주민들이 굉장히 많았다고함. 도와주는 것도 뭐 받고 도와준게 아니라 그냐
그냥 도와준 수준이라 영향력이 아직도 꽤 된다고....
ㅇㅇ 주은래 시절에 우리가 아니라 북한쪽에 한 이야기지만 “요하(요동강) 너머의 고대사는 우리들의 역사와는 구분되는 것” 이라고 인정을 했었음 그래서 1964년 3월 20일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으로 백두산도 청나라 시대보다 더 많이 양보한 것 물론 주은래 본인은 현지에서 저거 매국노 아니냐고 욕을 좀 먹었지만...
동북공정에서 북에서 별 말이 없는 이유기도함. 북에선 이미 중국의 국부급 인사인 마오가 다 인정한 역사적 사실을 중국얘들 스스로가 부정할 이유가 없거니와, 역사적으로도 논쟁이 끝난거라 인식이 그냥 학계에서의 중국내부용 정리정돈으로 파악한다고 함.
독립은 미국이 시켜줬고 독립운동가들은 별거 안했다는 인간들 많아져서 별 신경안쓸걸
연구된 독립운동가들도 일본눈치봐야하니 잊어버리자 시전하는 판국에ㅋㅋ
솔직히, 지금 우리가 독립운동사 연구를 위해 일본이 남긴 자료들을 이용해야 하는게 현실임
실제로 저렇게 파괴된 것도 있는데 막상 살아남은 독립운동가 상당수도 회고록이나 증언 같은걸 많이 남기진 않은 편임
오죽했으면 한국 성립 초기기록은 대부분 미군정 기록에 의지해야 하는 수준이고.
ㄷㄷ
그래서 넷플 삼체 추천함.